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루귀 산천

김연미

 

기다림에 지친 숲이 봄으로 갔어요

 

신동엽의 진달래 산천 아직은 먼 삼월 어귀

 

노루귀

 

분홍 노루귀

 

해방구가 여기네요

 

 

마지막 산사람이 귀 한 쪽 열어두고

 

냉전의 뿌리를 베고 잠이 들던 그 자리

 

지워진 파편자국에 귀만 남아 피네요

 

 

빈숲에 겨누었던 총부리 거두는 봄

 

햇살 환한 사람들이 한 줄로 찾아와서

 

노루귀

 

하얀 노루귀

 

무릎 꿇고 있네요

 

          

김연미 / 2009연인으로 등단. 시집 바다 쪽으로 피는 꽃, 산문집 비 오는 날의 오후. 2010년 제2회 역동문학상 우수상 수상.제주작가회의·한국작가회의 회원. 33383331@hanmail.net




바람의 집

이종형


당신은 물었다


봄이 주춤 뒷걸음치는 이 바람,

어디서 오는 거냐고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4월의 섬 바람은

수의 없이 죽은 사내들과

관에 묻히지 못한 아내들과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잃은

아이의 울음 같은 것

 

밟고 선 땅 아래가

죽은 자의 무덤인 줄

봄맞이하러 온 당신은 몰랐겠으나

돌담 아래

제 몸의 피 다 쏟은 채

모가지 뚝뚝 부러진

동백꽃의 주검을

당신은 보지 못했겠으나

 

섬은 오래전부터

통풍을 앓아온 환자처럼

살갗을 쓰다듬는 손길에도

화들짝 놀라 비명을 질러댔던 것

 

4월의 섬 바람은

뼛속으로 스며드는 게 아니라

뼛속에서 시작되는 것

 

그러므로

당신이 서 있는 자리가

바람의 집이었던 것

 

    

 

이종형 / 2004제주작가신인상으로 등단. 시집 꽃보다 먼저 다녀간 이름들. 20185·18문학상 본상 수상 .제주작가회의·한국작가회의 회원. lee56oh@naver.com.



4·3이라 쓰고 사·삶이라 읽는다

강봉수

 

손을 들면 손간데 꽃들이 지고

길나서면 닿는 곳마다 불이 태워졌다

몸을 숨긴 자왈 속 동굴은

다시 돌아 올 수 없는

, 무덤이었네

 

남의 손으로 얻은 빼앗겼던 조국산천

꽃이 피는 것조차 아픔이었다

살이 묻힌 대지를 밟고 살아야 했던

죄스러운 칠십 고개를 넘어도

바다는 여전히 슬픔으로 출렁이네

 

바람은 오늘도 멈추지 않고

한라산은 때때로 몸을 숨기며 속삭이네

자주독립 민족해방 통일조국

언제면 찾아올까

죽고 사는 일이 억압 없는 세상

 

    

 

강봉수 / 2011문예춘추로 등단. 현재 제주작가회의·한국작가회의 회원, 우당도서관 근무.



삽시(揷匙)

김영란

 

제주섬 바람소리엔 뼈 맞추는 소리가 난다 일어나 아우성치는 이백육 마디마디

사월의 제단 앞에선 산목숨이 죄만 같아

 

애비 아들 보내는 날 가슴 치며 울던 바다 육십년 만에 찾아온 육신 젓갈 삭 듯 녹아내려 생살점 떼어내듯이 봄꽃 벌써 지려 하네

 

머리 하나에 팔다리 맞춰는 놓았다만 내 남편 내 아들 맞기는 한 것이냐

어디다 하소를 할까 혼절했던 시간들

 

앞서거니 뒤서거니 절뚝이는 저승길 열두 대문 훠이훠이 고이 넘어 가시라

어머니, 고운 멧밥에

떨며 꽂는

숟가락

 

    

김영란 / 2011조선일보신춘문예 당선. 오늘의시조시인상. 시조집 꽃들의 수사修辭. 제주작가회의·한국작가회의 회원. puppy6571@hanmail.net



선작지왓 털진달래

-종이배의 표류기

김성주

 

한라산 선작지왓 망망 분홍 물결
자맥질하며 노는 어미 노루 새끼노루를 따라가던 시선이 뚝 끊긴다.

나의 종이배는 표류를 시작한다.

 

첫 기항지(유골 봉안실)

 

살아생전 봄을 제대로 그리고 싶었던 외할아버지, 군화 발걸음 소리 쇠 부딪는 소리들이 할퀴고 간 돌담 무너진 올레 어귀, 밑둥치부터 온 몸 푸르뎅뎅한 기세로 옥죄고 있는 송악 앙상한 가지를 매섭게 후려치고 있는 낯선 굴거리나무, 비명을 잃어버린 늙은 감나무 위로 2월의 마지막 노을은 붉게 번지는데 매서운 서북풍이 동남풍으로 바뀔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분홍 물감 통을 든 손은 덜덜 떨리는데 꽃이 피어야 봄바람이 분다는 앞선자의 외침이 가슴 속 진격의 북소리를 둥둥 울리는 것이었다. 분홍 물감 듬뿍 묻힌 붓이 북소리 따라 휘둘려지고 제주 섬 한복판에 굿판이 펼쳐진 것인데, 벌거벗은 이웃들은 두 손 비비며 동남풍 불어오길 기원한 것인데, 돌풍으로 몰아친 서북풍이 굿판을 뒤엎는 것이었다. 봄으로 가는 길목에서 곶자왈의 싸움은 그렇게 시작 된 것이었다. 벌거벗긴 채, 땅속에 묻힌 채, 분노를 삭이던 무리들이 겨우내 기세등등했던 사스레피나무 송악 굴거리나무 그 패거리에 저항하여 오름 오름 마다 산벚꽃은 아우성으로 피어나고 거센 비바람은 산벚꽃잎을 비비산산(飛飛散散) 찢어발기는 것이었다.

 

제주비행장 한옆, 구덩이로 낙화한 그 꽃잎 하나 70년 지나 하얀 유골함에 담겨 43평화공원 유골 봉안실에 앉아 있다. 분홍물감 통 꽉 붙들고.,

 

 

둘째 기항지(행불인 비석 )

 

사냥꾼은 피 묻은 자루를 내려놓으며 암노루라 했다. 도망치는 새끼노루를 놓친 게 무척 아쉽다고 했다. 국장은 몸보신에 특효라며 따끈한 피 한 사발을 단숨에 마셨다. 도막 낸 고깃덩이들은 곱게 포장하여 서울 본사 윗선에 보내기로 했다. 고깃덩이가 상자에 담기는 동안 나는 새끼를 향한 어미의 눈에 반짝 피었다 진 꽃 한 송이를 떠올린다. 고도성장에 목매던 그 시절 다른 회사 사정도 다르지 않았다. 높은 자리의 사람들은 왜 한라산 노루 고기에 환장했던 것일까?

 

70년 전 사람 사냥의 시절, 눈 덮인 한라산 계곡에 숨어 내게 젖을 물리시던 어머니 탕 탕 하얀 눈 위에 빨갛게 쓰러졌다. 같이 도망치던 젊은 처녀가 후다닥 나를 안고 숲으로 뛴다. 몇이 쓰러졌는지 모른다. 사냥꾼들이 주검을 발라먹고 뼈다귀까지 다 먹어 치워버려 흔적이 없다.

 

종이배가 닿은 곳은 흔적 없음을 흔적으로 남긴 행불인 비석 앞이다.

 

 

셋째 기항지(위폐 봉안실)

 

분홍 물감으로 봄을 그리려던 아버지 종갓집 며느리로 있다가 산으로 피신한 누님 연분홍 봄바람을 기다리던 동료들 피어나지 못한 채, 시뻘겋게 질 때마다 핏물을 뒤집어써 빨개진 외삼촌, 사살당했다.

 

43평화공원 내 위폐 봉안실, 수많은 위폐 속에 놓인 김상훈 이름 석 자, 내 눈에는 흰 바탕에 검은 글씨가 다른 위폐들과 똑같아 보이는데, 아무리 봐도 빨간색은 보이지 않는데, 빨갛다 한다. 빨개서 치우라 한다.

눈이 푹푹 쏟아지던 밤 죽음을 무릅쓰고 산에서 내려와 아직 목숨이 붙은 핏덩이 하나 할머니 품에 툭 던지고, 하얀 눈 속으로 떠난

 

 

귀항 (선작지왓 털진달레)

 

쫓길 때까지 쫓겨 선작지왓에 오른 작고 앙상한 몸뚱어리들이 온 힘으로 흩뿌려놓은 분홍 물결, 바람에 일렁이며 윗세오름으로 번져 철쭉꽃 피워내면 목마른 노루 백록담 물로 목을 축이고 컹컹 하늘 향해 봄을 알릴 수 있겠지. 초록 위로 색색의 꽃들이 자유로이 피어날 수 있겠지. 저 아랫마을 키 큰 나무 그늘에도 춘란이 향기를 내뿜을 수 있겠지.

 

김성주 / 1996자유문학으로 등단. 시집 , 바람길, 구멍.제주작가회의 회원. ksj2519@hanmail.net

 


소남머리

김 영 숙

 

생목숨 탕탕탕탕 절벽에서 떨어져

그런 날은 정방폭포 물빛도 바뀌어서

빨간 섬 붉은 바다가 겨울 내내 울었대

 

면회 가던 어머니 즉결처형 아버지

십일월엔 제사가 두 번 감저막이 기른 아이

하효동 오 선생 오면 터엉텅 우는 바다

 

씨멜족 임씨 일가도 여기서 죽었다고

등에 업은 애기까지 죽창으로 찔렀다고

폭포수 증언을 듣다 늙어버린 나무야

 

어릴 적 손 꼭 쥐고 고개 돌려 지나던

여기가 집단학살 터 아, 떼까마귀 고향 같은

바다 쪽 아찔한 체위 헛손 하는 곰솔아

 

      

 

김영숙 / 2006시선으로 등단. 제주작가회의·한국작가회의 회원. thfqlcqkek@hanmail.net



숟가락을 드는 봄

김진숙

 

사월 어깨너머 푸른 저녁이 온다

이 빠진 사발처럼 걸려 있는

초승달

 

누구의 가슴 한쪽이

저리 시려 오는지

 

그림자 빛을 가두며 내 뒤를 따라 온다

한 걸음 딛고 나면 달아나는 발자국

 

온 섬을 불 지르고 간

그날에 가닿을까

 

꽃이라 불렀지만 눈물이라 읽힌다

제주 땅 어디에나 울먹울먹 피어나

 

뿌리째 흔들고 간다,

내가 모른

봄 저편

 

눈물은 그런 거여 퍼내도 우물 같은

함께 울 줄 알아야 세상을 배우는 거여

 

힘겹게

숟가락 하나

눈물 한 술

뜨는 봄

 

      

 

김진숙 / 2006제주작가로 작품 활동 시작. 2008시조21등단. 시집 미스킴라일락, 눈물이 참 싱겁다. 한국시조시인협회 신인상 수상. 제주작가회의·한국작가회의 회원. jinsook67@hanmail.net.



아무런 이유 없이

김경훈

 

많은 사람들이

제주43에서 무수한 제주도민들이 아무런 이유 없이

억울하게 죽어갔다고 말한다

 

그런가

정말 그러한가

 

194731일의 그 거대한 군집의 운동을

뒤이은 310총파업의 열정을

나라 반쪽 만드는 510단독선거를 저지한 동력을

우리는 그 43의 봄을 애써 잊고 있는가

 

43의 겨울은

최고조에 이른 열정을 끄기 위한

그 몇 배 분량의 극한의 공포와 탄압

이것은 공동체의 파괴와 개인의 해체

이것은 정체성의 상실과 인간성의 말살

 

이것은 사유하는 세포 자체를 파괴하는 것이다

그래서 제주43에서 죽음만 기억되고 있는 것이다

 

제대로

진실을 말하자

 

제주43은 아무런 이유없이 억울하게 죽은 것이 아니라

죽어서 아무런 이유가 없어져버린 것이 억울한 것이다

 

제주43에서 선대들은

이재수 항쟁군들처럼, 동학농민군들처럼, 518 시민군들처럼

분명한 이유를 가지고 싸우다 스러져갔다

이것은 세상의 모든 빨치산 항쟁과 일맥상통한다

 

분명히

결단코 말하자

 

이유 있는 죽음들이다

고귀한 죽음들이다

의로운 죽음은 의로운 행진을 부른다

고귀한 죽음은 고귀한 결단을 부른다

 

이제 후대들의 몫이다!

      

 

 

김경훈 / 1993통일문학통일예술로 등단. 시집 삼돌이네집, 그날 우리는 하늘을 보았다, 산문집 낭푼밥 공동체. 제주작가회의·한국작가회의 회원. kimkh4597@hanmail.net



어쩌면 잊혀졌을 풍경

- 멀구슬나무와 팡돌과 나

홍 경 희

 

일 흔해 묵혀둔 말 쉽사리 꺼내지 못해

연필만 만지작만지작 선 한줄 겨우 그렸어

어렵게 말문을 트자

꽃눈들도 틔어났어

 

메마른 손가락으로 조바심 내며 피운 꽃들

저지른 잘못 없이 기다림조차 죄가 된,

무너진 하늘 아래서도

살아 있어 고마웠어

 

달을 쳐다보며 내가 앉아 있던 팡돌

푸릇한 꿈 한 채 기다리는 것 같아서

돌아온 가족을 맞듯

멀구슬나무 그렸어

 

비바람 흔적이나 기미는 어디에도 없어서

금세 다닥다닥 붙어 앉은 햇살들

여덟 살 나의 친구들이

올레에서 불렀어

 

백지로 비어 있던 유년과 우영팥에

동백꽃, 해바라기, 양애와 배채기꽃

또 다시 연필로 심고

붓끝으로 피워 놓았어

 

오늘도 꽃을 그려,

아프지 않은 꽃을 그려

고요히 느릿느릿 철도 없이 피어나

다시는 지지 않을 꽃,

향 피우듯 꽃을 그려

 

 

      

홍경희 / 2003제주작가신인상, 3회 오누이시조공모전 장원. 시집 그리움의 원근법. 제주작가회의·한국작가회의 회원. jejugod@hanmail.net.



표석 앞에 서다

오 영 호

 

무자년

원혼들이

올레길 산길 돌아

거친오름자락 등 굽은 느티나무

굴곡 진

나이테 돌아

새싹으로 피어나는

4월의 평화공원

신원의 꿈 등에 진

9순길 어머니와 7순의 유복자가

연둣빛 잔디밭 너머

표석 앞에 서다

 

뼈 하나 찾지 못해

새겨진 이름 보며

뭣이라,

한 마디 말이라도 해야겠는데

, 하고

터지는 한숨

눈시울만 붉어지는

술 한 잔 올려놓고 절하는 아들 보며

쌓이고 쌓인 한()이 한 겹이라도 벗겨질까

이제는

많이 용서했다고

흠향(歆饗)하고 가실까

 

그만 돌아서다 돌비에 손을 얹고

다시 못 올 것 같아요 하늘에서 만나요

어머니 젖은 목소리

명치끝이 아리다

 

      

 

오영호 / 1986시조문학으로 등단. 시집으로 현대시조 100인 선 등신아 까불지마라. 한국시조비평문학상제주도문화상 수상.

제주작가회의·한국작가회의 회원. jeju50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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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시 10편은 2019년 상주동학기념문집 녹두꽃 필 때』에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