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비(似而非)

 

우리는 일상에서 중용(中庸)이라는 말을 자주 듣게 된다. 중용이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중용 본래의 뜻이 아닌 중간의 의미로 쓰인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 사서를 제대로 공부하지 못한 까닭이다. 평소에 막연하게 ‘중용은 중간이 아니다’란 말을 가끔 입에 올린 적이 있다. 중용은 변증법적 선택이 아닐까, 라는 막연한 생각 때문이었다. 우리고장 출신의 석학 황헌식 선생의 ‘신지조론’을 읽으면서 중용에 대한 개념이 보다 가깝게 다가왔다.

 

  ‘장미꽃은 붉다’는 주장과 ‘장미꽃은 푸르다’는 주장 사이에서, 중도(中道)를 택한다는 미명 아래 ‘장미꽃은 보라색’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자기기만이다. 여기엔 중도가 아니라 진실이 있을 뿐이다. 이때 지조인(志操人)이 택할 바 중용은 ‘장미꽃은 붉다’는 그 한마디다.(신지조론) 중용에 대한 매우 명쾌한 비유적 설명이다.

 

  논어와 맹자에는 향원(鄕原)이란 말이 나온다. 쉽게 말하면 처세를 원만하게 하여 고을 사람들의 신임을 받는 이른바 유지를 가리키는 말이다. 광자(狂者)라는 말이 있다. 뜻은 높고 크지만 능력이 그에 따르지 못하여 미치광이처럼 보이는 자를 이르는 말이다. 돈키호테와 같은 사람이다. 견자(狷子)라는 말이 있다. 식견이나 생각은 부족하나 한번 옳다고 여기면 그 뜻을 굽히지 아니하는 고집불통을 이르는 말이다.

 

  향원은 시류에 영합하고 성격이 모나지 않아서 비난하는 자가 거의 없다. 그러나 공자는 향원은 덕을 헤치는 자이기에 광자나 견자보다 못하다고 했다. 향원은 중용을 가장한 사이비(似而非)이기 때문에 중용에 이르기가 불가능하다. 짝퉁이 명품이 될 수 없는 이치다.

 

  노무현은  대통령 후보 지명 연설에서 사이비 중용, 즉 향원이 지배했던 우리 역사를 통렬히 비판했다.

 

“조선 건국 이래로 600년 동안 우리는 권력에 맞서서 권력을 한 번도 바꾸어 보지 못했고, 비록 그 것이 정의라 할지라도, 비록 그 것이 진리라 할지라도, 권력이 싫어하는 말을 했던 사람은, 또는 진리를 내세워서 권력에 저항했던 사람들은 전부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 자손들까지 멸문지화를 당했습니다. 패가망신했습니다.  

 

  600년 동안 한국에서 부귀영화를 누리고자 하는 사람은 모두 권력에 줄을 서서 손바닥을 비비고 머리를 조아려야 했습니다. 그저 밥이나 먹고 살고 싶으면, 세상에서 어떤 부정이 저질러져도, 어떤 불의가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어도, 강자가 부당하게 약자를 짓밟고 있어도 모른척하고 고개 숙이고 외면했어야 했어요. 눈 감고 귀를 막고 비굴한 삶을 사는 사람만이 목숨을 부지하면서 밥이라도 먹고 살 수 있었던 우리 600년의 역사. 어머니가 제게 남겨 주었던 가훈은 ‘야 이놈아. 모난 돌이 정 맞는다. 계란으로 바위치기다. 바람 부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 눈치 보며 살아라.

 

  80년대, 시위하다가 감옥 간 우리의 정의롭고 혈기 넘치는 우리 젊은 아이들에게 그 어머니들이 간곡히 타일렀던 그들의 가훈 역시 ‘야 이놈아. 계란으로 바위치기다. 그만 둬라. 너는 뒤로 빠져라.’ 이 비겁한 교훈을 가르쳐야했던 우리 600년의 역사, 이 역사를 청산해야 합니다.

 

노무현의 이말은 아직도 유효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