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기

 

 

 

사람이 꼭 똑똑해야 하는 건 아니다

우리가 모르는 게 얼마나 많으냐

셈은 느려도 헤아릴 줄 알고 걸음이 느려도 가면 되지

 

사람이 꼭 말을 잘해야 하는 건 아니다

우리가 말 다 못하는 게 얼마나 많으냐

이 말은 아끼고 저 말은 버릴 줄 알면 되지

 

사람이 꼭 잘나야 하는 것은 아니다

어울려 가는 길에 길이 있듯 서로 통하면 되지

웃을 때 웃고 울어야 할 때 울 줄 알면 되지

 

때로는 변덕과 상처로 폐 끼치며 그렇게 살면 되지

서로 그러면 되지

 

씨앗이 저를 잃지 않는 소명을 다하듯

내가 그저 나로 사는 일이나

그대가 그대로 사는 일

 

어디, 그만한 향기 있으리




  

낙하落

 

 

나뭇잎이 지고 있다

지지 않으려, 지지 않으려 발버둥 치며

돌아갈 곳 없는 나뭇잎이 지고 있다

 

나무는 벌써 가지를 털고 흔적을 지우는데

 

아직은 낙엽이 아니라고

아직은 그럴 일이 아니라고

돌아갈 곳 없는 나뭇잎이 몸부림치고 있다

 

푸른 날의 명예도 시간을 되돌릴 순 없어

부귀와 권세도 시간을 되돌릴 순 없어

 

누구나 돌아가고 싶은 시간들이 피는 나뭇잎 같고

누구나 돌려놓고 싶은 시간들이 지는 나뭇잎 같네

 

그러나 시간은 굴절을 모르고

과거는 멈춰버린 기억일 뿐

 

어제는 푸르게 웃고 있던 이파리

오늘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 허공을 헤매고 있다

 

 

 

 귀하고 아득하고 깊은

 

 

 

무너져 내린 흙더미 속에서도 싹을 틔우는 씨앗

누가 그의 숨, 소리 들었는가

 

어느 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일에

그 숨, 소리 누가 들었는가

 

깊이가 깊이를 더해 깊어지는 그 일을 누가 아는 가

 

창밖에 나뭇잎은 흔들리는데

늙은 어미를 놓지 못해 마지막 숨줄을 잡고 있는

병상에 저 젊은 목숨 하나

누가 그의 숨, 소리 들었는가

 

그 아득한 숨, 소리 누가 들었는가

 

창밖에 나뭇잎은 지고 있는데  

아득여 슬픈 그 숨, 소리

어미의 눈물로 줄인 키의 길이 속에도 살고 있어

굽어버린 등뼈의 곡선 따라 흐르다가

닳아버린 무릎 위에 피고 있네

 

네가 쉬는 숨 내가 받고

내가 쉬는 숨 네가 받으며

그 아득한 숨, 소리 숨줄로 주고받는데

 

무엇이 이보다 더 귀할까

무엇이 이보다 더 깊을까

 

 

 결핍
-욕망에 대하여

 

 

꽃이 필 때 꽃나무가 핀 듯 눈이 속았다

나무 이파리가 흔들릴 때 나무가 흔들리는 듯 눈이 속았다

 

그러나 누가 누구를 속인 일은 없었다

 

제철 아닌 꽃에 마음 주고제철 아닌 과일로 허기를 달래려 했다

 

그러나 애당초 무엇이 무엇을 채울 수는 없었다

 

잡힐듯, 잡힐듯, 잡히지 않는

결여와 좌절의 간극에서 눈이 멀었을 뿐

 

무엇이 무엇을 어떻게 한 일은 없었다

 

다만 꽃이 피었다 지고 바람이 부는 동안

혼돈의 허기가 그 자리에 있었을 뿐

 

  

 

결핍2

-허무에 대하여

 

 

 

못 잊을 사람도 없고 지켜야할 맹세도 없는데

쓸쓸함이 물길처럼 드나드는 동그라미 하나

어느 날은 눈물 속을 걷고 어느 날은 공허 속을 걷네

 

때로는 슬픔 같고 때로는 바람 같아

젖었다가 흔들리다가 하는 동그라미 하나

어느 날은 불길에 꿰이고 어느 날은 서리에 꿰이네

 

바람이 물길처럼 드나드는 동그라미 하나

아무것도 머물지 못하는 동그라미 하나

 

영원히 빠지지 않는 마법의 반지가 되어   

숙명처럼 가슴을 꿰고 있는 동그라미 하나

 

, 동그라미 하나, 어쩌지 못해

 

나방은 죽을 줄 알면서도 불로 뛰어들고

사람은 사랑에 기대려, 기대려 하네

 

 

 

 

  

외로운 눈

 

 

 

 

산수유 열매가 떨어진다며

부음나무 이파리들이 소곤대는데

꽃술을 여미던 개망초 강아지풀과 눈을 맞춘다

 

호박넝쿨이 잎을 더 넓혔다고

부추가 꽃대를 올렸다고

텃밭에 사는 풀들이 사각사각 떠들고 있다

 

세상에 살 때 몰랐다

소리가 없이도 소리를 내는 것들이

서로 닿아 소리가 되는 걸

 

꼼짝도 않던 고구마 이파리들이

발자국 소리에 사라지는 황구렁이 뒤에서

터줏대감 오랜만에 몸을 말리러 나온 거라며

늘어진 가지나무 이파리와 말을 섞는다

 

하늘가에 파란 구름 도랑가에 물풀들

서로 닿아 흐르는데

바람에 스치운 박하 향기 

서로 만나 구르는데 

 

벌 두 마리 공중에서 꽉, 껴안고 있다

윙윙, 서로를 보듬고 있다

 

사람의 눈동자에도 외로움이 산다는 걸

그 외로움 사이로 망막이 빚어내는 눈의 그리움은

작고 여리고 가늘며 투명한 것들 다 볼 수 있다는 걸

세상에 살 때 몰랐다

 

 

 

눈물을 읽다

 

 

 

 

눈물은 그냥 눈물이 아니다

말 대신에 쏟아 놓는 말

마음 대신에 쏟아 놓는 마음이다

 

눈물은 그냥 흐르는 게 아니다

울고 난 뒤 허기가 붙잡고 있는 삶의 의지가

눈물을 따라 나오는 것이다

 

인생은 눈물 속에 길을 숨겨 놓고 딴청을 피우지만

발이 제 발을 밟으며 걸어갈 때

눈물은 저의 냄새를 저으며 길을 터주는 것

 

그러나 길은 선명한 것이 아니므로

눈물은 가벼운 것이 아니므로 눈물을 읽어야 한다

한량없는 사람의 사연을 읽듯

무량한 세월의 고해 읽듯

 

운다는 건 그냥 우는 게 아니다

옷을 입고도 발가벗는 일이다

 

고유한 그루터기가 살아 있는 그 길을 따라가 보면

 

눈물에는 숨이 붙어 있다

눈물에는 길이 숨어 산다

 

 

 

밭에서 호미를 잃어버렸다

 

 

  

비가 온 다음날 이었다

밭에서 호미가 사라져버린 건

 

나도 그렇게 어디론가 가고 싶었다

누군가 손을 내밀 때마다 흔들리며 멀리 가고 싶었다

 

보이지 않는 꽃 피우는 풀들의 이름 없는 시간처럼

몸살을 앓듯 꿈을 앓았다

 

그러나 세월이 그 많은 수레바퀴를 굴려가는 동안

어디로도 가지 못한 채로 아무것도 되지 못했다

 

그런 사이에 비가 내렸다

비 사이에서 풀을 메고 난 후

 

호미는 어디론가 가버리고 없다

 

 

 

 

나무 밑동을 만나다

 

 

 

만약 내가

그 길을 걸으며 나무 밑동의 숨소리 듣지 못했다면

오랫동안 뿌리를 내리고 앉아있는

몸뚱어리 날아간 나무 밑동을 무심히 지나쳤다면

그 깡깡 말라붙은 나무 밑동에서 푸르게 걸어 나와

웃고 있는 어린 이파리는 보지 못 했으리

 

그 이파리 오래된 어무이 부엌에서

밤을 재우고 새벽을 열어 길어 올리던 아침처럼

눈부신 걸 몰랐으리

 

수없이 쓰러져간 세월의 가슴, 가슴이 하나의 멍울로 돋아

멍울, 멍울 포진을 이룬 슬픈 나무 밑동에 대하여

베이다, 쓰러지다, 잃다, 숨죽이다의 동사로 바뀐 일생

다시 바로잡아 나무의 키를 뻗어보려는 용기를 알지 못 했으리

 

만약 내가 목석처럼 그 길을 지나갔다면

지독한 뚝심으로 버텨 낸 재생의 시간을 품었던

나무 밑동의 뜨거움을 알지 못 했으리

 

길섶 오둑한 곳에

바람에 흔들리는 잡초가 나무 밑동에 기대어 듣던

어린 이파리 숨 쉬는 소리

, 들을 수 없었으리

 

 

 

 

연탄불을 갈다가

 -대구참여연대 벗들에게

 

 

   

가난한 사람들의 고통에 마음 아파하던 오규섭 대장 

어머니 때문에 가슴 아프다며 시를 써 달라던 근식 오빠 

밥은 적게 먹고 일만 많이 하는 것 같은 채원이와 강금수 

생각해보니 모두 빼빼 말라 밥을 많이 먹었으면 싶다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는 세상사에

사람을 위하여 세상에 투쟁하는 그들

그늘진 곳을 밝히는 촛불들이다  

우리가 마음 놓고 일 하고 밥 먹고 차 마시는 것 

함께 꿈을 꾸는 세상을 만들어 가는 그대들 덕분이다

언제 한 번 연탄불에 고등어 굽고 구수하게 숭늉 끓여 

따끈한 밥상 한 번 차려 주고 싶다 

연탄불에 고구마 올려놓고 나면 느껴져 오는 이 달달함 

숟가락 위에 얹어 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