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명함을 높이 치지 않으면, 사람들이 다투지 않는다 不尙賢 使民不爭 (노자)


행복
김종삼

오늘은 용돈이 든든하다
낡은 신발이나마 닦아 신자
헌 옷이나 다려 입자 털어 입자
산책을 하자
북한산성행 버스를 타보자
안양행도 타보자
나는 행복해도
혼자가 더 행복하다
이 세상이 고맙다 예쁘다

긴 능선 너머
중첩된 저 산더미 산더미 너머
끝없이 펼쳐지는
멘델스존의 로렐라이 아베마리아의
아름다운 선율처럼.


한 할머니가 푸념을 한다. 텃밭을 빌려 무더위를 무릅쓰고 잘 가꿔 놨는데, 어느 날 주인이 자금 마음대로 씨앗을 뿌려 놓았더란다. 항의했더니 ‘그렇게 되었어요.’ 한마디 하고 말더란다.

주인은 그렇게 할머니의 땅을 빼앗아버렸다. 할머니는 이제 어디 가서 항의해야 하나? 바로잡아주는 기관이 있나? 한 사람의 억울함이 쉽게 묻혀버리는 우리 사회가 너무나 무섭다(우리는 안다 크건 작건 이런 일이 비일비재하다는 걸).

어쩌다 우리들 마음이 이리도 뻔뻔하게 되었을까? 뻔뻔함이 하나의 ‘삶의 양식’이 되어버렸을까?

철학자 칸트를 생각해 보았다.

그가 살았던 18세기 서양은 과학 혁명, 산업 혁명, 정치 혁명을 겪으며 인간은 중세의 신(神)을 벗어나 세상의 중심이 되는 시기였다. 인간이 이성(理性)으로 모든 걸 할 수 있다는 오만감이 극에 달해 가던 시기였다.

칸트는 고민했다. 지식으로 무장한 인간이 어떻게 윤리적으로 살 수 있을까? 우리는 안다. 인간은 지식을 많이 쌓으면 쌓을수록 더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존재가 된다는 것을.

우리 학교교육은 누구나 얘기하듯 ‘지식위주의 교육’이다. 지식도 대개 단편적인 지식들이다. 이런 지식으로 대학을 가고 직장을 구하고 결혼생활을 하는 우리들 마음은 어떻게 될까? 머리에 잔뜩 들어있는 지식들을 우리는 어떻게 쓸까?  

드디어 우리는 남의 땅을 빼앗고도 아무런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 인간이 되었다. 우리는 자신들의 가족만 챙긴다. 가족은 ‘나’니까. 그래서 자식이 아무리 잘못해도 덮어주는 게 부모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런 사랑은 제대로 된 사랑이 아니다. 그래서 자식들이 크면 이번엔 부모를 등쳐먹는다. ‘나’만 위하다가 우리는 ‘나’마저도 잃어버렸다. 그러다 보니 이제 가족도 ‘나’가 아니다. 각자도생(各自圖生), 각자 외로이 살길을 찾아 나선다.

칸트는 지식으로 세상의 중심에 선 인간이 윤리적인 인간이 되기 위한 하나의 대안으로 ‘미(美)적인 인간’을 생각했다.

우리의 학교교육에서도 예술 교육이 철저히 이루어졌다면 우리는 ‘어떤 인간’이 되었을까? 어린이 집에 다니는 유아들이 주로 그림을 그리고 악기를 다룬다면? 초중고에서도 주로 예술 교육을 한다면? 그런 학생들은 어른이 되어 어떤 삶을 살아갈까?      

김종삼 시인의 ‘행복’은 너무나 소박하다.  

‘오늘은 용돈이 든든하다/낡은 신발이나마 닦아 신자/헌 옷이나 다려 입자 털어 입자/산책을 하자/북한산성행 버스를 타보자/안양행도 타보자’

그는 아이처럼 설렌다.

‘이 세상이 고맙다 예쁘다//긴 능선 너머/중첩된 저 산더미 산더미 너머/끝없이 펼쳐지는/멘델스존의 로렐라이 아베마리아의/아름다운 선율처럼.’

그는 미(美)에 기대어 한 세상을 ‘인간답게’ 살았다. 하지만 그는 한평생 고독하게 살아야 했다.  

소위 선진국에서는 어릴 적부터 예술 교육을 많이 한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그 나라 사람들은 우리보다는 훨씬 여유로운 삶을 사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들도 깊은 내면에서는 고독과 권태에 시달린다고 한다. 또 국가 차원에서는 다른 국가와 여러 차원의 전쟁을 하고 있다.  

전체 인류의 차원에서 생각해 보면 지금은 전국시대(戰國時代)다. 인간의 마음은 황폐화되었고, 지구도 아사직전이다.

그래서 나는 모든 인간이 행복했다는 ‘부족시대’가 그립다. 그 시대는 ‘지식 많은 인간을 높이 치지 않아 사람들이 다투지 않았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