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모일기와』『토비대략』으로 본 상주동학농민혁명

                                                             박찬선          

 

 1. 머리말

 상주동학농민혁명을 알 수 있는 자료는 아주 적다. 민보군(民堡軍)과 연관된 소모사 정의묵(鄭宜黙)의 『소모일기召募日記』와 유생(儒生)의 기록으로 유격장(遊擊將) 김석중(奭中)의 『토비대략討匪大略』이 있다. 다스린 쪽과 다스림을 받은 쪽의 기록이 공존한다면 이상적이지만 한 쪽으로 치우쳐 있어서 고정된 시각에서 불 수 밖에 없다.

 ‘대체로 상주는 나라의 한쪽 구석에 있으며 조령의 남쪽에 위치한다. 이곳은 낙동강의 상류이고 영남의 요충지이며, 경계가 양호()와 접하고 서울로 가는 길과 통한다. 그러므로 조정이 특별히 하나의 소모영을 설치하여 방어하려는 것이다.(1894, 12, 5 소모일기)에 나타나있듯이 당시 상주의 중요성이 잘 드러나 있다.

 “저물녘에 우산에 도착하니 노모는 문에 기대어 서 계시고 어린 아이들은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위로가 되고 기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술 한 항아리와 곶감 1접을 내어서 데리고 온 병졸들을 먹여 추위를 녹이도록 하였다.(94. 12. 8 소모일기) 기다림으로 피어나는 따뜻한 가족 사랑과 동행한 병졸에 대한 자상한 배려가 담겨있다. 그런가하면 “소모사가 적의 세력이 매우 크다는 것을 듣고 고립된 군사가 원조도 없는 것을 크게 염려하여 마침내 몸을 일으켜 출전하면서 말하기를 ‘내가 차라리 김 모와 함께 죽을지언정 여기 앉아서 위태한 것을 보고 있을 수만은 없다’라고 하였다”(1894. 12. 19 토비대략)에서 보듯이 위태롭고 절박한 때에 신뢰와 결의를 보여준 휴머니티의 사실적 기록이다. 동시대에 소모사와 유격장이라는 직무를 맡은 동지적 관계에서 공동의 적을 물리치려는 충의의 정신이 녹아있다. 일기의 시작과 마침에 약간의 차이가 있고, 동일 사건의 기록에 약간의 시차는 있으나 같은 시기, 같은 사건을 기록한 만큼 상호 보완적 성격을 엿볼 수 있다.

 소모사와 유격장의 이러한 작전과 활동, 생각과 고뇌가 담긴 『소모일기』와 『토비대략』을 중심으로 상주동학농민혁명의 면모를 살펴볼까 한다. 두 자료에서 되도록이면 상주와 연관된 것을 몇 가지 주제별로 중요부분을 발췌 요약코자 했다. 따라서 이 글은 논문이라기보다는 독후감의 성격을 지녔다고 하겠다. 자료의 한계로 전 면모를 파악하는 데는 제한적일 터이나 사실의 기록에 근거한 만큼 상주를 중심으로 한 동학농민혁명의 실상을 파악하는 장점도 있겠다.

 

  2.소모일기(召募日記)

 

 『소모일기』는 1894년 동학농민혁명 때 경상도 상주에서 소모사로 활동했던 정의묵이 남긴 일기이다. 18941017일부터 1895127일 소모사로 임명한다는 명령을 받고 말을 타고 떠난 날부터 군대를 해산하고 집으로 돌아올 때까지 100일 동안 그 날 그 날 일어난 사건의 경과와 소회를 기록했다. 특히 요점만을 간추려 기록하는 실무적 사실성을 보였다.

 

 동학농민군의 2차 봉기에 직면한 조정에서는 각 지방에서 동학농민군을 토벌하기 위해 민보군을 결성하였다. 민보군의 지휘자에게 소모관이란 직함을 부여해서 그들의 활동을 뒷받침했다. 1894929일 조정에서는 삼남의 요지에 각각 2인씩 소모사를 임명했다. 여기에 임명된 소모사는 모두 현직 지방관이었으나 상주 소모사인 정의묵은 상주의 실정을 잘 아는 사람이다. 여기에는 읍성을 빼앗겼던 상주의 정황을 고려한 것으로 보인다. 상주지역의 명문대가에서 소모사를 선임함으로써 보수세력의 결속을 쉽게 다졌다.

 정의묵은 『소모일기』를 통해 상주소모영의 설치과정, 상주면리지역의 민보군 조직, 낙동의 일본병참부와의 관계, 호남과 호서 농민군의 동정, 상주지방 방위망의 구축, 동학농민군의 처리, 소모사로서의 소회 등에 관하여 기록하고 있다. 『소모일기』는 가장 치열 했던 갑오년의 상주 소모영의 활동상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이를 바탕으로 한 체계적인 논문으로·는 申榮祐의 「1894년 嶺南 尙州農民軍召募營」이 있다.1)

 

 지은이 정의묵(1847-1906)은 상주 巨族大家의 일원인 晉陽 鄭氏 21세 종손으로 상주시 외서면 우산에서 태어났다. 자 맹제(孟齊), 호 긍제(肯齊), 우복 정경세의 주손이며 윤우(允愚)의 손자로 가학의 정훈(庭訓)을 받아 경전에 정통하였다. 1879(고종 16) 기묘년 식년시(式年試)에 진사 3등으로 합격하였고 1885(고종 22) 을유년 증광시(增廣試) 병과 에 합격했다. 홍문관 교리(校理), 의금부 도사(都事), 통정대부에 이어 동부승지(同副承旨)에 올랐다.

 1894년 갑오년농민혁명 때 영남소모사로 활약하였으며 1898년 안동군수로 부임하여 몇 개월 후 사직하고 향리로 돌아와서 세속과 인연을 끊고 시부(詩賦)로 자오(自誤)하면서 후진교육에 힘썼다. 유고가 전한다.

 

 3. 토비대략(討匪大略)

 

 김석중(奭中)이 남긴 『토비대략』은 1894년 경북 상주와 충청도 보은 등지를 중심으로 전개된 보수양반 측의 동학농민군 진압 관련 기록이다. 162면의 진중일기(陣中日記)이다.

18934월 보은 장내와 금구 원평에서 열린 동학의 신원운동부터 기록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상주와 청산 및 보은 등지에서 동학농민군을 진압했던 189411-12월의 사실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이해 봄부터 부분적으로 기포했던 상주와 예천 등 경상도 북부지역의 동학교도들은 여름에 대대적으로 기포했고 9월 하순에는 상주를 공격해서 점령하였다. 이에 대항해서 일본군이 진압에 나서자 상주의 보수양반들이 소모영을 설치하였다.

 김석중은 11월 소모영의 유격장을 맡아 민보군을 이끌고 진압에 나섰고 그 활동 기록이 『토비대략』이다.

 군중(軍中)에 내린 명령을 비롯해서 효유문, 이동 경과, 전투상황, 전과, 체포, 처벌에 관한 내용이 실려 있다. 이를 통해서 상주의 동학의 실상과 동학지도자와 동학근거지를 파악할 수 있다. 김석중은 11월 중순부터 활발히 진압작전에 나서서 상주의 북쪽으로 동학농민군을 추격해서 접주 등을 포살했다. 그리고 동학교도인 주민들의 동요와 기포를 막았다.

 상주 화서와 화령을 넘어 충청도 보은군 장내로 들어갔고 청산군에서는 최시형을 집요하게 추적하였다. 영동군 용산에서 벌어진 동학농민군과 관군의 전투에도 참가하였다. 또한 손병희가 이끌던 동학농민군이 전라도에서 북상해서 후퇴해 있던 보은군 종곡을 관군 및 일본군과 연합해서 기습하여 커다란 승리를 거두었다.

 용산과 종곡 전투를 생생하게 기술하고 승리에 도취한 감상을 적었다. 끝부분에는 아들에게 서양서적을 가르치라는 일본군 장교와 나눈 필담과 서신도 간략히 기록하고 있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참고)

『토비대략』은 18934월과 18944, 5, 6, 9, 10, 11월의 월별 기록을 제외하면 19841113일부터 시작한다. “이것은 비류를 토벌할 때 진중에서 기록한 것이다. 풍찬노숙하면서 초고를 잡거나 기록하였고 말 타고 채찍을 가하며 대략을 썼으니 귀가한 후 혼자 살피려고 준비한 것이지 여러 사람에게 보이려고 한 것이 아니다. 따라서 다시 내용을 더하지 않으며 단지 그 사실을 보존할 뿐이다.” 이것이 18942월 마지막 기록이다.

 

 김석중(奭中): 동학교인들을 진압한 상주출신. 상주목사에 의해 그의 전공을 감영과 의정부에 보고했으나 갑오군공록(甲午軍功錄)에는 누락되어 있다.

 

 4. 동학농민혁명의 실상

 

 1)동학, 동학혁명의 전개

 

 동적(東賊) 40,000-50,000 명이 호서(湖西) 보은 장내(帳內)에 모이고, 한 무리는 호남 금구(金溝) 원평(院平)에 모여, 겉으로는 척왜척양(斥倭斥洋)을 내세우면서 깃발을 세우고 성을 쌓아 몰래 반역을 도모하였다. 임금이 양호도어사(湖都御史) 어윤중(魚允中)에게 명하여 선유(宣諭)하여 해산시키도록 명령하였다. 최시형(崔時亨)이라는 자가 동학을 일으켜 어리석은 백성을 유혹하며 부수(符水 부적과 청수)로 병을 치료하고 검무(劍舞)로 신을 내리게 한다는 말로 서울과 지방을 묶고 8도에 만연하게 하였다. 또 대접주(大接主) 해당 접주라는 명목을 세웠는데 대접주는 1-7만 명을 소접주는 2-3천명을 거느렸다.(1893. 4 癸巳 사월 『토비대략』. 이하 토비로 표기함)

 

 

 그들의 술법은 부적과 주문으로 신을 내려오게 한다면서 사람들을 미혹하는 것이었으며, 그들의 도는 하늘을 공경하고 덕을 베푼다고 하면서 백성들을 속이는 것이었다. 또 병을 치료하고 난리를 피하게 한다는 등의 말로 어리석은 민중들을 현혹시켰으며 결국 옛것을 버리고 새로운 것을 도모한다는 말로 반역의 마음을 드러내었다. 그들이 그런 생각을 품은 지는 오래되었고 그 뿌리도 매우 단단하였다.

 저들이 기치를 세우고 군사들을 불러 모아 거리낌 없이 제멋대로 행동하게 되자 말류(末流)의 폐단이 드러나서 부녀자를 겁탈하고 재물을 빼앗으며 시신을 욕보이고 사대부를 먼저 죽이는 데 이르렀다. 저들의 장기는 정당한 조세를 납부하지 않고 공공연히 패역(悖逆)을 자행하며 무기를 약탈하고 성을 함락시키고 임금이 임명한 관리들을 해치고 임금의 군대에 항거하는 것이었다. 그들을 회유하여 흩어지게 하여도 따르지 않고 그들을 위협하여 복종하게 하여도 잘못을 고치지 않아서 저들의 만행은 갈수록 더욱 심해졌다.(『소모일기』 서두. 이하 소모로 표기함)

 

 동학을 동적(東賊)으로 규정하고, 척왜척양을 내세워서 부적과 주문과 청수로 민중을 미혹하게 했으며, 반역을 꾀했다고 했다. 기울여져가는 말류에서 일어난 여러 가지 폐단과 패역을 들었다. 반역이기에 선유(宣諭)하여 해산을 명령한 것이다. 수운선생 「포덕문」에 나오는 보국안민과 광제창생의 본도에서 단지 척왜척양 만을 거론했다. 한울님이 내려주는 영부(, 궁을형으로 되어 있고 태극부 궁을부라고도 함)인 부적의 불가사의한 힘에 의해서 재앙과 질병을 물리친다고 현혹한 것이다. 그러나 정작 지성으로 위하는 사람에게 효력이 있다는 부적의 주술적인 것에서 종교적인 것으로의 전이를 생가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동학의 기본 개념인 지기금지 원위대강(至氣今至 願爲大降)의 강령주와 시천주조화정영세불망만사지(侍天主造化定永世不忘萬事知)의 본주 열 석자의 주문과 ‘옛것을 버리고 새것을 도모한다는 것을 봉건의 굴레에서 벗어나 만민평등의 새 질서 확립으로 보지 않은 시각의 차이를 보여준다.

 

 적이 상주에 들어가자 목사 윤태원(尹泰元)은 성을 버리고 도망쳤으며 일본병사가 진격하여 쳐부수었다.…토적문(討賊文)2) 을 지어 각 사에 돌려 보여 기한에 맞춰 거의(擧義)하도록 하였다.(94. 9월 토비)

 

 그런데 지금 국운이 험난하고 사설이 횡행하여 일종의 요괴무리들이 동학이라고 일컬으면서 어리석은 백성들을 속여서 유혹하고 악한 사람들에게 그 법을 전파한 지가 여러 해가 되었다. 그리하여 그 무리들이 불어나서 세력이 커지자 도처에서 추종자를 불러 모아 1,000명 혹은 10,000명씩 무리를 이루어 우리의 성읍을 무너뜨리고 우리의 무기와 군량을 빼앗아갔으며, 우리의 사족(士族)을 때리고 우리의 백성들을 흩어지게 하였다. 그밖에 분수와 법률을 어기며 윤상()을 어지럽히는 등 못하는 짓이 없었다. 팔도의 사람들이 모두 놀라 거의 조용한 지역이 없었는데 호남과 호서가 가장 심하였다. 관부가 정사를 집행할 수가 없고 조정이 명령을 시행할 수가 없으며 백성들은 편안히 생업에 종사할 수가 없고 국가는 하루도 편안할 날이 없었다. 참으로 유사 이래 처음 발생한 대변란(大變亂)이다.(94. 10. 21. 소모)

 

 

 비류들이 늘어나는 이유는 바로 접주(接主)들이 난을 피할 수 있다거나 군역을 면제해 준다거나, 병을 치료해 준다거나, 내세에 부귀를 누릴 수 있다는 등의 말로 유혹하기 때문이다..(94. 10. 21. 소모)

 

 아, 우리나라는 유학을 숭상하고 도를 중시하여 온 나라가 두루 잘 다스려졌다. 그러나 오백년 동안 태평한 시대가 오래되어 문무관료들은 안일에 젖어있고 백성들은 무기를 알지 못하고 장수들은 전쟁을 알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요사스런 비도들은 호미와 가래를 잡은 무리들이나 부적을 갖고 주문을 외는 요괴들에 불과하였으나 이들이 고부 한 고을에서 창기하자 나라(海東) 전역에서 대란이 일어났다. 다행히도 우리 성상께서 발끈 노하시어 장수에게 정벌을 명하시니, 1년 안에 온 나라가 평정되었다.(1895, 1. 27. 소모)

 

 동학을 ‘요괴 무리들’로 ‘요사스런 비도(匪徒)’ ‘비적(匪賊)’ ‘비류(匪類)’로 파악했으며 동학농민혁명을 유사 이래 처음 일어난 대변란으로 규정했다.

 1894922(1020)상주 동학농민군은 봉기하여 상주읍성을 점령, 상주목 객관에 지휘소를 설치하고 민정 실시의 태세를 갖추었다. 그러나 928(1026) 일본군의 공격으로 패퇴 했다. 이때 100 여명이 희생되었다. 상주읍성을 점령한 실상과 총제적으로 기강이 마비된 정황을 엿보게 한다. 아울러 태평 시대 안일만을 추구했던 관료사회의 타성을 지적했다.

 동학의 동()이 지닌 광명과 생명의 빛, 자주와 민주의 주체성과 서세동점(西勢東漸)과 삼정문란(三政紊亂)의 대내외적 위기를 벗어나고자 했던 동학농민혁명의 동기와 수운의 시천주(侍天主), 해월의 사인여천(事人如天), 의암의 인내천(人乃天)의 인간존중의 종지와 사회적 종교적 변화에 대한 원인 규명을 살펴보게 한다. 이것은 계층적 신분사회의 양상을 드러낸 결과였다.

 

 2) 소모사, 소모영의 업무와 감회

 

 “…이에 갑오, 18948월에 마침 소모사로 차하(差下)한다는 명령이 내려서 나는 1017일에 비로소 본군 상주에 도착하여 명령을 받았다”고 소모일기의 서두에 적었다. 이렇게 하여 소모사로서의 직무 수행이 시작되는데 첫 일기는 18941017일부터 시작된다. 20일 벽유당(碧油堂)에 소모영을 설치하였다.

 

 나는 재주가 없고 능력이 부족하여 경상우도라는 중요한 지역을 맡는 것이 적절하지 않으나 임금이 근심하는 것은 신하에게 치욕이 되니 어찌 분골쇄신하는 것을 꺼리겠는가? 다만 이번 변란이 불행히도 선산(先山)이 있는 고향 가까이에서 발생하였다. 대의(大義)는 양심을 가진 자라면 누구나 지니고 있는 것이니 개인적인 사정만 고려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출행하여 장차 병사를 소집하고 군량미를 모아서 저들의 뿌리를 제거하려고 한다.(94. 10. 21. 소모)

 

소모사 정의묵이 상주에 영()을 두고서 의병을 불러 모아 충성과 의리를 격려하였다. 정의묵은 충성스럽고 중후하며 의지가 굳어 평소 영남에서 명망이 있었다.(94. 10월 토비)

 

 소모영(召募營) 유격장(遊擊將)의 직책으로 한 부대를 맡아 적도를 섬멸하기를 청하였다.(94. 11월 토비)

 

 소모사가 별포(別砲) 20명을 가려 붙여주고 전령(傳令)1장과 환도(還刀) 1자루를 주어 영()․초장(哨將) 이하 명령을 따르지 않는 자들을 제어하게 하였다. 이들을 집합시켜 군례(軍禮)3) 를 강하였다.(94. 1113일 토비)

 

 정의묵이 소모사를 맡게 되는 과정과 김석중이 유격장을 맡는 과정이 나타나 있다. 소모사는 충성과 의리, 대의를 중시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고향 상주에서 발생한 난을 뿌리를 뽑아버리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소모사 정의묵이 여러 차례 사람을 보내 도와달라고 청하자 김석중이 소모사를 만나고 ‘저는 차라리 적에게 달려가 죽을지어정 생령이 도탄에 빠지는 것은 차마 볼 수 없습니다’ 고 하는 말을 듣고 유격장의 임무를 맡게 되었다. 유격장은 적도(賊徒) 섬멸의 기개를 보였다. 소모영의 규모를 알게 했다.

 ‘94. 10. 21. 이날 일기는 길게 이어졌다. “마음속의 생각을 드러내어 효유(曉諭)하고 아래에 자신을 새롭게 할 수 있는 방법을 조목별로 기록한다.4) 고 밝혔다. 경내 비류들에게 알리어 잘못을 깨닫고 귀화하여 살아서는 선량한 백성이 되고 죽어서는 정의로운 귀신이 되도록 하면 다행이라고 했다. 그리고 “충신(忠信)을 갑옷으로 삼고 예의()를 방패로 삼으며 민심을 성곽으로 삼아 끝까지 소탕한 뒤에야 그만 둘 것”이라고 했다.

 

 

 향내(鄕內)의 회원들이 번갈아가며 방문하여 소모에 관한 일을 의논하였으나 이러한 어려운 형국에 또 난리까지 겪게 되니 도무지 좋은 계책이 나오지 않아 매우 답답하였다.(94. 10. 23. 소모)

 

 국가가 판탕(板蕩)5) 의 사이와 같이 어지러운 때에 군사의 중임을 맡게 되었다. 그러나 조정에서 별도로 신칙하지도 않고 또 순상도 협력하지 않으며 군량도 없고 병사도 없이 맨손으로 적과 싸워야하니 당연히 몸과 마음을 다 바쳐야 하는 것이 도리이지만 일이 뜻대로 되지 않으니 어찌하겠는가? …창원 수령의 숙소로 가서 서로 근심하고 탄식하며 또 서로 격려하고 돌아왔다. 저녁에 도사(都事) 이동근(東根)과 초관(哨官) 노애산(愛山)이 내방하여 함께 소모의 일이 어려움을 이야기하였는데 탄식이 그치지 않았다.(94. 11. 18 대구. 소모)

 

 본목(本牧)에 도착한 순영의 관문을 보니 집강소를 소모영에 소속시켜 지휘를 받도록 하라고 하였다. 또 공문을 보니 과연 여러 고을을 나누어서 관장하도록 하였다. 상주, 함창, 문경, 의성, 용궁, 예천, 예안, 안동, 풍기, 봉화, 순흥, 영천, 청송, 진보, 영양,15개 고을은 상주소모사 정의묵이 관할하고…(94. 11. 26. 소모)

 

 앞서 소모사로서 중임을 맡아 비도들을 척결하고 안정을 되찾는 소임을 다하기 위해 효유(알아듣게 일러줌)하고 실천해야 할 방도를 조목조목 밝혔다. 오가일통(五家一統) 6) 과 오인일오(五人一伍)로 편성하여 통제와 감시의 기능도 살렸다. 이런 방법으로 헌종 때 천주교인들의 색출을 한 것처럼 범죄자와 역도(逆徒)를 색출하고 이탈자를 방지했다. 이를 활용하여 비류(匪類)들을 귀화시켜 선량한 백성이 되게 하는 선무의 기능도 살렸다. 끝까지 소탕한 뒤에야 그만둘 것이라는 사명과 굳은 의지를 지녔지만 그러나 조정, 순상, 군량, 병사 등 주어진 여건이 열악하여 좋은 계책이 나오지 않고 뜻대로 할 수 없음을 한탄하였다.

그리고 상주소모영의 관장고을과 집강소를 소모영에 소속시킨다는 내용이다.

 

 보은에서 본부로 보낸 공문에서 말하기를 “유격대가 경내에 들어와서 폐단을 일으키고 있습니다.”라고 하였다.(94. 12. 2 소모)

 

 

 300년 동안 훈련을 받지 못한 병졸들과 갑작스럽게 모인 오합지졸들이어서 장수는 병사를 알지 못하고 병사는 전투를 알지 못한다. 총을 들고 군을 따르는 자들은 모두 걱정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을 품고 있으며 의병을 일으킨 선비들도 한갓 인의(仁義)만 떠들어대고 있다.…지방에서 독서하는 선비들이 지금 조정의 명령 아래에서 의분을 떨치며 충성을 바치는 것이 가상하기는 하지만 병졸들을 통솔하는 것이 숨바꼭질을 하는 것과 같으며… 전쟁을 어린아이놀이로 생각하고 와언(訛言)을 책략으로 여기고 있다.…의병을 일으킨 것은 소모사가 조정의 명령을 받아 효유한 데서 말미암았으니 의병으로써 창의(倡義)를 공격하는 것이 어찌 말이 되겠는가? 크게 부끄러워하고 스스로 돌이켜 반성할 따름이다.(94. 12. 5 소모)

 

 병사, 장수, 선비들이 의분을 품고 충성을 다하는 것이 가상한 일이나 의병으로서 지휘 통솔과 임무 수행의 어려움을 실토하고 있다. 이것은 시대상황의 격변에 따른  적응이 어렵고 훈련되지 않은 서투름에서 온 것이다. 여기에 유격대 주둔지역의 폐단과 의병으로서 창의를 공격하는 경우에는 소모사와 유격장이 엄한 군율()로 다스리겠음을 강조한 바 있다. 소모사는 비류에 들어가지 않은 사람들은 의병이 되어야 한다는 규정을 비롯하여 8개의 구체적 항목을 발표하여 시행하였고 유격장은 “의병은 지나가는 곳을 조금도 침범해서는 안 된다. 만약 남의 물건을 탐하는 자가 있으면 죄가 동적(東賊)과 같으니 모두 군율로 다스려 결코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94. 12. 16 토비)라고하였다. 그리고…“유격장 김석중은 백면서생으로 적의 창끝을 무릎 쓰고 지금까지 공로를 세운 점은 사람들이 행하기 어려운 바입니다. 병사들을 데리고 적도들을 체포하고 양식을 싸가지고 다니면서 추호도 양민들이나 귀화한 자들을 괴롭히지 않았으니 그에게 감복하지 않는 자가 없었으며 한 지역이 그 덕택에 안정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제가 비록 사리에 어두우나 결코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것 때문에 국가의 대사를 그르치지는 않습니다.(94. 12. 13 소모) 이어서 “상주목사의 편지에 “옛날에 한신(韓信)과 팽월(彭越)7) 이 있었다면 지금은 모, 김석중이라고 하겠다”라고 하는 말이 있어 내가 보고 탄식하기를 “사람을 장려할 때 너무 지나치게 하면 사람을 무너뜨림이 지나치게 심한 것이 되지 않겠는가? 나는 나중에 발생할 근심을 두려워한다”라고 하였다.(94. 12. 16 토비)

 유격대가 저지른 폐단과 병졸들의 전투에 대한 무지, 선비들의 현실 대응 능력의 부재가 부끄러움으로 오는데 이런 문제는 동학농민군의 ’12개조 기율‘8) 을 떠올리게 한다.

 

 

 아침에 의병장 어른과 함께 객사에 출좌(出座)하여 별포(別砲) 200명과 관포(官砲) 100명 그리고 영관, 초장(哨將), 집사(執事), 전병(典兵), 장재(掌財), 서기, 종사리(從事吏) 21명을 청() 아래로 불러서 월료미(月料米)를 나누어 주었는데 쌀은 도합 3,814, ()1,334, 그리고 짚신은 300켤레였다.(94. 12. 1 소모)

 

 순무영(巡撫營. 한성부에 설치)의 회제에 “군량미가 없으면 병사들을 모집하지 않아도 된다. 여러 고을을 돌아다니면서 부호들에게 곡식을 빌리는 일은 결코 해서는 안 될 일이다. 또 ‘담박(澹泊)하지 않으면 뜻을 밝힐 수가 없고, 영정()하지 않으면 원대한 목표를 달성할 수가 없다’고 하였으니 이는 오늘날 힘써야 할 말이다.”라고 하였다. …소모사의 책무는 오로지 의병을 불러 모으는 것이며 의병의 파임은 이른바 조방장과 좌우부장(左右部將) 및 유격장 등의 명색이 있으며 이 또한 선배들의 기존의 규례임은 임진년과 병자년 이래 영남의 여러 창의록(倡義錄)을 살펴보면 알 수 있습니다

…순무영(巡撫營)의 회제에 ‘군량미가 없으면 병사들을 모집하지 않아도 된다.’라고 하였습니다. 병사가 없으면 어떻게 적도들을 막을 수 있습니까? 적도들이 물러나지 않고 쳐들어오면 관부와 민간에서 축적해둔 것들이 적도들을 위해 축적한 꼴이 되지 않겠습니까? 어리석은 백성들도 이 도리를 알고 있는데 대원융(大元戎 도순무사)의 식견이 여기에 미치지 못하는듯하니 매우 의혹스럽습니다.…과연 순무영의 말대로 하여 군량이 없으면 병사들을 모집하지 않는다면 소모사가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동학의 난 이후에 상주에는 집강소가 생겨났으니 이는 성 안팎의 인민과 이서()들이 조직한 것입니다. 군사들은 부르지 않아도 저절로 모였습니다.(94. 12. 13 소모)

 

 재물이 어찌 부족하지 않고, 백성들이 어찌 궁핍하지 않으며, 나라가 어찌 위태롭지 않겠는가? 나랏일을 걱정하며 밤새도록 뒤척이며 잠을 못 이루었다. 비류들은 법에 따라 처벌을 받는 것이 당연하며 이는 본디 천벌이다. 그러나 가엾은 우리 백성들이 어려운 지경에 처하게 되어 고향에 머물러 있는 자들은 군수물자를 수송해야 하는 수고로움이 있고 전쟁터에 나간 자들은 전투를 해야 하는 괴로움이 있으니 더욱 걱정이 되고 답답하였다. (94. 12. 14 소모)

 

 소모사로서 순무영의 회제에 군량미와 병사의 상관에 대한 예리한 비판과 반론은 소모사의 탁견임을 알겠다. 자발적 자율적 참여에 의한 집강소의 결성은 지역 주민과 이서들의 의식이 깨어있음을 보여준다.

 있어도 늘 부족한 것이 재물일진데 백성들의 궁핍을 안타까워하고 나아가 전란 속에 수송과 전투에 나가야하는 괴로움과 나랏일을 걱정하는 소모사의 심회가 아리게 다가온다. 그런 가운데에도 월료미와 전()과 짚신을 지급했다는 것은 사기진작과 목숨을 내건 충정에 보답하는 특단의 조치로 보여 진다.

 

 

 내가 헤아려보니 반드시 이길 수밖에 없는 까닭이 다섯입니다. 우리는 도리에 따르고 저들은 거역한 것이 첫 번째요, 그들이 생각지 않았을 때 나가는 것이 두 번째요, 날씨를 보니 서북풍이 불어 기쁨이 있을 조짐이니 세 번째요, 양쪽에 달무리가 약간 검은 것은 적이 패망할 조짐이니 네 번째요, 도참설에 이르기를 ‘속리산에 흰옷을 입은 적이 있으면 마고성(麻姑城) 아래 땅이 피로 가득 찬다’라고 하였는데 지금 도참설은 믿을 것이 못되지만 이치로 미루어보아도 반드시 패할 것입니다. 공들이 우리나라를 위해 힘을 내었으니 감사할 길이 없습니다.(94. 12. 17 토비)

 

 선무사 이중하가 내무협판(內務協辦)으로 소환되어 한양으로 가다가 지나는 길에 본영을 방문하였다. 이때 그에게 소모의 전말에 대하여 대충 설명을 하였다. 그는 서울로 올라간 뒤에 응교사촌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그 편지에서 김유격장의 북곡(北谷 보은 종곡(鐘谷)의 오기. 마을 사람들은 보통 북실이라 부름)의 승리는 그 공적이 과오를 덮기에 충분하다고 말하였다.(94. 12. 18 소모)

 

 보은 수령 이규백이 청주에서 돌아와 소 1마리를 끌고 승리한 병사들을 위로하기를 청하며 말마다 치사하기를 “공의 힘을 입어 근처 지역의 백성이 집안을 보전하고 죽은데서 다시 살아났으니 공의 은혜를 논하면 산처럼 높고 바다처럼 깊습니다. 하물며 극악한 적을 크게 쳐부수어 삼남이 평안해졌으니 공의 공은 비록 역사에 실리더라도 고인에 뒤지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94. 12. 18 토비)

 

 북정에 당도하자 본 목사 이만윤이 나와 맞이하였고, 토성에 이르자 진장(鎭將) 유인형이 나와 맞이하였다. 마침내 진남루(鎭南樓)에 오르니 소모사 장락()이 군사들을 위로하였으며 본군의 부모는 일어나 춤추며 말하기를 “즐겁고 통쾌하다. 통쾌하고 즐겁다. … 너는 숟가락을 팔고 나는 솥을 팔아 집집마다 비를 세워 공의 장수를 빌자”라고 하였다.(94. 12. 19 토비)

 

 군대를 돌려 북정(北亭)에 이르자 성주(城主)가 육방()과 삼현(三絃)을 데리고 와서 유격대를 보고는 진심으로 감사의 뜻을 표한 뒤에 출발하였다. 악기와 기치가 전후에서 호위하였으며 사이사이에 마을의 장정들이 창을 들고 북을 치며 춤을 추었으니 마치 태평성대와 같았다. 토성(土城)에 도착하자 진장(鎭將)이 일행을 인도하여 남문을 통해 들어갔다. 태평루(太平樓)에서 잔치를 베풀고 군사들에게 따뜻한 술을 내어주었으며 군사들은 모두 기뻐서 춤을 추었다.(94. 12. 20 소모)

 객사(客舍)에서 군사와 백성들을 대대적으로 소집하여 잔치를 베풀었다. 안동, 용궁, 함창의 군대를 돌려보내었으며 각각 노문을 지급하였다.(94.12. 21 소모)

 

 보은 종곡에서 동학농민군을 궤멸시킴으로써 사실상 소모사와 유격장의 임무는 끝이 난 셈이다. 왜 보은인가? 탄압받고 억눌리고 무시당했던 수 만 명의 백성들이 살기 좋은 새 세상을 열기 위해 모인 곳이 보은 장내리였다. 이름 하여 ‘보은취회’ 이른바 민회(民會)9) 가 열린 곳.  보은은 십승지(十勝地)의 하나요, 교통의 요지이며, 전략적 요충지이다. 그래서인지 해월은 1887년 보은에 법소(法所) 곧 동학교단의 중앙본부를 설치했다. 여기서는 동학의 핵심간부들 가운데 육임(-교장, 교수, 도집, 집강, 대정, 중정)의 직책을 맡은 사람들이 수련을 했다. 이러한 내력을 가진 동학의 성지에서 혹한 속에 궁지에 몰렸던 2,600여 명의 많은 동학군이 살육 당했다. 선무사와 수령의 말은 유격장의 전공을 높이 평가한 것이다.

 

 유격장 김석중의 판단대로 이길 수밖에 없는 전쟁을 이기고 돌아온 개선장군의 환대와 잔치가 태평성대를 구가하듯 성안 태평루와 객사에서 있었다.

 

 3) 동학농민군의 전말

 

 전에 집강소에서 체포한 비도 9명을 장날에 태평루(太平樓)에 형장을 설치하여 엄하게 형을 가하여 위엄을 보이고 다시 진심으로 귀화하라는 뜻을 원근에 효유하였다.(94. 10. 22, 소모)

 

 집강소의 병사 800여 명을 데리고 북장대(北將臺)에서 군사훈련을 하고 죄인 5명의 죄를 다스렸다.(94. 10. 23. 소모)

 

 죄인 김경준(景俊)을 잡아와서 엄하게 곤장을 친 뒤에 칼을 씌워 가두었다.(94. 10.29. 소모)

 

 임곡(壬谷)의 동학의 괴수 강선보(姜善甫)와 가리(佳里)의 강홍이(姜弘伊) 그리고 영수()의 김경준은 거접(巨接)으로 용서할 수 없는 죄를 지었다. 그래서 강선보는 태평루 앞에서 효수하였고, 강홍이와 김경준 2놈은 남사정(南射亭) 아래에서 총살하였다.…상사 강춘희의 편지를 받고, 청산, 황간, 영동, 보은 등지에서 경군과 일본군들이 소탕작전을 벌인 덕분에 저들 무리들 중에 죽은 자가 600-700명에 달하였으며…·(94.  11 .7 소모)

 

 적의 괴수인 접주 남진갑(南震甲), 이화춘李化春), 접사(接司) 구팔선(具八善), 김군중(軍仲) 및 상주에서 군기를 약탈한 적 유학언(學彦) 등을 중모 장터에서 총살하였다. 방문(榜文)을 내어 백성들을 안심시켰다.(94. 11. 14 토비)

 

 죄인 신두문을 잡아들여 무덤을 파헤치고 사람을 헤치며 무리를 모다 성을 함락시키려는 죄로서 남문 밖에서 총살하였다.(94. 11 .15 성주. 소모)

 

 밤 오경(五更)에 이른바 편의장(便義將) 조왈경(趙曰京)이라는 큰 괴수를 왕곡(旺谷)에서 생포하였다.(94. 11. 15 토비) 조왈경을 판계점에서 총살하였다.(94. 11. 16 토비)

 

 화동면 덕곡(德谷)에 들어가 분수를 범하여 강상을 어지럽힌 적 안치서(安致瑞)를 사로잡고 그곳에 사는 백성을 타일러 귀화하게 하였다. 접주 신광서(辛光瑞), 정기복(鄭奇福) 등을 쫓아가 잡게 하였다.(94. 11. 17 토비)

 

 

 병력을 인솔하여 화동면으로 갔다. 밤중에 대곡(岱谷)에 가서 청주 대접주 김자선(子先) 및 접사 서치대(徐致大) 접주 정수여(鄭須汝)를 사로잡았다.…김자선은 원래 보은 장내에 거주하였는데 이른바 대접주로 1017일 그 무리 4,500명을 거느리고 청주를 함락하려고 세교(細橋) 장터에 이르렀으나 일본 병력에 패하였다.…상주에 잠입하여 다음 기포를 도모하여 앞서의 치욕을 씻으려 하였다.(94. 11, 18 토비)

 

 김자선, 정수여, 서치대를 화령 장터에서 총살하였다.…밤중에 거괴 김민이(民伊), 원성팔(元性八) 등을 장내 후동(後洞)에서 잡았다. 이 밤에 하늘은 얼음 같았고 달은 서리 같았다.(94. 11. 19 토비)

 

 새벽에 병력을 3개부대로 나누어 평원동(平原洞)에서 김철명(哲命) 강만철(姜萬哲) 김달문(達文) 등 세 적을 사로잡았다. 오시 정각에 난을 일으킨 괴수 원성팔, 김달문, 김철명, 강만철을 광주원에서 거괴 김민아는 봉암세서 총살하였다.(94. 11. 20 토비)

 

 유격장 김석중의 첩보를 처음으로 보니 ‘군대를 통솔하여 중모 땅을 출발하여 동도 5명을 시장에서 총살하고 판계(板溪)에 주둔하고 있습니다. …또 김유격장의 첩보를 보니 중모에서 화령으로 가서 동괴(東魁) 8명을 시장에서 총살하고 사곡(思谷)에 주둔하고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순영에 다녀온 열흘 동안에 본부에서 또 포졸을 동원하여 6명을 잡아 가두었다. (94. 11. 22. 소모)

 

 식사 후에 본목(本牧)의 진장(鎭將)과 함께 태평루에 올라 비적의 괴수 6(손덕녀, 최선장, 이의성, 장판성, 남융일. 억손이)을 총살하였다. 김유격장의 첩보를 통하여 그가 임곡에 도착하여 1명을 총살하였음을 알게 되었다.(94. 11. 24.소모)

 

 진군하여 와지(瓦池)로 가서 접사 여성도(聖度)를 사로잡았다. 밤에 병력을 네 부대로 나누어 청산과 보은의 네 마을로 들어가 최시형이 왕래하는 소굴의 우두머리를 사로잡았다. 여적()은 기포하여 수천 명을 거느리고 성주로 가서 성을 함락하고 무기와 군목을 탈취했으며 상주의 변란 후에 다시 기포하려고 꾀한 자이다.(94. 11. 27 토비)

 

 월남 전점에서 다시 남진갑을 총살하고 청산 효림(孝林)에 들어가 굶주린 사람들 20호를 구제하였다. 남적의 몸을 자세히 검시하니 네 곳에 총을 맞았으나 모두 옆으로 맞고 명중하지 않아 도망쳐 살았다.(94, 11. 28 토비)

 

 병사 5명을 보내 거괴인 운량도총관(運糧都總管) 배학수(裵學秀), 팦로도집강(八路都執綱) 김경연(景淵)을 청산읍에서 사로잡게 하였다. 청산읍 본관 조만희가 배적(裵賊)을 관아의 안채에 숨겨두고 유격장에게 편지를 보내 목숨을 구걸하였다.(94.11.29 토비)

 

 유격장의 첩보를 보니 “지난날에는 포위망을 뚫고 빠져 달아난 남진갑을 다시 청산에서 체포하여 그 자리에서 총살하였으며 최적(崔賊최시형)의 소재지를 탐색하고자 청산과 영동 지역에서 머물면서 기미를 살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탄약을 보충해 주시고 병정을 추가로 보내주십시오”라고 하였다.(94. 11. 28 소모)

 

 

 다시 유격장의 첩보를 보니, 또 적괴 4명을 총살하였으며 청산의 거괴를 진중에 잡아두었다고 하였다. (94. 11. 30. 소모)

 

 유격장의 첩보를 보니, “청산으로부터 영동으로 가서 동학의 무리 김경연 등 4놈을 총살하니 호서 사람들이 두려워하였습니다.(94. 12. 6. 소모)

 

 아침을 먹은 뒤에 군사와 백성들 1,000여 명을 소집하여 남사정에 나가서 2놈을 효수하고 4놈을 총살하여 적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고 또 적을 방어할 의지가 확고함을 보여주었다. (94. 12. 12. 소모)

 

 남촌(南村)의 거괴 4놈이 9월의 변고 이후에 호서로 도망가서 최적(崔賊) 및 이괴()와 함께 몰래 무리를 모아 무주로 가서 오늘의 화를 조성하였다. 그런데 이들이 몰래 남촌으로 들어와서 기포하여 내응하고자 한다는 정보가 입수되었다. 그래서 즉시 정예 포수를 출동시켜 이들을 잡아다가 엄히 조사하여 승복을 받아내었다. 그래서 당일 오시에 문루(門樓)에서 개좌(開座)를 하여 이들을 모두 효수하자 온 경내가 썰렁하고 부중(府中)이 숙연해졌다.(94. 12. 14 소모)

 

 신촌(新村)에 도착하여 잠시 쉬면서 마을의 장정들을 효유하였다. 율원에 도착하여 또 신촌에서처럼 효유하였다. 저녁에 화서시(化西市)에 도착하여 회군하는 유격장 김석중과 만났다. 그가 보고하기를 “16일에 청산에서 군대를 출발하여 보은, 수피(水陂), 원암, 신전리(新田里)에 도착하니 적도 수만 명이 보은읍으로 가는 길에 공해를 부수고 민가 2채를 불사르고 한 부()를 분탕질한 뒤에 풍취점에 머무르고 있는 적도들과 합세하여 종곡촌으로 들어가서 주둔하고 있었습니다.(94. 12. 19 소모)

 

 김제홍, 성걸, 김상오, 유우석 등이 날카로운 칼을 뽑아 목을 자른 것이 10여 명이었고 어지러운 총에 맞아 죽은 것이 2,200여 명이었고 야간 전투에서 살해한 것이 393명이었다. 포획한 우마 60여 두, 깃발과 북 수십 면()은 모두 일본 병사들에게 주어 서로 구해줬던 공을 사례하였다.(94.12.18 토비)

 

 이 전투에서 적의 괴수 이른바 대접주 임국호, 이원팔, 김군오, 정대춘 등의 목을 베었고 그 외에도 죽은 자가 있지만 그 이름을 알 수 없었다.(95.12.18 토비)

 

 종곡의 동구에 이르자 적도 4명이 불을 피워놓고 경계를 서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먼저 칼로 3명을 찌르고 이어서 한 놈을 묶은 뒤에 일일이 취초(取招)하자, 적도들이 청산에서 이 동()으로 와서 머무르고 있으며 지금 금소촌(金召村)의 촌가에 있는 자들은 바로 동학의 괴수 45명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집을 포위하고 일제히 총을 쏘았더니 총에 맞아 즉사한 자가 3명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임국호와 정대춘이 그 안에서 죽었다고도 하였으나 확실히는 알 수 없습니다.…총에 맞아 즉사한 자들이 전후하여 모두 395명이었으며 그 밖에 뒷 골짜기의 시내와 숲속에서 죽은 자들이 골짜기와 계곡을 가득 메웠는데 이들은 서로 뒤엉켜 그 숫자가 몇 백 명이나 되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94.12.19 소모)

 

 

 남사정에 가서 1명을 효수하고 9명을 총살하였다. 이어서 들으니 적도들이 사방으로 흩어져서 청천(靑泉)으로 달아나고 혹은 괴산으로 달아났다고 하였다.(94. 12. 22 소모)

 

사정에 나가서 사격훈련을 하고 동학의 괴수 3놈을 죽였다. (94. 12. 24 소모)

 

 정무정(鄭茂亭)과 이이당(二堂)의 편지를 보고 호남의 전봉준과 손화중이 이미 체포되고 호남과 호서가 평정되어 전쟁이 끝나 조정에서 군대를 철수하려는 논의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95. 1. 5 소모)

 

 모서 약정(約正)의 품목(稟目)을 보니 “비도들이 여전히 영동과 옥천 등지에서 선동을 하고 있다고 하였다. 그래서 즉시 정탐을 하도록 하였더니 경군과 일본군이 비도들을 토벌하기위하여 용산시장에 모였는데 그 숫자가 400여 명이 된다”고 하였다.(95.1.12 소모)

 

 186212월 황문규가 상주 접주로 임명되면서 비롯한 상주동학농민혁명은 동학인들의 연이은 죽음의 기록이다. 상주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에서 펴낸 『동학농민혁명 제116주년 전국기념대회 자료집』의 사건일지를 보아도 거의 전부가 죽음에 대한 기록이다. 『소모일기』와 『토비대략』에 기록된 것을 발췌하여 동학농민군의 전말이라고 했지만 전과에 있어서는 과장되거나 축소될 소지도 없지 않다고 본다. 대충 헤아려도 상주와 보은 종곡과 인근에서 동학농민군이 약 2,760 여명이 희생되었다. 검시가 어려워서 그리고 갑질의 입장에서 파악된 희생자가 이처럼 많았던  상주동학농민혁명을 어떻게 볼 것인가?  어느 시각에서 보아도 아프고 슬픈 기록이다. 갑오년 동학농민혁명 100주년 기념을 하면서 처음으로 모신 해원의 자리가 새삼스럽다.

           

 4) 민심과 사회상

 

 소모에 관한 일이 아득히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백의로 의병을 일으키는 일은 옛날부터 어려웠지만 이러한 때의 이러한 거사는 더욱 답답하였다. 이 때문에 지역의 인사들도 모두 자기 집으로 흩어졌다10) .(94, 10. 28. 소모)

 

 향원들이 이따금 찾아왔으나 의병을 일으키는 문제에 대해서는 전혀 대책 없이 머리를 숙이고 관망만 하며 나서서 일을 맡으려고 하지 않았다.(94. 11. 2 소모)

향원들이 의병을 일으키는 일을 게을리 하며 나서려 하지 않았으며 조방장은 사임하는 글을 올렸다. 답답한 마음을 금할 수가 없었다.(94. 11. 4., 소모)

 

 

 귀화한다는 소장()이 날마다 관청에 접수되어 가득 찼다. 그런데 얼핏 들으니 중화(中和) 등지에서 동학을 옹호하는 무리들이 몰래 호서의 적들과 호응하려 한다고 하였다. 왕명이 지엄하고 각처에서 의병들이 막 일어나려고 하는데 옛 습성을 바꾸지 않고 거기에 미혹되어 정도로 돌아올 줄을 모르니 슬프고 또한 애통하다.(94. 11. 4., 소모)

 

 상주와 선산 및 주천(酒泉예천)의 아전들이 제멋대로 집강소를 결성하여 동학의 비적들을 토벌한다는 이유로 도리에 맞지 않는 못된 짓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94. 11. 18. 소모)

 

 18639월과 12월에 우산서원과 도남서원에서 각각 동학을 배척하는 통문(通文)이 발송되었다. 도단이 통문에“…저희들이 듣기에는 양호의 비류들이 근래에 더욱 늘어나서 성을 공격하고 백성들을 약탈하여 난리의 형세가 이미 드러났다고 합니다.…국가의 안위가 달린 시기에 목숨이 붙어 있는 자들이라면 이를 소홀히 보아 넘기면서 적들이 오지 않기만을 바랄 수 없습니다. 저희들은 타고난 천성을 지키면서 교화가 행해지는 곳에서 살고 있으며,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적개심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이에 우선 통문을 발송하고 두루 알립니다. 바라건대 모든 군자들은 분연히 일어나 …” 두 서원의 유사는 이렇게 동학의 실상을 알리고 분연히 일어날 것을 설득 권유했다. 동학 발생 초기에 빠르게 대응한 셈이다. 그러나 2십 년이 지나서 일까 지역인사들이 외면하고 향원들이 수수방관 관망만 하며 정도에서 이탈한 귀화의 소장이 날라드는 현실에 답답함과 애통함을 토로하고 있다. 민심의 이탈과 집강소의 행패가 드러났다.

 

 큰눈이 왔다. 사곡(沙谷)에 병력을 주둔시켰다. 본동 사민(士民)이 의연금을 내고 나와서 맞이하여 소를 잡아 대접하니 병사들이 기뻐하였다.(94. 11. 21 토비)

 

 10월의 공첩(公牒)을 보니 특별히 기록할 만한 것이 없었다. 그러나 시전상인들이 모두 정도를 떠받치고 동학을 배척하고자 의를 드러내서 재산을 덜어내어 순무영의 군수에 보태었다. 우리나라 백성들이 윗사람에게 충성하고 임금을 사랑함이 이와 같다.(94. 12. 3 소모)

 

 군대가 이르는 곳에서 군량은 어떻게 조달하였느냐고 묻자 대답하기를 “율계를 떠난 뒤로는 상주에서 출연한 곡식을 조달하여 사용하였습니다. 그리고 지나는 마을에서 모두들 의로운 마음으로 출연하여 도와주었으며 백성들이 크게 기뻐하였습니다. 종곡에서는 적도에게 획득한 군수물자 가운데서 큰 소 2마리를 동중(洞中)에 내어놓아 난리가 끝난 뒤에 경작할 때 사용하라고 하자 길 가던 사람들도 모두들 숙연해 졌습니다”라고 하였다.…화시(化市)에 있던 군사 400여 명과 종군색리(從軍色吏)에게는 의연곡식을 특별히 지급하였다.(94.12.19 소모)

 

 평부소(平賦所)에서 별포(別砲)의 정월 급료와 관포 및 여러 집사들의 급료를 이전의 수량과 같이 지급하였다.(94. 12. 25 소모)

 

 본영(本營)에서 200금을 내어서 서쪽으로 전투를 하러 나갔던 장수와 군사들에게 상을 주었다.(94. 12. 26 소모)

 

 

동춘당(同春堂) 송준길의 후손인 참판 송도순(宋道淳)의 편지를 보니 “그의 동생인 진사(進士)형이 화북의 광정리(光亭里)로 우거하였는데 동학의 무리들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군사들에게 학대를 당하여 편안할 날이 없다”고 하였다. 그래서 특별히 전령을 보내어 별도로 그를 지키고 보호하도록 하였다.(94. 12. 27 소모)

 

 향약이 발달된 상주, 상부상조(相扶相助)와 환난상휼(患難相恤)의 정신이 충일한 상주인의 정신이 드러나 있다. 사민이 의연금을 내고 시전상인들이 재산을 덜어내어 군수에 보탰으며, 군량의 조달도 의로운 마음으로 출연함으로써 해결되었다.  종군색리에게 준 의연곡식이나  급료와 상을 주는 이러한 사례는 어려웠을 때 함께하는 공동체의식의 발로임을 잘 반증하고 있다. 농경사회의 두레에서 각종 계(위친, 상포, 송아지, 금가락지)로 뒤이어 친목계로 이어지는 모임이 유독 상주가 많음도 이해가 간다. 그리고 동춘당 송준길의 후손에 대한 배려는 당파로 보아서는 서인이지만 인인애에 바탕을 둔 포용력을 보여준 사례라고 하겠다.

 

 당시 본읍에는 각지에서 위급한 상황을 알리는 문서가 한꺼번에 몰려 마치 눈 조각 같았으며 성 안이 소란한 것이 솥에 물이 끓는 것보다 더하였다.(94.12.10 토비)

 

…그런데 가장 급박한 것은 온 성내의 인심이 새와 물고기가 놀란 것처럼 마치 끓는 솟과 같았다는 점이다. 그래서 직접 다니면서 효유하고 또 일을 잘하는 노련한 아전들을 뽑아서 4곳 성문을 지키도록 하였다.(94. 12. 12 소모)

 

 당시 청산 수령은 성을 버리고 먼저 도망가서 금백(錦伯)을 만나 유격장이 와서 청산의 백성들을 학대한다고 거짓말을 하였다. 또 정부에 유언비어를 흘렸다.…영영()에서는 상주목사에게 자세히 조사하여 보고하도록 하였다. 이에 소모영의 모든 사람이 이 때문에 두려워하였으나 나는 듣고 웃으며 말하기를 “내가 이 일을 하는 것은 명예와 이익을 구함이 아니요 오직 충의로 하는 것이다. 지나는 촌과 집을 조금도 범하지 않은 것을 하늘이 위에서 살피시고 귀신도 촘촘히 늘어서 알고 있다. 조금이라도 죄를 범하였다면 만 번 죽어도 오히려 가벼울 것이다. 마음으로 돌아봐도 꺼릴 것이 없으니 다만 천명을 기다릴 뿐이다. 어찌 두려워하며 어찌 염려하겠는가”라고 하였다.(94.12.14 토비)

 

 세상일이란 참으로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이 사람이 포의로 공을 세운 사실은 이제까지의 문첩(文牒)을 통하여 충분히 입증할 수 있는 사실이었다. 그런데 그 공을 덮어두고 그 죄를 나무라는구나. 이는 맹영재와 선봉장 이규태가 앞장서서 적을 토벌하여 임금께서 그 공적을 칭찬하셨는데도 사람들의 비방을 받아 그를 소환하여 논죄하라는 의논이 생겨나기에 이른 것과 같다. 세상일이란 참으로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94. 12. 14. 소모)

 

 각지의 위급한 상황을 알리는 문서가 눈 조각같이 쏟아지고  물 끓는 것보다 더한 소란스런 사회상의 비유가 생생하다. 그런 와중에 유격장의 백성 학대와 소모사의 비애가 감지된다. 소모사가 하는 일이 명예와 이익을 위함이 아니라 충의로 하며 죄를 범했다면 만 번 죽어도 마땅하다고 했다. 비방과 모함이 사람을 여리게 하고 의욕을 저하시킨다.    

 

 

사격시합을 한 뒤에 큰 소 한 마리와 쌀 50되를 내어서 군사들을 배불리 먹이고 날이 저물어서야 돌아왔다.(94. 12. 7 소모)

 

운곡(雲谷)에 사는 황민과 지산동 사람이 술, , 담배, 과일을 가지고 와서 군인들을 위문하였다.(94,12.15토비)-

 

128일 일기에도 “영관에게 고을로 돌아간 뒤에 소를 잡아서 사졸들을 먹이라고 하면서 이들을 위로해 주었다.”고 했으며 1217일 일기에도 “안동에서 온 300여명 군사에게 소를 잡아 먹이라고 명령을 내렸다.”고 했다. 잘 먹어야 힘이 나는 법, 소는 모든 것을 인간을 위하여 온몸을 바친다. 우덕송을 읊을 만하다.

 

아침에 일어나서 짐을 꾸렸다. 문 밖에는 눈이 3자나 내렸다. 하인들과 병정들이 모두 눈이 많이 쌓여 길이 험하다고 백방으로 만류하였다. 그러나 난리가 조용해진 이때에 어머니를 모시고 새해를 맞아하는 것은 당연한 정리였다. 그래서 옷을 털고 말을 탔다.…위로는 임금님의 근심을 덜어드리고 아래로는 노모의 마음을 위로하였으니 금년 한 해를 헛되이 보낸 것은 아니었다. 밥짓기를 재촉하여 데리고 온 병정들을 먹이고 또 노자를 주어 떠나보냈다.(94. 12. 29 소모)

 

새벽에 선조의 사당을 배알하였다. 진시에 수령의 편지가 도착하였다. 이 편지를 통하여 군대를 파한 뒤에 관부(官府)와 양반가의 하인들이 민촌(民村)에서 폐단을 일으키는 일이 있어서 엄히 주의를 주었음을 알았다. 여러 부로()들을 배알하였다. 노친을 모시고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떡을 굽고 술을 마시면서 밤새도록 즐겼다. 전쟁으로 쌓였던 피로가 오늘 한꺼번에 풀렸다.(94.12.30 소모)

 

술과 안주를 마련하고 본영 아래에 있는 여러 이졸들을 객사로 불러 모았다. 진장과 유격장도 합석하였다. 자리가 파한 뒤에 이졸들을 불러 무기를 반납하고 귀농하여 각자 편안히 생업에 종사하라고 하였다. 간혹 눈물을 흘리면서 차마 떠나지 못하는 자들이 있었다. 이들은 병졸생활에 익숙해져서 그런 것이 아니라 비바람을 맞으며 삶고 죽음을 넘나들며 5-6개월 동안 기쁨과 슬픔을 함께하였기 때문이니 그 사정이 또한 측연하였다.(95.1.24 소모)

 

 소모사로서 진력하다가 세모에 노모를 위로해드리고 선조의 사당에 참배하며 부노들을 배알하고 아이들과 떡을 구워 먹으며 밤 이슥도록 즐겼단다. 한 집안의 아들이자 아버지로서 평범한 생활인으로 돌아간 장면이 정겹다. 산다고 하는 것이 이런 소소한 가정생활에서 보람과 행복을 누리는 것이 아닌가.

 뿐만 아니라 만남과 헤어짐의 아쉬운 석별의 자리, 이졸과 유격장이 함께한 숙연함이 묻어난다. 흔히 말하듯이 생사고락을 같이한 사람들이니 쉽게 잊힐 리가 있겠는가?

 

 

순사(巡使) 가사가 상주목에 대단히 화가 나서 수리(首吏)를 잡아들이라고 하였음을 알게 되었다. 전에 순영의 군사들이 이 고을에 왔을 때 겉으로는 구원하러 왔다고 해놓고 실제로는 폐단을 일으켰으며 종곡에서의 위기상황을 먼 산 쳐다보듯이 하며 시장에서 한가롭게 지냈다. 그래서 수령이 태평루에서 이들을 꾸짖었는데 이는 공분(公憤)을 표출한 것이었다. 그런데 당영(棠營)에서 이런 조치를 취하였으니 매우 의아스럽다.(95. 1. 1 소모)

 

상사(上舍) 종제의 편지를 보고 종곡에서의 전투 이후에 경향각지에서 사람들이 지나치게 모함을 하여서 염찰사(察使)가 이를 조사하기 위하여 떠나기에 이르렀음을 알았다. 세상일이 태항산()처럼 험준하여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95. 1. 19 소모)

 

구원이 폐단으로 나타나서 공분을 표출한 일에 도리어 수리를 잡아들이라니 분통 터지는 일임에랴. 공이 따르고 명예가 따르는 일에는 으레 있을 수 있는 일이지만 윗 기관의 처사가 온당치 못하고 정실에 싸여 고통과 실망을 안겨주는 일이 어이없다. 모함은 병이다. 서로를 아프게 한다. 사실이 전도된다면 황당하고 분통이 터질 일이 아닌가? 꽈배기처럼 꼬인 심보가  얄밉지 않은가?

 

 5) 일본인, 일본군에 대한 기록

 

 동학의 난이 사방에서 일어나 무리들을 거느리고 성을 차지하여 그 위세가 매우 장대하였다. 그런 까닭에 조정에서는 크게 놀라 군대를 파견하고 또 일본군대를 빌려서 사방으로 출정하게 하니 그 모습이 늠름하였다. 일본군 80명이 서울에서 호서를 지나 진주로 향하였다. 이들은 지나면서 본군의 성으로 들어왔는데 그들의 기치와 무장은 햇빛에 번쩍이고 그 위풍은 서릿발 같아서 매우 두려웠다. (94 .11. 3. 소모)

 

 달성산(達城山) 아래에 이르자 참에 머무르거나 행상을 하는 일본인들이 셀 수 없이 많았는데 참과 옥()을 개설해 놓은 것이 서울의 이현(泥峴진고개)과 흡사하였다.(94. 11. 17. 대구. 소모)

 

 유격장의 첩보를 보니 “적도들은 청산에 머물고 있으며, 청주의 군대는 퇴각하여 원암(元巖)에 주둔하고 있고 일본군은 황간에 있으면서 김산 소모영의 군대와 서로 연락을 하고 있는데 그 위세가 상당하다고 하였다.(84. 12, 14. 소모)

 

 이날 밤에 황간에 머무는 일본 육군 보병 소위 구와하라(桑原)가 병력 16명을 인솔하고 와서 만났다.…구와하라씨는 나이 27새로 성실하고 신중하며 엄중하고 꼼꼼하며 두루 살펴 한 번 보았는데도 오랜 친구 같아서 함께 죽기를 다짐하였다.(94. 12. 15 토비)

 

 새벽에 유격장이 편지를 보니 “황간에 온 일본군이 16명이며 또 추후에 65명이 더 왔습니다.(94.12.15 소모)

 

 

유격장의 편지를 보니 “일본군 16명이 다시 율계에 모여 있는데 장차 성현(星峴)으로 옮겨서 주둔하려고 합니다.… 또 군관 차재형이 올린 고목(告目)을 보니 “유격대는 보은의 마로시(馬老市)로 이동하여 주둔하고 있습니다. 일본군과 우리 군사를 합한 숫자가 231명이고 용궁과 함창의 포수가 도합 270명입니다.(94.12. 16 소모)

 

 밤중에 구와하라를 돕는 부대로 일본 육군 보병 대위 미야케(三宅武義)가 병력 13명을 인솔해 왔고 탭봉에 있던 일본 병력 8명도 뒤이어 왔다. ('94.12.16 토비)

 

 오시에 유격장이 보낸 편지를 보았다. 이것은 군관 차재행이 가지고 온 것이다. 그 편지에는 “지금 일본군과 함께 청산에 주둔하고 있는데 내일 보은의 원암으로 가서 적을 토벌하려고 합니다.”라고 하였다.(94.12.18 소모)

 

 이날 새벽에 보니 적도는 산 위에 늘어서서 이미 포위하는 형세를 이루었다. 이에 미야케씨가 오른쪽 산 아래 엎드려 위로 공격하고 구와하라씨는 왼쪽 산 아래 엎드려 위로 공격하며 나는 가운데 길의 텅 비어 있는 땅을 끼고 마주하여 공격하였다.(;94.12.18 토비)

 

 일본장교들과 서로 작별하였다. 미야케씨는 우마 7두를 보냈고 구와하라씨는 은화 20원을 노자로 주면서 말하기를 “제가 동양을 두루 다녔지만 대인처럼 뛰어난 공적이 있는 분은 처음 봅니다. 임금께 아뢰는 날 저희들의 공을 치사할 것은 없습니다. 우마는 비록 보잘 것 없으나 군사들을 위문하고 은화는 약소하지만 정표로 보냅니다.”라고 하엿다.(94.12.19 토비)

 

 그래서 17일 밤 삼경에 귀인교(貴人橋)에서 식사를 하고 의병포수 200, 일본군 43, 저의 동생 김직중, 성귤, 성걸, 김제홍, 황교택 등과 약속을 하고 출발하였습니다. …우리 군사들은 좌대(左隊)와 우대(右隊)로 나누었으며 일본군이 가운데에 위치하고 우리 군사들은 좌우를 맡아 협력하여 총을 쏘았습니다.…우리군사들이 정상을 탈환하자 일본군들도 봉우리의 좌측에서 올라왔으며 늘어서서 총을 쏘아대자 마침내 적도들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였습니다.…마을에 들어간 뒤에 적도들의 군수물자(輜重)를 획득하였는데 우마(牛馬) 100여 필과 양총(洋銃), 약환(藥丸) 및 상당수의 집물() 등을 이루 셀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모두 일본인들이 가져가고 우리 군대가 얻은 것은 단지 우마 112, 환도(還刀) 15자루, 철창(鐵槍) 42, 기치 10, 나팔 한 쌍 뿐이었습니다.(94.12.19 소모)

 

 미야케씨를 낙동 병참사령부로 돌려 보냈다. 이날 저녁 구와하라씨가 편지를 보내 문안하였다. 그 편지에 “처음 제가 공을 율계에서 만났을 때 모습은 온화하고 말은 신실하여 한 번 보았는데도 오래 된 것 같았으며, 며칠을 같이 있으매 간절함이 더욱 절실했습니다. 제가 비록 노둔하지만 어찌 감히 느끼지 못하겠습니까? 대개 공이 삼군을 지휘하는 것이 또한 이와 같았습니다. 오호라! 공의 덕은 가히 우러를 만하고 공의 의는 가히 사모할만합니다. 비록 옛날의 손자 오자라도 어찌 이보다 더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직책을 보전하고 후에 상주를 지날 때 공에게 절하고 싶은 마음이 밤낮으로 솟구치는 것을 그만 둘 수 없습니다. 이처럼 매우 추운 계절에 임금과 나라를 위해 부디 몸을 아끼십시오”라고 하였다.(94. 12. 22 토비)

 

 

 구와하라씨가 내방하여 함께 포정(浦亭)의 고향 집에 함께 갔다. 밤에 구와하라씨가 아들 규수를 불러 더불어 필담을 나누고 감탄하며 칭찬하여 말하기를 “어린 나이인데도 재주는 헤아릴 수 없습니다. 12세 소년이 이처럼 일찍 공부가 밝은데 어찌 구미 각국의 책을 가르치지 않으십니까?(94. 12. 28 토비)

 

 일본군의 참전과 참전 병사의 수와 역할 및 작전상황을 알 수 있다.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자 청나라 지원군이 조선에 들어왔음을 빌미로 조선에 일본군을 주둔시키게 된다. 두 나라의 세력 다툼으로 청일전쟁이 일어나고 일본이 승리했다. 1차 동학농민혁명은 아래로부터의 개혁으로 폐정개혁안을 정부로부터 받아낸 것은 큰 의미가 있다. 그러나 2차 봉기는 항일투쟁으로 척왜척양의 기치를 걸었으나 조선군과 일본군에 의해서 섬멸당하고 만다. 위세가 당당한 일본군, 그들의 기치와 무장은 햇빛에 번쩍이고 그 위풍은 서릿발 같아서 두려운 존재로 위압감을 느낀 모양이다. 낙동병참사령부의 육군 보병 대위 미야케(三宅武義)와 보병 소위 구와하라(桑原 27)의 역할이 드러나 있다.

 특히 구와하라의 인간적인 면이 퍽 감동 깊게 젖어온다. 전쟁 속에서 전쟁을 초월한 교분. 승전을 일궈낸 작전에 따르고 유격장의 덕을 높이 칭찬하고 사모의 생각을 가진다는 솔직한 심경의 토로와 소박한 인간성이 친밀감을 일게 한다. 나아가 유격장 김덕중의 고향집에 동행하여 아들에게 외국어를 가르쳐야한다는 청소년에 대한 교육 얘기는 120년 전의 이야기가 아니라 현재의 우리에게 맞닿은 절실한 것으로 여겨진다. 일본군과 일본인에 대한 우리가 가진 막연한 선입견이 잘 못된 견해임을 자인케 한다. 이것은 새로운 교훈이다.

 

 5. 맺음말

 

 이상으로 『소모일기』와『토비대략』으로 본 상주동학농민혁명에 대해 살펴보았다. 『소모일기와』『토비대략』에 대한 간단한 해설과 지은이 소모사 정의묵과 유격장 김덕중의 인물소개를 간단히 곁들였다. 본론에는 동학농민혁명의 실상을 1)동학, 동학농민혁명의 전개 2) 소모사, 소모영의 업무와 감회 3) 동학농민군의 전말 4) 민심과 사회상 5) 일본인, 일본군에 대한 기록의 순으로 간추려 보았다.

 

*동학은 척왜척양을 내세우고 부적과 주문으로 민중을 미혹하게 했으며 반역을 꾀했다. 동학도들을 요괴무리, 비도로 보았으며 동학농민혁명을 유사 이래 처음 일어난 대변란이라고 했다.

*동학을 배척하는 통문이 배포되어 동학에 대한 적대감이 팽배했으며 수취제도와 신분질서상의 사회적 혼란 속에서도 충의의 정신으로 위기를 극복했다.

*소모사 정의묵은 충성과 의리, 대의를 중시하고 비도를 척결하기 위해 군문규획(軍門規劃)을 정하여 효유하고 실천할 방도(오가일통 오인일오)를 밝혔으며 과단성 있는 실천으로 평정을 되찾고 ‘위로는 임금님의 근심을 덜어드리고 아래로는 노모의 마음을 위로한’(94.12 29소모) 성과를 거두었다.

 

*유격장 김석중은 적도 섬멸의 기개를 보였으며 빼어난 작전으로 보은 종곡에서 북접동학농민군을 전멸시킴으로써 큰 전공을 세웠다.

*일본군 참전으로 농민군이 점거한 읍성 탈환과 보은 종곡에서의 유격병대와 협력 으로 부접농민군을 궤멸시킨 상주지역에서 벌린 활동과 규모를 알게 했으며 구와하라의 인간미를 보았다.

 

 상황을 예측할 수 없는 전쟁의 총망중에도 일일이 기록한 『소모일기』와『토비대략』은 상주의 동학농민혁명을 이해하는데 귀한 자료적 가치를 지녔다. 두 자료를 남긴 정의묵과 김덕중은 북접농민군의 명맥을 끊고 잠재웠다는 점에서 진압군으로서 큰 업적을 성취했다. 따라서 상주는 동학농민혁명의 종언을 고하는 중심역할을 한 고을이라고 하겠다.

 앞에서도 밝혔지만 이 글은 두 자료를 읽고 주제별로 발췌한 기록이다. 거기에 동학과 상주와 연관된 사항을 언급하고 필자의 견해를 첨가한 것이다. 가급적이면 표제에 맞게 상주를 중심으로 전개된 사항을 중점적으로 다루었으며 이와 관련하여 파급된 사항도 일부 언급했다. 이 글에 다루지 않은 것으로 작전과 연계된 상황 전개 부분이 남았음을 밝히고 그 외에도 더 세분하여 감춰진 의미를 간취한다면 상주동학농민혁명을 보는 시각도 그만큼 다양해지리라고 생각한다.

 

 

 


1)  이 논문의 차례를 보면 소모일기의 내용을 쉽게 조감할 수 있다. 1.머리말 2. 資料에 대하여 3.尙州農民軍의 세력증대와 邑城점거 4.상주소모영의 설치와 농민군 진압방침 !)설치과정 2)조직 3)농민군 진압방침과 소모영 軍門規劃 5.상주소모영의 농민군 진압과정 1)民堡軍 조직과 歸化者의 증가 2)관하 각읍의 농민군 진압 통재 3)소모영 유격병대의 활동 4)北接농민군의 궤멸과 종곡전투 5)상주소모영의 운영경비 6.맺는말

2)  “동적이 임금도 없고 아비도 없는(無君無父) 것처럼 윤리와 의리를 능멸하는 것은 부녀자와 어린이들도 모두 아는 바이니 귀신들도 반드시 벌하여 죽일 것이니 이에 우리 의로운 선비는 함께 힘을 합쳐 괴수를 섬멸하고 따르는 자들을 풀어주어, 위로는 나라의 근심을 풀고 아래로는 사대부와 부녀자의 원한을 씻어 충의를 다하기로 한 맹약을 깨뜨리지 않기를 맹세한다. 그러므로 이에 돌려 보이니 생각건대 모두 잘 알도록 하라“

3)  .지나는 마을들은 감히 조금이라도 침범하지 말 것..대장의 명령이 한 번 나가면 감히 망령되이 시비를 가리지 말 것. . 대오를 정렬하여 행군하면서 감히 귀엣말 하거나 서로 소리치지 말 것.. 지명하여 적을 잡되 감히 다른 사람을 오인하여 범하지 말 것. . 이미 잡은 적의 괴수는 감히 정에 끌려 멋대로 풀어주지 말 것.. 적과 맞서 공격할 때에는 감히 뒤를 돌아보고 물러나지 말고, 명령을 어기는 자는 군율로 다스릴 것.

4) . 소모사의 임무는 오로지 의병을 모집하여 비류들을 소탕하는데 있으니 비류에 들어가지 않은 자들은 의병이 되어야 한다. 51으로 만들고 5인을 1로 편제하여 용맹하고 위풍 있는 자를 골라서 정의군正義軍으로 차출하며 정의영관正義과 정의무사正義武士로 차출하여 인첩印帖을 성급成給하는 것을 표준으로 삼는다.

..지금부터 비류에 들어가게 된 연유를 밝히고 자신이 지니고 있는 명첩名帖과 염주念등의 물건을 가지고 본 군문軍門으로 와서 정의로운 대오隊伍에 들어가기를 원하는 자는 지난 일을 허물하지 않을 것이다.

자신들이 처신해야할 바를 알아서 용감하게 귀화해야 할 것이다. 돌아오지 않는 자들은 끝까지 추적하여 붙잡아 머리를 효수하고 그의 집을 불태우고 그의 전택과 재산을 몰수하여 그의 이웃과 친척들을 연좌할 것임을 밝힌다.

.귀화한 비류들이 접주의 은닉처를 밀고하거나 잡아 바친다면 별도로 상을 내린다..거괴를 잡아서 바치는 자는 임금에게 아뢰어 상을 내릴 것임을 약속한다.

.사족士族과 관속官屬들이 잘못된 것에 물이 들었어도 뉘우치고 돌아오면 재능에 따라 임무를 맡길 것이다.

. 상황에 따라 적절하게 대응하고 본 군문의 절제節制에 따라 소홀함이 없도록 하라.

본 읍에서 무기를 잃어버린 것이 107-8이었다. 창검과 총등 무기를 반납하는 것은 훌륭한 일이니 절대로 처벌을 걱정하지 말라 발각되면 중벌을 면하기 어렵다.

..본 군문이나 본 진영鎭營 혹은 본부本府의 관속을 막론하고 외촌으로 나가서 귀화한 백성을 동요시키고 토색질을 하려는 자는 군율로 다스릴 것이다.

5)  판탕板蕩 :과 탕은 모두 시경 대아大雅의 편명으로 주의 려왕이 무도하여 나라를 어지럽힌 것을 풍자하는 내용이다.

6)  오가일통(五家一統)오가작통五家作統을 연상케 하는 것으로 오가작통은 조선시대 범죄자의 색출, 세금징수, 부역의 동원, 인보隣의 자치조직을 위하여 다섯 집을 1통으로 묶은 호적의 보조조직이다.1485(성종 16)년 한명회의 발의에 의해 채택되어 경국대전에 등재되었다. 한성부에는 방을 두고 방 밑에 5가작통의 조직을 두어 다섯 집을 1통으로 하여 통주統主를 두었다. 방에는 관령管領을 두었다. 지방은 5통을 1로 하고 몇 개의 을 형성 면마다 권농관을 두었다. 헌종 때 통의 연대책임을 강화하여 천주교도를 적발하는데 이용하였다.

7)  한신과 팽월 한의 공신으로 초의 항우를 멸하는 공을 세웠다.

 

8)  동도東道 대장이 각 부대장에게 명령을 내려 약속하였다. “매번 적을 상대할 때 우리 동학농민군은 칼에 피를 묻히지 아니하고 이기는 것을 으뜸의 공으로 삼을 것이며, 어쩔 수 없이 싸울 때라도 간절히 그 목숨을 해치지 않는 것을 귀하게 여길 것이며 매번 행진하며 지나갈 때에도 간절히 다른 사람의 재산이나 물건을 상하게 하지 말 것이며, 효제충신孝悌忠信으로 이름난 사람이 사는 동네 10리 안으로는 주둔하지 말 것이다.(東道大將下令於各部隊長約束曰 每於對敵之時 兵不血刀而勝者爲首功雖 得已戰 切勿傷命爲貴 每於行陣所過之時 孝悌忠信人所居村十里內 勿爲屯住)

12개 군호(軍號: 紀律-인용자 주) 항복하는 자는 사람으로 대하라(者愛對) 곤궁한 자는 구제하라(困者救濟) 탐관은 추방하라(貪官逐之) 따르는 자는 공경 복종하라(順者敬服) 굶주린 자는 먹이라(飢者饋之) 간사하고 교활한 자는(그짓을)그치도록 하라(姦猾息之) 도망가는 자는 쫓지 말라(走者勿追) 가난한 자에게는 나누어 주라(貧者賑恤) 충성스럽지 못한 자는 제거하라(不忠除之) 거스르는 자는 잘 타이르라(逆者曉諭) 병자에게는 약을 주라(病者給藥) 불효하는 자는 벌을 주라(不孝刑之)

6은 생명의 눈으로 보는 동학 박맹수 지음 P.71-72에서 재인용.

 

9)  보은취회에 참가한 동학교인들을 해산시키는 명령을 받고 내려온 양호도어사 어윤중(魚允中)이 민회(民會)란 말을 써서 장계를 올렸다.

10)  선교仙橋의 이상사李上舍 어른이 노병으로 직임을 감당할 수 없다고 하며 추천서를 돌려보내 왔으며 도곡道谷의 조승선趙承宣은 비도들이 있는 곳으로 부모님을 뵈러 가야한다고 핑계를 대었고 유자인 어른은 성 밖에 나가서 돌아오지 않았다..(84, 10. 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