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말

 

 

먼지들이

어대에 있는지도 모르는 정상을 찾아

소꿉놀이를 한다

 

어느 입김에 사라질지 모르는

먼지인 줄도 모르는,

 

먼지들이.

 

 

 

 

약력

 

2014년 리토피아로 등단. 시집 『산이 건너오다』.

 

 

 

 

해설

 

현상을 따라가다 만나는 본질의 말

김설희의 시세계

이경림|시인

 

현상은 본질이 선택한 가시적 형식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현상은 곧 본질의 말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세계는 존재들이 현상으로 나타나고 사라지는 들판이다. 보르헤스의 단편 신의 글에 나오는 주인공은 자신(인간)囚人으로 소개하고 ‘신은 세상의 마지막 날에 많은 재난과 화근이 일어날 것을 예감하고 창조의 첫날 그러한 불행을 피하기 위해 필요한 마술적인 문장 하나를 짓고 그것이 세상의 마지막 날을 준비하게 될 세대들의 손에 들어가고 우연에 의해 침탈당하지 않도록 하는 장치를 덧붙여 놓았다’고 했다. 그리고 ‘그것은 비밀스럽게 간직되어 있고 선택된 어떤 사람이 읽게 될 것’이라고도 했다. 그러나 자신은 이미 그 글을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깨닫지 못했는지도 모른다고 했다. 그가 결국 깨달은 것은 세상 모든 존재가 신의 글 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일테면 한 그루 나무, , 개 한 마리, 지나가는 바람, 구더기가 들끓는 쓰레기통, 아니 어쩌면 자신이 바로 신의 글일지도 모른다고. 이것은 자신의 시론을 소설화 시킨 것이지만 이 소설의 핵심은 ‘현상이 바로 메타포’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신의 글인 그 현상들을 읽을 선택된 사람이 바로 시인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말을 하지 못하는 고양이나 개 같은 동물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보면 시시각각 변하는 그들의 몸(현상)이 모두 말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이것은 비단 동물 뿐 아니라 식물, 혹은 무생물에서도 마찬가지라 생각된다. 그들은 온몸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온몸으로 흔들리며, 물을 뚝뚝 흘리며, 잎을 비들비들 말리며 나뭇잎을 떨구며 이끼를 키우며 말하고 있는 것이다. 현상 자체가 말이라는 걸 깊이 인식한 사람은 主客의 논리로부터 자유로워진다. 그에게 나는 너이며 그이며 그것과 다르지 않다. 주객이 사라진 세상! 그것이 자유가 아닌가. 시는 自由라는 말과 그 궤를 같이한다. 즉 스스로 말미암아 흘러나오는 말이라고나 할까. 바로 본질의 말이라는 뜻일 것이다. 시인의 눈은 본능적으로 현상을 쫒아다닌다. 현상의 추적자인 시인의 눈은 집요하고 섬세하다. 어쩌면 시를 쓰는 행위는 현상과 술래잡기를 하며 정신없이 노는 과정이라고 생각해도 좋겠다. 몽테뉴는 그의 저서 『에쎄』에서 ‘내가 고양이를 데리고 노는 것인가 고양이가 나를 데리고 노는 것인가’ 하고 묻는다. 나도 묻고 싶다 시인이 현상을 데리고 노는가? 현상이 시인을 데리고 노는가? 현상은 시인 앞에 던져진 한 마리의 고양이다. 아니 반대로 시인이 현상 앞에 던져진 한 마리 고양이인지도 모른다. 나는 그 둘을 구분 짓는 경계가 사라지는 지점이 시가 탄생 되는 지점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논다’는 개념은 어쩌면 시의 근본 개념인지도 모른다. 는 관념과 실제가 어우러져 벌이는 한 판 놀이다. 사랑, 슬픔, 즐거움, 그리움, 안타까움, 격정, 욕망, 불안 등 인간을 지배하고 있는 온갖 관념들과 그것들로 인하여 인간에게 불어닥치는 시시각각의 시간들이 그 어떤 말로도 설명될 수 없는 시라는 장르를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김설희 시인은 누구보다 성실한 현상의 추적자다. 그의 시에는 구구한 설명이나 수사 혹은 자기 해석 따위가 없다. 그는 그저 일상 속에서 부딪히는 현상들을 담담히 쫒아가다 보너스처럼 만나는 그 너머의 것들을 신기한 듯 보여줄 뿐이다. 일상(현상)은 한 순간도 같은 모습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변화무쌍한 일상 중 하나의 현상을 선택하고 집요하게 따라가다 그 속에 감춰진 메타포를 읽어내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세계를 보는 시적 자질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그녀는 놀라운 시적 감수성을 가진 시인은 분명 아니다. 그러나 그는 그 놀라움의 자리에 성실함을 앉히고 우직하게 그리고 집요하게 걸어가는 시인이다. 해서 그녀의 시는 과학적이라 해도 좋을 만큼 섬세하고 정직하다. 한 사물 혹은 잠깐 스쳐가는 현상을 볼 때 그는 절대로 자신만의 상상으로 꾸며대지 않는다. 현상과 본질이 어떻게 만나며 그것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꼼꼼한 관찰을 통해 보여줄 뿐이다.  

 

포장의 끝은 매듭이다

 

내용물이 등글든 길쭉하든 사각이든

잘쏙하게 리본이 장식한다

 

리본을 나비의 시조라 해도 될까

어디든 날아갈 있는 비단

 

잠자리 소쩍새 메뚜기 두루미……

날개를 들어 자신을 옮기는 것들

 

 

당신의 어디에 리본이 있어

여기서 저기로 꽃소식을 옮긴다면

 

활짝 날개를 펴고

내용 모를 소문이 닫혀 있다

 

마음 가는 데로 무릎이 난다

나비처럼 훨훨

 

무릎

어디로 건너가는 징검돌인가

 

꽃집 아가씨가 꽃다발을 묶는다

날개처럼

무릎

―「무릎」

 

이 시에서 특히 눈길이 가는 것은 ‘리본을 나비의 시조라 해도 될까?’ 하는 부분이다. 일반적이고 관습적인 사고 체계에서는 ‘나비를 리본의 시조라 해도 될까?’라고 해야 맞다. 그런데 시인은 나비의 시조가 리본이라고 말한다. 이 부분에서 우리는 발상의 전환 혹은 전복적 사고가 累를 이어온 유전공학적 체계를 너무도 쉽게 뒤집어버리고 뜻밖에 헤테로피아적 세계를 보여줌으로서 기존의 모든 체제를 흔들어 놓는 것을 볼 수 있다. 즉 리본이라는 무생물이 나비의 시조가 됨으로서 생물인 나비가 자연스레 어디로든 날아갈 수 있는 비단(무생물)이 되고야 마는 것, 말과 사물에서 푸코는 헤테로피아는 언어를 은밀히 전복하고 이것과 저것에 이름 붙이기를 방해하고 보통명사들을 무효가 되게 하거나 뒤얽히게 한다고 말했다. 무생물과 생물의 경계가 없어지고 나와 너와 그것과 저것이 동격이 되는 세계, 그것이 헤태로피아가 아니고 무엇인가?  그는 날것(생물)들은 모두 몸 어디에 리본을 숨기고 있다고 말한다. 그리하여 어느 날 그에게 날개를 활짝 펴고 내용모를 소문을 담고 있는 상자하나가 날아든다. 선물이 마치 나비처럼 날아온 것이다. (이 부분을 보면 인간도 어쩌면 몸 어딘가에 날개를 활짝 편 리본이 숨겨져 있는 선물상자인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만일 인간이 날개를 숨긴 선물상자라 생각하면 생을 유지하기 위한 인간의 노역의 상징인 양 무릎은 날개일지도 모른다고 그는 생각한다. 그렇다면 그 무릎은 어딘가로 건너가는(시간의 이동) 징검돌일지도 모른다고. 이 부분에도 리본-나비-무릎-어딘가로 건너가는 징검돌로 생물과 무생물 혹은 관념인 시간까지 마치 몸이 있는 존재처럼 넘나드는 그의 자유자재한 사유를 볼 수 있다.

다음에서 우리는 생이라는 관념을 활 쏘는 행위로 가시화 하여 사실적으로 보는 듯한 느낌이 들게 하는 시를 볼 수 있다.  

 

화살을 장전하고 있다

 

팔을 들고 시위 당길 준비를 한다

네가 중심이다

중심은 과녁이 없다

과녁은 너의 바깥에 있다

과녁은 네모

과녁은 세모

과녁은 동그라미

나무도 풀도 과녁이 된다

 

시위는 저절로 튕겨나갈 없다

너는 네가 겨누는 반대 방향으로 최대한 당긴다

비록 화살이 과녁의 중앙을 빗나가더라도

안에서 밖으로 내지르는 소리처럼

안에서 밖으로 심호흡을 한다

 

네가 겨누는 과녁은 망망 푸름이 끓는

사람이 많이 모이는 어느 행사장

밥이 무르익고 고등어 냄새가 골목을 적시는 햇살식당

누추하나 맑은 사람이 말없이 집어주는 수저가 있는 식탁

 

여기, 팽팽하게 당겨진 화살이 날아가 꽂힐 자리까지가 우리의 거리

말랑말랑한 허공이 곡선으로 휘어질 거리

갈라지고 깨지고 분리되지 못할 거리

 

우리가 서로에게 화살처럼

휘어진 거리

―「과녁은 너의 밖에 있다」

 

위의 시에 나타난 주요 모티브는 화살, 과녁, , 그렇게 셋이다. 그런데 눈여겨보면 그의 활쏘기는 좀 이상하다. 처음에는 너라는 중심을 향한 활쏘기로 시작하지만 그는 이내 중심은 과녁이 될 수 없다고 말한다. 왜일까? 이 부분에서 유의해 보아야 할 부분은 ‘너’가 누구일까?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다음을 보면 너는 실체가 없는 2인칭 대명사임을 알 수 있다. 마치 ‘세상’이라는 말처럼. 그리고 그 다음 행인 ‘과녁은 너의 밖에 있다’는 구절에 이르면 너는 곧 나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자신이 자신을 쏠 수는 없으므로 너는 아니 나는 과녁이 될 수 없다. 과녁은 늘 너의, 아니 나의 밖에 있는 것이다, 그러면 그가 말하는 과녁이란 무엇인가? 시인의 탐색의 대상이 되는 것, 그의 식으로 표현하면 세모, 네모, 동그라미, , 나무, 아니 삼라만상이 모두 그의 과녁인 것이다. 그러나 생이라는 화살은 늘 자신이 겨누는 반대 방향으로 날아가는 것, 인간이 겨누는 과녁이란 늘 들끓는 저자이며 죽어도 놓지 못하는 가정이라는 허공이다. 그곳을 그는 ‘망망 푸름이 끓는 곳’ 즉 허공이라 말한다. 그는 말한다. 팽팽하게 당겨진 화살이 날아가 꽂힐 자리까지가 우리의 거리이며 그곳은 말랑말랑한 허공이 곡선으로 휘어질(막다른 지점) 거리이지만 또한 그곳은 갈라지고 깨지고 분리되지 못할 거리라고 말함으로서 이생이 우연이 아닌 필연의 장소이며 인간이 건너야할 시간임을 말하고 있다.

 

다음 시에는 실로 찰나적인 사건 속에 숨겨진 생의 비의를 슬로 모션으로 보여주고 있어 읽는 이의 가슴을 처연하게 한다.  

 

,//유리문에 머리 박힌 마리, 가던 길을 틀어버린다

보도블록 바닥이다// 방울 보이는데 바닥이 써늘해진다/엉겅퀴 같은 소름이 와와 일어선다//날개 끝에서 바닥 사이가 흐르는 물처럼 길다/삽시간이다// 속에서, 마리가/ 바닥을 미친 돈다/ 마리 엎어진 새를 두고 허둥허둥,/가까운 전깃줄에 올라앉는다//새의 무게만큼 허공이 출렁거린다/공중도 쉼터가 되는가/불안不安 불안佛眼 든다//낭창낭창 외줄을 건너가는 맨발의 구름/날갯죽지 늘이고 깔딱거리는 숨을 지나간다//날개도 꽁지도 고요한 곁을/오래도록 서성이는 선분 하나/균형 잡힌 모서리가 무너질 같다

―「두 선분의 끝이 마주하여야 균형 잡힌 모서리가 된다」

 

새 한 마리가 유리창을 허공으로 잘못 알고 부딪혀 머리를 박고 바닥에 떨어져 죽은 것이 그가 본 현상의 전부다. 불쌍하다고 가슴이 아프다고 엄살을 떨거나 아니면 무심코 지나쳐 버릴 수도 있는 이 찰나적인 시간 속에서 날개 끝에서 바닥 사이가 흐르는 물처럼 긴 시간을 본다. 불과 몇 미터의 높이…… 그것이 생과 사의 아득한 거리다. 시인은 가 전깃줄 위의 앉은 새의 시간처럼 보이지 않는 가는 선분 위의 얹힌 시간에 불과 하다는 걸 발견한다 그리고  ‘공중도 쉼터가 되는가’ 묻는다. 그리고 잠시 동료 곁을 동동거리며 맴돌던 새의 불안不安이 불안佛眼에 드는 것을 본다. 그리고 잠시 함께 佛眼에 든 시인에게 ‘낭창낭창 외줄을 건너가는 맨발의 구름이/날갯죽지 늘이고 깔딱거리는 숨을 지나’가는 것이 보인다. 그리하여 시인은 스스로에게 ‘두 선분의 끝이 마주하여야 균형 잡힌 모서리가 된다’는 깨달음에 찬 결론을 들려준다. 그렇다면 이 사건에서는 결코 마주 할 수 없는(생과 사)의 두 선분은 끝내 균형 잡힌 모서리를 가질 수 없다는 비극적 결론에 이르는 것은 아닌가? 그러나 그것이 가 안고 있는 근원적인 딜레마인지도 모른다.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그의 시편들은 기하학적 혹은 과학적이라 할 만큼 정교한 틀을 가지고 있는 것이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섬세하고 정교한 사실에 근거를 두고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듯 극사실적인 현상들을 꺼내 보여주는 일이 그가 하고 있는 주된 작업인 것같기도 하 다. 아래의 시도 그런 방법론과 맥을 같이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손톱처럼 자라나던 어떤 소리 하나가

자정 너머까지 물장구질을 한다

평일에 들어보지 못한 언어들의 발자국이 깊다

앉을 자리를 찾아 떠도는 소리들이 잔뿌리를 내린다

 

듣지 않아도 들리는  

가느다란 소리의 뿌리들이 빈틈없이 살아나고 있다

 

속에서 소리가 일어서고 있다

소리를 따라 거리를 누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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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 어디쯤에서 내어준 언습일까

바람의 넓은 등에 금방 지워질 기록을 쓴다

 

몸에서 몸으로 넘나드는 소리의 내면

거처도 없는 낱말들이 낯선 몸들을 건너간다

―「환청」

 

환청이라는 제목이 달려 있지만 耳鳴을 썼을 것 같은 이 시에는 귓속에 하나의 세상이 있어 그 속에서 눈곱만한 소리들이 한 우주를 이루고 와글거리며 살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평일에 들어보지 못한 언어의 발자국이 깊다’라는 시구 속에는 마치 지구 속의 인간들처럼 소리라는 존재들이 와글거리며 귓속 세상을 지나다니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그 소리를 시인은 ‘앉을 자리를 찾아 떠도는 소리들이 잔뿌리를 내리는 소리’라고 한다. 이 문장에서 소리의 자리에 인간을 앉혀보면 금방 그 귓속은 인간의 세상이 되는 걸 알 수 있다.

그리하여 그는 그 세상도 이곳 인간의 세상처럼 ‘거처도 없는 낱말들이 낯선 몸들을 건너’다니는 곳이라 생각하는 것이다. 소리라는 觀念이 마치 인간처럼 캄캄한 귓속 세상에서 어떻게든 뿌리내리려 안간힘을 쓰는 것이 보이는 듯하다. 이렇게 그는 사물이나 인간 혹은 관념에까지 경계를 두지 않는다. 그 모든 것이 성주궤멸의 과정을 거쳐 가는 찰나적 존재들에 불과하다는 점에서는 같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다음은 한 연극 공연을 보고 쓴 시인데 생의 본질적 모습이 염쟁이 유씨가 벌이는 연극 속에 그대로 나타나 있어 씁쓸한 미소를 머금게 하는 시이다.    

 

그는 삼십년 무대에서 염을 한다/사자의 밥으로 찾으러 간다며 병풍 뒤로 가서는/붉은 모자를 아들이 되었다가/백발의 아비가 되었다가/허공에 사람의 유령으로 펄럭이다가/꺼이꺼이 곡을 하다가/한탄을 하다가 문득/ 놓고 보는 관객을 불러 세워 한풀이를 하기도 한다//그의 소품은 /사람의 형상 하나/알코올/ /소주 /수의 / 움큼의 //그가 형상의 뻣뻣한 몸을 꾹꾹 눌러 관절마다 반듯하게 펴는 동안/관객들은 한낮처럼 고요해지고/형상의 , 여덟 구멍마다 흘러나오는 썩은 물을/솜으로 틀어막고 마지막으로 항문까지 막을 /곡소리 곡소리/관객의 웃음 같은 곡소리//여보게 몸뚱이가 썩은 물이었네 그려/ 퀴퀴한 냄새를 막고 있던 피부는 사기였네 그려//수천 썩은 물이 걸어다니며/학생이 되고 선생이 되고 계장이 되고 과장이 되고 부장이 되고 사장이 되었다가/마침내는 송장이 되었네 그려// 형상 앞에서 그가 운다/오늘치의 각본대로 운다

―「염쟁이 유씨」

 

인도 육파철학의 하나인 산키아 학파의 학설에 따르면 우리가 영화나 연극을 보며  울고 웃는 것은 자신이 주인공이 된 듯한 착각에 빠지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들은 ‘본질적으로는 우리가 생의 배우가 아니라 관객’이라고 말한다. 태어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우리는 한 사람을 끊임없이 감시하고 또 그의 육체적이고 정신적인 컨디션을 함께한다고. 이 친밀한 동거는 우리로 하여금 자신이 곧 그 사람이라고 믿는 환상을 불러일으킨다. 영국의 작가 조셒 에디슨은 자신의 꿈 이야기에서 자신이 동시에 무대 뒤에서 연출하고 동시에 무대 위에서 연기하고 객석에서는 관객으로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고 말한다. 위의 시는 그 꿈을 염쟁이 유씨라는 주인공을 통해 그대로 보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 한다. 이 시에 나타난 학생이고 선생이고 과장이고 부장은 모두 송장으로 귀결되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결국 그가 우는 것은 자신을 애도하는 울음이며 그 모두가 누군가가 짜 놓은 오늘 치의 각본에 지나지 않는 다는 그의 인생론이 아리게 와 닿는 시이다. 생의 막다른 골목에서나 눈치 챌 만한 이런 깊이 있는 사유는 그가 남다른 병고를 겪으며 온 몸으로 체득한 것이라 생각되기도 한다.

 

그리하여 그는 이곳(이녁, 이승)을 첫사랑, 그곳이라 지칭하며 다음과 같이 담담히 정리한다.            

 

람사르에 오른 늪입니다

 

가시연 노랑어리연꽃 소리쟁이 개구리밥이 살아가는 곳입니다

소금쟁이들이 다리로 물의 지붕을 긁으며 놀고

부들이 바람 앞에 부들부들 떠는 곳입니다

물속에 밝은 눈을 가진 물고기가

비늘을 빗질하고 아가미를 벌렁거리는 곳입니다

이따금 푸드득 밖으로 뛰어올라 냄새를 흩뿌리기도 하는 곳입니다

 

연꽃 연뿌리가 실해지는 곳입니다

꽃이 밥이 것이라 미리 상상하는 곳입니다

늪과 언덕의 경계에 갈대가 무리지어 사는 곳입니다

 

며느리눈알과 며느리밑씻개가 늪의 영역을 넓히고

토끼풀이 파랗게 뜨고

동안 느티나무가 수로를 지키고 있는 곳입니다

거슬러 올라가면

단발머리와 상고머리가 발목이 시큰하게 빠지는 곳입니다

―「첫사랑, 곳」

 

위의 것들은 모두 자연 그대로의 풍경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들이다. 그러나 한 행, 한 행 읽어가노라면 이상하게 가슴이 처연해 지는 것을 느끼게 된다. 마치 조사가 서쪽으로 가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하는 질문에 조주가 ‘뜰 앞에 잣나무다’ 라고 하는 답처럼 ‘아무것도 아닐 것 같은 것들의 깊이’가 서늘하게 다가오는 시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곳이라고 불러야 마땅할 것 같은 곳을 그는 구태여 그곳이라 불렀다. 이곳과 그곳 이것과 저것의 거리가 필요 없는 곳, 그러나 그는 그곳이라 거리를 둔다. 마치 지나간 첫사랑처럼. 그러나 우리는 이 순간도 그곳에 연신 발목이 시큰하게 빠지며 어디론가 가고 있다. 잠시 후면 첫사랑이 될 것들에.

앞으로 그가 쓸 시편들을 통하여 찰나적으로 지나가는 시의 번갯불을 보여 줄 날을 기대해 본다. 모든 흐름은 멈추지 않고 시간은 정지하며 자기 자신으로 가득 찬 시간이 거기 있는 시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