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간지주(幢竿支柱)

                                                                       

마주보고 서 있는 것이, 서로 의지해서 서 있는 것이

 

마음의 성전이 사라졌다. 이름과 함께 깡그리 사라졌다. 화려했던 단청도, 불이문의 계단도,  두툼한 방석 자리도 신생대의 뜨거운 화석이 되었다. 속 불은 꺼지지 않고 길을 열어 간다는데 무로 돌리는 무자비함이 무섭다.

 

불사에 참석한 사람들의 짚신이나 거랑주머니가 삭아서 흙이 되었다. 야단법석의 진언은 깊은 잠에 빠져 진공을 이루었다. 소리가 사라진 자리의 적막. 폐허의 자리를 아름답게 가꾸는 것은 바람에 일어서는 풀이다.

 

심폐소생술도 응급처방도 쓸 경황이 없었다니 무심했다. 눈에 보이는 것만 보는 눈은 보이지 않는 것은 보려고 하지도 않았다. 빈자리가 한때 가득 찬 역사라는 것을, 개발 제한 지역이 정밀의 문화라는 것을, 귀가 어두웠다.

 

혁명의 깃발도 올리고 여기가 큰 도량이라고 소리보다 큰 몸짓도 하고, 흐르는 강물 같이 심경도 읊지만 듣는 이가 없다. 보아주고 새겨주는 이가 없다. 시간의 뿔이 항변하듯 견고하게 솟았는데 흑백 사진의 슬픔이 넘친다.

 

여러 천년 받들고 있는 것이, 하늘 향해 받들고 있는 것이    

 

  

거랑 주머니*

 

하늘()과 땅()의 이치가 담긴

()자가 수놓아진 거랑 주머니 메고 떠나고 싶네.

이른 아침, 늦은 저녁

이 마을 저 마을 낯익은 얼굴 만나 손 덥석 잡고

인간이 하늘이라는 통문 전하며 떠돌아다니고 싶네.

동수나무를 보면 손 모아 경배하고

큰 바위를 만나도 묵념을 올리며

길 가의 돌멩이 하나 풀 한 포기가 모두 다 사랑스럽네.

셈이 닿지 않는 영겁의 시간 속에서

지금 이곳에서 두루 만날 수 있다는 것은

너와 내가 다름없이 하나 된 기쁨이려니

풋풋하고 변치 않는 생명으로 살아있음은

해 뜨는 빛의 공부를 할 수 있음은

길을 내듯 모시는 일, 맥을 짚는 일이려니

냇물을 만나면 검어져야 맑아지는 이치를 익히고

바람을 만나면 열 석자 주문*을 실어 보내고

풀꽃을 만나면 풀꽃 속으로 들어 향기로운 잠을 청하며

꿈속의 우복동*을 품고 살아야겠네.

목마른 새벽 덜렁 거랑주머니 매고 떠나고 싶네.

아름다운 산하 오르고 내리며

만나는 사람마다 한울님의 얼굴이라고

거룩한 길상이라고 극구 칭찬하며 경배해야겠네.

빨갛고 노랗고 하얀 상생의 둥근 원이 그려진 거랑주머니에

물과 구름, 바다와 달, 푸른 숲*을 가득 담아

물과 구름의 시 ,바다와 달의 시, 새들이 사는 숲의 시

이런 자연의시, 동녘의 시, 빛의 시를

한 편 한 편 꼭꼭 심어주고 싶네.

 

*상주시 은척면 동학교당에 전해오는 70×32cm 크기의 휴대용 대()로 신호 및 당호, 공문이나 편지, 통문 등을 수발하는데 사용했다. 바탕은 청색, 대 중앙에 적색, 황색, 백색의 원 안에 아()자가 새겨져 있다.

*侍天主造化定永世忘萬事知

*상주에 전해오는 이상향, 유토피아

*水雲 최제우, 海月 최시형, 靑林 김주희의 호에서 따옴.

 

약력: 경북 상주 출생. 1976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돌담 쌓기」외. 상주, 동학, 낙동강 연작시를 쓰고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