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말

 

4층 건물의 창으로 붉은 해가 들어온다  

자리에서 일어나 책상 둘을 지나 창문을 연다

붉은 광주리 같은 해의 중심을 가르고

새똥이 뚝 떨어진다

 

  

약력

 

1998년 시대문학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굴참나무의 사랑 이야기』, 『강 저 너머』,

『날개가 긴 새들은 언제 오는가』 가 있다

 

 

 해설

 

현상으로 읽는 다채로운 시간의 영상

 

이경림 시인

 

  시집을 받아들면 언제나 설렌다. 사물을 보는 방향도 세계에 대한 인식도 사람마다 가지가지인 걸 생각하면 한 권의 시집을 읽는 일은 한 사람의 사유의 우주 속을 유영해 볼 수 있는 신비한 체험의 시간이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시집들이 빽빽이 꽂인 서재에 들어서면 마치 켜켜로 접힌 이루 헤아릴 수도 없는 우주 속에 들어선 듯, 깊이를 모를 아득함에 휩싸일 때가 있다. 우리는 우리가 접하는 일상 속에서 만나는 모든 사물이나 현상 혹은 시시각각의 시간들이 그대로 유닉크한 경이의 순간이라는 것을 미처 인식하지 못한다. 시집 한 권이 한 사람의 사유의 우주인 것처럼 지상의 모든 物物은 누군가가 쓴 한 권의 책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시인은 그것들을 성실하게 읽고 자신만이 쓸 수 있는 문장으로 베껴내는 신의 필경사라 해도 좋을 것이다. 사실 시간이란 말만큼 크고 포괄적이고 관념적인 주제도 없다. 그만큼 다루기 어렵고 조심스러운 주제라는 이야기도 되겠다. 그러나 자칫 허황한 관념의 나락으로 떨어지기 십상인 그것은 사실 곰곰 들여다보면 그저 변화무쌍한 이녁의 현상들이란 걸 발견할 수 있다. 그리하여 시간이야말로 가장 섬세하게 표현할 수 있는 리얼리티의 표상이라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모든 존재현상이 시간이란 걸 알고 나면 시인은 다만 현상을 그리는 일만으로도 그 광대무변한 시간에 대해 말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시간성의 빛으로 가 된다’고 한 하이데거의 주장이 실감 있게 다가오는 것도 그 때문이라 할 수 있겠다. 그는 또 모든 사물은 절대적 진리의 표상이라고도 하였는데 여기서 절대적 진리란 ‘본질’이란 말의 다른 표현이라 해도 될 것 같다. 풀어서 말하면 모든 존재 현상은 저 너머, idea의 말이라는 것이다. 조재학 시인이 이번 시집에 서 말하고자 한 부분도 그것일 것 같다. 만약 현대시를 두 종류로 나누라 한다면 첫째는 위로하고 다독거리는 시, 둘째는 끊임없이 싸우고 도전하는 시로 나눌 수 있다고 황현산 교수는 그의 평론집에서 말했다. 많은 선배시인들의 시들이 전자에 속한다면 현대에 씌어지고 있는 대부분의 시들은 후자에 속한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조재학 시인의 시를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그 중간쯤이 아닐까 생각된다. 그는 싸우거나 도전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누구를 위로 하지도 다독거리지도 않는다. 그는 다만 관찰할 뿐이다. 그리고 그 관찰의 결과를 꿈과 현실의 중간쯤에 그려 넣는다. 질료는 시간이다. 그는 자신이 먹고 자고 꿈꾸고 깨어나고 배설하고 타고 다니는 이곳의 물물들과, 시시각각 변화하는 그것들의 형상들을 그때 그 때 알맞은 색깔과 방법으로 그려낸다. 그런데 그 작업의 결과는 엉뚱하게도 未知에 대한 旣知의 물음이 되고 旣知에 입력된 未知의 답이 되는 것이니, 시란 참으로 묘한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 시간의 조감도

 

  그의 시에 나타난 시간은 때로 물의 형태로 흘러가기도 하고 때로는 어떤 인간의 얼굴로 나타나 터무니없는 말로 종 주먹을 대기도 하고 때로는 새소리로, 때로는 꽃잎으로, 때로는 오래된 마루장의 결로, 없는 듯 박혀 있다가 어느 날 문득 수세기의 이야기를 나지막이 주절거리며 걸어 나온다.

  강을 배경으로 閑遊하는 중국의 신선도를 보는 것 같기도 하고 보르헤스의 소설 <타자>에 등장하는 청년 보르헤스와 노년의 보르헤스가 조우하던 그 찰스 강변의 풍경이 연상되기도 하는 다음의 시에서 시인은 그 위를 가로지르는 나무다리 위에서 오디주를 마시며 閑遊하는 시간에 마주한 것들을 쓰고 있다 .

 

나무다리에 앉아 붉은 오디주를 마시고 있었다

바닥이 훤히 보이는 강물은

오디 속으로 들어간 햇빛처럼 반짝였다

반짝이는 것들은 어지러웠다

 

얕은 다리가 풀어진 치마끈처럼

강의 이쪽과 저쪽을 이어주고 있었다

뻐꾹새 울음이 치맛주름 사이로 자꾸 흘러내렸다

 

다 마시지 못한 술을 강에 부었다

강이 붉었다

그는 물속으로 스며든 술 향기를 발가락으로 툭툭 차고 있었다

물속에서 이따금 기포가 올라왔다

술 취한 물고기의 노래 가락이었다

 

강물은 자신을 흔들며 흘러가고 있었다

알 수 없는 바람과 햇빛 속

잠시 그가 보이지 않았다

                                                                ― 「 강의 한가운데였다」 전문

 

 

  이 시를 보면 시인이 본 것은 다만 속을 환히 드러낸 강이 햇빛과 만나 반짝이는 풍경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시인은 반짝임에서 ‘오디 속으로 들어간 햇빛’을 발견한다. 오디는 온 몸으로 햇빛을 녹여낸 후에야 비로소 오디가 된다. 그것은 강물이 온몸으로 빛을 안고서야 비로소 강으로 반짝이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이렇게 존재는 빛의 화신이다. 그것은 시간이다. 생명의 비의를 숨기고 있는 그 반짝임은 어지럽도록 황홀하다. 어지러움은 眩氣의 다른 표현이며 그것은 현상으로 보여주는 본질의 말이다.

  예부터 강은 시간의 이미지로 많은 문학작품이나 노래 가사 속에 등장해 왔다. 그만큼 물은 시간의 이미지를 나타내기에 알맞은 소재중의 하나이기 때문일 것이다. 근원을 알 수 없는 곳에서 흘러와 무한을 향해 흘러가는 강의 속성은 그대로 成住壞滅의 주체인 시산의 속성과 일치한다. 그 속에서 존재들은 하게 서로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알 수 없는 질서 속에서 생멸한다.

  이 시 속에 등장하는 나와 강과 햇빛과 나무다리와 뻐꾹새 울음, 오디주, 술 취한 물고기, 바람, 그리고 ‘그’라 불리는 존재들 역시 꼬리에 꼬리를 물고 연계되어 있다. 그것이 이 시에서 시인이 보여주고 싶은 강(시간) 속 풍경이다. 거기서 시인은 자신이 그 강의 한 가운데에 있었다고 말한다.

  <가운데>라는 말을 곰곰 들여다보면 일차적으로는(생이라는 강의 한가운데)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 존재 자체가 시간이며 스스로 자신을 흘러가는 강이라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어쩌면 이 강은 시인 자신일 수도 있다고 생각되기도 한다. 한 존재가 하나의 강이라면 강의 중심은 물론 자신이 기 때문이다

 

* 막무가내 닥치는 시간

 

  위의 시가 시간을 그린 조감도라면 아래의 시는 막무가내 들이닥치는 폭력으로서의 시간을 그리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사실 시간의 본질 중 가장 특징적인 것은 그 내용을 알 수 없다는 것일 것이다. 시간은 때로 거짓말처럼 행운을 몰고 오기도 하지만 때로는 참담한 절망을, 몰락을, 유리걸식의 나날을, 사랑을, 이별을, 죽음을, 막무가내 던져주고 가기도 한다. 그저 속절없이 견뎌낼 수밖에 없는 이 일방적 폭력을 우리는 생(시간)이라 부르는 건지도 모른다. 그 때마다 인간은 자위하듯 운명이니 숙명이니 하는 체념적 말로 스스로를 위로하기도 하지만 사실 예고 없이 들이닥치는 그 속절없는 폭력이야 말로 인간의 근원적인 두려움이며 상처라 할 수 있다. 그런 시간의 속성을 그는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다.

 

 

  저 얼굴 없는 것이 온다 시간도 아닌 것이 시간도 아닌 것이 아닌 것이

형체도 아닌 것이 형체가 아닌 것도 아닌 것이

온다 돌연한 것이 온다 돌연하지 않은 것이 온다

 

  혼돈이 온다

 

  끝없는 길이 온다 노래가 온다 내가 태어나기 전

에도 있었던 밤바다의 물결이 온다 플랑크톤을 데

리고 온다 긴 노를 저으며 온다 철썩철썩 물소리 내

며 온다 벌거벗은 달이 온다 절벽에서 뛰어내리며 온다

 

  청춘이 손을 잡고 온다 빙글빙글 돌며 온다

 

  사냥꾼 어깨에 걸친 뿔사슴이 온다 해바라기 사이로

흰 말이 끄는 마차가 온다 갈기를 날리며 온다

갈색 말의 탱탱한 엉덩이가 온다 우유통을 실은

목동의 자전거가 온다 노래 불러줄게요

 

  문을 열고 허공이 온다

 

  불꽃처럼 온다 없는 것으로 꽉 찬 씨앗이 온다

소용돌이가 온다 눈 뜬 침묵이 온다 오래된 기호가

온다 녹슨 구멍이 온다 벅벅 긁으며 온다 피를 묻히

며 온다 손를 뒤틀며 온다 노래 불러줄게요 얼굴도

없는 것이 얼굴이 온다

                                                                                ― 「 오 는 것이 있다」 전문

 

  그렇다, 시간은 얼굴이 없다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 그것은 혼돈이며 끝을 모르는 길이며 태어나기도 전에 일었던 밤바다의 물결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플랑크톤처럼 극사실적인 것들로 나타나는 극사실적 현상이며, 긴 노를 저으며 철썩거리는 물소리 같은 것이기도 하다. 그는 그것을 벌거벗은 달이 절벽에서 뛰어 내리는 이미지로, 혹은 사냥꾼의 어깨에 걸친 뿔사슴의 이미지로, 해바라기 사이로 달려오는 흰 말이 끄는 마차의 이미지로, 갈색 말의 탱탱한 엉덩이의 이미지로 우유통을 실은 목동의 자전거의 이미지로 끊임없이 변주되며 오는 것이다. 이렇게 천변만화하며 막무가내 밀어닥치는 시간이 내용을 알 수 없는 폭력이 아니고 무엇일까?

  마지막 연에서 그는 /시간이 불꽃이며 씨앗/이라고 말함으로 생육의 근원으로서의 시간과 성주괴멸의 주체로서의 시간을 함께 말하고 있다.

 

 

* 시간이라는 리얼리티

 

  위의 두 편이 큰 틀에서 본 시간이라면 아래의 시들은 그 속에서 일어나는 변화무쌍한 시간들, 즉 리얼리티로서의 시간을 보여주는 시들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4층 건물의 창으로 붉은 해가 들어온다

자리에서 일어나 책상 둘을 지나 창문을 연다

붉은 광주리 같은 해의 중심을 가르고 새똥이 뚝

떨어진다

 

메타세쿼이아 이파리 속에서 꾸룩꾸룩 우는 비둘기를 지나

4층 건물을 나뭇잎에 꽝꽝 묶어놓은 거미를 지나

어디로든 흐르지 못하고 고여 있는 생각들을 지나

창살에 널어놓은 걸레를 지나

담장에 소복하게 핀 넝쿨장미를 지나

자기만한 가방을 지고 하교하는 아이들의 시끄러운 소리를 지나

 

날개 짧은 새의 똥이 지상에 닿는 동안

비를 피해 뛰어가던 남자가 동전 세 개를 잃어버리는 동안

등이 서로 붙은 아이들이 태어나는 동안

백과사전을 뒤적이던 아이가 어쩌면 자신이 별일 것이라 생각하는 동안

갱도에 들어간 광부가 시커먼 입술로 밥을 씹는 동안

이륙하는 비행기가 급 추락하는 동안

소매치기가 옆 사람 지갑을 빼내는 동안

 

난데없이 똥을 뒤집어 쓴 화단의 씀바귀의 당혹감이 뿌리를 흔든다

씀바귀 꽃 아래 지나다 함께 당한 개미의 비명이 노랗다

붉은 해가 고층건물 뒤로 슬그머니 사라진다

                                                                                ― 「노랗다」 전문

 

  위의 시는 그저 평범한 일상의 한 순간을 쓴 시이다. 이 시에서 시인이 한 일은 자리에서 일어나 책상 둘을 지나 창문을 연 일 뿐이다, 그때 그는 붉은 광주리 같은 해의 중심을 가르고 새똥이 뚝 떨어지는 것을 본다. 그리고 시인은 그 짧은 순간에 일어날 수 있는 온갖 경우의 수를 생각해 보는 것이니, 그 새가 앉은 나뭇가지와 바닥 사이는 고작 몇 미터에 불과하지만 새똥이 바닥에 닿기까지의 행로는 실로 유구한 순간이라 할 수 있다, 그의 관찰에 의하면 새똥은 메타세쿼이아 이파리 속에서 꾸룩꾸룩 우는 비둘기를 지나고, 4층 건물을 나뭇잎에 꽝꽝 묶어놓은 거미를 지나고, 어디로든 흐르지 못하고 고여 있는 생각들을 지나고, 창살에 널어 놓은 걸레를 지나고, 담장에 소복하게 핀 넝쿨장미를 지나고, 자기만한 가방을 지고 하교하는 아이들의 시끄러운 소리를 지나 비로소 닿을 수 있는 것이 바닥이다. (사실 이것은 경우의 수가 아니고 시인이 본 것이다). 실로 <찰라>라 할 수 밖에 없는 이 시간은, 새똥의 행로로 보면 영원이라 해도 좋은 시간이다.

 

  그 때, 인간의 시간에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었는가? / 비를 피해 뛰어가던 남자가 동전 세 개를 잃어버리고/ 등이 서로 붙은 아이들이 태어나고 백과사전을 뒤적이던 아이가 어쩌면 자신이 별일 것이라 생각하고/ 갱도에 들어간 광부가 시커먼 입술로 밥을 씹고 있고/ 이륙하는 비행기가 급 추락하고/ 소매치기가 옆 사람의 지갑을 빼내는/ 시간이다. 이것이 시간의 신비이며 영원의 역사가 아니겠는가.

  또 그것을 통과하여 바닥이 되는 똥의 시간은 어떤가? 그것은 자신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화단의 씀바귀를 당혹시키는 시간/이며, 그 아래를 지나던 /개미를 비명 속으로 몰아넣는 시간/이기도 하다. 결국 시간속에서 모든 존재는 인드라의 그물로 연결되어 있다고 그는 생각한다.

  또 신생아실의 시간을 그리고 있는 다음의 시를 보자

 

바구니 안에서 입을 두리번거리는 사람

볼에 닿는 것 있으며 빨려고 고개 돌려 입을 대는 사람

그러다가 찡그리고 입 벌리고 우는 사람

가래떡 같은 팔다리 버둥거리는 사람

 

어미가 물려주는 젖 물고 빨다가 스르르 잠드는 사람

흔들어도 눈 안 뜨는 사람

말없이 똥 싸고 오줌 싸는 사람

 

하나같이 누런 탯줄을 달고 나온 사람들이 어미품에서 울고 있다

아직 눈뜨지 못한 사람이 입을 벌리고 목청으로 소리를 지르고 있다

양수를 막 빠져 나온 알몸이 팔다리를 버둥거리며 울고 있다

 

고개 옆으로 돌리고 잠만 자는 사람

아무 생각 없이 속싸개에 똘똘 감긴 사람

자다가 문득 웃는 사람

 

 

목욕하고 배내옷 갈아입고 새카만 머리털이 잠만 잔다

뜨개실 왕관을 씌워도 잠만 잔다

바구니 안에서 잠만 잔다

 

웃고 울고 잠자고 싸고 버둥거리는

50센치의

사람

                                                                                ― 「오십 센티의 유머」 전문

 

  가장 확실한 리얼리티에 속한다고 볼 수 있는 이 시의 주인공은 ‘배내옷을 입고 고개를 돌리고 혼자 씩 웃고 싸고 버둥거리고 목욕을 하고 바구니 안에서 잠만 자는 50쎈티의 사람들’이다. 사람이 아니고 사람들이다. 복수다. 그러나 누가 봐도 신생아실의 한 때를 그리고 있는 이 시에 등장하는 ‘그들’이 과연 신생아들이기만 한 것일까? 과연 그들은 누구이며 그곳은 또 어디인가? 이렇게 이녁의 모든 현상은 중의적 메타포를 가지고 있다. 현상이 곧 본질의 말이란 말이 의미를 획득하는 부분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이 50센티의 사람들의 세상은 이 별의 축소판 이다. 그곳에서 목욕하고, 옷 갈아입고, 싸고, 버둥거리고, 잠자고, 웃고 울고, 하는 존재들은 모두 신생아와 무엇이 다른가? 집이라 불리우는 크고 작은 바구니 안에서 일어나는 이 유머러스한 세상을 그는 신생아실이라 명명한다.

  시인은 말하는 자라기보다는 발견하는 자에 가깝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사실적인 현상을 그릴 때 뿐 아니라 관념을 쓸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그것이 꿈이나 생각 혹은 환상, 같은 실체가 없는 것들이 소재가 될 경우에도 리얼리티가 바탕이 되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 시가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것

 

어느 날의 꿈을 쓴 다음의 시를 보자.

 

  나는 나무에 기대어 그녀를 기다렸어요 불에 구운

비스킷을 가득 실은 수레를 밀고 앞치마를 두른

그녀가 왔지요 그녀는 손바닥을 내밀었어요 값을 묻

지도 않고 머리 위의 구름을 떼어 반만 주었어요 부

족하다는 듯 그녀가 얼굴을 찡그렸어요 다시 지갑

을 열고 꽃을 꺼내 주었어요 그녀는 가버리고

 

 

  숲으로 가는 다른 길을 보았어요 잘 다져진 황

톳길이었어요 키 큰 나뭇잎에서 햇빛이 반짝였어요

주위를 둘러보았어요 언덕 아래에는 분지에 갇힌

사자가 어슬렁거리고 있었어요 반짝이는 사자의 등

에 작은 새가 흰 날개를 접고 있었어요 나는 사자와

눈이 마주치지 않으려고 몸을 움츠렸지요 언덕 위로

사자가 올라올 수 없다는 걸 알았지만 떨렸어요

                                                                                ― 「소」 부분 발췌

 

  위 시를 보는 독자는 딱히 뭐라 말할 수는 없지만 뭔가 아득하고 모호한 그러나 묘한 아름다움을 느낄 것이다. <어떤 것>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는 것은 그것이 실체가 없는 것, 꿈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위 시의 배경은 말 그대로 꿈속이다. 꿈의 본질이 그렇듯 이 시는 어떤 명징한 사건도 서늘한 메타포도 없다. 그저 자욱한 꿈속을 걸어가듯 신비롭고 아름다운 느낌......마치 어떤 생의 알레고리 같은 것을 어렴풋이 느끼리라, 그것이 전부이다. 혹자는 그래서 어쨌단 말이냐고 비아냥거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이러니 하게도 그래서 시가 아닌가? 시가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것, 시라고 밖에 도저히 말할 수 없는 것, 어떤 의미의 부여도 필요하지 않는 것, 마치 물안개 자욱한 어느 새벽의 호수 같은, 호젓한 산길을 지나다 문득 만난 달개비 꽃 한 무리 같은, 그 위를 천천히 지나가는 구름 같은, 어느 날 선 잠 속을 언듯 지나가던 시대를 알 수 없는 여인 같은. 어떤 未知의 어른거림 같은. 그것이 시이며 꿈이며 또한 그것이 우리가 딛고 사는 현실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존재가 피어나는 터전으로서의 인간의 감성 속으로 쑥 들어와 버린 그것. 이 시에는 존재와 존재자가 확연히 구분되는 부분이 있어 흥미롭다.

 

  당신이 꿈을 꾸는 동안 나는 늙고 허약한 소 한

마리를 안고 숲으로 가고 있었어요 내가 왜 소를 안

고 가야하는 지 알 수 없었지만 그렇게 가고 있었어요

 

  위의 구절에서 <당신>이 꿈을 꾸는 동안의 <당신>은 존재자인 나이다. 말하자면 존재자인 내가 잠들어 있는 동안 존재인 나는 늙고 허약한 소 한 마리를 안고 숲으로 가고 있다 존재는 어떤 이유도 목적도 없다. 그냥 그렇게 있는 것이다. 영문도 모르고 그렇게 가게 하는 것, 그러나 존재는 자신의 한 부분인 존재자에게 일종의 알레고리 같은 그림을 보여줌으로서 철부지 존재자를 일깨우는 것이다. 가령 존재자는 조막만한 원숭이 한 마리에 정신이 팔려 늙고 병든 소를 잃어버리는 그림이나 구름을 주고 비스킷을 사먹는 어리석은 자들의 그림으로 나타난다 이 때 영리한 존재자라면 이 신통한 존재의 말을 알아들어야 할 텐데 현실은 그게 아니다. 결국 사자굴 속을 헤매고야 마는 것이 존재자 시간이다. 다음의 시에서 시인은 그런 시간()<연분홍>이란 말 같다고 표현 한다.

 

 

나무도감에 모과꽃은 연분홍이라 했다

연분홍이란 말

천년을 산다는 모과나무가

뿌리를 내리기 전에도 있었을 것 같은

 

연분홍이란 말

모과는 모르는 말

 

과실이 맺히기 전 과육의 말

 

그리고

허공엔 연분홍이 있었다

 

햇빛을 손에 쥐고서

손을 펼치면 꽃이 있었다

 

하였으나

볼 수 없는 자에겐 슬픔

 

담장 너머로 가지를 뻗은 모과나무

꽃의 표정을 모르는

                                                                                ― 「연분홍이란 말」 전문

 

  그의 시적 상상이 돌올히 빛을 발하는 시라 할 수 있다. 그는 연분홍이란 말은 천년을 산다는 모과나무가 뿌리를 내리기도 전에 있었을 것 같은 말이며 과육이 맺히기 전 과육의 말이라고 한다. 결국 근원의 말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허공에 있는 것이며 햇빛을 쥐고서 손을 펼치면 피어나는 꽃(마술)같은 것이며 그것은 모과나무 자신도 모르는 모과나무(근원)의 말이라고 그는 말한다,

  시인은 생이 모과나무는 모르는 모과의 말, 그 누구도 모르는 신의 말 같은 것이 연분홍이란 말이라고 한다. 未知이며 神秘인 이 시간은 볼 수 없는 자에게는 슬픔인 시간이다. 그러나 한그루 모과나무에 불과한 인간은 연분홍 속에서 연분홍이란 말을 모르는 슬픈 존재들이라 할 수 있다

  그의 시에는 꿈인 듯 현실인 듯 살다가는 존재들의 시간들이 아득히 출몰한다. 꿈같기도 실재 같기도 한 그것들이 아름다운 것은 그것이 다만 시라고 밖에 달리 뭐라 명명할 길이 없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시에는 어떤 가르침도 없다.

 

  시에는 어떤 길도 없고. 목적 같은 것은 더더구나 없다. 그것은 어떤 방향도 제시하지 않는다. 그것은 도달하려 하면 할수록 더욱 멀어지는 것이며. 구할수록 놓치는 것이며 놓쳐야 나타나는 것이기도 하다, 그것이 왜? 어째서? 시이며 시인인 것이다. 마치 연분홍이란 말처럼 전후도 좌우도 없이 지금 막 지나가는 연분홍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