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장된 색의 공간에서 마음을 정화하다

 

누구든 후회스러워 되돌리고 싶은 과거들이 있을 것이다.

부끄럽거나 감추고 싶다거나 실수한 것들에 대한 자책으로 늪에 빠지듯 생각의 틀에 자꾸만 빠져 벋어나

지지가 않는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자기 위안도 했다가 변명도 했다가 결국에는 막다른 골목에 가서야 자기 포장을

시작하는 같다.

인생은 단순한 것이 아름다운 법인데 관계의 연속에 꼬인 실타래를 생각도 하고 포장에 숨어 버린

부끄러운 자신, 오늘 맘과 같은 그런 그림들을 같다.

평소 빠듯한 점심시간이라 식사만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나 오랜만에 후배가 회사 근처로 찾아오니

시간을 조금 할애해서 점심을 간단히 먹고 찻집 대신 근처 갤러리에서 그림 감상을 하기로 했다.

그림 전시회는 학교 다닐 과제로 밖에는 다녔는데 갑작스레 예술세계를 접하려니 조금 어색했다.  

게다가 강남의 고급스러운 분위기의 갤러리여서 심리적으로 약간 주눅이 들어 조심스레 문을 열었는데

아무도 없는 공간에 관람객은 우리 밖에 없는데 카운터에 남자분과 눈이 마주치니 나갈 수도 들어

수도 없는 어정쩡함에서 엤다 모르겠다란 심정으로 둘러보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림도 모르는 사람이 그림을 감상하자니 아까 남자분의 시선이 느껴지는 뒤통수가

여간 따가운 아녔다.

아마 그림을 그린 주인공 같은데 자기 그림을 이해해줄지 걱정이 되었던 모양인지 시선이 자꾸 우리

동선을 따라다니고 있으니 무슨 그림을 그렸는지도 모르는 추상화 같은 그림들에서 생각하는 연기를

없고, 분위기에 압도되어 감히 설명해달라는 말도 하겠고...

그래서 비슷해 보이는 형이상학적 그림을 그냥 건성건성 스캔하는 정도만 보고 금방 나오려니 미안해

인증 샷이라도 남기려고 우리 사진 부탁을 했다.

그런데 시선이 자꾸 마주쳤던 그분이 기다렸다는 듯이 옆에서 같이 찍으려고 자연스레 포즈를 취하셔서

느낌상 알겠는 데도 예의상 "직접 그리신 화가님 세요?"

 

그렇게 말문이 터지고 자연스레 작품설명이 이어졌는데 아까 밑도 끝도 없었던 작품들이 비로소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포장이란 주제로 인체를 다양한 형태로 덧칠해 포장하고 수많은 요소가 섞인 이미지로 변형시켜 보여주려

했다는 이런 설명을 하시는데 화가님의 깊은 의도는 수는 없지만 그림을 대하는 당시의 심리

상태서 바라봤을 때는 부끄럽거나 감추고 싶은 내면들을 색으로 덧칠하면서 포장시키고 싶었던게 아닐까

나름 추측도 해보며, 그제야 색감이나 터치감이 눈에 들어오고 숨은 그림처럼 희미한 사람의 형태도

이는게 전의 건성건성 감상했던 거와는 달리 아주 흥미롭고 재밌어졌다.

 

화가님은 작품마다 엄마의 맘처럼 마치 사랑하는 자식 자랑하듯 설명하셨는데 어떤 작품은 못난이여

 

포기 상태였는데 덧칠하다 보니 새롭게 이미지 변신을 해서 반응이 좋았다는 하고, 어떤 작품은 미숙아인

채로 여백의 미를 살려 놔두었더니 스스로 진화하더라 하기도 하고, 심지어 밑그림에서 작업 완성하는 과정

사실적으로 설명해줄 때면 나도 따라 그리고 있는 같은 착각까지 정도였다.

이렇게 작가의 관점에서 배경지식까지 갖고 감상을 하니 상징성, 상상력, 주변 소재들의 창의적 표현, 색채의

조화로움 느낄 있어 처음으로 미술작품에 자꾸 시선이 가고 궁금해지고 감동으로 다가왔다.

~ ‘아는 만큼 보이고 보이는 만큼 느낀다’라 하더니....

얼마 시에서도 시인의 작품배경을 듣고 시인의 맘으로 시를 읽으니 시가 다시 보이고 새롭게 마음에

닿았었는데 이번엔 그림이 그랬다.

 

작품을 감상하면서 전시된 그림들 속에 유난히 노란색 색감의 형태들이 많이 띄어 물어봤더니 시골집 주변에 널려있던 호박꽃들을 다양하게 표현하면서 부모님 생각도 담고 싶으셨단다.

그래서인지 소박하고 정겨운 느낌까지 함축되어 추상적이지만 따뜻한 그림으로 표현된 같았다.

잠시 나도 그림을 그린다면 주가 되는 소재가 무엇일지 궁금해졌는데 특히 우리 엄마를 그리워할 뭐가 생각나려나? 무슨 색이 엄마를 대신할까? 그런 생각만으로도 마음이 찡해져왔다.

 

평소 예술세계는 작가만의 세상이고 그들만이 있는 이기적 사고로 표현했다고 생각해왔는데

연한 기회가 만들어준 예술학습으로 다양한 소재와 자유로운 발상의 작가 내면의 작품세계를 돌아다니며

초입에선 부끄럼을 감추려는 심리의 포장위주로 봤다가 감상을 마무할 무렵 생각지 못한 따뜻한 노란색의

엄마가 그리워졌듯이 작가의 의도대로 수도 있고 내가 느끼고 싶은 대로 느낄 있는

예술이란 같은 작품에서도 밑도 끝도 없는 감정들을 춤추게 하는 묘한 매력이 발산하는 색의 공간 같아서

요즘 맘이 없이 어지럽고 옹색했는데 이곳에 머물다 보니 저절로 치유를 받은 느낌이 들었다.

오늘 우연치 않게 들른 색의 공간에서도 짧지만 여운의 힐링이 되는 이래서 사람들이 문화예술을

위해 시간과 돈을 투자하나보다.

 

  

 

 

 

엄마 나랑 친구 먹어요

 

‘엄마’

단어는 오묘한 같다.

따뜻함과 포근함이 느껴지기도 하지만 강인함과 억셈도 같이 공존하는 같은

적어도 나의 엄마를 생각하면 그랬다.

 

작은 체구였는데 생각의 배포도 크고 뿜어져 나오는 카리스마 또한 엄청나서 어릴 적은 엄마처럼 강한 사람

없다고 생각했었다.

게다가 다른 엄마에 비해서 박할 정도로 검소하고 절제된 생활을 강요하셨는데 매사 규제와 통제 생활

싫어서 입이 나온 채로 투정을 부렸던 같다.

당시 다들 어려운 형편에 그럴 수밖에 없다고 하지만 개인 학용품은 언감생심 부러지고 지저분해진 학용

품을 남자 형제들과 공유해야 하고 여자라고 분홍 하나를 사주고 오빠들이 입다 작아진 검정 갈색

들만 물려받으니 선머슴이 따로 없었는데 외모에 신경 쓰면 공부를 못한다고 거울도 5 이상 보게

하신 아이의 눈에는 엄마의 독재라고 생각될 수밖에 없는 일이지 않은가?

맛난 선물상자 같은 들어올 자리에서 열어보질 못하게 때는 불만의 절정이었으니...

 

엄마가 그리 지독해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내가 결혼해서야 알았다.

할머니에 학생이 4명인 가정에 공무원이신 아버지 월급으로 생활도 빠듯할 텐데 줄줄이 학생이라 교육비며

책값이 상당했을 것이다.

남자 형제들이 많아서 먹성들은 얼마나 왕성했는지 1달에 가마씩 먹을 정도로 생활비에 식비가 만만치

아을 텐데 다른 지독하게 절약하셨어도 유일하게 후했던 교육비였다.

 

공부한다고 하기만 하면 모든 일에서 제외됐고 책값이나 학원비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으시고 밀어주실

도로 엄마의 교육열은 대단하셨는데 교육이 아이들 인생의 최고의 투자라고 생각하셨던 같다.

그래서 지금의 자식들이 나름 사회에서 번듯하게 한자리씩 하고 있는 이렇듯 엄마의 지극한 교육열의 때문

것이다.

 

그런 이유 때문이라도 엄마의 손에서는 당연히 부업이 떨어질 리가 없었는데 부업 보따리들로 집이 지저분해지는 싫어서 매번 투덜거렸다.

그럴 마다 엄마는 번도 힘든 내색이나 싫은 내색을 하시고  오히려 내가 학교에서 돌아오면 투덜

거릴까봐 쪽에 치워놓고 없을 때만 하시는 눈치였으니, 온종일 꾸부려서 만드시느라 힘이 드셨을 만도

셨을 텐데 지저분하다고 타박하는 비위가 먼저였으니...

 

그런 자식에 대한 맹목적 희생과 배려와 사랑이 그땐 보였을까?

오히려 엄마의 입장에서 번도 이해하려 들지 않고 강하기만 사람이라고 생각했는지 소견이 짧고

 

 

리기만 했었던 같다.

가끔은 철부지 딸이 답답했던지 엄마가 종종 했던 말이 ‘너 언제 철이 들래?

 

철은 결혼하고야 들기 시작하더라.

지금은 결혼이 선택사항처럼 여겨져 당연히 해야 한다는 의식이 희미해져 가는데

당시는 20 적령기를 넘기면 세상 불효이고 주변의 심리적 압박감에 주홍글씨처럼 붙어다닐  노쳐녀

딱지가 두려워 20 후반에 가까스로 남자지 싶은 상대를 선택해 결혼했다.

이후 달달하기만 신혼생활이 어느 정도 흘렀는데 이번엔 아이가 제때 생기질 않으니 주변의 시선도 느껴

지고 스스로도 조바심이 생기기 시작해서 나름대로 임신 잘되게 하는 한약을 지어 먹고 산부인과에서 배란일

맞추는가 하면 일시적 알칼리로 만든다고 새벽녘 잠에 취해 어쩔 몰라 하는 신랑 깨워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 쓰디쓴 커피를 마시게 했다.

 

그런 노력 덕분인지 어렵게 아이를 가졌으나 조금만 무리하면 유신 끼로 피가 비치고 입덧도 10 내내 하는

엄마를 긴장시켰던 뱃속의 딸아이는 급기야 세상에 나오려고 때는 장장 12시간 이상을 고생시키더니 제왕절개 직전에서 자연분만으로 어렵사리 나오긴 했는데 지도 뱃속에서 힘이 들었는지 태변을 먹었다고 해서 엄마랑 같이 퇴원도 하고 검사가 이만저만이 아녔다.

 

그때부터 본능적으로 모성애 발현, 젖먹던 힘까지 쏟아붓느라 실핏줄이 터져 검둥이가 얼굴과 난산

으로 인한 더딘 회복에 아이가 제때 먹어줘야 하는 젖은 퉁퉁 불러 아이 낳는 진통보다 심한 젖몸살까지

앓아야 했지만, 나의 고통보다 병원에서 아직 퇴원 못하고 검사받는 아이만 걱정 되어 12 혹한에 꽁꽁 싸매

병원 문턱을 달게 쫓아다녔을 정도로 아이의 안위를 살피게 되는 나도 어느새 강인한 엄마가 되어가고

있었다.

 

이런 일련의 과정에서 우리 엄마 생각이 제일 많이 났다

아이 낳느라 애썼다며 손을 잡아줄 때는 하염없이 눈물이 났었는데 엄마의 따뜻함이 뼛속 깊이 느껴졌기 때문이리라.

자식이 길고 험난한 인생길을 스스로 버티고 이겨낼 힘을 기를 있도록 이끌어 주시느라 ‘난 괜찮다’,

‘난 됐다’ 했던 배려와 사랑을 당연한 희생에 가둬버린 ‘우리 엄마는 그런 싫어해’ 했던 아이에서

엄마가 되어보니 엄마의 맘이 이해되고 같은 경험을 공유해가면서 엄마의 세계를 나도 똑같이 걸어가는 듯했다.

 

나보다는 가족이 우선이 되다 보니 검소해지고, 지독해 보이겠다 싶을 정도로 억척스러워졌고, 인내심, 책임

감이 커지는 ‘여자는 약해도 엄마는 강하다’처럼 점점 강한 엄마의 모습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나도 어쩔 없이 규제와 통제를 하게 되고 특히 딸아이에게는 강조했던 같다.

 

 

 

 

어렵게 갖은 아이가 10 뱃속에서도 맘을 놓지 못하게 만들더니 태어나서도 한참을 애를 먹였을 정도로 까딸

스럽고 쉽지 않은 아이였는데 아이를 다듬어 바르게 키워서 아이가 세상 밖을로 나갔을 아직은

여자에게 유리천장이 있는 사회에서 우리 딸만큼은 맘껏 능력발휘를 있는 멋진 전문여성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에  아이의 맘을 헤아리지 못하면서 엄하게만 하다 보니 엄마의 욕심이 과해 독재자 같았나 보더라.
딸은 오래전부터 엄마랑 친구처럼 지내길 갈망해왔던 같았는데 딸의 삶을 들여다보려고도 않은 입장

에서만 생각하느라 간절함의 맘이 이제 읽혔으니...

이제 생각해보면 좋은 엄마가 아니라 엄마가 역할에만 충실했던 아닌가 반문이 들었지만 그것도 사랑이

인한 것이었음을 나처럼 엄마가 되었을 알게 것이다  

 

암튼 이제라도 어엿한 사회인으로 자라준 딸에게 같은 여자의 입장에서 생각을 공유하는 친구 같은 좀더  

따뜻한 엄마가 되어주고 싶었다.

내가 엄마의 사랑의 표현을 어느 순간 이해하고 존경하듯 딸과도 나를 그리 받아들이도록 많이 표현해주고 느끼도록 해줄 것이며  

우리 엄마가 지금까지 든든한 후원자이자 인생 친구가 되어준 것처럼 딸에게 더없은 후원자이자 인생

친구가 되어줄 것을 다짐하면서....

이제 친구먹자 우리 , 사랑한다.



경기대학교 응용통계학교 졸업

문학광장 73기 수필부분 등단

문학광장 문인협회 회원

) 회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