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거처는 나의 말이고, 대기는 나의 무덤이다 (옥타비오 파스)


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酒店)에 앉아 있을 거다
황지우

초경(初經)을 막 시작한 딸아이, 이젠 내가 껴안아줄 수도 없고
생이 끔찍해졌다
딸의 일기를 이젠 훔쳐볼 수도 없게 되었다
눈빛만 형형한 아프리카 기민들 사진;
“사랑의 빵을 나눕시다”라는 포스터 밑에 전가족란의 성금란을
표시해놓은 아이의 방을 나와 나는
바깥을 거닌다, 바깥;
누군가 늘 나를 보고 있다는 생각 때문에
사람들을 피해 다니는 버릇이 언제부터 생겼는지 모르겠다
옷걸이에서 떨어지는 옷처럼
그 자리에서 그만 허물어져버리고 싶은 생;
뚱뚱한 가죽부대에 담긴 내가, 어색해서, 견딜 수 없다
글세, 슬픔처럼 상스러운 것이 또 있을까

그러므로, 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酒店)에 혼자 앉아 있을 것이다
완전히 늙어서 편안해진 잡담을 담담하게 들어주면서
먼 눈으로 술잔의 수위(水位)만을 아깝게 바라볼 것이다

문제는 그런 아름다운 폐인(廢人)을 내 자신이
견딜 수 있는가, 이리라


모 정치인이 ‘이부망천’이라는 말을 했다. ‘이혼하면 부천에 살고, 망하면 인천에 산다’는 뜻이란다. 한순간에 부천에 사는 나는 ‘이부망천인(人)’이 되어버렸다.

아내의 고향이라 수 십 년을 부천에 살게 되었는데, 내 아이들은 부천이 고향이 되었는데, 아내의 모교에 강의를 갈 때는 처갓집에 가듯 즐거웠는데, 졸지에 이부망천이라는 괴물이 온 하늘을 검붉게 물들여 놓았다.

그래서 부천, 인천에 사는 사람들이 그렇게도 분노했을 것이다. 다 자신들만의 사연을 안고 살아가고 있는데, ‘국민의 머슴’이라는 사람이 한순간에 이혼하고 망한 사람으로 만들어 버렸으니 어찌 분노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 정치인은 어디에 살고 있을까? 아마 마음속으로는 ‘강남’ ‘성북동’ ‘평창동’ ‘청담동’ 등 부자동네에 살고 있을 것이다. 지역구 때문에 몸은 비록 이부망천 비슷한 곳에 살고 있더라도.          

소위 천민자본주의의 나라, 우리나라는 ‘성적’이라는 하나의 잣대로 모든 학생들을 한 줄로 세웠듯이 모든 국민들을 ‘경제, 돈’이라는 하나의 잣대로 한 줄로 세워 놓았다.  

그 정치인은 지극히 ‘현실적인 발언’을 한 것이다. 아마 그는 ‘이부망천인들’의 분노를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겉으로는 탈당하는 등 사죄하는 척했지만.

‘민중은 개돼지’라고 한 교육부의 한 간부도 ‘나의 말에 무슨 문제가 있어?’ 하고 속으로 외쳤을 것이다.

그들은 국민을 한 줄로 세워놓고는 맨 끝 줄에 속하는 사람들은 아예 개돼지만도 못한 ‘호모 사케르(벌거벗은 생명)’로 만들어 놓는다. 호모 사케르는 사회적 지위의 상징인 옷이 없다. 살아 있되 이 세상에서 아무런 존재감이 없다.      

우리는 맨 끝 줄에 속한 ‘불가촉천민들’을 보고는 항상 공포감을 갖고 살아간다. 언제 저렇게 될지 몰라! 오로지 살아남아야 해! 생존이 삶의 목표가 된다. 우리는 삶을 누리는 짐승만도 못한 삶을 살아간다.

이런 세상에서 삶을 누리려면 어떻게 살아야할까? 아예 줄서기에서 빠져 나오기! 아감벤이 얘기하는 ‘자발적인 호모 사케르 되기’가 아닐까?    

삿갓으로 얼굴을 가리고 천하를 주유하는 김삿갓. 높은 벼슬자리를 제사상에 쓰는 재물로 여긴 장자. 대 자유를 누리기 위해 스스로 호모 사케르가 된 멋있는 인간들은 많다.  

아마 최고의 호모 사케르는 예수가 아닐까? 총독 빌라도는 예수에게 묻는다. ‘사람들이 당신을 왕이라고 하는데, 당신은 정말 왕이냐?’ 예수가 대답한다. ‘당신이 왕이라고 했다.’ 빌라도가 재차 묻는다. ‘그럼 당신의 왕국은 어디 있느냐?’ 예수가 대답한다. ‘내 왕국은 이 세상 것이 아니다.’  

이 세상 것이 아닌 왕국을 가진 사람은 이 세상의 어떤 압력에도 굴복하지 않고 인간으로 한 평생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동학의 주문 맨 처음 글자는 시천주(侍天主)이다. 천주, 하느님을 모시는 것이다. 가슴에 하느님을 품고 살아가는 사람은 최고의 삶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비록 이 세상에서는 대역 죄인이 되어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갈지라도.    

황지우 시인은 폐인이 되어 ‘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酒店)에 앉아 있을 거다’하고 울부짖는다.

‘초경(初經)을 막 시작한 딸아이, 이젠 내가 껴안아줄 수도 없고/생이 끔찍해졌다/ 딸의 일기를 이젠 훔쳐볼 수도 없게 되었다/눈빛만 형형한 아프리카 기민들 사진;/ “사랑의 빵을 나눕시다”라는 포스터 밑에 전가족란의 성금란을/표시해놓은 아이의 방을 나와 나는’

그는 집에서도 쉴 곳을 찾지 못한다. 그래서 ‘바깥을 거닌다, 바깥;’

‘누군가 늘 나를 보고 있다는 생각 때문에/사람들을 피해 다니는 버릇이 언제부터 생겼는지 모르겠다/옷걸이에서 떨어지는 옷처럼/그 자리에서 그만 허물어져버리고 싶은 생;/뚱뚱한 가죽부대에 담긴 내가, 어색해서, 견딜 수 없다/글쎄, 슬픔처럼 상스러운 것이 또 있을까’

인간으로 태어나 한 생(生)을 살아간다는 건 얼마나 굴욕적인 일인가! 그래서 그는 ‘그만 허물어져버리고’ 싶은 것이다.  

‘그러므로, 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酒店)에 혼자 앉아 있을 것이다/완전히 늙어서 편안해진 잡담을 담담하게 들어주면서/먼 눈으로 술잔의 수위(水位)만을 아깝게 바라볼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이 생(生)이 버겁다. ‘문제는 그런 아름다운 폐인(廢人)을 내 자신이/견딜 수 있는가, 이리라’

예수는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아 나선다. 그의 왕국엔 호모 사케르가 없다. 그래서 모든 양들이 평화로이 한 생을 누릴 수 있다.

이 세상은 일부러 한 마리 양에게 길을 잃게 한다. 모든 양들을 공포에 떨게 한다. ‘아, 언제 나도 길을 잃어버릴지 몰라!’

한 평생 공포에 떨고 사느니 차라리 길을 잃어버릴 거야! 이 세상의 길을 잃어버리고 자신의 발길이 길이 되는 사람들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