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이 건너오다

 

 

 

속을 다 비운 산이 어디 먼데를 돌아 제자리로 왔다

 

그가 흘린 것들이 무엇인지

어디를 돌아 왔는지

아무도 모른다

 

당신의 가랑이를 슬쩍 지나간 바람 같은 것

당신의 정수리에 그림자를 드리우다 간 구름 같은 것

교통사고 현장에서 누군가의 피를 밟고 지나간 발자국 같은 것

 

그런 시간들이 그의 속이었을까

 

세상 감옥을 벗어난 물렁한 산 하나가 누워있다

산맥 같았던 핏줄이 얇은 살가죽을 겨우 들고 있다

가죽의 파랑사이 흙냄새가 물씬 솟아난다

헐거워진 아랫도리에서 계곡 물소리가 찔찔거린다

 

속을 다 버린 산에는 슬픈 새소리마저 사라졌다

 

벌거숭이, 누가 어디를 만져도 부끄러움이 없다

 

헐렁한 산은 이제 눈을 감고

지나온 대지에 깊숙이 뿌리박을 것이다

그리고 산은 다시 산으로 건너갈 것이다

 

  

 

어느 연주회

 

 

 

손가락 지문이

건반을 부지런히 건너다닌다

지문의 흔적 따라 운율처럼 돋는 소리

 

눌린 건반들

웃음이 자지러진다

울음이 까무러친다

 

저렇게 기절하는 것들

한 땀 한 땀 잇대가며 생의 긴 끈을 만들다

 

웃는다

운다

 

음악은 끊임없이 연주되고...

 

 

 

 꽁지

 

 

가지에 앉고서도

저렇게 꽁지를 흔드는 것은

새로 앉은 가지의 무게를 재는 것일까

가고자 하는 다른 방향을 재는 것일까

 

몸의 가장자리

그러나

몸의 중심

 

어둠 한 벌 털어내고 햇살자리에 앉는 순간

바닥을 가리키는 꽁지

드디어 흔들리는 가지와 새가

균형을 잡는다

 

꼬리를 아래로 늘어뜨린다는 것은

비로소 평안해진다는 것인가

 

그 자리에서 한참 가장자리를 털다가

하늘 한 번 보고

다시 꽁지를 아래로 내리는

 

  

 

견고한 유리

 

 

호텔 온탕에서 유리 밖을 본다

먹구름이 하늘을 덮은 채 어디론가 떠간다

시커먼 바람에 소나무 대나무 가지 채 흔들린다

대나무 밑에 작은 풀들도 몸서리친다

비마저 뜀박질이다

초롱꽃도 불안한 종소리를 낸다

 

구름이 검은 한 바람은 멎지 않는다

 

유리 밖의 일이다

아니 유리 안의 일이다

 

수증기가 낮게 피고

늘어지게 피로를 푸는 사람들이 눈을 감고 있다

 

물속은 봄날처럼 늘 푸근하다

 

눈은 감을수록 이기적이다

 

차가운 비가 서로 엇갈리거나 마주치거나

구름이 어디로 흐르거나 사라지거나

낮은 풀들이 소문 쪽으로 눕거나 쓰러지거나

 

감은 눈을 뜨고 싶어 하지 않는다

 

쏠리는 바람은

빨간 파란 녹색 현수막을 흔든다

0000당들도 같이 능청거린다

 

저 먹구름이 언제쯤 벗어나려는지

바람은 언제쯤 잦아질지

감은 눈은 언제쯤 뜨려는지

 

곧 선거일이 다가온다는데

 

 

 

 

냉장고 수리하는 날

 

 

지상의 코드 하나를 물고

날마다 속을 휘저었어

 

온 몸은 뜨거운데 뭔가 허전했어

김치 된장 마늘 배추 무...

거침없이 먹었어

먹을수록 훈기는 감돌지 않고 오히려 차가워져

 

막 벌어지려는 장미꽃처럼

뜨겁게 불타오르고 싶어

뜨거워지고 싶어

 

막무가내 차게 하는 것이

탯줄 같은 끈 하나를 잡고 있는

이유일까

 

시린 손으로

무의 성질 병속 내용물 수박의 질량...

 

어루만지던 시간이 얼마인가

 

전신인

냉매가 사라지고

구리선마저 삭는 줄도 모르고

 

 

  허공에서

 

 

탯줄이 어디 있는 줄도 모르는 잎 하나가

끊어진 거미줄 한 올을 잡고 달랑거린다

 

공중이다

사방이 바람이다

 

어느 틈 기척만으로도 움츠러지는

바싹 오그린 몸이 매달려 있긴 땅이 멀다

하늘도

구름도 아득히 멀다

 

삶 한 장이

보일 듯 말 듯 한 오라기를 부여잡고

몸부림치면 칠수록

깊이 흔들리는 허공

 

저 허공을 할퀴는 것이

내 놓지 못한 목숨일까

가느다란 숨을 죄는 바람일까

 

언제 녹아내릴지 모르는

한 생이

 

 

 

어지럼증

 

 

뱀딸기에 나비 한 마리 앉았다

그 사이에 새소리 눌려 있다

바람분다

뺌딸기와 새소리와 나비가 함께

흔들린다

와와

 

 

 

 

무밥

 

 

칼에 베인 자국들을 잘 안쳐야 해

냄비바닥이 안 보이도록 층층 눕혀야 해

 

방어의 첫 방법은

앞으로 다가 올

불길의 높이와 세기를 재는 일

 

그리고는 식은 밥을 상처 한가운데 가만히 얹어야 해

한 톨의 밥알도 바닥에 닿지 않도록

 

그러면 밑의 것이 위의 것의 머슴이 되지

아래서 받쳐주거나 밖으로 밀려나거나 하는 동안

아랫것들은 감정(憾情)의 충돌이 잦지

 

바닥을 경계라 해도 될까

 

불길에 칼자국들이 뜨다 가라앉다

남은 물을 죄다 짜서 맞서는 동안

불길은 그치지 않고

검게 탄 무는 제 속을 새까맣게 토해놓지

도마뱀의 잘린 꼬리같은 냄새를 풍기며

한 고을을 뒤덮지

그 때쯤이면 식은 밥도 냄새로 범벅이 되지

 

사실 무의 감정(感情)

예리한 칼날에 몸이 잘릴 때부터지

 

감정은 경계가 없다

라고

냄새가 흘림체로 온 마을을 휘갈기며 돌아다니고 있어

 

 

 

 

 

가시 끝도 자라면 둥글어진다

 

 

꽃 진 자리가 가시 끝이다

 

계단 끝에 걸쳐진, 막 시작한 아이의 걸음같은 배꼽 하나 맺힌다

무시로 바람이 다녀가는데 배꼽이 커진다

이따금 비가 놀다 가고

해의 콧노래가 자박거리는데

떨어진 꽃을 찾아가는 길처럼 부푼다

 

그럴수록

탯줄과 멀어진다

 

멀어진다는 것은 자란다는 것

 

자란다는 것은

장벽이 많아진다는 말인가

보호해야 할 것들이 늘어난다는 말인가

 

커진 배꼽의 기원을 생각하는데

황금빛 탱자 향이 부르터 올라

가시 끝이 그만 둥글어진다

 

 

  

가장 가벼운 날

 

 

찻물을 끓여요

찬물이 끓는점을 찾아 가는 동안

화장실을 거처 뒷문으로 들어오는 가을을 잠깐 만나고

돌아온 사이

탁자위에 얹어 둔 가방이 사라졌어요

 

악어가 끈덕지게 물고 있던

볼펜 두 자루

카드 두 장이 든 지갑

해 넘긴 수첩 한권 올해 수첩 한권

자동차 면허증 단발머리사진 주민번호

시집 한권 안경 선글라스 USB 두 개

......

 

악어 한 마리가 나에게서 멀어졌는데

 

달아오른 물이 화끈거리고

뜨거운 수증기를 뿜는 주전자는 덜컹거리고

녹차를 기다리던 사람은 온데간데없고

없는 가방을 찾는데

닫힌 문마다 끓는 물소리처럼 들썩거리고

 

나의 눈과 손

나의 재산

나의 역사가

나를 두고 나를 벗어났는데

 

() 대신 가방을 들고 나간 앞니 하나 빠졌던 사나이

지금 어디쯤 가고 있을까

어디까지 나를 데리고 갈까

 

내가 지배해온 악어 한 마리가 나를 떠난 날

 

나를 그물처럼 옭아매고 있었던 악어 한 마리

에서 내가 벗어난 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