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향기가 가득한 박은주 시 모음



향기 /박은주

사람이 꼭 똑똑해야 하는 건 아니다
우리가 모르는 게 얼마나 많으냐
셈은 느려도 헤아릴 줄 알고 걸음이 느려도 가면 되지
 
사람이 꼭 말을 잘해야 하는 건 아니다
우리가 말 다 못하는 게 얼마나 많으냐
이 말은 아끼고 저 말은 버릴 줄 알면 되지
 
사람이 꼭 잘나야 하는 것은 아니다
어울려 가는 길에 길이 있듯 서로 통하면 되지
웃을 때 웃고 울어야 할 때 울 줄 알면 되지
 
때로는 변덕과 상처로 폐 끼치며 그렇게 살면 되지
서로 그러면 되지
 
씨앗이 저를 잃지 않는 소명을 다하듯
내가 그저 나로 사는 일이나
그대가 그대로 사는 일
 
어디, 그만한 향기 있으리



벗 /박은주

멀리 있어도 
나무의 목소리를 듣는 건
새뿐이다
한달음에 날아와
가지를 차지하고 앉는 것을 보면 안다
가까이 있어도
나무의 숨소리를 듣는 건
새뿐이다
이파리 하나 헤치지 않는 몸짓을 보면 안다
잠시 지나가는 길 위에서
고요한 시간을 깨트리고 휘파람을 불며
나무를 흔들고 가는 바람을 보면
아무래도
나무의 눈물을 보는 건
새뿐이다
주저리 주저리 지저귀며
나무를 달래는 걸 보면 안다



하모니카 부는 남자 /박은주

그 남자가 발코니 창가에 앉아 하모니카를 분다
들 향기 그윽한 들녘에 누워 들꽃에 취한 듯
흙냄새 나는 남자가 하모니카를 분다
 
지붕 위에 별이 많던 날 그 남자 태어났다 지
어머니 겨드랑이에 감겨들던 황구렁이 아름다웠다 지
고향이 그리운 남자가 하모니카를 분다
 
아이가 자라는 동안 늙어가는 남자
못 잊을 그리움이라도 있다는 듯
그리운 첫사랑이라도 있다는 듯
도시가 어울리지 않는 남자가 하모니카를 분다
 
들꽃이 불러주는 자장가를 들으며 자란 그 남자
아내가 차려주는 밥상을 기다리며 하모니카를 분다
그 남자가 눈가에 주름을 접으며 하모니카를 분다



귀하고 아득하고 깊은 /박은주

 무너져 내린 흙더미 속에서도 싹을 틔우는 씨앗
누가 그의 숨, 소리 들었는가
 
어느 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일에
그 숨, 소리 누가 들었는가
 
깊이가 깊이를 더해 깊어지는 그 일을 누가 아는 가
 
창밖에 나뭇잎은 흔들리는데
늙은 어미를 놓지 못해 마지막 숨줄을 잡고 있는
병상에 저 젊은 목숨 하나
누가 그의 숨, 소리 들었는가

그 아득한 숨, 소리 누가 들었는가

창밖에 나뭇잎은 지고 있는데  
아득여 슬픈 그 숨, 소리
어미의 눈물로 줄인 키의 길이 속에도 살고 있어
굽어버린 등뼈의 곡선 따라 흐르다가
닳아버린 무릎 위에 피고 있네
 
네가 쉬는 숨 내가 받고
내가 쉬는 숨 네가 받으며
그 아득한 숨, 소리 숨줄로 주고받는데
 
무엇이 이보다 더 귀할까
무엇이 이보다 더 깊을까



들꽃 /박은주

순희 할머니가 밭에 풀을 메면 꽃밭이 생긴다
 
쓰러진 잎들 다시 화르르 일어나고
젖은 잎들 자주 벨벳 그 빛처럼 따스해져
풀이 저를 베고 누운 자리마다 꽃들이 일어선다
 
순희 할머니 풀을 멜 때 꽃 핀 것들 메지 않는 걸
밑동 아래로 살살, 흙을 긁어 덮어주는 걸
그때 꽃밭이 생기는 걸 보았다
 
꽃잎들 화르르, 화르르 일어날 때
그 꽃 보며 웃는 걸
냉기가 서리처럼 스민 뼛골마다 들어앉은 쓸쓸함이
그 꽃 보며 웃는 걸
 
어느 날 보았다
일흔, 고쟁이 속에 꽃잎 하나 후끈, 다시 웃는 걸
순희 할머니 한 송이 꽃으로 밭에서 피는 걸
 
감은 눈 뜨게 하고 닫힌 문 열게 하는
들꽃을 보았다




결핍 /박은주
-욕망에 대하여

꽃이 필 때 꽃나무가 핀 듯 눈이 속았다

나무 이파리가 흔들릴 때 나무가 흔들리는 듯 눈이 속았다
 
그러나 누가 누구를 속인 일은 없었다
 
제철 아닌 꽃에 마음 주고제철 아닌 과일로 허기를 달래려 했다
 
그러나 애당초 무엇이 무엇을 채울 수는 없었다
 
잡힐듯, 잡힐듯, 잡히지 않는
결여와 좌절의 간극에서 눈이 멀었을 뿐
 
무엇이 무엇을 어떻게 한 일은 없었다
 
다만 꽃이 피었다 지고 바람이 부는 동안
혼돈의 허기가 그 자리에 있었을 뿐



결핍2 /박은주
-허무에 대하여
 
못 잊을 사람도 없고 지켜야할 맹세도 없는데
쓸쓸함이 물길처럼 드나드는 동그라미 하나
어느 날은 눈물 속을 걷고 어느 날은 공허 속을 걷네
 
때로는 슬픔 같고 때로는 바람 같아
젖었다가 흔들리다가 하는 동그라미 하나
어느 날은 불길에 꿰이고 어느 날은 서리에 꿰이네
 
바람이 물길처럼 드나드는 동그라미 하나
아무것도 머물지 못하는 동그라미 하나


영원히 빠지지 않는 마법의 반지가 되어   
숙명처럼 가슴을 꿰고 있는 동그라미 하나
 
그, 동그라미 하나, 어쩌지 못해

나방은 죽을 줄 알면서도 불로 뛰어들고
사람은 사랑에 기대려, 기대려 하네



결핍3 /박은주
-결백에 대하여
 
마흔 아홉 개의 마디가 살던 그녀의 피는
선명하지 않은 건 용서치 않는다는 듯 온도계의 눈금을
일정하게 유지하는 중인데
 
곧 지어질 쉰 개째의 마디는 몇 도쯤에 눈금을 그을까
 
그녀의 피는 차양처럼 내부를 실루엣으로 그리지만
비틀거린 흔적이 역력한 마디마다 뚜렷한 상흔은
깊은 수심 속에 발을 내린 뿌리처럼 저를 보이지 않는다
 
허나, 흔들리는 수심 속에서도 뿌리는 결백하여
너무나 결백하여 가문을 이룬다
뿌리의 결백에는 내력이 있으므로
 
담장 안에 하얀 그림 같던 외할머니
 
늘 댓돌에 기대어 키를 재던 하얀 코고무신 위로
순백한 햇살의 시간들 쏟아지면 
하얀 그 머리카락 비녀로 말아올린 일생
더 하얗게 태어나곤 했지
 
담장 안, 결백에 기대어 키를 재던 외할머니의 외부는
티끌 하나 침범하지 못하는 성지처럼
벙어리 개망초 하얀 꽃만 피었다 지고 피었다 졌지
 
그 결백의 내부에서 여든 세 개의 마디가
하얀 피를 흘리며 서로를 맞추다 떠나간 후
어머니는 당신의 여든 마디를 햇볕 아래 말리고 있다



외로운 눈 /박은주

산수유 열매가 떨어진다며
부음나무 이파리들이 소곤대는데
꽃술을 여미던 개망초 강아지풀과 눈을 맞춘다
 
호박넝쿨이 잎을 더 넓혔다고
부추가 꽃대를 올렸다고
텃밭에 사는 풀들이 사각사각 떠들고 있다
 
세상에 살 때 몰랐다
소리가 없이도 소리를 내는 것들이
서로 닿아 소리가 되는 걸
 
꼼짝도 않던 고구마 이파리들이
발자국 소리에 사라지는 황구렁이 뒤에서
터줏대감 오랜만에 몸을 말리러 나온 거라며
늘어진 가지나무 이파리와 말을 섞는다
 
하늘가에 파란 구름 도랑가에 물풀들
서로 닿아 흐르는데
바람에 스치운 박하 향기 
서로 만나 구르는데 
 
벌 두 마리 공중에서 꽉, 껴안고 있다
윙윙, 서로를 보듬고 있다

사람의 눈동자에도 외로움이 산다는 걸
그 외로움 사이로 망막이 빚어내는 눈의 그리움은
작고 여리고 가늘며 투명한 것들 다 볼 수 있다는 걸
세상에 살 때 몰랐다

 

낙하落下 /박은주

나뭇잎이 지고 있다
지지 않으려, 지지 않으려 발버둥 치며
돌아갈 곳 없는 나뭇잎이 지고 있다
 
나무는 벌써 가지를 털고 흔적을 지우는데
 
아직은 낙엽이 아니라고
아직은 그럴 일이 아니라고
돌아갈 곳 없는 나뭇잎이 몸부림치고 있다
 
푸른 날의 명예도 시간을 되돌릴 순 없어
부귀와 권세도 시간을 되돌릴 순 없어
 
누구나 돌아가고 싶은 시간들이 피는 나뭇잎 같고
누구나 돌려놓고 싶은 시간들이 지는 나뭇잎 같네
 
그러나 시간은 굴절을 모르고
과거는 멈춰버린 기억일 뿐
 
어제는 푸르게 웃고 있던 이파리
오늘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 허공을 헤매고 있다



 

사인암 /박은주
 
바위가 소나무를 품고 있다
 
어쩌면 소나무가 바위를 품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누가 누구를 품고 있든 온전히 한 몸일 수 있다니
남을 위해 제 몸 저렇게 열어 줄 수 있다니
서로가 서로를 지키는 몸짓이다
 
누가 뭐래도 고고하게
뿌리가 없던 바위에도 뿌리가 생겼으리라
그리하여 서로가 서로를 꽉, 잡았으리라
 
세상 온갖 복사본들을 만들어 내느라
세상 온갖 공해를 만들어 내느라
사람들이 서로 사랑할 시간도 없이 바쁠 때
빙하가 자꾸 녹아 홍수가 나는 걸
단층이 흔들려 지진이 나는 걸 걱정하는 듯
더 깊이 서로를 꼭, 안으며
괜찮다고 절대 놓치지 않겠다고 부둥켜안았으리라
 
체온과 체온이 닿으면 얼마나 따뜻한지
고요와 다정이 만나면 얼마나 평온한지
은혜와 절개가 만나면 얼마나 든든한지
그들만이 아는 것처럼
 
태고 적에 떨어진 씨앗 하나
꽉, 바위를 껴안은 태초부터 절개는 세상에 생겨났다
  


눈물을 읽다 /박은주

눈물은 그냥 눈물이 아니다

말 대신에 쏟아 놓는 말
마음 대신에 쏟아 놓는 마음이다
 
눈물은 그냥 흐르는 게 아니다
울고 난 뒤 허기가 붙잡고 있는 삶의 의지가
눈물을 따라 나오는 것이다
 
인생은 눈물 속에 길을 숨겨 놓고 딴청을 피우지만
발이 제 발을 밟으며 걸어갈 때
눈물은 저의 냄새를 저으며 길을 터주는 것
 
그러나 길은 선명한 것이 아니므로
눈물은 가벼운 것이 아니므로 눈물을 읽어야 한다
한량 없는 사람의 사연을 읽듯

무량한 세월의 고해 읽듯
 
운다는 건 그냥 우는 게 아니다
옷을 입고도 발가벗는 일이다
 
고유한 그루터기가 살아 있는 그 길을 따라가 보면

눈물에는 숨이 붙어 있다
눈물에는 길이 숨어 산다



세상에 가로되, /박은주

박하가 여름 내 뻗어간 뿌리를 쳐내며 뜨끔했다

 누가 내 머리를 아니 내 몸이나  손이나 코끝 같은데를
쳐 낸다면 어찌하리

무성하게 뻗어간 딸기 줄기를 쳐 내려다 그만 두었다 
누가 나를 쳐 내려다가 그만두기를 빌며 

땅콩 이파리를 건드리는 고구마 줄기를 쳐 낼 때도
고구마를 갉아 먹는 두더지 구멍을 막을 때도 미안했다 

그들의 삶에 내가 자꾸 관여하는 것 같아서 

주렁주렁 매달린 열매를 보며
오래 살고도 열매 맺지 못하는 내가 부끄러웠다

칠 것 안 칠 것 너무 쳐 버린 것 같아서
 
나와 남의 생에 대하여 무단히 쳐 내려온
내 속 좁은 역사를 들여다보며

누가 나를 하릴없이 쳐 내는 일 없기를 빈다 

저, 잘려나간 뿌리와 줄기와 눈들이 
아아, 가위 눌리는 일 없기를 



내 두 번째 손 /박은주

하루 세 끼 꼬박꼬박 내 그릇을 씻어주던
고무장갑에 물이 샌다
물의 갈키로부터 나를 보호하던 고무장갑 
그 고무장갑에 물이 새다니 허전하기 그지없다
그런 고무장갑을 훌렁 벗어 던질 수가 없어
손 안으로 들어오는 물기를 만지며 설거지를 한다
가끔은 설거지를 하다가 
노래를 부르기도 하고 전화를 받기도 하는데
그러니까 고무장갑은 내가 음치에 욕쟁이에 방귀까지 
잘 뀐다는 걸 다 아는 것이다
손톱은 얼마 만에 깎는지
밥은 얼마나 먹는지
커피는 몇 잔이나 마시는지
핸드크림은 어떤 향이 나는지
나보다 더 훤히 나를 아는 것이다
그런 나를 고무장갑이 어떻게 생각하든 
내 손을 대신해 두 번째 손이 되어주던 
그 정든 손을 떠나보내는 건 쓸쓸한 일이다
사람이 사람을 떠나가는 일이나
정이 정을 떠나보내는 일은 참 쓸쓸한 일이다
 


누가 이름을  불러주면 /박은주

이름을 부르는 그 목소리에는
한낮의 바람 같은 훈훈함이 있는 것 같고 
오래 입은 스웨터의 편안함이 있는 것 같고

이름을 부르는 그 목소리에는
혼자가 아니라는 든든함이 있는 것 같고
돌아보면 언제나 기다리는 자리가 있는 것 같고

이름을 부르는 그 목소리에는
같이 걸어가는 길이 있는 것 같고
함께 나누어 온 이야기가 있는 것 같고

귀뚜라미가 가을을 부르듯
누가 이름을 불러주는 그 목소리에는
들어도 들어도 듣고 싶은 노래가 있는 것 같네

다정한 벗이 이름을 불러주듯
밥은 먹었느냐고
별일은 없느냐고 
물어봐 주는 마음이 있는 것 같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