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랑젤리 결투

 

 

 

결투가 시작된다

 

흑백 필름으로 인화되는 토요일 밤

멀리서 구해온 아버지의 말랑젤리는

어린 우리들을 건맨으로 만들었다

 

꼭 황야와 석양이 반복되며

화면 가득 금괴를 약탈하는 악당들의

거친 태클처럼 포장지는 뜯겨진다

 

허연 설탕가루를 휘파람같이 날리며

등장하는 서부의 총잡이

 

한 개를 더 탈취하려는 막내의 아우성은

황급히 도망가는 마차의

바퀴소리로 기억된다

 

결투는 이미 주인공의 눈빛에서 읽혀진다

 

전광석화같이 표적으로 쏘아올린 총알들

정확하게 단맛으로 변해 갔고

쓰러진 검은 그림자들은

빈 봉지의 바스락거림으로 남는다

 

유창한 영어발음으로 엔딩자막을

차례로 호명하는 아버지의 목소리

 

그 판정에 불복하며 엎드린

한 인디언을 닮은 동생의 신음이

천천히 오버랩 된다

 

 

 

 

실험의 추억

 

 

 

형은 비글이다

입 안엔 옥시콘틴 냄새가 났다

 

예전의 반항기는 실종되고

축축한 눈망울만이 까맣게 묻어났다

 

타액 같은 눈곱은 ‘매번’을 상기하며

희뿌연 새벽을 견인했다

 

기계의 굉음은 귓딱지에 붙어

이내 방음상태다

 

‘똑같이’란 동작이 우리 속에서

희생의 제의로 의심 없이 행해졌다

 

땀에 부풀은 꿈은 고통에 비례하며

짧게 깎여 나갔다

 

광기에 찬 주사바늘은 생을 마취시켰고

형은 여전히 비글이어야 했다

 

자본의 논리는 단 한 번의 오작동 없이

다음 공정으로 진행되었다

 

물지도 울지도 못한 그는, 결국

절망의 B등급에서 풀려났다

 

이미 안락사가 예정되어

버려질 운명을 아슬히 비켜간 것이다

 

그 대가는 왼쪽 다리의 깁스로

몇 달간을 덩그렇게 치러내야 했다

 

 

그리고 형은 그때 그 기억들을, 지금

한 자 한 자 목발로 오려내고 있는 중이다

 

 

 

*옥시콘틴: 암환자나 만성통증환자의 통증을 치료하는 진통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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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요아킴

1969년 경남 마산 출생. 2003년 계간 <시의나라>2010년 계간 <문학청춘> 1회 신인상으로 등단. 시집『가야산 호랑이』『어느 시낭송』『왼손잡이 투수』『행복한 목욕탕『그녀의 시모노세끼항』, 산문집『야구, 21개의 생을 말하다』. 한국작가회의와 부산작가회의 회원. 부산 경원고 교사.

 메일: kjhchds2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