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적

 

 

 

 

나는 나무나 풀꽃이 아니다 강물도 아니다 그저 길이라고 불린다 그러나 때론 강물 넘쳐 흘러들거나 산과 나무 쓸쓸한 영혼이 스며들기도 한다 그럴 때면 내가 길 아닌 어떤 흔적이라고 생각되기도 한다  

 

누군가의 발목이 내 몸 아득한 오지에서 흔들리면 늦은 가을이다 그러면 어떤 얼룩이 선명해진다  

 

오래전 우기雨期의 가을, 그날 소년은 우산도 없이 내 안에서 흘러가다 학교 교정 플라타너스 쪽에 닿았다 늦은 오후, 소년은 다시 내게 얹혔는데 뺨에 손바닥이 붉게 판각*되어 있었다 그러고는 한적한 곳 어디쯤에서 동그마니 접힌 채 동시 적힌 노트를 찢어 종이배를 접는 것이었다

 

이젠 어디도 소년은 없고 낡은 그림자만 보인다 밤이면 내 몸 위를 자주 비틀대는    

 

 

 

* 열한 살 아이가 동시 숙제를 검열받기 위해 교탁 난간에 걸려 있다. 가자미눈으로 변이된 여교사의 눈, 엄마가 해줬다며 거칠게 몰아붙이는 붉은 입술, 이윽고 울고 있는 아이가 복도로 질질 끌려간다. 뺨에 손바닥이 판각된 채 추락하는 아이, 창가의 빗물도 하얗게 질려 흩날리고… 다음 날 아침, 아이는 얼굴에 판각된 선생의 손바닥을 쥐가 갉아놓은 비누로 씻어낸다. 밤일 다니는 엄마는 죽어가는 짐승처럼 쓰러져있고

 


 

 

 

침대가 있는 무대

 

1

입이 없다. 입이 없지만 때로는 운다. 나는 겨울이거나 낙엽. 밤이 오는 두렵다는 아프게 우는 새에게 경의를 표한다. 새의 울음은 독백이거나 문학. 당신의 문학은 불온했습니까. 최소한 나의 구간은 눅눅하고 음습합니다. 몰락의 바닥이 어디쯤인지 없다. 몰락은 홀로 하는 전위예술. 깨어진 선인장 화분이거나 찢어진 명태.

 

2

복수複數 혹은 복합인 적이 없다. 나는 오리 알이거나 소녀의 잃어버린 한쪽 귀걸이. 몸을 사각 끝에 걸치고 있을 가장 위험하다. 사각은 감옥이거나 그믐. 어깨를 면에 기대고 있을 때도 위태하다. 그건 불면이거나 몽유. 무용하지 않지만 용이함을 바라는 것도 아니다. 졸다가 나를 놓치게 되면 영혼이 출렁대거나 영혼이 얼굴을 놓아버릴 지도 모를 일이다.

 

3

눈이 내린다. 나무와 개와 불빛과 차량이 우르르 쏟아져 나온다. 검은 승용차와 위태한 인간이 부딪힌다. 떠나가고 떠나오는 눈송이들. 밖은 혼란스럽고 없는 물상은 어떤 동요도 없이 고정되어 있다. 친근하면서도 무서운 짐승이다. 입이 없다는 , 의자이거나 젖가슴. 아무리 가슴을 더듬어도 꽃이 기미는 없다. 꽃을 아무리 더듬어도 가슴이 열리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번 생에는 흥분과 발화를 모색하지 않을 거다.

 

4

가면증은 유전이다. 나무가 바다로 향하고 있다. 바다를 마신 사내가 나무를 끌어안고 운다. 가면증은 추상이거나 연극. 빗새가 향하고 있는 곳은 심장이거나 노을. 얼굴에 더는 걸칠 여분의 가면이 없다. 동공에서 자라는 원뿔이거나 얼음. 오독이 밤을 메우고 닿을 없는 곳에선 애인이 나를 위해 가면을 낳고 있다. 하나, , 셋… 마흔다섯.

 

5

아름답게 태어나지 못한 생각이 가시밭에서 자란다. 누가 가시를 엮어 침대를 조립하는가. 가시밭은 전생이거나 후생의 오늘 . 내가 누운 곳은 지도일 수도 다쉬테 사막일 수도 있다. 수음을 설계하다 그만두는 밤이면 모래먼지가 뿌옇게 들이친다. 나도 침대도 더는 키가 자랄 없다는 생각할 때면 안에서 붉은 선인장이 피어난다.

 

 

6

그녀는 어느 별에서 폭발하였다고 한다. 그것은 죽은 때문일 수도 있고 미술 때문일 수도 있다. 추억엔 배경이 필요한 걸까. 미술은 새의 울음이거나 푸른 독백. 매주 금요일에 새의 울음을 편씩 그리기로 했던가. 내가 분리 수거될 있음에 감사 기도를 드린다. 기도 또한 전위 예술이거나 선인장. 후생에선 찢어진 명태이거나 조화. 매일 독거인 채로 낡아 가거나 액자가 된다.

 

7

화면 속에선 언제나 하나 이상이 펼쳐진다. 드물게 셋일 때도 있다. 혹은 셋이란 섹스이거나 분쟁. 섹스이든 분쟁이든 고독에 대해 나무의 심장이 운다. 그것은 질투이거나 질색. 침대의 입장에선 얼마나 무기력할까. 나는 다리가 , 침대는 다리가 , 침대는 최소한 이상을 지탱할 있다며 단단한 표정을 짓고 있다. 그럼 여섯 개의 다리는 어떨까. 그건 이사移徙이거나 영화.

 

8

누구도 의도하고는 절벽 아래로 떨어지지 않는다. 의도를 품고 절벽 아래로 낙하한다는 겨울새이거나 빗물. 자살을 위장한 무의식이 위통을 앓는다. 꿈이 너무나 선명한 것에 위통을 앓는다. 위통이 꿈을 정확하고 예리하게 해석한다. 잠에서 깨어났을 바닥에 떨어져 있을 때가 많다.

 

9

노래를 짓는 식물과의 동침을 갈망하곤 했다. , 날이 오면 체위는 나의 형태일까, 아니면 식물의 형태일까, 생각에 잠기면 회색 졸음이 근처에 도달한다.  

10

오늘은 입이 보인다. 그러나 여전히 말이 없다. 말없이 삐걱삐걱 울기만 한다. 내가 잠을 주인으로 섬긴 것인지, 잠이 침대를 주인으로 섬긴 것인지, 이도 저도 아니면 침대가 여자를 꿈꾼 것인지, 불면인지 도무지 말이 없다. 어쩌면 머지않아  침대가 무덤이 수도 있다. 모든 슬픔을 함께했으니 서로의 수음을 관찰한다는 , 달빛에 젖은 안개 같은 . 몸이 나무처럼 딱딱해지는 것은 성욕이거나 식욕. 몸이 시트처럼 푹신한 것은 위통이거나 나무의 심장. 사춘기의 나는 식은땀을 흘리며 잤지. 그런데 계절에도 눈은 식은땀을 흘리는 걸까. 침대의 키가 자라지 않는 것은 침대가 더는 나를 사랑하지 않아서이고 침대 바깥에서 서성이는 누군가를 계산하기 때문. 오늘 밤에도 고양이처럼 웅크린 잠들 것이다. 그러면 머리 위로 토막잠처럼 낯선 새들이 토막토막 날거고  

 

 

 

. 본명 안병호, 경남 김해 출생

. 2010년 『불교신문』 신춘문예 당선

. 2018년 『부산문화재단』 지역문화특성화지원사업 수혜

. 2018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아르코문학창작기금 수혜

. 18회 부산작가상 수상

. 시집 『게헨나』 현대시기획선

. 현재 부산작가회의 회원

 

dominiko8@hj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