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 만큼이 나다


그날
이성복

그날 아버지는 일곱 시 기차를 타고 금촌으로 떠났고
여동생은 아홉 시에 학교로 갔다 그 날 어머니의 낡은
다리는 퉁퉁 부어올랐고 나는 신문사로 가서 하루 종일
노닥거렸다 전방은 무사했고 세상은 완벽했다 없는 것이
없었다 그날 역전에는 대낮부터 창녀들이 서성거렸고
몇 년 후에 창녀가 될 애들은 집일을 도우거나 어린
동생을 돌보았다 그날 아버지는 미수금 회수 관계로
사장과 다투었고 여동생은 애인과 함께 음악회에 갔다
그날 퇴근길에 나는 부츠 신은 멋진 여자를 보았고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면 죽일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날 태연한 나무들 위로 날아오르는 것은 다 새가
아니었다 나는 보았다 잔디밭 잡초 뽑는 여인들이 자기
삶까지 솎아내는 것을, 집 허무는 사내들이 자기 하늘까지
무너뜨리는 것을 나는 보았다 새점 치는 노인과 변통의
다정함을 그날 몇 건의 교통사고로 몇 사람이
죽었고 그날 시내 술집과 여관은 여전히 붐볐지만
아무도 그날의 신음 소리를 듣지 못했다
모두 병 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가 대유행하며 한 확진자가 맹비난을 받고 있다. 우환을 다녀와 감염 위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여기저기 다녀 다른 사람들에게 전염시켰느냐는 것이다.  

그가 다녀 간 곳은 폐쇄되기도 하고 그가 함께 식사한 사람도 감염되어 확진 판정을 받고 이 감염자의 가족들도 감염 위험이 높다고 한다. 이 가족들의 직장도 비상사태에 돌입했다.

그는 ‘평상시’대로 행동했을 것이다. 우리는 아파도 참고 견디며 학교에 가고 직장에 가지 않는가? 미국에서는 아프면 집에서 쉰다고 한다.

사람은 몸에 익은 습관(習貫)으로 살아간다. 그래서 공부는 ‘학습(學習)’이다. 배우고 익히는 것이다. 그래서 다른 삶을 살아가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공부는 ‘학(學)’ 뿐이다. 단편적인 지식을 배우는 데만 주력한다. 새로운 지식을 배워서 몸에 익히게 하지 않는다.  

그 확진자는 우리 사회의 ‘한 증상’일 뿐이다. 남을 배려하지 않고 나만 챙기는 사회 문화. 우리 사회 체제의 희생자일 뿐이다.  

우리 사회에서는 피해자는 넘치는데 가해자는 없게 된다. 가해자는 억울할 뿐이다. ‘왜, 나만 갖고 그래!’ ‘다들 그렇게 살고 있지 않아?’  

실존주의 작가 알베르 까뮈의 소설 ‘페스트’에는 우리가 지금 맞닥뜨리고 있는 ‘상황’이 설정되어 있다. 어느 날 페스트(흑사병)가 창궐하여 한 도시가 폐쇄된다. 도시 전체를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는다. 하지만 사람들은 차츰 이성을 회복하며 서로의 마음을 모아 상황에 대처해 나가기 시작한다. 이기적이었던 사람들이 차츰 이타적인 사람으로 변모한다. 결국 도시는 안정을 찾아간다.

나는 인터넷 댓글을 읽으며 까뮈가 상상했던 인간의 위대함을 본다. 처음에는 무모한 행동을 한 확진자를 비난하기만 했지만 차츰 서로 힘을 합쳐 이 상황을 잘 헤쳐 나가자는 댓글들이 등장한다.  

원시인들은 잘못한 사람을 처벌하기 보다는 피해를 준 사람들에게 피해를 보상해주도록 했다. 문명인처럼 돈을 주고 마는 게 아니라, 피해를 받기 전 상태로 복구하는 노력을 하게 했다. 이 과정에서 가해자와 피해자는 다시 공동체의 일원이 될 수 있었다.  

인간은 경험을 통해 지혜를 배운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되지 않아?’ 이 말은 논리상으로는 맞는데, 현실에서는 맞지 않는다.

만일 우리 모두가 조금만 생각해 보았더라면, 이런 상황이 왔을까? ‘왜? 전염병이 이리도 쉽게 퍼지게 세계화를 한 거야?’ ‘우환이라는 도시에서는 도대체 이렇게 퍼지도록 뭐한 거야?’ 이런 질문들은 함께 공동체를 회복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 한  공허할 뿐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자본주의, 신자유주의가 ‘생각 없이’ 마구 탐욕에 젖어 살게 하는 체제가 아닌가?

우리는 지혜를 모아 우리 사회를 바꿔가야 한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체제가 굴러가는 대로 따라 굴러가며 산다. 한 개인은 하나의 부품이 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다 이번 같은 ‘대 재앙’을 만나게 되면 사람들은 서로의 마음을 모으게 된다. 사람이 바뀌고 세상이 바뀐다. 우리는 이 소중한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  

평상시의 ‘그날’은 어떤가?  

‘아무도 그날의 신음 소리를 듣지 못했다/모두 병 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

그러다 사건이 터지면 비로소 ‘그날’의 비명이 들리고 아픔을 느끼게 된다. 우리는 평상시에는 마비되어 살기 때문이다.

우리는 남의 아픔에 얼마나 무심한가! 인간은 ‘사회적 존재’인데. 하물며 아파도 학교에 가고 출근하다 보면 자신의 몸이 아픈 것조차 모르게 되지 않는가? 몸의 감각을 느끼지 못하는 몸은 내 몸이 아니다. 우리는 몸이 없는 인간, 바로 유령이 된다.

이번 재앙을 통해 우리는 마비의 저주에서 풀려나야 한다. 자신과 다른 사람, 다른 생명체들의 아픔을 느끼는 존재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 이 체제에서는 ‘나’는 행복하기는커녕 제 한 몸조차 제대로 지킬 수 없다는 것을 통렬하게 깨달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