로라의 게시판

 

 

로라는 가출하지 않는다. 로라는 교실의 네모난 게시판도 벗어나지 못한다. 로라의 네모난 게시판 속엔 자의에 의해 혹은 타의에 의해 억압하고 절제한 로라의 욕망이 들어있다. 로라는 아이들의 사물함 이름표로 붕붕차 모양이 적당할 것 같았다.

“굴뚝 달린 양옥집은 또 어떨까?”

로라는 일단 생각한 것을 뾰족하게 깎은 HB연필로 그리기 시작했다. 붕붕차나 굴뚝 달린 집은 그리기 무난했지만 썩 맘에 들지 않았다. 그러다가 무심결에 우주선 모양을 하나 그렸다. 로라는 우주선이 맘에 들었다. 그래도 뭔가 미진한 느낌이 들어 우주선을 연필로 계속 긁적거렸다. 직선으로 나가던 연필 끝이 곡선방향으로 움직였다. 사선 방향에서 바라 본 우주선 모양이었다. 우주선은 정지된 상태가 아니었다. 연필 끝으로 양끝만 살짝 치켜 올렸을 뿐인데 우주선은 날고 있는 형상이 되었다. 로라는 새로운 발견이라도 한 기분에 휩싸였다. 로라는 엄지와 중지에 가위를 끼고 서둘러 그것을 오렸다. 그러고 나서 로라는 한쪽 벽을 거의 다 차지하고 있는 게시판을 채워나가기 시작했다.

“저걸 언제 다 채우나.”

처음엔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로라는 소매를 걷어붙이고 작업을 시작했다. 언제나처럼 네모난 게시판의 한 귀퉁이를 채워 넣고 나니 그 다음 것이 저절로 생각났다. 그것들은 이상하게 어울렸다. 게시판 전체의 아우트라인을 미리 짜지도 않았다.

가을이었다. 나뭇잎을 바닥에 하나 떨어뜨리고 나자 바람이 생각났고, 바람은 나뭇잎들을 지붕 위로 날게 했고, 저절로 머릿속엔 지붕에서 미끄러져 골목으로 떨어진 나뭇잎들이 떠올랐다. 로라의 생각대로 게시판의 풍경이 움직였다. 로라의 머릿속은 그래서 그런지 자주 아팠다.

“나는 지금 과로 상태야. 이제 그만 쉬어야만 돼.”

로라는 틈이 날 때마다 중얼거렸다. 하지만 하나마나한 이야기였다. 새학기는 아미 시작되었다.

 

*

 

로라는 동그란 돔 모양의 놀이기구 속에 아이들을 집어넣었다. 아이들은 마구 들어갔다. 빙글빙글 돌아가는 돔 속에서 아이들은 이것보다 더 재미있는 게 없다면서 소리를 질렀다. 그러다가 갑자기 진땀을 흘리며 무섭다고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로라는 아랑곳하지 않고 아이들의 목소리가 도망가지 않도록 귀를 쫑긋거리며 옆에서 지켰다. 로라는 아이들이 지르는 소리를 처음엔 기쁨의 변주곡쯤으로 여겼다. 제1, 제2, 제3 변주곡으로 시작된 곡은 제12곡까지 이어질 수도 있었다. 그것은 공포였다.

“이제 시작이야. 시작일 뿐이라고.”

로라는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그것은 아침의 작은 정원에서 들리는 새소리로 시작되어 경쾌한 실로폰 소리가 되기도 했다. 숨을 고르는 사이 작은북소리로 이어지다가 마라카스를 착착 흔드는 소리처럼 규칙적인 힘의 선율을 쏟아내기도 하고 눈 쌓인 길 위에 퍼지는 핸드벨 연주 같이 로라에게 감동을 안겨주기도 했다. 가끔은 이끼 낀 담벼락에 내리는 밤중의 빗소리가 되어 그녀를 외롭게 했다. 밤중의 빗소리는 폭포수가 콸콸 쏟아지는 소리로 변했다가-그 순간을 조심해야했다, 다음으로 이어지는 불행한 레퍼토리를 피하기 위해서는-끝없이 우물 속으로 떨어지는 비명소리로 끝나는 것이었다. 그럼 끝이었다.

시간이 흐르고 아이들을 꺼내려하니 돔의 뚜껑이 열리지 않았다. 로라는 당황하여 돔의 손잡이를 잡고 한참을 버둥거렸다. 결사적으로 뚜껑손잡이에 매달린 끝에 로라는 겨우 돔의 뚜껑을 열었다. 하지만 돔 안은 텅 비어있었다. 로라는 아이들을 찾아서 돔의 둘레를 뱅글뱅글 돌기 시작했다. 다람쥐가 쳇바퀴 도는 모습을 상상해보라. 그러다가 로라는 붉은 건물 밖으로 나가서 공원 안을 샅샅이 뒤졌다. 로라는 공원의 화장실에 가보기도 하고, 미술 전시관으로 가 액자 뒤도 살폈다. 지하전시관으로 내려가는 계단 입구에는 용 모양의 기둥이 있었다. 로라는 기둥 뒤로도 가 보았다. 하지만 어디에도 아이들은 없었다. 로라는 검은 물감에 흰 물감이 몇 줄기 번지는 것과 같은 기분에 휩싸였다.

로라는 기둥을 부여잡고 절규했다. 기둥은 떡 버티고 서서 로라가 몸을 기댈 수 있게 허락해 줬다. 하지만 로라의 절규를 알아들을 리 없었다. 아이들은 앙큼하게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듯했다. 깊고도 커다란 원통기둥 속에 들어갔던 로라의 소리는 다시 되돌아 나왔다. 아래로 모였던 소리가 갑자기 한꺼번에 위로 터져 올라왔다. 그 충격으로 기둥에서 튕겨나간 로라는 계단 아래로 떨어졌다. 아이들은 계단 아래 양탄자 밑에 불개미들처럼 숨어 있었다. 로라가 바닥 위로 쓰러지자 한꺼번에 양탄자 밑에서 우르르 기어 나왔다. 바닥에 쓰러진 로라 앞에서 벌어진 광경이었다.

시속 100킬로미터의 속도로 아이들은 로라의 몸으로 뛰어 들었다. 순식간이었다. 한 명은 눈 속으로 한 명은 콧구멍 속으로 한 명은 목구멍 속으로 계속 들락날락하며 로라의 몸을 칭칭 돌아다녔다. 로라는 소인국에 간 걸리버가 된 느낌이었다. 로라는 아이의 발에 콕콕 찔린 눈을 껌벅거렸다. 그 바람에 눈꺼풀에 매달려있던 아이가 바닥에 떨어졌다. 로라는 온 몸이 간질간질했다. 로라는 전 날 3시간 밖에 잠을 못 잤다. 무거운 자물쇠가 채워진 듯 슬금슬금 눈꺼풀이 자꾸 아래로 내려앉았지만 로라는 아이들을 데리고 운동장으로 나갔다.

아이들이 운동화 앞발로 운동장을 푹푹 긁으며 지나갈 때마다 운동장의 흙들이 들고 일어났다. 운동장이 흙먼지로 뿌옇게 변했다. 아이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흙먼지 속의 운동장을 질러 뛰어갔다. 아이들은 손에 들고 있던 짝짝이를 가끔 쳤다. 아이들의 짝짝이 소리에 맞춰 흙들이 춤을 추는 듯했다. 흙들은 사막을 지나는 낙타 떼처럼 금빛으로 빛났다. 구령대에 가을햇빛이 스러지고 흙들은 구령대 위에서도 춤을 췄다. 아이들은 짝짝이를 주머니에 넣었다. 아이들이 장단을 맞춰주지 않아도 이제는 흙먼지들이 스스로 콩나물 합주를 시작했다. 북을 치고, 기타를 치고, 오카라스를 불었다. 흙들의 합주에 맞추어 학교 정문에서 후문까지 빛은 파장을 일으키며 가마니를 굴렸다. 모래 콩나물들이 반짝거리며 박수를 치고 시소 위에서 아이들의 초록웃음과 뒤섞였다. 바람에 날아다니는 모래 가루는 서로 입을 맞추고 아이들은 야구 방망이처럼 운동장에서 막춤을 췄다. 로라는 호주머니에 숨겨놓았던 호루라기를 꺼내서 불었다. 정글짐 꼭대기에서 놀던 콩나물이 아래로 떨어져 켜켜이 쌓였다. 잠시 뒤 빛은 흙과 함께 가라앉았다. 흙먼지가 사라진 구령대는 조용했다. 긴장이 해체되는 순간이었다.

 

*

 

로라는 규칙적으로 잠을 잤다. 로라는 규칙적으로 그릇을 닦아냈다. 먼지 따로 진공청소기를 하루에 한 번씩 꼭 돌렸다. 투명한 플라스틱 통 안에 따로 모은 먼지를 쓰레기통에 털어냈다. 로라는 규칙적으로 해를 보고 달을 보고 밥 딜런을 듣는 것을 반복했다. 음악은 대부분 슬펐다. 특히 슬픈 음악은 아이의 눈물처럼 슬프고, 유리창에 매달린 빗방울처럼 슬펐다. 음악은 그쳤고 빗소리는 아직도 들린다. 뜨거운 햇볕과 폭염이 끝이 없을 것 같더니 이틀째 비가 내린다.

“나에겐 음악이 있고 아이들이 있고 잠이, 그리고 내일이 있지.”

로라의 하루는 규칙이었다. 하지만 꼭 지키지 않아도 되는 규칙이었다. 로라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도 아이들에게는 규칙1과 규칙2와 규칙3을 철저하게 지키도록 했다. 로라의 규칙은 신기하게도 계속 새롭게 만들어졌다. 그것과 반대로 뱀이 허물을 벗듯 로라의 욕망은 자꾸자꾸 떨어져나갔다. 떨어져나가고 다시 생겨나는 걸 반복했다.

로라의 남편은 몇 년 째 직장을 구하지 못했다. 그러나 로라는 가출 하지 않았다. 그녀의 어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같은 길을 가지 않고 버텼다. 햇살 같은 두 아이가 있었다. 모성이 부재한 텅 빈 방을 로라는 진작 경험했다. 좋은 남편은 아니라도 아이들에겐 좋은 아버지였다. 단지 그 이유 하나만으로 로라는 이를 악물고 규칙을 견디고 있었다. 다만 위안삼아 바람을 맞으며 걸었을 뿐이다. 빗길을 하염없이 바라볼 때도 있었다. 그러면 한 계절이 가고, 두 계절이 가 버렸다. 진작 윤기는 사라졌다. 욕망에 대한 그럴 듯한 타당성만 남았다. 윤기를 잃은 욕망은 세상의 규칙 속에서 빈껍데기가 되어 굴러다녔다. 그것은 마치 검은 도시 속에 떨어져 길을 잃고 날뛰는 얼룩말의 공허한 뒷발질 같았다.

 

*

 

로라는 병이 났다. 하필이면 겨울이 시작된 날이었다. 겨울이 오는 게 썩 기쁘지 않고, 기대되지 않고, 썩 기대되는 일이 없고, 매일매일 내일이 오는 게 영 부담스럽고 불편하기만 했다. 이유가 딱히 있는 것도 아니고 하여튼 썩 좋지 않은 기분으로 매일매일 내일을 마주 했다. 위가 막혀서 답답한 느낌이 들었다. 쓴 약이 몸에 흡수되지 않은 채 위액과 섞여 속을 훑었다. 감기 바이러스는 드디어 입 안의 혀로, 오른쪽 귓구멍으로 깊숙이 파고들었다. 급기야 머릿속까지 치고 올라왔다. 사과를 반으로 딱 자른 듯 머리의 반쪽에 두통이 왔다. 눈은 자꾸 감기고 기관지에서 시작된 기침가래의 포효가 몸 전체에서 끓기 시작했다. 로라는 침대에서 솜이불을 두 개나 덮어쓰고 감기와의 한판 장전에 들어갔다.

 

*

 

하얀 나무를 양쪽으로 2개 배치했다. 커튼처럼 파란 하늘을 바탕으로 드리우고 색종이로 오린 눈을 호지키스로 고정시켜 하늘에서 마구마구 내리게 했다. 파란 하늘에 하얀 눈이라. 그래도 하늘은 하늘이니까, 잿빛 하늘너머에 있는 파란 하늘이라고 생각하면 될 것 같았다. 크리스마스를 기다리던 아이들은 루돌프 사슴이 모는 산타클로스 할아버지의 마차를 상상했지만, 로라는 커다란 바퀴를 가진 신데렐라의 마차를 만들었다, 클레이 점토로 만든 분홍토끼를 마차에 태웠다. 마차가 가는 길 위로 가로등 불빛이 붉은 안개처럼 드리웠고 얼음길은 멀리 산 끝까지 이어졌다. 로라는 분홍토끼가 타고 있는 마차를 따라 얼음길로 들어섰다.

헝겊신을 신은 로라는 자꾸 미끄러졌다. 분홍토끼를 태운 마차는 이미 로라를 저만큼 앞서갔다. 로라는 헝겊신을 벗어 손에 들고 뛰기 시작했다. 스타킹을 신은 발은 발을 내디딜 때마다 바닥에 꽁꽁 얼어붙는 듯했다. 로라는 붉은 안개를 연출하는 가로등까지 왔다. 마차는 숲 속으로 벌써 들어가고 있었다. 로라는 가로등을 붙잡은 채 숨을 고르며 눈앞에서 점점 멀어지는 마차를 바라봤다. 마차는 눈 쌓인 겨울 숲에서 검은 점으로 남는가 싶더니 숲 속으로 아예 사라져 버렸다.

 

*

 

로라는 두 손과 두 발에 하얀 붕대를 감고 걸상에 엉거주춤 앉아있었다. 얼음길에서 마차를 놓친 로라는 두 손과 두 발 모두 동상에 걸렸다. 발을 내디딜 때마다 얼음조각이 바삭거리며 엄지발가락부터 발뒤꿈치까지 얼음조각에 살이 베이는 느낌이었다. 따뜻한 난로 옆에서 두 손가락은 더 간지러웠다. 둔하고 묵직한 느낌이 더해 손가락에서 내장까지 간질간질한 게 몸에 안달이 날 정도였다. 하지만 로라는 난로 옆을 떠날 수 없었다. 난로를 조금만 벗어나도 교실 안은 시베리아 벌판처럼 추웠다.

아이들은 손에 손을 잡고 로라와 난로 주변을 빙빙 돌았다. 톱밥이 날렸다. 석탄 가루가 떠다녔다. 아이들의 노랫소리가 교실 안에 퍼졌다. 사뿐사뿐 걷던 아이들은 갑자기 우당탕탕 교실 바닥을 뛰어다녔다. 로라는 호루라기를 불었다. 아이들은 두 손으로 귀를 막은 채 각자 제자리로 돌아갔다. 자기 자리로 되돌아가던 맨 앞줄의 남자 아이가 여자아이의 발을 밟았다. 태권도 검은 띠인 여자아이는 남자 아이의 뺨을 찰싹 때렸다. 갑자기 교실 안에 냉기류가 흘렀다.

하지만 로라는 걸을 수가 없어 남자아이의 뺨을 쓰다듬어 주지 못했다. 남자아이의 눈에서 맑은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잠시 후 남자아이의 얼굴은 분노로 차올랐다. 날렵하게 여자 아이의 머리채를 잡아챘다. 여자 아이가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여자 아이의 목소리는 난로 속의 불을 순식간에 꺼버렸다. 난로는 이내 식었다. 여자 아이의 비명 소리는 연통 속으로 들어가 돌아다녔다. 연통 속속들이 허옇게 성에가 끼었다. 남자 아이는 오줌을 찔끔 흘렸다. 로라는 무릎을 꿇은 채 그 자리에 얼어붙어 버렸다.

 

*

 

로라는 불을 다시 켰다. 아이들의 변덕은 장소를 불문하고 언제든지 다시 나타났다. 어둠을 무서워하지 않는 아이들은 소리 질렀다.

“불을 꺼, 불을 꺼.”

그러나 아이들은 이불을 뒤집어쓰고 밖으로 얼굴을 내밀지 않았다.

“불을 켜요, 불을 켜 주세요,”

이번엔 불을 켜라고 소리 질렀다. 두려워서 지르는 비명 소리 같기도 하고 데시벨을 한껏 높인 고장 난 라디오 소리 같기도 했다.

불을 켠 어둠 속에서 아이들은 현실 너머의 세계를 즐겼다.

“귀신이야. 호박 귀신.”

로라는 호박귀신으로 변했다. A, B, C, D, 라고 적힌 알파벳 카드가 커튼 사이에서 튀어나왔다. A로 우산을 만들어 받고 나온 여자아이, D 모양의 가면을 쓰고 나온 남자아이, 마귀 모자를 쓴 할멈이 합죽이가 된 입을 내밀고 지팡이를 휘둘렀다. 아이들의 변덕스런 눈으로, 몸으로 각성되는 두려움의 실체는 무엇일까. 의문을 뒤로하고 로라는 천막 밖으로 나왔다. 밤하늘 왼쪽으로 유성이 하나 떨어졌다. 모닥불은 불씨도 남지 않았다. 로라는 쓰러진 통나무에 살짝 걸터앉았다. 10개나 되는 천막은 쥐죽은 듯 조용했다. 불은 다 꺼졌고 밤은 한가운데 있었다. 그런 중에 로라는 새벽이 다가오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다가오는 시간을 거부하고 싶었다. 잠을 자야했다. 로라는 속삭였다.

“상관없어. 그래도 아직 밤이야. 밤이라구.”

로라의 마른 등은 눈 뜬 밤의 진공을 견디기 힘들었다. 밤새 뒤척이다가 공사장바닥처럼 매번 상처자국이 났다. 눈의 움직임을 거의 제동할 수 없을 때를 포착하는 일이 일 순위였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잠자리에 들어야 그나마 잘 수 있었다. 로라는 눈이 반쯤 감길 때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 로라는 천막 안에 들어가 호랑이 가죽위에 비스듬히 옆으로 누웠다. 신기하게 눈이 감겼다. 그렇게 단 몇 시간이라도 잠에 빠질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

 

로라는 나룻배를 타고 파란색 도화지 위로 노를 저어갔다. 반쯤 벗겨진 털모자를 떨어뜨리지 않으려고 뺨을 비스듬히 치켜 올린 채 노를 저었다. 로라는 건너편 오두막집을 향해 갔다. 날은 이미 저물기 시작했고 오두막집 창문으로 붉은 불빛이 새어나왔다. 로라는 노를 젓기 힘들었다. 파란색 수면 위로 크고 흰 얼음 조각이 군데군데 떠 있었다. 얼음 조각에 나룻배가 자꾸 걸리는 바람에 건너편 오두막집으로 접근하기가 쉽지 않았다. 로라는 노를 나룻배에 걸쳐놓고 바로 앞에 있는 크고 흰 얼음조각을 두 손으로 들어 한쪽으로 던지면서 물길을 만들었다. 하지만 호수 아래서 금방 크고 흰 얼음조각이 떠올라 앞을 가로막았다. 로라는 크고 흰 얼음조각을 두 손으로 들다가 털모자를 호수 속에 빠뜨리고 말았다.

털모자 속에 숨어있던 로라의 길게 딴 머리가 양 옆으로 드러났다. 머리털이 뽑힌 삼손처럼 로라는 치욕스러움을 느꼈다. 로라의 입술은 점점 더 파랗게 변해갔다. 양 옆으로 삐져나온 잔 머리칼이 바람에 정신없이 날렸다. 털모자는 깊숙이 물속으로 가라앉았다. 로라가 노를 놓고 머리털을 수습하는 사이에 아이들이 몰려와서 나룻배를 찢어버렸다. 로라는 노를 얼른 잡았다. 나룻배에서 밀려난 로라는 물속에서 허우적대다가 얼음 조각 위로 겨우 올라탔다. 건너편 오두막집의 불빛은 그 사이에 꺼져버렸다. 로라는 오두막을 나올 때 모르고 양초를 켜두고 나왔다. 양초는 너무 소모적이었다. 하지만 양초는 밤을 밝히기 위해선 꼭 필요했다. 강을 부지런히 건너 거의 다 왔을 무렵 커다란 얼음조각이 시간을 끌게 했고 아이들이 나룻배를 찢어버리는 순간 로라는 오두막의 양초가 다 타고 없어졌다는 걸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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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라는 긴긴 겨울이 빨리 지나가고 봄이 오길 기다렸다. 로라는 얼음공주가 되기 싫었다. 나무 가지 사이에 꿀벌들의 집을 만들었다. 나무 밑동으로는 개미들이 떼를 지어 기어 다녔다. 무당벌레가 로라의 치맛단에 붙었다. 치마를 마구 흔들어도 빨간 무당벌레는 떨어지지 않았다. 투명했던 목공용 풀이 치마에 허옇게 잔뜩 묻었다. 떼어내려고 할수록 더 달라붙었다. 손끝에도 휴지에도 치마에도 엉켜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봄이 오는 작업은 번거롭고 힘들었다. 목공용 풀과 승강이를 벌이는 동안 초록색 나뭇잎에다 그린 무당벌레, 하늘소, 왕개미, 꿀벌, 애벌레, 나비가 다 기어 나왔다. 날개 짓을 막 하려고 준비하는 것도 있었고 빠르게 기어서 이미 교실 구석으로 가버린 것도 있었다. 모든 벌레들이 다 사라진 초록색 나뭇잎은 불치병 환자가 복용해야 하는 알약들 같았다.

로라는 나뭇잎들을 다 뜯어냈다. 초록색 나뭇잎을 솥에 담고 수돗물을 가득 채워 가스불 위에서 팔팔 끓였다. 수돗물은 점점 초록빛으로 변해갔다. 물이 반으로 줄었을 때 로라는 가스불을 껐다. 중국은 드라이아이스와 요오드화은(銀)을 실은 로켓을 구름층에 발사해 인공강우를 내리게 하지만 로라는 초록색 나뭇잎을 끓인 수돗물로 초록비를 내리게 했다. 비가 내리자 연잎들 위로 개구리들이 하나씩, 하나씩 튀어 올라 개굴개굴 울기 시작했다. 개구리들은 하늘을 쳐다보고 울었다. 개골개골 울 때마다 개구리의 목젖이 풍선처럼 크게 부풀었다 꺼지기를 반복했다. 플라스틱 까만 눈알은 투명창 안에서 아래위로 흔들렸다. 그것들은 다 비슷했다. 생김새도 피부색도 눈알 크기도 울음소리도 한 공장에서 만들어 나온 것처럼 같았다.

게시판은 오래된 연못이 되었다. 로라는 붉은 잉어 한 마리를 개구리밥, 생이가래, 부레옥잠이 떠 있는 연못 속에 넣었다. 붉은 잉어는 살이 통통했다. 잉어는 이내 붉은 꼬리를 흔들며 연못 아래로 사라졌다. 로라는 잉어를 부르기 위해 한 마리를 더 집어넣었다. 두 번째 넣은 붉은 잉어도 이내 사라져버렸다. 연잎 위의 개구리들만이 개굴개골 소리 내 울었다. 아이 한 명이 돌멩이를 연못 한 가운데에다 던졌다. 연못 한 가운데 피었던 수련이 돌멩이에 맞아 연못 위로 흩어졌다. 바로 눈앞에서 벌어진 연꽃들의 참사를 그냥 두고 봐야 하는 로라는 가슴이 찢어졌다. 로라는 끝이 날카롭게 세 갈래진 갈고리를 던져 돌멩이를 건져 올렸다. 하지만 돌멩이는 단단해서 갈고리 끝에 상처 입지 않았다.

 

*

 

우유를 데워서 꿀을 두 스푼 탔다. 진짜 봄이 왔다. 봄은 준비하는 시간이 더 길었다. 사월의 바람은 T,S 엘리어트를 생각나게 했다. 잔인한 달 사월. 로라는 목이 다 헐었다. 아이들은 네모난 방에서 우유 좋아, 란 노래가사를 우유 싫어, 라고 개사해 신나게 불렀다. 로라는 우유를 한 모금씩 삼키기 시작했다. 우유가 입으로 넘어갈 때마다 혓바닥과 목구멍이 따가웠다. 로라는 바닥에 누웠다. 로라는 눈을 감았다. 달콤한 낮의 기운이 느껴졌다. 하지만 로라는 나갈 수 없었다. 열린 창문으로 꿀벌들이 들어와 누워있는 로라의 얼굴 위로 윙윙거리며 날아다녔다. 로라는 몸을 일으켜서 창문을 활짝 열었다. 삼분의 일 정도 창문을 가리고 있던 로만쉐이드를 위로 바짝 당겼다. 로만쉐이드는 가로로 주름이 잡히며 위로 올라갔다. 꿀벌 두 마리는 천장으로 바닥으로 빙빙 돌면서 탈출구를 찾았다. 방 안을 두세 바퀴 돌다가 바람의 기운이 느껴지는 다른 방으로 날아갔다. 꿀벌들은 나갈 구멍을 찾아 구석에서 빙빙 돌다가 활짝 열린 창문을 통과해서 밖으로 나갔다. 로라는 바람의 기운을 따라 창밖으로 날아간 꿀벌들을 보고 조금은 희망적이 되었다. 잔인한 4월의 고비를 넘길 수 있으리라. 꿀벌들이 다 나가고 나서야 로라는 창문을 닫았다. 대기에 바짝 당겨 올린 초록색 로만쉐이드를 모두 내렸다. 커튼이 다시 걷힐 때 뜨거운 여름이 와 있을 것을 기대해도 무방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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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가 먼저 왔다. 검은 장우산 5개가 게시판에 등장했다. 장마 구름이 몰고 온 무겁고 어두운 분위기가 연출되었다. 하지만 검은 장우산 아래 노랑, 초록, 주황색 비옷을 입은 아이들은 무지개를 꿈꿨다. 빗소리는 음악 소리로 들렸다. 혹시 자기 머리 위로 벼락이라도 내리칠까 자신의 삶이 아쉽기만 한 자들이 몸서리치는 장대비 쏟아지는 소리도 아이들은 두려울 게 없었다. 게시판의 아이들은 노랑, 빨강, 파랑 장화를 신고 빗속을 경쾌하게 뛰어다녔다. 분홍색으로 칠한 지붕은 흰색물감의 배합이 잘못되어 너무 탁했다. 그래서 지붕 위의 빗줄기는 검은색으로 칠할 수밖에 없었다. 옆의 아이의 것은 초록색을 테두리로 한 노란색 지붕이었다. 아주 투명하여 지붕 속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나뭇가지 마다 열린 어항들, 아이들은 어항 속에다 소라게를 넣고 싶어 했다. 로라는 아이들의 꿈을 허락할 수밖에 없었다. 아이들은 모닝글로리에서 파는 천 원짜리 소라게에 한참 빠져있었다. 엄지손톱만 했다. 손으로 자꾸 만지고 꺼내서 불빛에 비쳐봤다. 아이들의 손을 탄 소라게는 곧 죽고 말았다. 천 원짜리 소라게는 문구점에 들여놓자마자 금방 품절되곤 했다. 봄, 한 계절이 다 가도록 그랬다. 일찍 찾아온 무더위가 한 차례 기승을 부리고 본격적인 여름이 오기 전에 곳곳에 장마의 피해가 심했다. 개천이 넘쳐나고 산기슭이 무너져 지붕을 덮치고 문명의 이기인 자동차 수십 대도 흙더미에 파묻혔다. 하지만 아이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아이들은 게시판의 어항 나무를 태평양에 있는 보라보라섬이라도 되는 듯 흥미로워했다.

소라게 어항을 만든 아이는 세 명이었다. 벌레가 무서워 집에 가기 싫다는 아이는 어항 속에다 벌레들을 가두고 싶어 했다. 아이는 벌레 때문에 밤에 잠을 제대로 못 잤다. 뒤뚱거리며 걷는 아이의 짧고 두꺼운 다리는 벌레 물린 자국으로 종아리며 넓적다리며 성한 구석이 없었다. 벌레는 혼자 집을 지키며 컴퓨터 게임을 하는 아이 앞으로 불쑥 불쑥 출몰했다. 아이가 무서워한 건 빳빳하고 까만 날개와 통통한 몸통을 가진 바퀴벌레와 다리가 많은 지네였지만 아이가 어항에 가둔 벌레는 사슴벌레와 하늘소였다. 덩치가 커다란 아이는 배가 자주 아팠다. 복통을 달래기 위해 간이담요 위에 누워 있다가 잠이 들었다.

어항 속에서 개구리 한 마리가 튀어나와 지붕 위에 내려앉았다. 친구들이 왕따를 시켜서 지붕 뒤에 숨어있던 여자아이가 얼굴만 삐죽 내밀어 상황을 살폈다. 그러다 주황색 비옷을 입은 여자아이는 지붕 뒤에서 나와 개구리 옆에 나란히 따라 섰다. 여자아이는 작은 구슬 같은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개구리의 반응이 어떻게 나타날지 기다렸다. 개구리는 주황색 비옷을 입은 여자아이의 무릎 위로 풀쩍 건너뛰어 올랐다. 여자아이는 만면에 웃음을 띤 채 두 손을 동그랗게 오므려 개구리를 감싸 안았다. 애초부터 개구리는 도망갈 생각이 없었다. 여자아이는 안심했다.

 

*

 

로라는 우산 밖으로 손을 내밀었다. 한 방울 두 방울 빗물의 흔적이 손바닥에 만져지다 멀어지다 했다. 거리에는 아직 로라처럼 우산을 쓰고 가는 사람도 있고 접은 장우산을 지팡이 삼아 걷는 사람도 있었다. 비는 잠시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로라는 우산을 접었다. 비 맞은 새 한 마리가 로라의 앞을 가로 막았다. 새는 어디서 왔을까. 비 맞은 새는 로라를 모른척하고 앞에서 잠시 멈칫거리다가 통통 뛰어 길가 나무 아래로 갔다. 새는 나무 아래에 가서도 고개를 연신 쫑긋하며 머뭇거렸다. 무리에서 떨어져 나와 길을 잃었을까. 갈 길을 헤아리고 있는 것일까. 그러나 새의 까맣고 공허해 보이는 눈은 무언가 찾고 있는 듯했다. 바닥을 이리저리 부리로 콕콕 찍는다. 먹이였다. 새의 발톱은 까맸다. 새가 부리로 나무 부근을 콕콕 찍을 때마다 나뭇가지에 고였던 빗방울들이 흔들리며 떨어져 새의 깃털을 적셨다. 새는 그럴 때마다 몸을 흔들어 빗물을 털어냈다. 나무들이 새의 눈치만 보고 새의 날개 짓에만 집중하고 있는 듯했다. 새는 다시 후드득 날개 짓을 하더니 낮게 날아갔다. 어디로 가나 했더니 아파트 벽 너머에 있는 나뭇가지였다. 그리곤 금방 아래로 내려앉았다. 로라는 더 이상 새를 볼 수 없었지만 새는 아파트 담 너머에 있는 쓰레기통 주변으로 갔다. 그제야 로라는 멈췄던 걸음을 다시 걸으며 새가 길을 잃은 것이 아니었다는 알았다. 새는 장마가 잠시 소강상태가 된 틈을 타 먹이를 찾고 있었던 것이다. 새는 거기서 빵부스러기와 생선 가시들과 쓰레기통 밑에서 털 뭉치를 감고 노는 고양이의 발과 만날지도 모른다. 로라는 새가 어미새일 거라는 생각을 했다.

로라는 새의 젖은 깃털이 언제 마를까 생각해 봤다. 젖은 손이 마를 겨를이 없는 어머니들, 로라도 어미였다. 로라는 갑자기 비가 지겨웠다. 남쪽의 뜨거운 태양 아래 절벽을 타고 올라가 몸을 말리고 싶었다. 창백해진 몸을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 까맣게 태운다면 어떨까. 그리고 거기 서서 노래를 부르면 기분이 어떨까. 긴 머리를 풀어헤치고 춤도 춘다. 손톱과 발톱에 매니큐어를 하고, 멋진 다리를 자랑할 수 있다면. 새의 정체를 파악한 로라는 거리에 더 머물 것 없이 우산의 빗물을 털고 게시판 안으로 들어갔다.

 

*

 

로라는 키위를 반으로 갈라서 아이들의 접시에 나눠줬다. 아이들은 키위를 숟가락으로 파먹었다. 아이들의 어금니 사이로 검은 씨가 우지직 씹히는 소리가 났다. 아이들은 진저리를 치며 키위 접시를 화분 위로 던졌다. 산호수 이파리들이 떨어져 나갔다. 아이들은 쪼르르 화분 있는 곳으로 달려가서 바닥에 떨어진 이파리들을 집기 위해 쟁탈전을 벌였다. 아토피 피부염으로 고생하는 여자아이는 자그마한 이파리들이 떨어진 바닥 위에 주저앉아 키위 껍질 때문에 팔이 가렵다고 울기 시작했다. 여자아이의 울음은 그칠 줄 몰랐다. 여린 갈색 단발은 눈물바람에 헝클어져 이리저리 날렸다. 로라는 단 한 개 있는 안락의자에 여자아이를 눕혔다. 여자아이가 울음을 그치고 잠이 들 때까지 자장가를 불러주고 팔을 긁어줬다.

“이거는 아스파라거스, 이거는 제라늄이야.”

로라는 자장가 소리를 듣고 진정된 아이들에게 찬찬히 온실 속의 식물 이름을 가르쳐주었다.

“열대식물 피라켄사스, 영춘화, 히어리,”

로라가 이름을 댈 때마다 아이들은 신기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하지만 아이들은 오래 견디지 못했다.

“이게 뭐라고요?”

아이들은 온실식물원이 더워서 그런지 식물 이름을 금방 까먹었다. 흥미를 잃고 계단을 오르내리던 아이들은 사진을 찍어준다고 로라의 카메라를 뺏었다. 그리곤 로라를 선인장이 전시된 화단 쪽으로 몰았다. 뒷걸음을 치던 로라는 노란 선인장 화분 위에 그만 엉덩방아를 찧었다. 선인장은 로라의 엉덩이에 내리눌려 약간 납작해졌다. 로라는 바닥에 팔꿈치를 짚고 엉덩이를 든 채 선인장 뒤로 물러나다가 허벅지에 선인장 가시가 박히고 말았다. 로라는 허벅지가 따가워 인상을 찌푸렸다 아이들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카메라를 찰칵 눌렀다. 로라의 스팽글이 달린 노란색 세타만 디지털카메라에 찍혔다. 로라는 몸통이 잘린 사진을 확인하고 나서야 안심하고 저장버튼을 눌렀다.

“잘했어, 아주 잘했어.”

로라는 아이들을 부추겼다. 아이들의 마음은 풍선처럼 방방 더 부풀어 올랐다.

커다란 잔디나무가 앞을 가로막았다. 잔디나무는 살아있는 식물 같지 않았다. 잔디나무는 온실 속의 허수아비 같았다. 아이들은 잔디나무 위에 올라가고 싶어 했다. 잔디나무 꼭대기로 올라가 온실 천장으로 팔을 뻗어 그 안에 갇힌 하늘을 열어보려고 했다. 하지만 아이들은 똑, 똑, 똑, 똑, 물처럼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물방울은 떨어져 내리는 것이 당연했다.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은 물방울 같았다. 하늘은 더 멀어졌다. 하얀 물방울무늬의 하늘색 원피스를 입은 여자아이가 물방울을 잡으려 바닥 물웅덩이 주위를 살랑살랑 뛰어다녔다. 머리를 한줌 뒤로 묶은 분홍색 리본이 옆머리와 함께 나풀거렸다. 여자 아이는 물방울을 집어서 꽃잎과 풀잎, 줄기 위에 놓았다. 아이가 손을 펴고 가만히 꽃잎 위에 얹고 있으니까 물방울이 점점 커졌다. 여자아이는 물방울 한 개를 집어 올려 공중에 날려 보냈다. 그리곤 다시 풀잎 위에 손을 펴서 올렸다. 물방울이 송송 일어나더니 점점 커졌다. 여자아이는 손으로 물방울을 잘도 집었다. 물방울로 떨어진 아이들은 바다가 되었다. 파란 바다 위에 하얀 배 한 척이 떠 있었다. 마도로스 모자를 쓴 남자가 뱃머리에 서서 파이프를 입에 물고 있었다. 남자의 줄무늬 옷은 무척 가벼워 바다 위에 언제나 떠있을 것 같았다. 로라는 풀어진 여자아이의 샌들 끈을 묶어줬다.

 

*

 

여름을 위한 마지막 게시판은 해바라기 꽃밭이 있는 바닷가 그림이었다. 파란 하늘 위에 하얀 뭉게구름이 몽실몽실 낮게 떠 있고 햇빛이 해변에 가득했다. 해변에는 곱실거리는 머리카락의 남자가 웃통을 벗은 채 어깨에는 흰 수건을 두르고 말구유에 물을 받아 아이를 목욕시키고 있었다. 여기저기에서 모래놀이를 하는 아이들과 높이 날고 있는 갈매기, 해는 수평선 너머까지 반짝이는 날개를 뻗쳤다. 바다와 모래와 아이들과 해가 있었다. 로라는 공이 빠졌다는 것을 알아챘다. 동료 교사나 학교장, 누구라도 객관적인 입장에서 바라본다면 이 게시판이 처한 곤혹스러운 문제가 뭔지 말해주고 싶어 할 것이다.

“아이들은 모래사장 위에서 공놀이 하는 것을 좋아하잖아요? 공은 해를 닮았고 바닷가 모래사장에서 빠질 수 없죠. 공이 없으니 어떤 아이는 슬퍼하지 않을까요? 그리고 어울리지 않게 저 말구유는 뭔가요?”

아무리 그래도 로라는 아이의 슬픔을 그릴 수 없었다. 아이들은 공이 없지만 슬퍼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이들의 웃음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말구유는, 말할 것도 없이 그러고 있는데 로라의 거미줄 같은 머리칼이 모래 바람에 날렸다. 아이들은 여전히 모래사장에서 튜브를 마음대로 굴리고 날리며 뛰어다녔다. 로라는 튜브10개를 일렬횡대로 정렬했다. 아이들은 그제야 진정이 됐다. 모래사장에서 숨은 조개를 찾아내기도 하고 갈매기가 줄지어 따라가는 고기잡이배도 그렸다. 흰 옷을 입은 어떤 아이가 해를 발로 찼다. 해는 공처럼 느리게 곡선을 그리며 붕 떠오르더니 반대편 아이의 품속으로 들어갔다. 아이는 발끝으로 모래사장에 자국을 움푹 남기면서 해를 또 찼다. 해는 또 튀어 오르면서 처음 있던 자리로 날아갔다.

로라는 바닷가의 아이들을 뒤로 하고 해바라기 꽃밭 속으로 들어갔다. 해바라기는 끝없이 이어졌다. 이제 해바라기는 게시판을 벗어나 천장까지 뒤덮었다. 해바라기는 아래로 쏟아져 내릴 것 같았다. 로라는 계속 걸어 나갔다. 해바라기 꽃들 사이로 사람들이 한 명씩 나타났다. 로라는 발걸음이 무겁지 않았다. 로라는 곧 다시 게시판으로 들어갈 것이다.

    

  










약력

2003년 시 「 마른 꽃」으로, 2006월간문학에서 단편소설 꽃삽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2011년에는 단편소설끝나지 않는, 녹슨으로 5.18문학상을 수상했고, 교보 <퍼플>에서 장편소설지하철 아이, 소설집 끝나지 않는, 녹슨, 로라의 게시판, 배달구역》을 비롯하여, 장편동화 <엄마의 달>,  제 1시집 <늪의 방식>과 함께 십여 권의 시집을 전자책으로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