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되거나, 뜨겁거나!


 

 

1.이름을 얻다

 “느거 엄마 딸 낳았대매? 그라믄 길자가?

 반찬가게에 심부름 가서 이런 질문을 받고 멀뚱허니 서있는 어린 둘째오빠 모습을 나는 머릿속에 그려본다. 아들만 넷 있는 집 귀한 딸로 나는 태어났고 오빠들 이름은 모두 ‘길할 길()’자 돌림-길환, 길복, 길호, 길범-이었다. 그래서 당연히 ‘길자’가 되어야했다. 김길자. 그러나 손꼽아 기다리던 ‘딸’이었으므로 이름 짓는 데 신중을 기해야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이종사촌오빠가 내민 이름은 참 진, 계집 희, ‘진희’였고 그 이름이 모두들 마음에 들었나보다. 아버지, 엄마는 내가 참한 계집으로 자라나길 바라셨을까. 길자였어도 괜찮았겠는데...... “길짜”라고 발음하면 스스로 운명을 개척해나가는 강인한 여자의 모습이 떠오른다. 겉치레, 허영을 훌훌 털어버리고 홀로 길 위에 서서 진짜배기 삶을 살아가는 한 인간의 모습 말이다. 그런데 ‘진희’는 어떤가. 너무나 순종적이고 허약하지 않는가. 진짜를 추구하려면 좀 더 진취적이고 반항적이어야 할텐데 말이다. 하지만 나는 ‘진희’라는 이름에 오래 깃들어 살았고 앞으로 남은 날들도 ‘참된 것’의 언저리를 서성이며 살아갈 것이다.

 

2.흉터

 하꼬방.

 어렸을 때 많이 들었던 말이다. ‘히야시’라는 말도 있다. 아버지는 함경도에서, 엄마는 황해도에서 피난 내려와 가난한 부부가 되었다. 일제강점기를 거쳐 온 부모님들 입에는 일본말들이 아직 남아있었다. 거대한 역사의 수레바퀴에 간당간당 매달려 돌아가는 와중에도 ‘하꼬방’에 살림을 차리고 리어카 끌며 ‘노가다’를 하면서 ‘히야시’된 막걸리를 찾는 삶을 살게 된 것이다. 내가 태어난 부산 당감동 판잣집은 그전에 마굿간으로 쓰였던 곳이었다. 단칸방에 나무 널을 여러 개 잇댄 마루가 있었고 그 마루 한쪽에 연탄아궁이가 있었다. 날씨가 추운 이북식 가옥구조였다. 하루는 그 연탄아궁이에 큰솥이 올라갔고 솥 안에선 물이 끓고 있었는데 이제 막 기어다니기 시작한 내가 그 솥에 빠지는 일이 일어났다. 어린 나는 어쩐 일인지 오른쪽 팔꿈치로 몸을 지탱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날이 마침 일요일이라 병원은 문을 다 닫았고 겨우 임시방편으로 약국에서 구한 게 가아제였다. 연고가 덧발라진 끈적한 가아제로 화상을 견뎠다. 그 흉터가 어떤 운명의 화인처럼 뜨겁게 내 삶을 관통하고 있다. 운동회 날 달리기하다 넘어져 바닥에 긁혀 흉하게 벗겨진 오른쪽 팔꿈치를 내려다보며 서럽게 울었던 일이 떠오른다. 그 후로 오랫동안 아니, 아직까지도 나는 그 흉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연애할 때도 그 흉터가 걸림돌이었다. 결국 나의 흉터를 받아주고 이해해 줄 것 같은 사람을 골라 결혼을 하게 되었다. 우연한 기회에 사주를 보게 되었는데 이 팔꿈치 흉터가 아니었으면 더 큰 화를 입었을 거라는 점괘가 나왔다. 거대한 솥처럼 나를 덮치는 운명이 두려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안도감이 들었다. 자포자기의 심정일지도 모르겠다. 얼른 늙어지길 바란 것도 이 흉터 때문이다. 늙어 주름살이 생기면 흉터도 묻힐 거라는 희망. 하지만 그 때 쯤이면 이미 육신의 흉터라는 것에 연연 할 만큼 삶에 대한 애착과 열정이 남아있지 않겠지.        

 

 

3.봄의 한가운데서 봄을 꿈꾸다

 사춘기.

 본격적인 사춘기는 중2 겨울방학 때 시작되었다. 치기어린 시절이었다. 방학동안 칩거를 했다. 밖에 나가지도 않고 씻지도 않고. 주로 한국단편소설 전집은 거의 다 읽었고 일본소설 전집을 읽기 시작했다. 책을 읽지 않을 땐 창이 없는 방에 누워 공상에 빠졌다. 생활력 약한 아버지에게 엄마가 퍼붓는 잔소리를 들으며 방 한쪽에서 ‘작문’을 했다. 시가 아닌 소설. 겨울방학 숙제였다. 나는 방학숙제를 내 인생의 숙제로 떠받들어 정성들여 써나갔다. 읽고 쓰고 읽고 쓰고 읽고...... 내 몸은 비대해졌고 그럴수록 달달한 초콜릿이나 빵에 더 손이 갔다. “기집애, , 저 발바닥 봐라!” 더께처럼 앉은 발바닥 때가 영광스런 훈장이었다. 그 겨울, 그 작은 방에 스스로를 가두고 나는 아주 먼 데 있는 봄을 기다렸던 것일까. 얼른 어른이 되어 자유롭게 글을 쓰고 싶었다. 하지만 어른이 되고 난 후 그 희망은 더 멀어졌다. 봄의 한가운데서 봄을 생각하는 사춘기. 겨울방학이 지나고 내 글쓰기는 한 단계 올라선 느낌이었다. 그리고 비참하게 비대해진 몸을 숨기기 위해 해가 져서야 어둠을 덧입고 하교를 했다.

 

4.산문의 시절, 시의 시절

 나는 소설을 쓰고 싶었다. 고등학교 자율학습시간에 연습장을 펼치고 펜촉에 잉크를 묻혀 글을 써나갔다. 어떤 이야기들을 썼는지는 떠오르지 않는다. 그냥 그랬다. 대학을 못 보낸다는 엄마 말을 듣고 이불을 뒤집어쓰고 한참을 울었다. 세상이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걸 절감했다. 고등학교 졸업을 하고 공장에 취직하여 야근하고 돌아온 피곤한 몸으로 글을 쓰는 내 모습을 상상해보았다. 그리 나쁘지는 않았다. 책을 읽고 글만 쓸 수 있다면 뭘 하든 상관없을 것 같았다. 69번 버스 손잡이를 잡고 흔들흔들 학교와 집을 오가며 절망과 희망을 번갈아 씹어 삼켰다. 그리하여,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대학에 들어갔다. 등록금이 싸다는 교육대학. 가난은 나를 절망시켰지만 가난으로 인해 나는 좀 더 단단해지기도 했다. 대학에 들어와서는 시를 쓰기 시작했다. 시인이 멋져 보였다. 주말에 집에 가지 않고 기숙사에 남아 새우깡 봉지를 보며 시를 썼다. 대학3학년 때 교대 문학동아리에 들었다. 그리고 경상대 문학동아리에도 가입했다. 이제 산문의 시절은 지나고 본격적인 시의 시절이 나에게 온 것이다. 교대 문학동아리는 소위 순수문학을 추구했고 경상대 문학동아리는 민중문학을 지향했다. 둘 사이에서 중심을 잡지 못하고 흔들리던 나는 결국 경상대 ‘울력’동아리 쪽으로 기울었다. 삶도, 문학도 치열한 동아리였기 때문이다. 시대의 아픔과 문학에 대한 갈증으로 나는 휘청댔다. 길 위의 구호와 예술성 사이에서 아슬아슬 줄타기를 하면서 문학적으로 단련되어갔다.  

 

 

5.부록의 삶

 나는 20대 삶의 기억으로 살아가고 있다. 내 삶의 기준은 대학시절, 문학에 미쳐있던 시기이다. 그 이후의 삶은 사족의 삶이라고 생각해왔다. 몇 번 연애의 실패 끝에 결혼을 했고 아이를 둘 낳았다. 문학을 하지 않고도 살 수 있을 것 같았고 반면, 문학을 하지 않으면 미쳐버릴 것 같은 양가의 감정을 끌어안고 엉거주춤한 삶을 살았다. 그러다 우여곡절 끝에 경남작가 신인상으로 등단을 하게 되었고 마흔 셋에 시집을 출간하였다. 태연한 척 하면서도 마음 한 쪽엔 자부심이 꿈틀대었겠지. 하지만 나의 시는 이십 대의 뜨거움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절망은 옅어지고 고통은 사라졌다. 행복이 무언지도 모르고 행복한 삶을 누리고 있다. 이러한 상태로 문학을 이어나갈 수 있을까. 밥을 먹고 커피를 마시는 일처럼 나에게 글을 쓰는 일은 아무렇지 않은 일상이 되어버렸지만 그런 만큼 타성에 젖어 있는 걸. 대학 시절, 당감동 집에 내려와 이불 위에 뒹굴거리며 시집을 읽다가 아!!! 눈앞이 밝아오는 그 깨달음의 순간을 다시 맞을 수 있을까. 몇 개의 동굴을 더 거쳐야 나는 글다운 글을 쓸 수 있을지...

 

6.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을 써야하리.

 젊은 시절엔 세상에 대한 복수심으로 썼다. 그 복수심이 사라진 자리는 허망했고 다시는 글을 쓰지 못할 것 같았다. 한 편의 시를 쓰고 나면 늘 벼랑 끝에 선 기분이었다. 그래서 겸손하지 않을 수가 없다. 삶 앞에 그리고 시 앞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을 쓸 수밖에 없는 건 나에게 남은 부끄러움 때문이다.  

 양지쪽으로만 옮겨 산 것에 대한, 마른 땅으로만 골라 밟으며 살아온 것에 대한.

 삶은 이미 나를 뜨거운 물에 한 번 빠뜨렸고 이제 되갚아줄 일이 남았다. , 뜨거! 내 앞에 천연덕스레 놓인 운명이란 것에 내가 제대로 화상을 입힐 일이 아직 남았다.    

   

 * 김진희  1969년 부산 출생, 2016년 경남작가 신인상, 시집 『굿바이, 겨울』      * bullaeya@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