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에 나타난 말

 

잠든 도시의 등허리를 무람없이 지르밟고 말이 나타난 것은 막차가 막 차고로 들어간 후였다 잠자던 시민들은 폐경기로 돌아누운 어둠의 머리채를 뒤흔들어 깨웠고 서둘러 창마다 불 밝히고 뒤숭숭한 가슴들을 거리로 내몰았다 목장이나 경마장에 있어야 할 말이 보도블록을 턱하니 밟고 서 있는 사실을 두고 도시는 머리마다 요란스레 사이렌을 켜댔지만 말은 도무지 숨으려 하질 않았다 더 이상한 건 말을 바라보는 시민들의 방법이었는데 모두들 한손을 망원경처럼 오므리고 그 안으로 들여다보는 거였다 가까이 있든 멀리 있든 마치 그 말이 희고 커다란 알이라도 낳기를 바라는 심정으로 아이들은 물론 다 자란 어른들까지 한결같았다 그렇게 말은 꼼짝없이 손 안에 들어와 버렸고 한쪽 눈을 감고 있는 시민들은 말 이외에는 아무것도 볼 수가 없었다 말하자면 그 밖의 빌딩들과 도로표지판 그리고 각종의 불빛들은 의식 속으로 숨어버렸고 한밤중 예고 없이 출현한 말만이 시민들의 떨리는 가슴을 지배하고 있었다 사이렌소리가 꼬리를 감출 무렵 말은 분명 자의에 의해 가뭇없이 사라져버렸는데 시민들은 쉽게 그 자리를 벗어나지 못했다 어느새 새벽이 오고 있었는데도 창가에 모여 소문처럼 웅성거리며 오므린 한손을 오랫동안 바로 펴지 못하고 있었다 더더욱 이상한 건 아침이 되자 도시 한복판으로 말들이 이끄는 낯익은 꽃상여가 쉬지 않고 지나가고 있었는데

 

 

겨울동화

 

아직 추운 겨울이 좋아요

 

날 안아줄 수 있으니까요

 

 

 

이원준

서울 출생. 서울예술대학교 문예창작과 졸업. 1991현대시세계로 등단한 시인, 소설가. 저서 김오랑》 《김구》 《이상》 《권정생》 《노먼 베순》 《넬슨 만델라》 《정약용의 편지》 《조선왕들의 속마음》 《누가 조선의 영의정인가》 《한국사 그 숨겨진 역사를 만나다

 

jjun63@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