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율포

 

 

그해 여름 율포만은

시대만큼의 습기를 머금고

지는 해의 그림자를 붙들었다

 

파도가 실종된 수면 위로

몇 개의 파라솔이 부표처럼 떠다니며

새파란 하늘을 가렸다

 

해수사우나 냉탕에서 몸을 담근 나는

보트를 타고 나간 딸아이들의 흔적을

TV처럼 지켜보았다

 

수평선은 빨랫줄처럼 팽팽하고

흰 거품을 내는 아이들의 즐거운 비명이

깊은 자맥질을 하며 펄럭였다

 

나도 아이들처럼 나부끼며

온몸을 물 틈으로 비집고

소금기 가득한 꿈을 꾸었다

 

순간, 코로 엄습하는 공포가

유영을 학습치 못한 시절을 들춰내며

벌떡 제자리로 솟구쳤다

 

망막 속으로 사라진 아이들, 한 뼘의

그 세월은 가늠키조차 싫었고

철렁하는 마음이 먼저 닻을 내렸다

 

입었던 구명복의 기억을 짜 내며

마악 율포로 환생하는 제트엔진의 요란함에

풀린 다리를 겨우 욕탕 밖으로 뗄 수 있었다

 



세월이 잔인하다

  

잎이 피기도 전에

꽃봉오리는 떨어졌다

 

수상한 계절,

깊은 안개와

방향을 가늠키 힘든 바람이

때 이른 음모처럼 습격한다

 

제 스스로 물을 길어 올리며

한 점 한 점 단단한 살로

희망을 채워 나가던

사월의 그 하루가

몹시도 기울던 날

 

이를 막아줄 든든한 동아줄은

어디에도 없었다

 

얇은 습자지처럼 배어오는 공포와

턱밑까지 차오른 절망이

무수한 생채기를 내며

거대한 쇳덩어리 같은 무게로

순장되었다

 

새파래서 너무 슬픈

꽃봉오리들이 눈물처럼 흩어져있다

 

세월이 지독하게 잔인하다

 

  

 

The Boxer

 

 

 

그해 유월, 권투 링에서 나는

시대의 스파링 상대가 되었어요

 

무수히 날아드는 펀치와 집요한 잽에

잠시 넋을 놓았지요

 

눈물과 함께 뒤범벅이 된 콧물로

곧 통증을 알게 되었어요

 

가진 거라곤 맨 몸뚱어리인 약관의 나이,

냅다 지른 주먹은 허공만을 갈랐지요

 

따갑게 조여 오는 공포는 하얀색이었지만

관중들은 열렬히 나를 응원했어요

 

상대 글러브가 남겨준 멍은

푸르게 치명적이었죠

 

그때마다 엄마 품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은

울컥거리는 기침으로 남곤 하였어요

 

끝이 보이지 않는 싸움은 핏빛 노을의 낡은 침대 위로

또 아픈 하루를 더듬고 있었죠

 

그럴 때 귓속으로 흘러넘치는 바로 그 노래가

매번 나를 다독여주었어요

 

 

 

*The Boxer: 미국의 팝 가수 Simon & Garfunkel1969년에 발표하여 부른 노래.

 

 

 

 

스트랜딩stranding 유서

  

 

육지 위로 고래 한 마리가

정박해 있다

 

무리에서 이탈하여 맨 먼저

생의 종지부를 확인하려, 소리 없이

등을 해변에 갖다 대었다

 

그날 아버지는 얼굴에 돋은 흰털을

모두 깎으시고

물 밖으로 나와 누우셨다

 

밀려오고 밀려가는 지난날의 일들이

모래처럼 쌓인 방바닥에서

그리곤, 움직이질 않으셨다

 

신이 인간과 소통하기 위해

보냈다는 그 고래의 오늘 일에 대해

이유를 타진하기엔 우리들 시간은

너무 짧았다

 

다만 초라하게 남아 유영해야 할

생을 경계하며, 결벽 같은

고래의 매끈한 피부처럼 당신은

스스로 유서를 쓰신 것만은

확실하였다

 

 

  

 

택시 안에서 서사를 읽다

  

 

요금미터계가 은밀하게 상승하는 동안

창밖으론 불온한 용어들이, 하나 둘

흔들리는 불빛으로 곡예를 했다

 

젖은 밤 늦게 강변도로를

시대처럼 질주하는 지난날의 기억들도

핸들 잡은 손을 몇 번이나 놓게 했다

 

취기 오른 숨소리는 그의 짠한 서사에

매번 고개를 끄덕이며

그 갈등구조에 응답했다

 

남도, 시골, 농사, 가난, 가출

부산, 달동네, 공장, 야근, 저축

결혼, 장사, 성공, 부도, 택시 운전

 

마디마디 방점을 찍는 곳마다

터져 나오는 걸쭉한 욕설과 분노

켜 놓은 뉴스보다 더 새로웠다

 

택시 문이 열리자, 울컥울컥

목구멍까지 치밀어 오르는 몇몇 부제는

다음 독자를 예비하기에 충분했다

 

장식처럼 매달린 가로등 아래

한 움큼의 감상문을 남겨놓다가

결국 대를 이은 한 위정자가 생각났다

 

 

  

국밥으로 환생하다

  

 

늦은 아침, 아내와 주문한 국밥을 한술 뜹니다

 

서로의 말투 같은 뚝배기엔

어젯밤 노동이 우거지처럼 담겨있습니다

뜨끈하게 지펴 오르는 김은

한 점 땀방울로 이마에 송글거립니다

켜켜이 묵은 책장 사이로 발효되지 못한 활자들이

와락, 한 톨 밥알로 목구멍을 채웁니다

 

수십 년 동안 부화하지 못한 지식들,

책꽂이 깊이 옹송거리며 동면을 취하고 있었습니다

한 푼 두 푼 모아 찾아간 헌책방의 곰팡내와

낯선 이데올로기에 묻어난 매캐한 가스도 보였습니다

지난 세기의 잔해들이 그럴듯한 제스처도 없이  

마스크를 낀 채로 결별을 선언하였습니다

종이박스에 몇 상자로 차곡차곡 재여

윤회할 채비를 갖추며 이른 아침을 맞았습니다

 

그리고 일용할 한 끼 양식으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고백성사

 

 

나는 그를 위해 매일 새벽 기도를 바쳤어요

 

지팡이를 짚을 힘은 없지만 묵주만은 놓지 않았어요

 

정지된 그때의 화면이 늘 악몽처럼 베갯머리로 떠올라요

 

그날 나는 꼼짝없이 핸들을 붙잡고 있었죠

 

가시 돋친 탱자나무를 울타리로 방어한 관청 앞이었어요

 

제복의 사내들이 수상하게 들쳐 매고 옮기는 동안 시동은 꺼지지 않았죠

 

여섯 명이 동승한 검정색 지프엔 딱 한 명만이 숨을 쉬지 않았어요

 

그 온기만큼이나 삼월의 새벽 공기는 서늘하였지요

 

유리 없는 차창으로 남도의 비릿한 갯내음이 코끝으로 몰려왔어요

 

영문을 모르는 거리의 나뭇잎엔 아직도 어제의 매캐함이 묻어 있었어요

 

확실한 증거를 인멸하기 위해 돌과 철사는 이미 예정되어 있었죠

 

풍덩, 이란 실루엣이 무려 이십 칠 일 동안 표백되어 버렸어요

 

세상이 바뀌고 약관의 나이만큼 나는 두려움에 떨며 몸을 숨겼죠

 

그럴수록 왼쪽 눈꺼풀이 텅 빈 것마냥 또렷해오곤 했어요

 

그리고 밤마다 그 속에 하얀 국화 한 송이를 놓는 꿈을 꾸었어요

 

이제 얼마 남지 않은 그와의 만남을 위해 매일 묵주기도를 바쳐요

 

어쩌면 죄의 보속으로 주님이 허락한 나의 숙명인 것만 같아요

 



두 꽃잎을 묻다, 왼쪽 자리에

-미선이와 효순이를 기억하며

 

  

새로운 나라가 잉태되면서, 결국

그 오른쪽 바퀴는 발길질을 시작했어

 

점령군의 수유에 힘을 더해가며, 무섭게

흙길이든 아스팔트든 거침이 없었지

 

한때 뜨거웠던 유월의 광장에 숨을 고르고, 다시

어린 두 꽃잎을 차마 붉게 물들였어

 

길가엔 이미 다녀간 봄들마저, 울컥

흔들리는 지축에 몸서리를 쳤지

 

또래의 태어남을 축하하려는 고운 마음을, 무참히

학살해버린 건 오른쪽 가장자리였어

 

, 저항의 외마디조차 삼켜버리며

거룩한 분노를 푹신한 소파에서 즐겼었지

 

강산이 한 번 더 바뀐 지금도, 여전히

살을 엘 듯한 굉음은 구르고 있어

 

하얗게 빛나는 국화 두 송이, 진정

놓여야 할 곳은 바로 여기 서늘한 왼쪽 자리이지

 

 

  

태양주유소

-제이미 모이어Jamie Moyer를 기억하다

  

 

희끗한 머리에 매달린 돋보기 너머

주유기注油器를 든 세상은

한번 굴절되어 있다

근육이 실어 나르는 파워는

급격히 연소되었지만

살아낸 생의 마디가

부도난 자리를 버티게 했다

차려입은 유니폼이 낯설기도 하지만

연신 타석에 들어서는 행렬에, 결국

주유구를 향한 피칭은

제 몸 크기에 알맞아야 했다

이제는 마운드에 살아남는 일만

생각해야 한다

힘 있고 빠르진 못하지만

정확하고 끝까지 시간을 던질 수 있는

지천명의 컨트롤이 필요하다

476개월의 나이, 그날은

단 한 방울의 기름도 바닥에 흘리지 않은 채

하루를 완봉하였다

 

 

 

*제이미 모이어: 미국 메이저리그 최고령으로 승리를 따낸 왼손잡이 투수.

 

 

  

지금은 침묵 중

-정태규 소설가를 위하여

 

                                   

                     저는 세상에서 가장 운이 좋은 사람입니다.

                        -헨리 루이스 게릭(Henry Louis Gehrig)의 은퇴 연설 에서

 

  

언제부턴가 몸이 언어에 순종하지 않았다

 

탁탁 튀는 힘줄이 하얀 원고지에서

푸른 서사로 변주될 때에도

 

유년의 뜰에서 매운 거리로

그리고 교단에서 꼭 놓지 말아야 할

생의 주제가 발견되었을 때도

 

늘 손아귀엔 힘이 도사리고 있었다

 

꽃이 피고 사람들이 웃음 지을 때에도

잎이 지고 이웃들이 슬퍼할 때에도

 

이를 읽어낼 기호들은 행간을 더듬으며

부지런히 활자화 되어갔다

 

2,130경기를 연속으로 출장한

전설의 메이저리그 타자가 처음으로

한 시즌 2할대로 떨어졌을 때

 

비로소 몸의 한쪽이

침묵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배트를 더 이상 휘두를 날카로움도

1루를 향해 질주할 전력도

모두가 빠져나간 그날

 

언어마저도 굳어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서서히 잦아드는 몸의 고요

비원에 서서 우두커니

헝클어진 지천명의 실타래를 풀어본다

 

이제 그 침묵이 언어가 되고 서사가 된다

 

# 에필로그, 하나

 ‘절망하거나 내가 처한 현실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지 않을 것이다.

 가능한 한 오랫동안 버텨낼 것이다.

 차후에 그것이 찾아와도 묵묵히 받아들일 것이며,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전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