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말

 

 

 

 

꿈길을 헤매다 길을 찾아 나왔다.

이 평화로운 밤 있기까지 악몽의 밤도 있었다.

외롭고도 사랑스러운 별들하고 속삭인, 고독,

사랑, 미움, 망상, 낙서, 비밀, 한숨, 갈등, 증오,

용서……. 잡동사니 문장들을 망설이다 보낸다.

진달래 피고지면 국화가 수줍게 웃듯이

버리고, 잊고 잊는 것이 나를 위한 기도

귀한 선물 주려고 분홍 새벽이 오고 있다.

천지신명이 더 큰 선물 줄 때까지

명상하며 기다리고, 기다리리라.

 

 

 

 |해설|

초점焦點 맞춰가는 ‘초심初心 힘’을 위하여

―김다솜의 시세계

백인덕|시인

 

 

1.

일상의 모든 영역은 시로 전환할 수 있다. 포스트모더니즘 이후 현대시는 이 정의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몇 가지 상위의 개념들에서 그 원인을 찾아볼 수 있지만, 어쨌든 현대라는 시대가 ‘일상/여가’라는 대립 위에 세워졌음은 부인하기 어렵다. 하지만 ‘시로 전환’ 될 수 있다는 것은 가능성이 그렇다는 것 일뿐, 모든 일상적 소재가 곧바로 시적 감흥을 유발한다고 할 수는 없다. 일상의 속성은 지극히 비시非詩적이다. 우리의 일상은 단순성, 자동성, 반복성에 의해 작동한다. 따라서 하루를 아무리 힘겹게 살아냈다 하더라도 그 안에서 ‘체험’이라 부를만한 순간을 찾아내기란 쉽지 않다. 게다가 ‘시’란 장르적 형식을 선택했을 때는 반드시 ‘시적 형상화’라는 과정을 통과해야만 한다. 결국 매일의 일상을 시로 형상화하기가 무척이나 어렵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시는 ‘일상시’라는 하위 범주를 당연하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아마도 시인들의 투철한 시작詩作 과정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에 그러할 것이다. 시를 ‘제작making’한다고 하면, 아직도 우리 시단의 적지 않은 곳에서 거부감을 드러내겠지만 ‘강력한 감정의 자발적 유로’라는 표현론 시각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선택/배제’, ‘확대/축소’, ‘외재화/내재화’ 등이 모두 한 편의 작품에 올바르게 적용할 수 있는 형상화(육화肉化)의 전략이라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김다솜 시인은 ‘초점’을 맞추기 위해 렌즈의 조리개를 돌리거나 아예 렌즈 자체를 교체하는 지난한 작업의 과정을 이번 시집, 『나를 두고 나를 찾다』를 통해 드러낸다. 물론 초점을 맞춘다는 것은 시인의 색깔과 질감에 가장 알맞은 형상화의 방법을 선택과 배제를 통해 추구하는 전략적 방법에 대한 비유일 뿐이다. 그 와중에 빛을 잡으려 했는데 멋진 그림자가 포착되듯이 작품은 의도치 않은 방향으로 감상, 즉 미학적 사유의 물길을 트기도 한다.

 

턱을 내리고 다시 약간 위로 다시 옆으로 올리고 OK. 혼자 나가기 싫어 동반 가출한 나를 찾으러 갔지요 어딘가 있을 나를 찾아 지갑 속마다 주머니 달린 옷마다 털어봤지만 없었지요 서랍을 열어 봐도 없었지요 그동안 나는 인줄 알았으나 알고 보니 나는 없고 그가 나였다니요 점프하듯 현기증이 나고 소리 없는 한숨이 나왔어요 그러나 그것이 있어야 살아 있는 목숨, 어쩌다 나를 잊어버리고 찾아 헤매는데 어제 찍은 사진을 보여주니 , 법이 바뀌었다며 여권사진처럼 귀와 눈썹 내놓고 아카시아 향기와 함께 다시 찍어 오라 합니다 자격증, 수료증, 졸업장, 이력서…… 은행, 동사무소, 여권 발행처…… 나는 내가 진짜인지 가짜인지 확인 하러 다녔지요 나는 여기에 있는데 수없이 나를 복사 했지요 지금 세상에 나는 없고 나만 있지요 나를 찾지 운전도 못하고 하루하루 기다렸지요 나는 어디로 갔을까요 분홍 루즈를 바르고 눈썹을 짙게 그리고 다시 찍은 사진 가지고 주민센터 갔다가 경찰서 갔다가 결국 나를 가출 신고 합니다 가출 하고 싶어도 가출 시간도 없이 살아 나를 두고 가출한 나는.

 

―「나를 두고 나를 찾다」 전문

 

표제작인 이 작품의 정황은 언 듯 보기에는 단순하다. 등장한 시어로 유추해볼 때 운전면허증을 잃어버려 재신청하는 과정이 담겨 있다. “턱을 내리고 다시 약간 위로 다시 옆으로 올리고”하는 것은 사진관에서 증명사진을 찍을 때 피사체에게 주어지는 과도한 주문을 열거한 것으로 보인다. 그밖에도 어처구니없는 상황은 더 있다. “법이 바뀌었다면 여권사진처럼 귀와 눈썹 다 내놓”은 사진을 요구하는 주민센터가 그렇다. 시인은 ‘아카시아 향기’를 슬쩍 집어넣어 시를 탄력적으로 만들어 놓았지만, 자기가 자기를 육안으로도 확인시키지 못하는 것이 현재 우리의 삶이라는 점에서 일종의 자괴감까지 드러낸다. 여기까지는 이 작품의 정황에 관련된 부분이다. 사실 이 작품이 표제작으로 충분히 자리매김할 수 있는 이유는 “나는 내가 진짜인지 가짜인지 확인하러 다녔지요 나는 여기 있는데 수없이 나를 복사했지요 지금 세상에 나는 없고 나만 있지요”라는 일종의 존재론적 인식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자연적이고 물리적 실체로서 이 우주에 유일무이한 ‘나’가 ‘법’으로 표상된 사회적 계약에 의해서 인정되지 못하고, 무수한 복제를 거듭하면서 사회적 ‘나’만이 존재하는 현실에 대한 일종의 깨달음이 시작된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은 결국 “가출하고 싶어도 가출 할 시간도 없이 살아 온 나를 두고 가출 나”를 ‘가출신고’하는 데까지 나아간다. 이런저런 증이나 서류로 인정되던 ‘나’를 ‘나 아닌 나’로 인정하면서 ‘나인 나’를 찾겠다는 일종의 계기적 선언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선후를 알 수는 없지만, 시인은 몇 편의 작품에서 그림자가 아니라 ‘유령’을 생각한다. 「유령마을」에서 “기차를 타거나 버스를 타거나/지하철을 타거나 자가용을 타거나/어딜 가나 거울을 보는 유령들이 있다.”고 한다. 보인다면 유령이 아니다. 시인이 작품에서 언급한 것처럼 ‘체르노빌’ 인근 마을이나 ‘사하라 사막’의 70년 된 전투기처럼 실재하지만 부재하는 듯 일상이 유지되어야만 유령이라 할 수 있다. 또 「역에서 역으로」에서는 “영화를 보다가 게임을 하다가 채팅 하는 성냥개비들, 스크린도어에 거울처럼 비치는 성냥개비들은 어디선가 한 번 본 듯한 링가샤리라* 닮았다”고 직접적으로 서술한다. 그러므로 ‘거울을 보는 유령’이란 자기 정체성을 파지把持하지 못한 존재들의 포괄적인 비유가 된다. 마찬가지로 “굽은 길은 위험하다/.말이든 길이든/직선은 더 위험하다./운전석에는 누군가 유령처럼 앉아 있다.(「또! 당첨」)는 것은 직접적으로는 부주의에 대한 비유지만 자각적으로 행동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앞의 시와 궤를 같이 한다. ‘나 아닌 나’와 ‘나인 나’가 부지불식간에 ‘실체/유령’으로 변질되었지만, 어쨌든 자성적 자아를 확립하려는 시인의 의도가 작품의 여러 행에 파편으로 박혀있음이 보다 중요하다는 사실을 다시 강조하고 싶다.

2.

일반적으로 초점을 맞추기 위해 조리개를 확대하거나 축소할 때, 그 방향은 일정한 정서적 지향을 지시할 수밖에 없다. 보편적으로 관련성이 깊은 것은 확대하고, 조금 무관하게 느껴지는 것은 축소하려는 것이 우리의 본질적인 성향이기 때문이다. 이때 이른바 근원적 정서라고 불리는 가족, 고향, 유년에 대한 기억은 확대 재생산 되고, 눈앞의 날것 이미지로 던져지는 현실은 축소될 수밖에 없다. 김다솜 시인도 이 경로를 따라 자신의 시심을 정돈하고 있다고 보이는데 몇 편의 작품을 통해 이를 확인할 수 있다.

 

 

깨지고 날아간 밥그릇을 그들과 먹으며

전쟁 속에서 얻은 빛나는 훈장은 녹슬고 있다.

지금 그의 몸에는 강처럼 흐르는 베트남의 신화

조왕신*에게 올린 어머니의 기도 덕분일까.

버트, 땅콩잼, 금박물린 마후라 보이지 안고

싱크대 속에 남아 있는 꽃무늬접시.

―「꽃무늬 접시」 부분

 

길에서 스트레스 받다 ,

주머니마다 잔소리와 뒷담화 하다 ,

입학이며 졸업식에 갔다 , 승진 했다 퇴직 했다

잔하고 취해

갈지자로 비틀거리다가 , 돌잔치와 결혼식 각종 행사

갔다 ,

주연 조연 엑스트라에게 박수치다가 , 상사 앞에서

쩔쩔

야단맞다가 여우털, 악어가죽, 소가죽, 양털, 오리털……

장례식장에서 국화향기 맡고 옷들

―「대형 세탁소」 부분

 

먼저 인용한 작품은 ‘베트남’이라는 어휘가 직접적으로 지시하는 것처럼 월남전 참전 군인인 ‘오빠’를 소재로 했다. 기억 속의 그는 “꽃깔 모자 쓰고 새색시로 분장했”어도 여전히 따뜻한 오빠였고, “영화배우처럼 잘 생긴 그”였다. 이 작품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싱크대 속에 남아 있는 꽃무늬접시”인데 이것이 그 오빠가 참전 후 겪게 된 정신적 상처와 시대의 변화에 따른 처우의 불균형에 대한 이미지이면서 동시에 그 오빠를 아름답게 추억하게 하는 시적 계기로서 양가적으로 작동한다는 점이다. 시인이 시인의 기다리는 「태양의 꿈」에서 “잊으려 해도/한사코 생각나는 그리움 삭히려/오늘 초승달 하고 앉아 한 잔 합니다.”라며 애상哀想에 젖어드는 반면, ‘꽃무늬 접시’라는 일종의 객관적 상관물을 통했을 때 시적 자아는 보다 시적인 거리와 태도를 취할 수 있게 된다. 다시 말해, 기억에 의지하면 시상은 그 사유를 오늘로 확산하려는 자동적인 성향을 드러낸다. 마찬가지로 부정적 뉘앙스로 점철하지만, 「어머니의 방」에서 드러나는 일종의 가족사, “어머니가 좋아하셨던 어머니의 오빠 돌아 가셨고/어머니의 큰 언니와 작은 언니도 어느 날 돌아 가셨다/어릴 때 이모이자 고모, 삼촌이지 살다보면 남, 남인 것을/막내 이모부만 명절에 만나서 이별 연습을 하더니 오지 않으신다”는 사실은 세월의 흐름 이상의 그 무엇을 시인에게 각인시킨다. 일종의 단독자 의식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결국 “고아처럼 혼자 남아서/벽보처럼 붙은 사진을 보”는 어머니를 통해 오늘의 시인에게 전이轉移된 시적 계기일 것이다.

반면에 다음으로 인용한 작품은 기계적으로 제 역할을 거뜬히 해내는 현재의 한 지점, 장소를 모티프로 한다. 그곳은 ‘대형 세탁소’인데. 그곳에서 시인이 만나게, 아니 보게 되는 동시대의 군상群像들이 차가운 언어로 나열되고 있다. ‘옷’이란 말 그대로 옷이다. 내면에 껴입는 옷이란 없다. 마치 체면이나 교양을 인간의 정신에 덧입힌 옷처럼 생각하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사실 그들이야 말로 몸 밖의 옷을 자기 정신까지 빨아들인 물신주의자들일 뿐이다. ‘땅’도 마찬가지다. 시인은 「땅」에서 “내 땅, , , 들 없어도/송이능이 온갖 약초로 살아가는 사람들 많지요/다슬기와 물고기 잡는 사람들 많지요//우리 빌라 앞에 텃밭 주인 치매 걸려 어딜 가더니 오지 않으니/동네 사람들 자기 땅처럼 여기는 네 땅, 저기는 내 땅, , 땅”하는 무욕과 탐욕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옷’, ‘땅’ 이런 것들이 현실의 날것 이미지로 삶을 압박할수록 ‘나아닌 나’를 찾기는 더욱 요원해진다.

 

 

그대만 , , 있고

나는 , , 없는 새인가요.

 

새들의 지저귐 듣는 것도 받는 길인가요.

누군가에게 무심코 던진 미움의 하나가

부메랑처럼 그대 가슴으로 돌아가는 모르시나요.

지금 그대의 미움은 누가 만들어 옷걸이에

걸어 놓았는지 거울을 보세요.

 

새야, 새야,

듣고만 있다고

부리로 상처주지 마라.

단지, 허공 무서워 살얼음 걷듯 하는데

짓듯 하는 그대는 무엇이 무서운가요. 벙어리

마음 알아 허공 있기에

길을 걸으며 꿈꾸는 그대이고 .

 

스님, 신부, 목사, 시인님 무섭지만

무섭지 않음을 어찌 할까요. 내가 세상에서

제일 무서워하는 것은 은빛 잠자리 머물고 있는 허공,

먼지와 황사 오고가는 허공, 그곳이 무서워

거울 보듯 바라볼 뿐이라오.

―「눈」 전문

 

이번 시집에서 명령형 어미가 사용된 거의 유일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김다솜 시인의 시작 동기와 지향이 동시에 함축되어 있다고도 보인다. 여기서 ‘거울’은 자성의 이미지로, 유령을 환기할 때의 ‘거울’ 즉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이는 일종의 환영을 너머 선 무엇을 상징한다. 시인은 직접적으로 “스님, 신부, 목사, 시인”을 호명하고 있다. “무섭지만/무섭지 않음을 어찌 할까요”라는 진술은 여러 층위에서 생각을 거듭하게 한다. 하지만 “은빛 잠자리 머물고 있는 허공”이 제일 무섭다는 시인의 진솔한 고백을 통해, 이 작품이 어쩌면 김다솜 시인이 초점을 맞췄을 때 시적으로 형상화해야 할 세계의 지평地平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3.

김다솜 시인은 이번 시집, 『나를 두고 나를 찾다』를 통해서 시인만의 시각의 초점을 맞추기 위한 여러 시도들을 보여주었다. ‘초점’을 맞춘다는 것은 결국 시인만의 개성적인 시각을 갖는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주지의 사실이지만 개성적 시각은 단순히 삐딱하게 보거나 생경生梗한 것들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철저한 ‘관찰 →통찰 →인식’을 거쳐 자아와 인생과 세계에 대한 ‘이해’를 지향할 때 저절로 형성되는 것이다.

시인은 가족에 대한 기억으로부터 생생한 날것 이미지들을 불러낼 수 있었다. 인용한 작품들 말고도 「등골」과 「아버지의 바람」에서 가려졌던 자기 근원의 한 켠을 밝혀냈고, 「꽃무늬 노인정」과 「달」 등에서 회귀하고 싶은 모정에의 염원도 충분히 담아냈다. 뿐만 아니라, 「잡자, 신종플루」나 「동업자」 등에서 이 시대의 참혹한 현상과 그 기저基底에 흐르는 불의不義까지 담아내고자 했다. 시란 어차피 사건이나 대상에 의한 순간의 감흥에 의지하는 것 보다는 자기고백에 가까우므로 고백과 함께 자성自省을 담은 작품들도 여럿 배치할 수 있었다.

초점이란 렌즈를 통과한 여러 형상이 모이는 한 집중을 의미하지만, 역으로 다양한 사태들을 향해 뻗어나가는 시선의 기준점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때 가장 간과看過하기 쉬운 것이 초심인데, ‘처음만한 끝이 없다’는 잠언은 깊이 새겨둘 필요가 있을 것이다. 필자 역시 시인이므로 이 말을 되새김질 한다. 김다솜 시인은 작품 「핵들」에서 “핵은 화산처럼 높이 솟는다/핵은 불이고 바람, 태풍이고 물거품이다//핵은 한 줌의 가루를 만드는/빛이자 공기방울이다”라는 전혀 새로운 시적 정의, 시인만의 물리학을 보여준다. 포커스가 맞춰진 이후의 시인의 시세계를 상상해 볼 수 있는 즐거운 단서이다. 더불어 「멍」에서는 “나의 실수로 만든 멍, 이렇게 오래 가다니 그럼 나도 모르게 또 다른 누군가에게 푸르고 노란 멍, 붉고 하얀 멍, 주지 않았는지 혹시 그 멍 품고 있다가 곪지는 않았는지 멍 끓어 안고 있다”고 토로한다. ‘나 아닌 나’와 ‘나인 나’의 분별에서 시작했지만 사실 시는 ‘멍’ 하나로도 연결되는 ‘나와 너’의 진정한 관계 맺기로 환원한다는 것을 드러낸다. 희망의 징후徵候들이 상징으로 빛나길 기대하며 시집 곳곳에 박혀 반짝이고 있다.

 

번도 읽은 없을 과수원 사장님은 나를 부를 때는 아줌마라 불렀다. 일주일 일이 끝나고 봉투에 적힌 이름은 ‘시인’

 

시인: 7 6만원씩 7 42만원

포도 : 15.000 박스 : 3만원

포도 : 13.000 박스 : 26.000

포도 56.000 빼고 364.000 적힌 봉투를 받는다

 

 시인이라고 적힌 봉투를 그리 오래 보고 있었는지 누구 친구라 적을 수도 있고 그냥 넣어 수도 있는데 ‘시인’이라고 적었을까? 봉투를 들고 창문에 흐르는 빗방울을 닦는다

 

그는 포도에 관하여 박학다식하신 분이다

어느 누구에게 듣는 시인이란 보다

 

 

하얀 봉투에 적힌 ‘시인’

―「시인」 전문

 

말 그대로 시인의 ‘근황’은 알 수 없지만, 시인이 가질 수 있는 수만 개의 양태 중 하나라는 점에서 시인은 근황은 어둡거나 우울하지 않다. 오히려 밝고 건강하다 해야 할 것이다. 시인이 연예인이길 요구하는 시대에, 시인이란 자기 가면persona 위에 다시 분칠을 하는 ‘시인’들로 가득한 것이 현실이다. 김다솜 시인의 앞날을 눈여겨 볼 이유가 여기 있다.

 

 

 

 

 

 

 

 

2015년 계간 <리토피아> 등단, 시집: 『나를 두고 나를 찾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