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화1 - 태풍이 불던 날


고석근 

우화1

- 태풍이 불던 날

 

원시사회에서는 누군가 다른 사람을 위해 뭔가를 해주면 도와준 사람이 도움을 받은 사람 에게 빚을 지게 된다

 

태풍이 몹시 불던 날, 계곡의 흙들이 갑자기 불어난 물에 마구 쓸려 내려갔다. 산허리의 흙들은 이 광경을 안타깝게 지켜보아야만 했다. ‘아, 어떻게 해?’ 산허리의 흙들은 발을 동동 굴렸다.

계곡은 점점 더 깊이 패어갔다. 나무들의 뿌리가 앙상하게 드러났다. ‘아, 저러다간 계곡의 나무들이 다 죽을 거야.’

산허리의 흙들은 약속이나 한 듯 서로의 손을 잡고 일제히 계곡으로 굴러갔다. 깊게 패인 계곡을 자신들의 몸으로 채워갔다. 하늘이 쩍쩍 갈라지며 비가 마구 쏟아졌다. 계곡의 흙들은 서로의 몸을 더 힘껏 부둥켜안았다. 몸이 찢겨져 나가는 고통을 이를 악물고 견뎠다. ‘힘내자. 우리가 도와주지 않으면 이 계곡의 나무들은 다 죽어!’

다음 날 아침, 언제 그랬냐는 듯 태풍이 멎고 비가 그쳤다. 하늘엔 햇빛이 쨍쨍 비쳤다. 세상은 고요하고 평화로웠다.

하지만 계곡은 처참했다. 마구 파헤쳐지고 크고 작은 돌들이 앙상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다행히 계곡의 나무들은 무사했다. 산허리의 흙들 덕분에 간신히 목숨들을 구했다. 산허리의 흙들은 계곡의 나무들을 보며 너무나 기뻐 눈물을 글썽였다. ‘아, 우리가 해냈어.’ 산허리의 흙들은 서로의 손을 꼭 잡았다. 계곡의 나무들은 고맙다는 말도 하지 못한 채 가는 숨만 간신히 내쉬고 있었다.

산허리의 흙들은 깊은 잠에 빠져 들어갔다. 그들의 얼굴엔 깊은 평화가 감돌았다. 햇살이 그들의 얼굴을 밝게 비추어주었다. 바람도 그들의 얼굴을 곱게 쓰다듬으며 지나갔다.

산허리의 흙들은 악몽을 꾸었다. 자신들의 몸을 요상하게 생긴 괴물들이 갉아먹는 꿈이었다. 아삭... 아삭... 그들은 생시처럼 그 소리를 선명하게 들었다. ‘아... 아...’ 그들은 신음을 토해냈다.

신음하던 산허리의 흙들은 너무나 몸이 아파 잠에서 깨어났다. ‘아니? 이럴 수가!’ 그들은 꿈에서 일어난 일이 실제로 일어나는 일인 것을 알고 경악했다. 자신들이 목숨을 바쳐 도와준 계곡의 나무들이 자신들 몸 깊숙이 뿌리를 박아 놓고 자신들의 피를 빨아 먹고 몸을 갉아 먹고 있었던 것이다.

이미 피가 거의 빠져나가고 몸이 너덜너덜 찢겨져 나간 산허리의 흙들은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신음소리만 토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