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을 부르고 있다

처마 밑 흑백 사진  액자 속으로
붉은 치마자락이 펄럭이고 있다

그늘을 접어버린 추색 마블링은
노랗게 익은 탱자나무 사이로
시큼한 향기의 가을을 부르고

햇살을 비비며 술술 익어가는
퇴색된 신록의 섬섬옥수 손길같은
푸른잎을 삼키며 가을을 뱉어낸다

풀벌레의 울음을 타는 충만한 색깔과
겸손함으로 바람개비를 돌리며
내 마음도 익고 가을도 익어간다



할머니

할머니는 6.25때
피난 가신  분이다
이엉 섶짝 무우 구덩이에
궤종시계 숨겨눟고
쌀 몇 되박 봇짐 짊어지고
머리에 쟁개비*이고 가셨다
메카시즘에 연루 될까봐
한숨 쉬시며
소달구지는 소리나서 안된다고
발소리 죽여 맨발로 가셨다

*쟁개비:무쇠나 양은 따위로 만든 작은 냄비




새책 받는 날

잠못이루는 밤이다

세상에서 제일 무거운것이
눈 꺼풀인데 그리 무겁지않다
내일이면 새책 받는 날이기에

책 꺼풀은 뭘로하지
황지로 할까 비닐로 할까
헌책은 동생이 딱지를 만드네
다쓴 공책으로 해도 될터인데

날이 밝자 마자 일찍 학교 가야지
새책 받으러 시작이 반이거든



물수제비

물길을 뚫어
홀가분히 마음을 비운다

날개를 접은 바람들이 모색한
동그라미의 실체가
빙그르르 물 위를 걷는다

휑하니 나이테의 그리며
궤적을 소멸시킨
순간의 느낌이 황홀하다

그 물결의 마루에서
쾌감을 맛보는 찰나
뭇사람의 마음을 꽤뚫는
성찰의 순간이 아낌없이 스친다



5월

햇살을 잉태한 초록이 온다

빛깔로 소묘된 바람이 불면
새벽 이슬 머금은
오월의 눈빛이
목이 긴 사슴처럼 영롱하다

이것은 실로 아름답고
싱그러운 눈길이다
오월의 초록 행렬을 시샘하는
바람을 곁들인 물상들의
재롱이 치렁하다

뱁새의 휘파람 소리에
격정을 추스리지 못한
오월의 제 모습은
가눌 수 없는 물결로
실록을 물들인다



봄날

따뜻한 햇살로 구워낸
연두가 아름답습니다

겨우내 앓은 산통으로
파릇파릇 새싹을 피워 낸
아름다운 묵은지 맛으로
봄을 삭힙니다

초록빛 가득히
청 보리밭 거닐듯
한없이 마음이 풋풋합니다

가도 가도 환한
웃음이 가득한 봄날은
늘 날개짓이 푸릅니다




봄길

봄은 늘 뺍쟁이*가
누운자리를 밟고 지나간다
떼지어 수북히 누운
만병 통치로 가는 그 길은
가깝기도한 먼길이다

비탈길이거나 오솔길이거나
밟혀 수모를 격은 만큼
맛이나 효능도
발자국의 내력 만큼이나 훤하다

원초적 웃음이 열린 닳아 빠진
고샅길이 사퉁팔달이다
그래서 그들은 일정한 너비를 가진
입맞춤한 길이 싫다

그 길이 내길이 아닐지라도
물흐르듯 정도(正道)이고 싶다

*뺍쟁이:질경이의 방언




강자의 법칙

우리 마을
양계장 손자놈이
샘통을 부린다
눈깔 사탕 한 봉지로
대장 노릇 할때
장난감 나무총으로
동무들을 난사한다
동네 개구장이들이
나 뒹군다
한 놈도 살아 남지 못한다
움직이는 놈은 사탕이 없다
무서운 강자의 법칙이다




반상회

공평한  세상이 손짓하는 날
예수도 재림하고
석가도 강림한다
밝은 세상의  이웃들이
반상회 모이는 날
성인군자 다 모였다
자유 평등을 외치며
세상사 의논하려고
고리타분한  공회당이 아닌
마당놀이 세상으로 모여
소통하며 노래한다


필연적(必然的)

늘 푸른 도우미들의 아우성
하늘을 향해 광합성을 하는
그들에게서 나는 그늘을 가졌다

초록의 향기 너머로 시시각각
빛과 바람의 연주로 반드시
분주한 자활을 진행중이다

한결 내심 여여한 물상들이
몸체를 분해하여 읍소시킨 후
그들과 서로 팔로우를 시작한다

이것은 군유 (群有)의 도출과
필연적 섭리의 뿌듯함이며
현실을 반영(反映)한 창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