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말

 

올해로 시력(詩歷) 마흔 해가 되었다.

 

가을 수확철인데 갈반병(褐斑病)이 휩쓸고 간 감나무 밭에는 고엽제를 뿌린 듯 황량하다.

 

부실함 속에서도 나를 지켜준 동학, 동학은 인간학이다.

 

인간이 중심이 된 해 뜨는 동녘의 학이다.

 

다함없는 생명의 빛으로 내일을 연다.

 

201611

박찬선









해설

사람을 모시는 신인(神人)의 시

김주완(시인, 철학박사)

 

 

1. 열쇳말 모실 시()

 

이 시집을 열고 들어가는 열쇳말은 모실 시() 자이다. 근곡 박찬선 시인은 상주를 모시고 낙동강을 모시고 동학을 모신다. 상주와 낙동강과 동학 - 이는 시인이 외경의 대상으로 삼는 시적 주제이며 시의 삼발이다. 상주는 시인이 태어난 곳이고 낙동강은 시인이 마시고 자란 젖줄이자 강인(江印)과 해인(海印)을 얻는 일터이며 동학은 시인을 지탱하는 정신적 지주이다.

모시는 일은 숭상이고 배려이다. 모든 배려는 궁극적으로 사람을 향한다. 사람은 하늘이므로 사람을 하늘처럼 모셔야 한다. 남자도 여자도 어른도 아이도 사람이다. 가진 자도 못 가진 자도 사람이고 힘 있는 자도 사람이고 힘없는 자도 사람이다. 그러므로 사람을 모시는 일은 그가 가진 것을 보는 것이 아니라 다만 사람인 그를 보며 모시는 일이다. 사람을 모시는 일은 기도교적 사랑인 인인애(人愛)와 흡사하다. 사람을 모시는 일에는 차별이 없어야 하고 차별이 없는 곳에 평등과 정의가 뿌리 내린다. 꿈꾸면서도 깨어 있으면서도 다독이는 사람 섬기기를 시업(詩業)으로 삼는 시인의 눈은 형형한 청년의 눈이고 심장은 뜨거운 불덩이며 넓고 따뜻한 가슴은 산이고 바다이다.

상주시 만산동 631번지는 시인의 7대조부터 이백 년이 넘도록 대를 이어 살고 있는 붙박이 터이다. 천봉산 자락에 안겨서 북천을 내다보는 곳, 아침마다의 산책길에서 만나는 임란북천전적지에서 역사의 민낯을 만나고 와서 가슴 아픈 시를 쓰는 곳이다. 시인은 일찍이 시집 『尙州(문학세계사 1986)를 상재하여 고향 상주를 전국에 알리고 상주에 새로운 의미 부여를 한 바 있다.

이번 시집 『우리도 사람입니다』는 동학을 주제로 하면서도 상주와 낙동강과 유기적이면서도 견결한 연관성을 유지한다. 이 시집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는 주제는 상주 동학이며 상주 은척 동학교당이지만 그곳이 곧 상주(尙州)에 상주(常住)하고 있으며 상주에서 비로소 강다운 낙동강이 흐르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지역성에 국한되지 않고 종횡으로 세계성과 역사성을 확보한다.

 

 

 

2. 높은 고을에 있는 상주동학교당

 

시인이 지키면서 살고 있는 땅, 상주는 옛 사벌국이 있던 오래된 고을이다. 경상도라는 명칭의 유래조차 경주와 상주에서 나온다. 상주(尙州)의 ‘상’() 자는 ‘숭상하다’, ‘높이다’라는 뜻을 포함한다. 상주는 높은 것을 숭상하는 고을, 지향하는 정신이 높은 고을이다. 높은 것은 하늘이며 하늘이 곧 사람이다. 시인은 모실 시() 자를 모시고 산다. 하늘을 모시고 사람을 모시고 상주를 모시고 산다. 전국 무대에서 활동하는 많은 문인들이 한때 상주를 거쳐 갔다. 상주 출신의 지명도 높은 문인들도 많다. 하지만 모두들 상주를 떠나서 활동하고 있다. 그러나 박찬선 시인은 상주에서 태어나 일생 동안 상주를 지키면서 상주와 낙동강과 동학을 노래한다.

 

살아있는 자들은 집이 있습니다.

죽은 자들도 집이 있습니다.

풀쐐기가 야문 각질의 집을 짓듯이

굳고 단단한 성 같은 집을 짓고 삽니다.

 

방랑자와 방황하는 자는 집이 없습니다.

가는 길이 집이요 머문 하늘이 집입니다.

산에 집을 짓기도 하고

바위 속에 집을 짓기도 합니다.

 

미로의 중심에 지은 정신의 집 네 채

낮이 없던 깊은 밤 잠자지 않고 깨어 있는

집 안에 집이 있는 음양의 조화

 

집을 두고도 집이 그리워서

사경(寫經)을 하듯 한울님의 집짓기를 거듭해온 개벽

서러움이 받치면 집이 됩니다.

눈물이 마르면 집이 됩니다.

 

 

물결에 바람결에 허물어지는 보루

가라앉은 주춧돌만이라도 지키려는 어기찬 행진

굴욕의 끝에 자리 잡은 교당(敎堂)

 

고문 받는 신음 소리 사이사이

경 읽는 소리, 주문 외는 소리, 먹 가는 소리

뒷담 위 하늘수박 익는 소리가 들리는

열린 하늘 집

 

가난한 자의 집은 대낮같이 밝습니다.

집 안에 없는 자의 고독이 켜켜이 쌓여

밤에도 빛나는 구슬처럼 혼이 나르는 반딧불처럼

빛을 나누는 집이 됩니다.  

 

― 「깨어 있는 집」 ―상주 은척 동학교당 전문

 

상주시 은척면 우기리에 있는 상주동학교당을 시인은 깨어 있는 집이라고 한다. 초가집이지만 동학과 관련된 건물로서는 전국에서 유일하게 보존되고 있는 건물이다. 동학의 귀중한 유물들이 교당에는 남아 있다.

산 자는 주택에서 살고 죽은 자는 유택에서 머문다. 가진 자가 세운 집은 굳고 단단한 성이다. 빼앗긴 자기를 찾기 위하여 방랑하는 자는 집이 없다. 사람이 되고자 하여 가는 자는 가는 길이 집이고 머무는 하늘이 집이다. 길 없는 길의 중심에서 지은 집, 동학교당은 집 없는 자들의 집이다. 잠들 수 없어 깨어 있는 집이다. 깨어 있는 자는 불빛이다. 주변을 밝히는 불빛을 넓혀 나가서 마침내 온 세상을 낮의 세계로 만들어야 한다. 꺼져가는 동학의 불씨를 지키기 위하여 세운 집(교당)에서는 잡혀가 고문 받고, 또 고문을 받는 사이사이 경을 읽고 주문을 외고 경전을 간행한다. 신념이 끌어가는 불굴의 의지력이다. 암흑을 벗어나 광명천지로 가기 위한 성스러운 과업이다. 정신의 전승은 정신으로서만 가능하다. 정신이 전승될 때 인간은 자존한다. 그런 의미에서 동학인은 살아있는 정신의 집이다. 동학은 성() () ()을 바탕으로 하는 정신의 곳집이다. ‘집 안에 있는 집’은 동학인이며 그들은 가난하지만 정신이 대낮같이 밝다.

정신을 지키는 사람은 죽어서도 살아있다. 빛을 나누고 있다. 시인은 동학교당을 찾아 자주 은척으로 간다. 1924년에 교당을 건립한 김주희 선생의 정신을 만나기 위해서이다. 동학의 정신을 대대손손 이어 나가는 수많은 정신을 만나고 때마다 정신을 새로이 가다듬기 위해서이다.

 

 

은척 가는 길은 동학의 길이다

사람이 낸 사람의 길이다

사방으로 막힌 높은 산길을 넘어야 하고

물오를 때는 자라가 기어오르는 개울도 함께 간다

깊은 땅속 검은 불

곤이 잠든 시간을 캐 올려 온몸을 태울 검은 광장

비껴 돌아드니 성주봉과 칠봉산이 마주 선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아늑한 분지

상주시 은척면 우기리에는

내 친구가 교장으로 있다가 퇴직한 중학교가 있고

그 옆에는 김주희 선생이 창도하신 동학교당이 있다

은자골은 평화롭다

발길 닿아 머무는 곳이 도량이라지만

다리품밖에 없던 시절 첩첩산중을 어이 찾았을까

마음의 눈은 풍수에 밝아

험한 산하를 넘은 것일까

간간이 비 뿌리는 초겨울

붉은 산수유 열매가 조롱조롱 매달린

마을 안 길 찾아든 동학교당

빈 마당에는 경 읽은 소리가 가득하다.

 

― 「은척 가는 길」 전문

 

시인의 “고조할아버지는 상주 은척 교당의 경교장(敬敎長)이셨고/매일 먹물로 경전을 쓰고 설교집을 쓰셨다”(「먹물」) 한약업을 하셨던 증조부는 교당의 적극적인 후원자셨고 재종조부는 “열심히 수도한 동학교인”(「구업」)이셨다. 그러니까 시인에게 있어서 “간간이 비 뿌리는 초겨울/붉은 산수유 열매가 조롱조롱 매달린”(「은척 가는 길」) 첩첩산중 은척 가는 길은 고조부와 증조부가 간 길이며 기댈 데 없이 허약한 동학교인들이 마음을 기대러 가던 길이며 지금은 시인이 그들의 정신을 만나러 가는 길이다. 그러므로 은척 가는 길은 시인에게 있어서 개인적으로는 사당에 가는 일에 버금간다. 사람은 자손으로 이어지고 정신은 가슴으로 이어진다.

 

 

 

3. 우리도 사람입니다

 

이 시집의 표제인 『우리도 사람입니다』는 동학의 실상을 가장 극명하게 나타내는 말이다. 핍박 받는 자의 처절한 말, 억울한 사람이 하는 절박한 말을 우리는 여기서 만난다. “우리도 사람입니다” - 이 말은 말이 아니라 말 이전의 원초적 절규이다. 지상의 가장 낮은 곳에서 솟는 가장 숭고하고 장엄한 부르짖음이다. 아무나 소리 낼 수 있는 말이 아니다. 진실하게 사람이 된 사람만이 낼 수 있는 가장 진실하고 절실한 사람의 말이다. 생생한 이 말들이 모이면 함성이 된다. 땅이 흔들리고 하늘이 놀라는 혁명이 된다. 개벽이 된다. 눈이 뜨이고 새날이 열린다. 일순에 미명이나 암흑을 걷어내고 천지에 광명이 가득한 새 세상이 열린다. 그러나 이것은 언제나 꿈이며 이상에 머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나 꾸는 꿈이 아니라 깨어 있는 자만이 꿀 수 있는 꿈이다.

 

지난밤 꿈에 먼 신라 적

상주 사벌에서 일어선 원종과 애노를 만났습니다.

 

두 분을 꼭 시로 써야 한다는 초조함으로

똑같은 꿈을 세 번이나 연거푸 꾸었으니

참 이상한 일입니다.

 

‘나도 사람입니다’

‘우리도 사람입니다’

 

이 말이 딱 좋다고 거듭 거듭 이르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다음 말이 떠오르지 않은 채

애를 태우다가 깼으니……

 

땀에 젖은 가마니가 실려 갈수록

잘 익은 호박빛 얼굴로 오는

 

꿈에 시로 나타난 사람이 있습니다.

흙을 걸우던 옛 사벌 사람이 있습니다.

 

― 「우리도 사람입니다」  전문

 

 

여기서 ‘원종과 애노’는 사벌주(沙伐州 현재 상주)를 근거지로 반란을 일으켰던 신라 진성왕 3(889) 당시의 사람 이름이다. 시인은 동학의 근원을 신라 때까지로 거슬러 올라 찾는 것 같다. 아니 그보다 더 이전, 권력의 수탈이 시작된 때로 보는 것 같다. ‘흙을 걸우던’ 사람들의 ‘땀에 젖은 가마니’를 빼앗아 가는 폭압적 권력은 사람을 목적으로 보지 않고 수단으로 본다.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고 짐승으로 본다. 여기에 대한 반동으로서의 사람 사랑에 대한 눈뜸이며 깨침이 바로 동학이 아니던가.

 

 

4. 영원히 살아 있는 사람의 동학

 

사람의 옛말이 ‘사’이다. ‘사’은 ‘사룸’에서 왔고 ‘사룸’의 어원은 ‘사르다’라고 할 수 있다. 사르다는 불사르다와 같은 말이다. 불사르는 일은 불태우는 일이다. 사람은 스스로 자기의 한 평생을 불태우는 존재이다. 우리는 그것을 정열이나 열정이라고도 한다. 니체도 ‘삶은 불꽃이다“라고 하였다. 사람은 한 평생을 스스로를 태우는 불꽃으로 산다.

 

상주 은척 동학교당에는

아흔 되신 할머니가 사십니다.

열여섯에 시집 와서 아들딸 낳고

헌성(獻誠)일마다

제수 장만으로 생애를 보내신 할머니

 

「곽아기 할머니」 일부

 

곽아기 할머니는 왜경의 수색에서도 놋쇠 의기를 지켜낸 분이다. 상주 은척 동학교당 김정선 접주의 모친으로 16세에 시집와서 90세인 지금까지 교당을 지켜오고 계신다. 누가 시켜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시인은 ‘세상에서 제일 큰 일 하신 할머니’라고 한다. 우리는 여기서 신념의 불꽃이 이끄는 삶의 정수를 본다.

“저마다 하늘을 안고 하늘의 말씀을 익혔으니//뭇 곡식을 키우고도 줄지 않는 흙처럼/푹 썩어서 생명을 키우는 두엄처럼/우리는 가슴에 사랑의 불씨를 지펴오지 않았던가/자잘한 풀꽃을 키워오지 않았던가//나무들 겨울바람을 맞아 더욱 성장을 하는”(「동학인의 아침」) 동학인은 “감나무 접붙이듯 생명의 접붙이기”(「어떤 강론 4)가 동학임을 안다.

 

시인의 눈에는 자나 깨나 동학인들이 보인다. 씨옥수수를 보면 효수된 동학인들의 머리가 떠오르고 시래기를 보면 빈속에 겨울 찬바람을 맞으며 사발통문을 돌리던 동학인의 헐벗은 얼굴이 생생하다.

 

“바람벽에 매달린 옥수수를 보면//상투 쫒듯 겉잎을 치켜 올려 하나로 묶인 옥수수를 보면//알몸을 드러낸 채 딱딱하게 야위어가는 몸을 보면/효수된 동학군의 부릅뜬 눈이 떠오른다”

 

(「옥수수」 일부)

 

“시래깃국에 보리밥 한술 말아 먹고/사발통문 가슴에 품은 채/눈 내린 고갯길 발자국 지우며 걸어간 사람들////맵고 찬 바람을 맞으며/눈 속에 묻힌 풀들의 꿈을 생각하며/새벽을 열어 간 흙을 사랑한 사람들”

 

 (「시래기에 대한 명상」 일부)

 

이들은 모두 치열하고 처절하게 한 생을 살고 간 사람들이다. 시인은 “살아서도 죽은 사람이 있습니다./아니 죽어서도 살아있는 사람이 있습니다.(「일어서는 흙」)고 하면서 이들은 죽었으되 죽지 않았다고 강변한다. 죽지 않았으므로 시인은 이들을 찾아가서 한 사람, 한 사람 이승으로 불러낸다.

 

강선희, 강홍이

손덕녀, 최선창, 이의성, 장판성  

남융일, 최인숙, 윤경오, 김순녀

전명숙, 억손이

 

억손이, 동수나무 같은 억손이 무참히 참수되고

떠도는 혼령들의 원성으로

이름처럼 세상은 태평치를 못했다.

 

(「태평루」 일부)

 

시인은 상주 임란북천지에 있는 누각 태평루에서 동학의 꽃잎으로 떨어져 간 순박한 농사꾼의 이름들을 호명하며 태평루가 결코 태평치 못했음을 애통해 한다.

 

시인은 멀지 않은 곳에 있는 희생자의 무덤을 찾아 참배하면서 술잔을 올린다.

 

나뭇가지에 걸린 붉은 글씨의 ‘산불조심’이

그날의 깃발처럼 펄럭이는 일요일 오후

상주시 화남면 임곡리 후미진 곳

물소리 멎은 넝쿨 어지러운 개울가

진산 강씨 휘 선희지묘 (晉山姜氏諱善熙之墓)

자석에 이끌린 양 잔 올리며 늦은 참배하다.

 

-광산의 폭파음보다 우렁찬 함성이 산을 흔든다.

-부릅뜬 불의 눈이 불을 뿜고 있다.

 

목 베인 육신의 아픔보다도

어두웠던 백년의 침묵과 소외가 고통으로 쌓여

산새 울음 구슬픈 봄 산천에

뜨겁게 활활 타는 진달래꽃

 

대모산 아래 흙 걸구며 흙처럼 살자 했는데

푸른 하늘 받들며 사람으로 살자 했는데

청명 앞둔 사월 무덤가에는

생강나무의 노란 꽃술이 벙글고 있다. 

 

(「백년의 침묵」 전문)

 

 강선희는 189411월 태평루에서 참수 당한 상주동학농민군지도자이다. 상주시 화남면 임곡리, 누가 이 후미진 곳에 그의 무덤을 썼는지 우리는 모른다. 그러나 시인은 무덤을 찾고 생가를 찾아 추모하고 애통한 사연을 시로 남긴다. 동학으로 희생된 크고 작은 이름들, 이름 없는 이름들까지 불러와 시로서 값진 희생을 떠받든다. 멀고 후미진 다른 시공에 사는 우리는 시를 통해서 비로소 동학의 실상을 만나고 아파한다.

시인은 맺힌 한을 풀어낸다. 시로 풀고 제사로 풀고 굿으로 푼다.

 

(상략)

 

1994년 상주동학 100주년 기념사업회를 결성하고

누군가 해야 될 일을 한다는 마음으로

구천을 떠도는 원혼들 모시고

한풀이 굿도 하고 열린 제사도 올렸는데

궁궁을을 잘 사는 뒷날이 온다는 연극 공연도 하고

녹두꽃 떨어진 그 이후 그림전도 열었는데

(중략)

돌아보면 모두가 푸는 일이었네

얽히고설킨 꼬인 매듭을 풀듯

가슴에 응어리진 쇠뭉치의 원한을 푸는 일이었네

(하략)

 

(「해원(解寃)」 일부)

 

시제(詩題) 해원(解寃)은 원통한 마음을 푸는 일이다. 얼음장을 녹여 물이 되어 흐르게 하는 일이다. 시인은 시로 원한을 푼다. “해원이란 말 속에는 물이 흐른다/언 땅을 녹이는 물이 흐른다//……//해원이란 말에는 날개가 달려 있다/가볍게 서방으로 나는 날개가 있다”(「해원(解寃)). 그렇다. 우리는 시인의 시를 통하여 서방정토 극락으로 날아가는 노랑나비 떼의 자욱한 날갯짓을 본다. 처연히 본다.

생명은 살아있는 일이다. 그냥 살아있는 일이 아니라 뜻을 이어가는 일이다. 그러니까 ‘살아서 입으로 뜻을 전하는 일’이 생명이다. 시인은 생명의 증인이고 시는 생명의 가장 확실한 역사적 기록이다. 미완의 혁명, 동학의 뜻을 좇고 이어가는 시인이 있고 독자가 있으므로 이들이 살아있음은 분명하다.

 

 

5. 상주동학의 정체성

 

동학의 분화에 대한 일반적인 견해는, 창시자 최제우가 죽은 뒤 최시형의 북접과 전봉준, 김주희의 남접으로 나뉘는 것으로 본다. 그리고 최시형의 북접에서는 천도교(손병희), 시천교(김용구), 상제교(김연국) 등으로, 남접에서는 경천교, 동학교, 청림교 등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견해에 따르면 상주동학은 남접에 속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분류는 기준에 따라 달라진다. 이 시집에 수록된 시에 따르면 최시형도 상주동학에 깊이 관여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상주동학에는 혁명적 지향성과 종교적ㆍ도덕적 지향성이 공존한다. 그래서 박찬선 시인은 남접 북접을 구분하지 않는다. 동학의 정신을 다만 추구하고 상주와 관련된 동학인들의 행적을 찾아 시로 남긴다. 전북 정주시 베들평야의 전봉준(「베들평야」), 원통봉 아래(지금의 상주시 화서면 봉촌리)서 도가 통했다고 하는 동학의 2대 교주 해월 최시형(「원통봉 아래 도가 통하다」), 해월 강론 연작시(「어떤 강론」), 상주동학농민군지도자로서 189411월 태평루에서 참수 당한 강선희(「백년의 침묵」), 남조선을 개벽한다는 이름 김개남(開南)(「똥 다 누고 나가겠네」), 임술년 1862년 상주농민항쟁에서 가장 앞장섰던 정나구(「일어서는 흙」) 등 동학인으로서의 삶을 뜨겁게 불태운 사람들, 지금은 밤하늘의 별로 떠서 미명의 세상을 밝히는 사람들을 빠짐없이 모셔와 시적 생명을 부여함으로써 영원성으로 부활시킨다.

동학이 어떻게 분화하든 간에 ‘사람이 하늘((人乃天)’이라는 근본사상은 변할 수 없다. 인간본성 회복을 강조하는 체천사상이 상주동학의 요체라는 데도 많은 사람이 동의하고 있다. 이것은 후천개벽을 꾀하는 것이 아니라 선천회복을 꾀하는 입장이다. 우리는 여기서 ‘사람이 하늘((人乃天)’이라는 명제가 가지는 본질적 의미와 체천사상이 내세우는 실천 덕목으로서의 성() () ()의 의미를 살펴보기로 한다.

<사람은 어떻게 해서 하늘이 되는가?> 사람이 하늘인 것은 인간의 본성이 자연에서 왔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주역에서는 자연법칙의 네 가지 근본원리로 원(), (), (), ()을 내세운다. 이는 봄에 태어나고(春生) 여름에 성장하고(夏長) 가을에 거두어들이며(秋收) 겨울에 저장한다(冬藏)고 하는 농경사회의 계절적 순환질서가 된다. 이러한 자연법칙을 천명(天命)이라고 한다. 중용 1장에는 “천명을 성이라 이른다(天命之謂性)”고 한다. 그러니까 천명은 하늘의 법칙이자 자연의 법칙이다. 천명이 사물 속에 들어가면 물성(物性)이 되고 인간 속에 들어오면 인성(人性)이 된다. ‘사람이 성을 따르는 것을 도라고 한다(率性之謂道). 여기서의 도()는 도덕법칙으로서 맹자가 말한 인(), (), (), ()이다. 자연법칙인 원형이정이 사람 속에 들어와 인의예지라는 도덕법칙이 된다는 말이다. 원형이정이라는 자연법칙은 하늘의 원리이고 인의예지라는 도덕법칙은 사람의 본성이다. 그러니까 하늘의 원리가 사람 속에 들어와 있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사람이 하늘이고 하늘이 곧 사람이 된다. 이것을 박찬선 시인은 시적으로 “사람과 하늘, 하늘과 사람, 두 낱말이 번갈아 솟구치다가 하나로 합쳐졌다. 인내천, 몸이 하늘로 날아올랐다”(「어떤 강론 1人乃天)고 표현한다. 하늘 천() 자는 서 있는 사람() 위에 끝없이 펼쳐져 있는 하늘()을 의미한다. 사람과 하늘이 하나로 합쳐진 글자가 하늘 천() 자인 것이다. 최시형 선생이 평생토록 강조한 말도 바로 “사람이 곧 하늘님이니 너희들은 사람 모시기를 하늘님 모시듯이 해야 한다.(「어떤 강론 3 ―머슴 놈 머슴 놈」)는 것이다. 따라서 하늘의 뜻(자연의 원리)을 거스를 때 사람은 사람 아닌 비인간이 된다. 동학의 선천회복이란 그러니까 인간이 가진 본래성으로서의 자연성(천명)을 되찾아야 한다는 말과 같다. 이러한 선천회복을 위하여 사람의 몸에 하늘을 들이는 일이 체천(體天)이다. 그러니까 하늘의 뜻을 내면화하는 것, 체현하는 것이 체천이다.

 

체천을 이루기 위한 도행의 본체(실천 덕목)가 성(), (), ()이다. 한자는 그림에서 온 상형문자이면서 뜻을 모아서 글자를 만드는 회의문자이다. 글자의 의미부터 새겨보자. ()은 ‘말()’과 ‘이룸()’이라는 뜻으로 합해져 있다. 말한 것을 이룬다, 말한 것을 실천한다는 의미이다. 성실은 자기가 한 말을 책임지는 일이며 성숙한 인격이 가지는 약속 능력이다. 성실한 사람은 상대방에게 믿음()을 준다. ()은 ‘사람()의 말()은 믿을 수 있다’는 의미를 가진다. 사람 아닌 사람의 말이나 짐승의 말은 믿을 수 없다. 믿음은 사회의 기초이다. 믿지 않고는 사회생활을 할 수가 없다. 그러나 믿음은 모험이기도 하다. 믿음은 본래적으로 맹신이다.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는 속담처럼 믿음이 배신으로 돌아오는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믿음은 성실을 주어야만 받을 수 있고, 성실을 받지 않으면 믿음을 줄 수가 없다. 성실과 믿음은 ‘내가 주고 네가 받고’, ‘네가 주고 내가 받는’ 상호적이라야 비로소 완전하게 된다. 이와 같이 성()과 신()은 불가분리의 관계이면서도 불완전한 관계이다. 여기에 조정자로서의 경()이 기능한다. ()은 공경이고 공경은 받들어 모시는 일이다. 공경의 대상은 보통의 사람이 아니라 이상적 인물이며 인격이 높은 자이다. 공경은 긍지와 잘 조화가 된다. 양자는 피차 상호 보충하는 관계에 있다. 공경 없는 긍지는 교만이 되기 쉽고, 긍지 없는 공경은 비굴이 되기 쉽다. 스스로 긍지를 잃지 않으면서 상대방을 공경하는 사람은 상대방과의 약속을 어길 수가 없으며 상대방의 믿음에 배신할 수도 없다.

그런 의미에서 동학은 종교이면서 실천도덕이다. 사람이 곧 하늘인 동학에서는 사람의 생명(生命)이 천명(天命)이고 도()이다. 동학은 실패한 민중항쟁이 아니라 도법자연의 정신이며 만민평등이라는 민주주의의 대전제이다. 요컨대 사람을 모시는 일은 정신을 모시는 일이다. 정신은 자연에서 왔으므로 정신을 모시는 일은 자연을 모시는 일이다. 저항의 처음이며 끝인 사람의 말, 사람의 노래인 동학은 공동번영의 기초이다.

 

 

6. 때를 기다리는 동학인

 

동학인은 때를 기다린다. 억압과 참수와 절멸의 위기를 지나 언젠가 밝은 빛으로 다가올 선천회복의 날을 기다린다.

 

때라는 말이 참 좋다

때라는 말에는 기다림의 싹이 돋는다

 

우리가 캄캄한 어둠 속에서 억눌려 지냈을 때

짓밟히고 으깨지고

가마니처럼 묶여가서 고문을 받았을 때

사람이 하늘임을 몸소 보여준 여든네 해

삼풍 선생 마지막 운명의 순간에 남기신 말씀

‘때가 되면 다 된다’

잠자던 경전이 눈을 뜨고

풀린 겨울 개울물 소리가 난다

 

때라는 말에는 닫힌 문이 열린다

다 때가 있다는 말 언제 들어도 참 좋다

 

― 「때가 되면 다 된다」 전문

 

삼풍은 상주 은척 동학 교주인 김주희(1860~1944) 선생의 호이다. 여기서의 ‘때’는 선천회복의 때로 보이며 거기에는 오랜 기다림이 내재되어 있다. 동학인들의 길고 긴 인내를 당부하는 말이기도 하다.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황혼이 깃들어야 비상하기 시작한다.”는 헤겔의 명제와도 맥을 같이 한다.

 

 

해 오르는 동녘 큰들 사람들

자 떠나세, 신 끈을 고쳐 매고 이른 새벽 

불면의 긴 터널을 나오면 산과 들판이 펼쳐지고 

자잘히 봄꽃 피는 밝은 세상이 열리는 것을 

두려울 것 없네 

머뭇거릴 것 없네 

길은 길로 이어져 돌아오는 것을

 

― 「동학인의 아침」 일부

 

동학인의 희망과 각오를 노래하는 시다. ‘사람은 시인으로서 이 세상을 산다.’ 마르틴 하이데거의 명제이다, 시인은 꿈꾸면서 불 밝히는 자이다. 동학인은 시인이다. 동학을 노래하는 시인은 시인 중의 시인이다.

 

 

7. 동학이 완성되는 곳에 있을 우복동

 

이 시집에는 <소리>라는 시어가 사십 차례 이상으로 쓰이고 있고 <>를 노래한 시가 여러 편 있다.

동학은 소리로 이어진다. 쌓이고 쌓인 소리가 일시에 터져 나오는 함성으로 이어진다. 동학농민혁명이 3.1운동 정신으로 이어지고 그것이 다시 10.1 항쟁으로 이어지는 데는 함성이 있었고 숭고한 희생이 있었다. 높고 맑은 정신은 그 자체 힘이 약하다. 약함으로 강함을 대적하기에 절멸되지 않고 전승된다. 고결한 정신은 약하기에 위대하다. 아무나 흉내 낼 수가 없기에 숭고하다. 소리로 이어지는 동학이 길고 오랜 길을 가는 데는 소처럼 우직한 발걸음이 필요하다.

 

가벼운 육신 무더기로 꽁꽁 묶여서

수의 같은 흰 비닐에 싸여서

누룩 뜨듯 푹 익혀 진한 맛을 들여

온몸을 소에게 소처럼 고스란히 공양 올리는  

 

우걱우걱 되새김질하는 저물녘의 우리

 

가죽 속 움직이는 붉은 꽃으로 불어나는

은밀한 시간

 

― 「짚 1  일부

 

“……/한우(韓牛)여 어디로 가려느냐/푸른 기와가 있는 집은 네가 갈 곳이 아니다/……/튼튼한 네 발이 있어도 마음대로 갈수도 없는/세상은 어지럽기만 한데/차라리 공주 우금치(牛金峙)로 가거라/……/그해 겨울 산을 타고 내를 건너/그곳에 모였듯이, 사람이 하늘임을 외쳤듯이/……”

 

― 「한우여 어디로 가려느냐」  전문

 

위의 시는 농촌의 상징인 짚을 제목으로 하여 연작으로 쓰인 시 중의 한 편이며 아래의 시는 한미FTA 반대 시위를 위해 상경하는 소를 주제로 하는 시다. 모두 동학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무더기로 꽁꽁 묶’여 ‘수의 같은 흰 비닐에 싸’인 동학정신을 “우걱우걱 되새김질하는 저물녘의 우리”는 오늘날 동학의 의미를 되새기고 있는 사람들의 초상이다. 되새김질은 부활이며 재조명이다. 묶이고 싸인 형체에서는 끈끈한 동지애와 굳센 결속력이 보이며 선천회복의 그날을 향한 긴 기다림의 미학 또한 보인다. 한우(韓牛)에게 공주 우금치로 가라고 하는 아래의 시는 조선소처럼 미련하면서도 한결같은 저력으로 살아가는 민중에 대한 시인의 간절한 소망과 희원이 드러난다. 믿음과 희망과 기대를 어떻게 하여 시인은 소에게서 찾는가?

조선 후기 정감록에서는 우복동(牛腹洞)이라는 이상향의 전형을 제시하고 있다. “속리산 동편에 항아리 같은 산이 있어 예전부터 그 속에 우복동이 있다고 한다네”라는 글귀는 정약용이 지은 우복동가의 일부이다. 우복동이란 상상 속의 마을로 예부터 영남지방에 전해져 오는 피란지의 이름이다. 동네가 마치 소의 배안처럼 생겨 사람 살기에 더없이 좋다는 것이다. 우복동은 소의 배 속과 같이 편안하고 기근이 들지 않는 곳이다. 상주시 화북면에는 도로명 주소에 우복동길이 있다. 한때 한국인의 전설적 유토피아인 '우복동'의 현장이라고 하여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다.

‘소는 농가의 조상’이라는 말이 있다. 조상 같이 모셔야 할 대상이 소라는 것이다. 농경사회에서는 그만큼 소가 중요했다는 의미가 된다. 소의 배는 풍요와 여유의 상징이다. 짚을 먹고 되새김질을 한다. 한번 먹으면 오래도록 먹지 않아도 된다. 임진왜란과 한국전쟁의 처참한 전쟁터가 되기도 한 상주시, 그러나 소리와 함성으로 이어져 오는 동학이 꿈처럼 실현되는 날이 오면 이곳 상주가 곧 이상향이 되어 병화(兵火)가 침범하지 못할 것이라는 시인의 염원이 시 속에 은은하게 배어난 것이 <소리><>라고 한다면 무리한 유추가 될까.

 

 

 

8. 시의 신앙인 동학

 

깨어 있는 자는 잠들어도 잠들지 않는다. 박찬선 시인은 잠결에서도 동학의 밝은 미래를 본다.

 

초저녁잠이 늘면서 

자정 넘어 한 차례씩 깬다

사방이 바위처럼 고요하다

창을 열면 달빛은 

은척 동학교당의 제상에 올린 

하늘 길 흰 무명베처럼 올올이 내린다

감나무 우듬지가 밝다 

이슥토록 밤을 노래하는 풀벌레 소리 

머리맡에 둔 메모지에도 앉는다

하얗게 잠이 달아났다

 

― 「잠이 달아났다」  전문

 

이 시집의 맨 뒤에 수록된 시다. 시인은 천봉산 품에 안겨서 산다. 자다 깬 자정 넘은 천봉산은 ‘사방이 바위처럼 고요하다.’ 교교한 달빛이 ‘은척 동학교당의 제상에 올린/하늘 길 흰 무명베처럼 올올이 내린다.’ 달빛 한 줄기에서도 신앙으로 모시는 동학을 보는 시인의 간절함이 묻어나는 대목이다. ‘제상에 올린 흰 무명베’는 땅에서 하늘로 내는 길이다. 선천시대의 태평성대로 가는 길이다. 불가능성이 아니라 가능성으로 열려진 길이라 시인의 눈에는 밝게 보인다. 길이 밝으니 한밤의 ‘감나무 우듬지가 밝다.’ 자다가도 시상이 떠오르면 적기 위하여 ‘머리맡에 둔 메모지’에 풀벌레 소리가 와서 앉는다. 미완의 혁명, 동학의 노래 소리는 풀벌레 소리처럼 미약하지만 ‘하얗게 잠이 달아’난 시인은 자다 일어나 메모지에다 또 시를 쓴다.

 

시인이 강호에 얼마나 알려져 있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세상 사람들은 그가 가진 청력만큼만 듣고 그가 가진 시력만큼만 보기 때문이다. 세간의 사람들은 보여주는 것만을 본다. 그가 보고 싶은 것만을 본다. 그래서 ‘모르는 것은 손에 쥐어 주어도 모른다’는 말이 있다. 산삼은 깊은 산 속에 숨어서 백년을 살고 천년을 산다. 부정한 사람의 눈에는 띄지 않는다. 박찬선 시인은 행복하다. ‘당신’이라는 극존칭으로 부를 수 있는 시를 모시고 상주를 모시고 동학을 모시는 시인의 마음은 열락에 든 평정심이다.

 

당신이 아주 가까이 있어서

사랑한다고 말하기가 쑥스러웠습니다.

당신이 너무 멀리 있어서

사랑한다는 일이 덧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내가 어리석고 부족한 줄 알면서

당신을 사랑하면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나는 당신의 깊은 속을 모릅니다.

나는 당신의 말 없는 말을 모릅니다.

그리워하면 엄마의 흙냄새를 풍겨주고

외로워하면 온돌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당신의 넓은 속을 모릅니다.

비바람이 치고 눈보라가 휘몰아쳐도         

당신은 언제나 한결같은 모습으로

사시사철 가장 아름다운 풍경을 보여줍니다.

심장이 쿵덕쿵덕 뛰게 하는

가장 장엄한 교향곡을 들려줍니다.

당신을 향한 내 사랑은 투정에 불과하고 

한갓 시샘으로 그칠지도 모릅니다.

당신이 아랑곳하지 않는다 해도

나는 당신을 사랑할 것입니다

당신을 사랑하는 일은 나의 운명입니다.

당신을 사랑하면서 오는 날을 맞을 것입니다.

들어서나 나서나 늘 함께하는 당신 

당신이 있어서 행복합니다.

 

― 「당신이 있어서 행복합니다」  전문

 

 

박찬선 시인은 시를 모시고 그의 시는 사람을 모신다. 어미는 새끼를 품고 신은 사람을 품는다. 두보를 시성이라 이르고 이백을 시선이라 칭한다면 시로서 사람을 모시는 박찬선 시인을 우리는 시의 신인(神人)이라 불러도 좋으리라. 시의 신인(神人)은 시신(詩神)이면서 시인(詩人)이다. 시신 박찬선 시인의 시정신은 고결하다. 외로이 높고 맑아 밤하늘의 별처럼 빛난다. 시의 신인은 낮은 곳에 처한 자를 떠받들어 밝고 높게 모신다. 바로 동학의 정신이다. 혁명은 정신에서 나온다. 성공한 혁명은 권력으로 변질되지만 미완의 혁명은 정신으로 남아 마침내 신앙이 된다. 미완의 혁명은 미완이기에 영원하다. 하늘과 땅 사이의 사람은 모두 하나(人中天地一)이니 한민족의 정신이라 할 수 있는 천부경이 곧 동학정신으로 이어지고 시신 박찬선이 일가를 이룬 상주와 낙동강과 동학의 시정신으로 구현된다. 시신은 시로서 사람을 하늘로 모신다. 사람이 시고 사람이 하늘이다. 그런 시를 쓰는 박찬선은 시신(詩神)이다. 시의 신()이다. 시의 신은 모든 것을 모시고 맺힌 것을 풀며 의미 있는 것을 남긴다. 모두가 눈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