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이 건너오다 

 

 

속을 다 비운 산이 어디 먼데를 돌아 제자리로 왔다

 

그가 흘린 것들이 무엇인지

어디를 돌아 왔는지

아무도 모른다

 

당신의 가랑이를 슬쩍 지나간 바람 같은 것

당신의 정수리에 그림자를 드리우다 간 구름 같은 것

교통사고 현장에서 누군가의 피를 밟고 지나간 발자국 같은 것

 

그런 시간들이 그의 속이었을까

 

세상 감옥을 벗어난 물렁한 산 하나가 누워있다

산맥 같았던 핏줄이 얇은 살가죽을 겨우 들고 있다

가죽의 파랑사이 흙냄새가 물씬 솟아난다

헐거워진 아랫도리에서 계곡 물소리가 찔찔거린다

 

속을 다 버린 산에는 슬픈 새소리마저 사라졌다

 

벌거숭이, 누가 어디를 만져도 부끄러움이 없다

 

헐렁한 산은 이제 눈을 감고

지나온 대지에 깊숙이 뿌리박을 것이다

그리고 산은 다시 산으로 건너갈 것이다

 

 

 

 

 

 

 

 

 

 

 

허공에서

 

 

탯줄이 어디 있는 줄도 모르는 잎 하나가

끊어진 거미줄 한 올을 잡고 달랑거린다

 

공중이다

사방이 바람이다

 

어느 틈 기척만으로도 움츠러지는

바싹 오그린 몸이 매달려 있긴 땅이 멀다

하늘도

구름도 아득히 멀다

 

삶 한 장이

보일 듯 말 듯 한 오라기를 부여잡고

몸부림치면 칠수록

깊이 흔들리는 허공

 

저 허공을 할퀴는 것이

내 놓지 못한 목숨일까

가느다란 숨을 죄는 바람일까

 

언제 녹아내릴지 모르는

한 생이

 

 

 

 

 

 

 

 

염쟁이 유씨

그는 삼십년 째 무대에서 염을 한다

사자의 밥으로 쓸 쌀 찾으러 간다며 병풍 뒤로 가서는

붉은 모자를 쓴 아들이 되었다가

백발의 아비가 되었다가

허공에 두 사람의 유령으로 펄럭이다가  

꺼이꺼이 곡을 하다가

- 지랄 같은 세사-=  

한탄을 하다가 문득

넋 놓고 보는 관객을 불러 세워 한풀이를 하기도 한다

 

그의 소품은 사람의 형상 하나

알코올

쌀 한 줌

소주 몇 잔

수의 한 벌

한 움큼의 솜

 

그가 사람이 아닌 형상의 뻣뻣한 몸을 꾹꾹 눌러 관절마다 반듯하게 펴는 동안

관객들은 한낮처럼 고요해지고

형상의 몸, 여덟 개 구멍마다 흘러나오는 한 생 썩은 물을  

솜으로 틀어막고 마지막으로 똥구멍 까지 막을 때

곡소리 곡소리

관객의 웃음 같은 곡소리

 

여보게 이 몸뚱이가 썩은 물이었네 그려

이 퀴퀴한 냄새를 막고 있던 피부는 사기였네 그려

 

수천 년 썩은 물이 걸어 다니며

학생이 되고 선생이 되고 계장되고 과장되고 부장되고 사장되었다가 마침내는

송장이 되었네 그려

 

제 형상 앞에서 그가 운다

오늘치의 각본대로 운다

 

 

 

마른 화분

담 구석에 화분 하나 엎어져 있다

화분은 없는데 꼭 분모양이다

둥글 길쭉한 분에 흙보다 뿌리가 더 많다

뙤약볕에 비스듬히 누운 그것을 세우니

화초 한 포기 말라 죽어 있다

흙이 뿌리들을 그러모은 채 딴딴하게 굳어있다

뿌리들이 흙을 안고 화석이 되어 있다

뿌리들은 침묵 중이다 돌처럼

발로 툭  

그것들을 깨워본다

그것들 엉겨 붙어 떨어지지 않는다

분 안에서 자란 뿌리들이 가늘고 길다

아래로만 뻗어간 놈

내려가다 옆으로 가다 다시 위로 올라간 놈

화분의 둘레를 따라 둥그스름 길을 튼 놈

서로의 다리를 걸고

서로의 목을 조르고

발목이 접질리며

잔뿌리들은 아래로 몰려 옹차게 껴안고 있다

 

형을 벗어나지 못한 꽃 한포기가

온몸으로 만들었던 저것

 

 

 

 

 

 

 

 

 

 

 

 

 

 

세상은 밤이야

그림자를 해방시키는 밤

 

목을 누르고 칼 든 손에 거머리처럼 튀어나온 힘줄이

튕겨져 나간 밤

터진 고무줄 같은 밤

몰래 명의 이전한 땅문서를 장롱 속에 넣어두고

밤이라고 우기는 밤

정수리를 감고 도는 햇살이 쨍쨍한 밤

 

밤 속 같은 밤

 

멀건 대낮에 쓰레기로 가득한 가방 하나 들고

동굴 같은 지하철을 타고 어둠 속을 떠도는 밤

네모난 상자들이 흔들리며 흘리는 납작한 빛을 따라가는 밤

 

멀쩡한 장미를 제집에다 옮기겠다고 한낮을 톱질하는 밤

 

톱도 톱날도 안 보이는 밤

꽃의 피비린내가 햇살을 덮는 밤

 

밤의 그림자가 어둠인가

 

달아난 흉기의 발자국을 찾아낼 수 없는 밤

 

 

 

 

 

 

 

팬플루트

나무들이다

뿌리 없는 마른 나무

 

그의 입술이 닿자

어느 쓸쓸한 오후의 바람소리가 난다

 

저 죽은 것의 심장에

무엇이 건너간 것일까

 

톱날에 잘려지던 때

내지르지 못한 단말마의 숨이 저리 순하게 삭은 것인가

 

어디 깊은 데서 솟아오르는 샘물소리 같다

횡격막을 가로지르는 소리

 

고공 타워크레인에서 아슬아슬 흔들리던 비정규직같이

아득한 터널을 헤쳐 나오는 소리

 

잘려진 것들은 소리가 된다

목청껏 부르는 노래가 된다

 

 

 

 

 

 

 

 

 

 

 

 

 

 

 

 

 

 

물집

 

 

처음엔 그냥 입술 한쪽이 근질거렸어

찬 눈이 내릴 것 같은 예감이 들었어

경계도 없이 조금씩 넓어지느라 입술이 들썩였어

살갗이 부르터 오르는 만큼 통증이 자랐어

 

밖은 눈이 펑펑 쏟아지지

앞은 깜깜하지

바람 한줄기가 쏟아놓은 말처럼

눈송이 앞 뒤 없이 흩날리지

 

저 눈송이의 한 씨눈이

몸 속 구석구석에서 숨죽이다 살아나

진물 같이 뿌연 것을 채우고 있었을까

집은 더 높고 넓고 눈송이처럼 분열되고 있어

부풀대로 부푼 고갱이가 터지고 있어

 

누가, 부피가 팽창되면 결국 터진다고 했을까

 

얼어도 곪아도

맞아도 찔려도

결국 터지게 되는 것

 

나의 밖에서 집 하나가 산산이 부서지고 있어

감추었던 발톱들이 다 보여

발들이 박차고 나온 자리에 암호처럼 흉터가

 

너무 깊이 박힌 심지는 감출 수 없어

 

 

 

 

 

 

 

 

 

 

 

 

초파리

 

 

터진 살결에서 흘러나온 홍시의 울음이다

달착지근한 맛

 

어디서 왔는지 초파리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빈 배를 채우느라

파리채보다 큰 사람이 앞을 지나가도 모른다

 

굶주림은 밝은 눈을 어둡게 하는 마력이 있는 걸까

 

접시를 부뚜막으로 슬쩍 옮긴다

칼집은 컴컴하고 칼은 예리하다

그 곁에서 도마는 우두커니 서 있다

 

멀쩡한 홍시를 고르는 사이

초파리들이 또 떼거리로 몰려들었다

옆에 칼날이 있는데도 초파리들은

빨간 홍시의 뺨에 올라앉는다

 

홍시의 머리를 누른다

홍시의 눈을 찌른다

해안 같은 옆구리에 흡입기를 갖다 댄다

 

몇 번 더 자리를 옮겼다

그럴 때마다 그릇 주변 소란은 여전히 둥그렇다

어디든 정확히 찾아내는 먼지보다 작은

위와 창자들

 

한숨에도 날아갈 것 같은

 

 

 

 

 

 

 

 

 

 

안개, 자욱하다

 

 

높은 하늘이 낮아져 안개에 덮였다

 

뼈대가 굵은 높은 빌딩이 물렁한 안개가 된다

길을 찾아 쉼 없이 구르는 타이어들

안개 속, 길은 도무지 알 수 없어

속도를 줄이고 신경을 곤두세운다

 

잠시 쉬어가라는 신호등이 있었던가

맘 놓고 건너가라는 횡단보도가 있었던가

길은 깜깜하다

 

윤기 흐르는 푸른 나무들

짙은 안개에 둘러싸여

햇살을 찾지 못하고 젖은 채 헤맨다

 

무엇이든지 낚을 것 같은 낚싯대도

밥 냄새가 무르익을 것 같은 주방가구점도

어디든 달려 갈 수 있을 것 같은 차들도

안개에 가려 보이지 않는 날

 

수많은 청년들이 일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는

라디오 뉴스는

안개 속에서도 명징하다

 

춤 없는 노래, 짐승들의 울부짖음만 뚜렷한

캄캄한 이 한 낮이

내막을 알 수 없는 수수께끼 같이 안개에 휩싸인다

산 것과 죽은 것이 함께 묻힌다

 

 

 

 

 

 

 

 

 

무릎

 

 

포장의 끝은 매듭이다

내용물이 사각이거나 길쭉하거나 둥글거나

잘쏙하게 리본이 장식한다

 

리본을 나비의 시조라 해도 될까

어디든 날아갈 수 있는 비단

 

잠자리 소쩍새 메뚜기 두루미 ...

날개를 들어 자신을 옮기는 것들

 

당신의 몸 어디에 리본이 있어

여기서 저기로 꽃소식을 옮긴다면

 

날아갈듯 활짝 날개를 펴고

내용모를 소문이 굳게 닫혀있다

 

마음 가는 데로 무릎이 난다

나비처럼 훨훨

 

저 무릎

어디로 건너가는 징검돌인가

 

꽃집 아가씨가 꽃다발을 묶는다

날개처럼

저 무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