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이 주인이다

 

모 신문에 따르면 7월15~25일 서울, 경기, 인천 15개 고교의 2학년생 1천51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벌인 결과 ‘대한민국 국민으로서의 자긍심을 느낀다’는 응답자는 세월호 참사 전 61.9%에서 참사 이후 24.9%로 급감했다고 한다.

또한 ‘내가 위기에 처할 때 국가가 나를 지켜줄 것이라는 믿음’ 역시 46.8%에서 7.7%로 급락했다. ‘사회지도층이 리더로서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다는 믿음’은 6.8%에 그쳤다.

대통령과 정부에 대한 신뢰도는 6.8%, 정치권 신뢰도는 5.4%로 곤두박질쳤고, 언론에 대한 신뢰도 역시 12.4%에 그쳤다. 

이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대한민국의 현실이다. 세월호 참사 이후라는 점을 참고하더라도 이미 국가는 더 이상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켜주는 역할을 못하고 있다고 믿는 것이다.

 

우리나라 헌법 10조는 이렇다.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진다.”

 

국가가 헌법에 부여된 의무를 다하지 않는다면 국민은 불행한 것이다. 국민의 목숨과 재산을 보호하지 않는 국가에 누가 신뢰를 가질 것인가.

올해 최대의 참사인 세월호 참사를 보면서 많은 국민들은 참담했을 것이다. 어떤 재앙이 닥쳤을 때 누구나 국가로부터 도움을 받을 수 없구나, 느꼈을 것이다.

 

120년 전, 당시의 농민들도 비슷한 처지였을 것이다. 대부분이 소작농인 농민들은 농사를 지으면 80% 이상을 지주나 양반 관료들에게 빼앗겼다. 당장 굶어죽지 않고 살아남는 게 문제였다. 그때 농민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어려울 때 도움을 주지 않는 나라를 사랑했을까. 착취만 하고 군림하는 나라를 위해 충성을 생각했을까.

동학농민군들은 먹고 살기 위해서 혁명을 일으켰다. 악독한 지주 양반들과 부패한 관료들을 몰아내고 새 세상을 만들기 위해 혁명을 일으켰다. 국가가 의무를 다하지 않는 상황에서 동학농민군들은 스스로 주인이 되고자 행동했다. 그래서 읍성을 점령했고 백성이 나라의 주인임을 널리 알렸다.

 

120년 전이나 지금이나 서민들이 주인 대접을 받지 못하는 점에서 똑같다. 언제 잘릴지 모르는 회사. 앞길이 막막한 비정규직. 언제 가게 문을 닫을지 모르는 자영업자. 또한, 어려움이 닥쳤을 때 국가로부터 도움을 별로 받지 못하는 것까지.

 

국민이 국가의 주인이다. 재앙이 일어나지 않는 안전한 사회, 다 함께 잘 사는 사회. 그런 사회를 국민은 꿈꾼다. 국가는 국민의 신뢰를 회복해야 한다. 그래야 국민이 행복하다. 그러긴 위해선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국가는 국민을 주인으로 섬겨야 한다. 대통령 및 정부, 정치인, 재벌, 소위 사회지도층이라는 사람들이 국민들 위에 군림하지 않고 주인으로 섬겨야 제대로 된 국가일 것이다.

2014년 가을  

                           <웹진 문학마실>편집인  고창근



소는 내가 잘 몬다

고석근

 

 

 노래

 김남주

 

 이 두메는 날라와 더불어

 꽃이 되자 하네 꽃이

 피어 눈물로 고여 발등에서 갈라지는

 녹두 꽃이 되자 하네

 

 이 산골은 날라와 더불어

 새가 되자 하네 새가

 아랫녘 웃녘에서 울어예는

 파랑새가 되자 하네

 

 이 들판은 날라와 더불어

 불이 되자 하네 불이

 타는 들녘 어둠을 사르는

 들불이 되자 하네

 

 되자 하네 되고자 하네

 다시 한 번 이 고을은

 반란이 되자 하네

 청송녹죽(靑松綠竹) 가슴으로 꽂히는  

 죽창이 되자 하네 죽창이

 

 

 아마 1992년 여름이었을 것이다. 시 공부하던 단체에서 주최하는 수련회를 갔다. 무주 어딘가로 간 것 같은데, 정확한 장소를 모르겠다.  

 밤에 술판을 벌리던 장면이 선명하게 기억난다. 우리 담임 쌤인 김남주 시인께서 어깨를 으쓱거리며 춤을 추시던 모습. 누군가가 소처럼 춤을 추신다고 했다.

 나는 가끔 김남주 선생님의 '노래'를 흥얼거린다.

 

 '이 두메는 날라와 더불어/꽃이 되자 하네 꽃이' 그렇다! 우리는 꽃이 되고 싶은 것이다. 꽃이. 이 두메와 더불어.

 '피어 눈물로 고여 발등에서 갈라지는/녹두꽃이 되자 하네' 내 눈에 어느새 이슬이 맺힌다.

 '다시 한번 이 고을은/반란이 되자 하네/청송녹죽(靑松錄竹) 가슴으로 꽂히는/죽창이 되자 하네 죽창이' 이 대목에 오면 나도 모르게 울먹이게 된다.

 

 가끔 이런 상상을 해 본다. 녹두 장군이 한양까지 진격했을 때, 일본군이 참전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지금 어떻게 되었을까?

 프랑스가 대혁명 후 민주주의로 이행했듯이 우리도 지금 민주주의의 꽃을 피우고 있을까?  

 일제 강점기도 없었고, IMF도 없었고, '작은 아름다운 나라'가 되어 평화를 구가하고 있을까?  

 

 동학혁명 후의 우리 역사는 피와 눈물의 역사다. 나이 드신 분들을 만나 얘기하다 보면 숙연해진다.  

 그렇게 힘겹게 살아오셨는데, 지금도 힘겹게 살아야 하시다니!

 

 녹두 장군이 동학 농민군과 함께 전주성에 입성하려 할 때, 어느 모로 보나 열세인 농민군을 어떻게 강군으로 만들 것인가가 화두였다.

 농민군에 합세한 산적들이 녹두 장군에게 제의했다. '우리가 농민군을 훈련시키겠다.'고.  

 누가 봐도 좋은 방법 같았다. 싸움 전문가인 산적들이 농사만 짓던 농민들에게 싸움 훈련을 시키면 훨씬 좋지 않겠는가?  

 그때 녹두 장군이 말했다.

 "소는 내가 잘 몬다."

 아, 나는 '녹두 장군(송기숙 지음)'을 읽다가 이 장면에서 숨이 탁 막혔다. '역시 명장이로구나!'

 '동학 농민군에겐 동학 농민군만의 싸움 방식이 있는 것이다.' 녹두 장군은 농민의 아이디어로 만든 '대나무로 만든 통'을 이용해 전투를 승리로 이끈다.    

 

 지금 우리 사회는 어떤가? 무언가 문제가 심각한 것 같은데('세월호 사건'같은 기막힌 사고가 일어나는데), 도무지 길이 보이지 않는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세월호' 말만 나오면 가슴이 먹먹해지고 눈물이 맺힌다.

 '하지만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이야?'

 

 이때 퍼뜩 떠오르는 말, '소는 내가 잘 몬다!' 그렇다! '지금 이 시대의 우리만의 방식'을 찾아내야 한다.

 '기성의 어떤 이념, 이데올로기, 방식'으로서는 실패한다. 지금 이 시대에 사는 사람들, 변화를 갈구하는 가장 낮은 곳에서 신음하는 사람들 속에서 방법을 찾아내야 한다.

 예수의 죽음을 앞둔 제자들이 울부짖었다. "앞으로 주님을 어떻게 뵈오리까?" 예수가 담담히 대답했다. "언젠가 너희 집 앞으로 거지가 지나갈 것이다. 그가 바로 나다!"

 이 시대의 '녹두 장군'은 누구일까? '농민군'은? 우리는 이미 알고 있지 않을까? 단지 모르고 싶은 게 아닐까? '죽은 녹두 장군'만 기리는 게 아닐까? '죽은 농민'만 칭송하는 게 아닐까?  

 

 김남주 선생님이 그립다. 선생님과 함께 2박 3일 일정으로 강릉에 다녀왔었다. 선생님께서는 횟집에서 술을 드시다 동해 바다를 바라보시며 울부짖으셨다. "바다여! 바다여!"    

 소처럼 춤을 추시던 선생님. 선생님은 이 시대의 '녹두 장군'이셨다. 앞으로 수많은 '녹두 장군'이 나와야 할 것이다. '소를 잘 모시던 녹두 장군'이.

 

 솔직히 말해서 나는

 김남주

 

 솔직히 말해서 나는

 아무것도 아닌지 몰라

 단 한방에 떨어지고 마는

 모기인지도 몰라 파리인지도 몰라

 뱅글뱅글 돌다 스러지고 마는

 그 목숨인지도 몰라

 누군가 말하듯 나는

 가련한 놈 그 신세인지도 몰라

 아 그러나 그러나 나는

 꽃잎인지도 몰라라 꽃잎인지도

 피기가 무섭게 싹둑 잘리고

 바람에 맞아 갈라지고 터지고

 피투성이로 문드러진

 꽃잎인지도 몰라라 기어코

 기다려 봄을 기다려

 피어나고야 말 꽃인지도 몰라라

 

 그래

 솔직히 말해서 나는

 별것이 아닌지 몰라

 열개나 되는 발가락으로

 열개나 되는 손가락으로

 날뛰고 허우적거리다

 허구헌 날 술병과 함께 쓰러지고 마는

 그 주정인지도 몰라

 누군가 말하듯

 병신 같은 놈 그 투정인지도 몰라

 아 그러나 그러나 나는

 강물인지도 몰라라 강물인지도

 눈물로 눈물로 눈물로 출렁이는

 강물인지도 몰라라 강물 위에 떨어진

 불빛인지도 몰라라 기어코

 어둠을 사르고야 말 불빛인지도

 그 노래인지도 몰라라

 

 

 아, 우리 하나 하나는 정말이지 아무것도 아니다.

 '단 한방에 떨어지고 마는 모기인지도 몰라 파리인지도 몰라/ 뱅글뱅글 돌다 스러지고 마는/ 그 목숨인지도 몰라'

 그러나, 우리는

  '꽃잎인지도 몰라라 꽃잎인지도/피기가 무섭게 싹둑 잘리고/바람에 맞아 갈라지고 터지고/피투성이로 문드러진/꽃잎인지도 몰라라 기어코/기다려 봄을 기다려/피어나고야 말 꽃인지도 몰라라'  

 우리는 기어코 피어나고 만다. 누구나 꽃이다. 꽃잎이다.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김남주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셋이라면 더욱 좋고 둘이라도 함께 가자

 앞서가며 나중에 오란 말일랑 하지 말자

 뒤에 남아 먼저 가란 말일랑 하지 말자

 둘이면 둘 셋이면 셋 어깨동무하고 가자

 투쟁 속에 동지 모아 손을 맞잡고 가자

 열이면 열 천이면 천 생사를 같이 하자

 둘이라도 떨어져서 가지 말자

 가로질러 들판 산이라면 어기여차 넘어 주고

 사나운 파도 바다라면 어기여차 건너 주자

 고개 너머 마을에서 목마르면 쉬었다 가자

 서산낙일 해 떨어진다 어서 가자 이 길을

 해 떨어져 어두운 길

 네가 넘어지면 내가 가서 일으켜 주고

 내가 넘어지면 네가 와서 일으켜 주고

 가로질러 들판 누군가는 이르러야 할 길

 해방의 길 통일의 길 가시밭 길 하얀 길

 가다 못가면 쉬었다 가자

 아픈 다리 서로 기대며

 

 '빈민 단체'에서 일할 때 모 성당에서 수녀님들이 서로 손을 맞잡고 선생님의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을 부르던 모습이 뇌리에 선명히 박혀 있다.

 우리 모두 꽃이 되고 꽃잎이 되는 길.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우리 모두 이 시대의 '소는 내가 잘 모는 녹두 장군, 농민군'이 되어야 한다. 우리 가슴 속의 '녹두 장군' '농민군'이 깨어나야 한다.

 그렇게 이 시대를 돌파해 나가야 한다. 100여년이 흐른 후, 우리 후손들이 우리에게 물을 것이다.

 '녹두 장군, 농민군을 계승했냐?'고.  

 

 '녹두 장군' '농민군'을 기념하는 순간, 그들은 죽는다. 우리가 그들이 되어야 한다.

 우리 모두 자기 자리에서 '소처럼 춤을 추는 한 시인'이 되어야 한다.

 

고석근/ 경북 상주 출생, 제6회 민들레문학상 수상, 시집『나무』산문집『명시 인문학』,수필집『숲』, 인문학 강사.





동학농민전쟁의 숭고미

권서각

 

  상하의 구별이 있었던 봉건사회에서 피지배계층인 농민들이 지배계층인 관아를 공격하여 승리한 동학농민전쟁의 광경을 그려보면 장엄하고 숭고한 느낌에 전율한다. 참으로 숭고한 광경이 아닐 수 없다. 임마누엘 칸트는 숭고한 느낌을 불러일으키는 광경을 ‘판단력 비판’에서 다음과 같이 열거하고 있다. 천둥 번개와 함께 몰려오는 먹구름, 화산의 폭발, 인간의 마을을 폐허로 만드는 태풍, 파도로 일렁이는 대양, 전쟁터에서 아무런 두려움 없이 적을 무찌르는 장수...... 전봉준이 농민군을 이끌고 관아를 공격하여 승리하는 광경은 숭고한 느낌을 불러일으키기에 부족함이 없다.

  인간이 느끼는 미적 범주 가운데 숭고미(崇高美)는 보통 이상의 인간이 현실과의 대결에서 승리할 때 나타나는 미학이다. 전봉준이 체포되어 압송되고 심문 받고 처형되는 장면은 비장미(悲壯美)로 분류될 수 있다. 보통 이상의 인간이 현실과의 대결에서 패배했을 때 나타나는 미학이 비장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처형당하는 전봉준에게서는 비장미가 느껴지지 않는다. 그는 힘의 강약에서 패배했지만 끝까지 존엄을 잃지 않았기에 최후의 승리자다. 농민군의 선봉에 섰을 때도 당당했고 체포되어서도 당당했기에, 그리고 그의 혁명정신이 아직도 살아 숨쉬기 때문에 그의 모습은 숭고하다.

  전봉준은 체포되어 1989년 2월 9일부터 3월 10일까지 5차례에 걸쳐 심문을 받았다. 심문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 ‘전봉준 공초’에 나타난 그의 대답을 통해서 당대 농민군의 목소리와 전봉준의 이미지에 다가가 보고자 한다.

 

문: 왜 난을 일으켰느냐?

답: 어찌하여 날보고 난을 일으켰다 하느냐? 작란(作亂)을 하는 것은 바로 왜놈에게 나라를 팔아먹고도 끄떡없는 부패한 너희 고관들이 아니냐?

 

전봉준의 대답은 조금의 주저함도 없고 망설임도 없다. 그만큼 굳은 신념과 절실함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당대 부패한 권력들이 외세를 끌어들여서 권력을 유지하려 했기에 그들에게 나라와 백성은 중요한 것이 못되었다. 그들에 비하면 민중들의 생존을 위해 봉기한 동학의 의거는 당당하고 정의롭기에 부패한 관리 앞에서 의연할 수 있었을 것이다. 난을 일으켰느냐는 물음에 난을 일으킨 것은 자신이 아니라 지금 심문하고 있는 부패한 관리들이라고 한다. 농민들의 생존권과 인권을 막다른 골목으로 몰고 간 책임이 그들에게 있기 때문이다.

 

문: 관아를 부수고 민병을 일으켜 죄 없는 양민을 죽게 한 것이 난이 아니고 무엇인가?

답: 일어난 것은 난이 아니라 백성의 원성이다. 민병을 일으킨 것은 기울어져가는 나라를 구하고자 함이요 백성의 삶에서 폭력을 제거코자 했을 따름이다.

 

  당시 백성들은 가혹한 세금으로 생존권마저 박탈당하는 위기에 처해 있었을 것이다. 관아를 부순 것을 전봉준은 난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것은 백성의 생명을 지키기 위함이요 관으로부터의 폭력에서 백성을 구하기 위함이라고 했다. 동학사상의 핵심은 사람이 곧 하늘이기에 하늘과 같이 귀한 백성의 생명을 지키고 폭력으로부터 구하는 것은 동학의 핵심적인 사상의 실천이기도 하다. 백성들을 구하는 일이 난이 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문: 그리하면 지방의 방백수령을 혼내주면 됐지 왜 서울에 입성코저 했는가?

답: 국체를 무시하고 궁궐을 침범한 왜놈들을 응징코저 한 것이다.

문: 그럼 서울에 살고 있는 외국인을 다 내쫓고자 했는가?

답: 아니다. 외국인은 통상만 하면 되는 것이다. 헌데 왜놈들은 군대를 주둔시켜 나라를 집어삼키려 하고 있다는 것을 그대들은 아직도 모르고 있단 말이냐? 어찌 뿌리가 썩었는데 가지를 친다함이 의미가 있을손가?

 

  부패한 권력은 전봉준의 서울 입성 시도를 반역으로 몰아서 처단하려는 의도를 보인다. 전봉준은 서울 진격의 목적이 권권을 침탈한 일본을 응징하고자 함이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이는 동학농민전쟁의 핵심적 목표인 보국안민(輔國安民)의 가치를 확실하게 함이기도 하다. 동학의 기치가 척양척왜(斥洋斥倭)이긴 하지만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배척하는 것이 아님을 밝히고 있다. 외국과의 관계는 통상에 한해서 허용적인 태도를 보인다. 이는 우리민족의 생명만이 귀한 것이 아니라 지상의 모든 사람이 다 귀하는 메시를 담고 있다. 동학이 적대시하는 것은 외국인이 아니라 국권을 침탈하는 외세라는 것이다.

 

문: 너는 동학의 괴수(魁首)냐?

답: 나는 의를 펴고자 일어났을 뿐이다. 동학의 괴수라 함은 가당치 않다.

문: 동학엔 언제 입당하였느냐?

답: 삼 년 전이다.

문: 왜 입당하였느냐?

답: 사람의 마음을 지키고(守心) 하늘님을 공경하는 것(敬天)을 가르치기 때문이다.

 

  동학에 입당하게 된 동기와 목적이 드러난 부분이다. 그가 말하는 의는 유교의 덕목이다. 義는 유교에서 수오지심(羞惡之心)으로 설명하고 있다. 옳지 못한 것을 미워하는 마음이다. 맹자도 의를 곰발바닥 요리보다 더 좋아한다고 했다. 당대 부패한 관리가 백성을 억압하는 일은 불의다. 불의를 보고도 못 본 체 하는 것은 사람의 도리가 아니었기에 이에 봉기하는 것은 마음을 지키는 일(守心)이다. 동학에서의 가르침은 사람이 곧 하늘이다. 백성의 생명을 구하는 일은 곧 하늘을 공경(敬天)하는 일이기도 하다.

 

문: 동학의 주의(主意)가 무엇이냐?

답: 보국안민(輔國安民)이다.

문: 그렇다면 그대는 하늘님을 공경하는 것 보다는 보국안민이라는 정치적 목적을 위해 동학이라는 조직을 이용한 것밖에 더 되느냐?

답: 동학은 본시 우리 해동 조선 땅에서 일어난 것이며 그 도학(道學)에 종교와 정치의 구분이 있을 수 없다.

 

  심문자는 전봉준을 종교를 이용하여 국가권력을 무너뜨리고 자신이 권력자가 되려는 반역자로 규정하고 있다. 이에 대한 전봉준의 대답은 심문자의 의도를 전복하고 있다. 그의 혁명은 지금의 권력자들이 자신의 이익과 권력을 위해 백성을 억압하는 것과 달리 백성을 편안하게 하고 나라를 바로 세우는 일에 그 목적이 있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백성을 공경하는 일이 곧 하늘님을 공경하는 일이기에 종교와 정치의 구분이 있을 수 없다고 한 것이다.

  동학농민전쟁, 그것은 힘없는 백성들이 국가권력에 대항해서 승리한 일이기에 숭고했고 비록 힘에서는 실패했지만 끝까지 당당했기에 본질적으로는 실패하지 않은 역사의 숭고한 한 장면이었다. 동학농민전쟁의 결과 전봉준은 처형되었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당당하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부패한 권력과 외세에 맞섰다. 그리고 당당하게 죽었기에 죽어도 죽은 것이 아니라 숭고한 모습으로 그 정신이 민족사에 살아 있다.

  

권서각/ 경북 영주 순흥 출생, 1977년<조선일보>신춘문예 시 당선, 시집『눈물반응』,『쥐뿔의 노래』, 산문집『그르이 우에니껴?』, 경상북도문화상 수상, 한국작가회의 이사.



상주의 자랑 공갈못(공검지)이 위협받고 있다

청정지역 공검에 한국타이어 주행시험장이 들어오면 안되는 이유

김영태

 

 상주시는 공검면 율곡리, 부곡리, 동막리 일대 약 43만평에 타이어주행시험장을 유치키로 하고 지난해 9월 한국타이어 측과 투자양해각서를 체결했으며, 2014년 현재 설계를 완료하고 산업단지계획 승인신청을 앞두고 있다. 하지만 청정지역인 이곳에 한국타이어 주행시험장이 들어선다면 막대한 농업손실은 물론 귀중한 문화유산인 공갈못(일명 공검지)이 훼손될 우려가 있어 의식있는 지역민들의 반대 목소리가 어느때 보다 커지고 있다. 국제슬로시티지역이면서, 국가습지이자 세계적 문화유산인 공갈못이 위협을 받고 있다.

 

1. 이정백시장은 약속을 지켜야 한다.

 이정백상주시장은 지난 6.4지방선거를 앞두고 후보시절 공검지역 주민들과 수차레에 걸쳐 한국타이어 주행시험장 유치를 원점에서 재검토 하겠다는 약속을 했으며, 지난 7월  9일 공검지역 대책위 주민들이 합동으로 시장을 면담한 자리에서도 원점 재검토를 거듭 강조하셨다.

 하지만 무슨 일인지 이시장께서는 아직까지 해당부서에 원점재검토 지시를 내리지 않아 혼선이 빚어지고 있다.

 뿐만아니라 이러한 혼선을 틈타 재임시절 이를 추진했던 전임시장이 여전히 지지자들을 만나고 다니면서 한국타이어 주행시험장 유치를 부추기고 있다고 한다. 이는 한국타이어 주행시험장 유치가 자신의 업적임을 내세워 권토중래를 노리고 있다고 보여지는 대목이다.

 이정백시장은 이러한 사정을 잘 헤아려 바드시 약속을 지켜야 할 것이다.

 

2. 200여농가가 생계를 위협받고 있다.

 공검일반산업단지 조성 예정 지구인 공검면 율곡리, 부곡리, 동막리 일대 1,368,173㎡(413,872평)는 농업진흥지역 즉 절대농지가 817,410㎡로 전체부지의 약 60%에 해당하는 전형적인 농업지역으로 이 곳이 산업단지로 수용된다면 이 곳을 생활터전으로 삼고 있는 약 200여 농가는 당장 생계에 위협을 받을 수 밖에 없다.  

 

3. 경제적가치 유발효과는 미미하다.

 농지 40여만평을 수용하고 들어서게 될 한국타이어 주행시험장의 예상고용인원은 겨우 371명(한국타이어측 발표)으로 지역경제에 끼치는 효과가 매우 미미하며, 더군다나 제조시설이 아니기 때문에 상주시의 세수증대도 기대할 수 없다.

 또 현재는 타이어 주행시험장이라고 하나, 주행시험장 만으로는 지역경제에 미치는 효과가 미미하다는 이유 등을 들어 언젠가는 한국타이어 본 공장이 입주하지 않는다고 보장할 수 없다. 특히 현재의 예상고용인원 371명 중에는 생산제조인력 221명(생산인력 168명과 기능인력 53명)이 포함돼 있다. 이것만 봐도 한국타이어 생산공장이 언제든지 입주할 준비를 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4. 노동계 선정 ‘최악의 살인기업’ ... 타 지역에서도 반대가 심해.

 한국타이어 생산공장은 대표적인 공해기업으로, 현재 금산과 대전지역의 한국타이어공장에서도 인근 주민들의 반대가 심하다. 특히 한국타이어는 지난 2008년 노동계로부터 ’최악의 살인기업‘으로 선정되는 등 그간 근로자들의 사망사건으로 끊임없이 구설수에 오르는 문제기업이다. 또 지난 2007년 대전지방노동청은 한국타이어 근로자 집단 돌연사와 관련한 특별감독을 통해 모두 1394건의 법위반 사실을 적발했으며, 대전지방법원은 지난 2012년 산업안전보건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대전공장 안전관리책임자 이모씨, 금산공장 책임자 정모씨 등 한국타이어 임원들에게 유죄 판결을 내린 바 있다. 뿐만아니라 작년 3월에도 한국타이어 대전공장 생산직 근로자 3명이 잇따라 숨지는 사고가 발생해 논란이 되기도 했다. 청정지역인 공검지역에 이러한 공해기업을 입주시키는 것은 살인행위나 다를바 없다.

 

5. 공갈못이 위협받고 있다.

 일반산업단지 조성 예정지역은 현재 환경부 지정 국가습지로 지정된 공검지(공갈못)와 직선거리로 불과 800여미터밖에 떨어지지 않아 생태계에 미치는 악영향이 클 것으로 우려된다. 2013년 대구지방환경청의 ‘상주 공검지 습지보호지역 생태계 모니터링 보고서’에 의하면 공검지에는 법적보호종인 수달, 삵 등 포유류 11종, 천연기념물 황조롱이 원앙 등 조류 58종 3,324개 개체, 연꽃 수련 등 식물군 78과 210종, 그리고 딱정벌레 등 곤충류 39과 73속 76종이 서식하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또 공검일반산업단지 조성 예정지구 인근에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재수리시설이 출토돼 그 가치가 무한한 공갈못(직선거리 800미터)을 비롯해 우복정경세 신도비, 난재 채수선생 신도비 등 각종 문화유산이 산재해 있는 곳으로, 심각한 문화유산 훼손이 우려된다. 오히려 공검지역 전체가 문화재 보호지역으로 지정돼 보호받을 가치가 있는 곳이다.

 

6. 국제슬로시티 요건과 안맞아

 일반산업단지 조성 예정인 공검지역은 인근의 이안, 함창과 함께 국제슬로시티협회로부터 곶감과 양잠 그리고 각종 친환경 농산물 등 슬로산업이자 생명산업인 농업이 비교적 잘 지켜지고 있는 곳으로 평가를 받아 2010년 6월 국제슬로시티로 지정받은 곳이다. 하지만 한국타이어는 환경, 기초인프라, 도시경관 및 미과, 토산품의 가치화 정책 등 슬로시티 요건과는 전혀 맞지 않는다. 만약 한국타이어 주행시험장이 들어선다면 겨우 제자리를 잡아 가고 있는 슬로시티 지정이 해제될 우려가 있다.

 

7. 타이어공장 인근지역은 소음-냄새 심해

 뿐만아니다. 지난 8월 공검지역 전직 시의원, 조합장, 면장 등 원로들과 함께 한국타이어 금산공장과 인근한 제원면 수당리 마을을 견학해보고는 사태가 얼마나 심각한지 실감할 수 있었다.

 8월 27일 오전 11시. 우리 일해은 충남 금산군 제원면 수당리 마을에 들어섰다.

 아직 8월장마가 끝나지 않았는지 하늘은 잔뜩 찌푸린채 바람은 솔솔 불어오고 있었다. 금산IC에서 차로 불과 5분여 거리에 떨어져 있는 마을에 들어서자 첫 인상은 마을에 고압철탑을 비롯한 고압전선이 너무 많다는 것이었다. 한자리에 서서 카메라 시야에 들어오는 고압철탑만 해도 5개가 넘었으며 고개만 한바퀴 돌리면 보이는 철탑의 수는 10개는 족히 돼 보였다. 철탑 아래쪽의 전봇대까지 포함해서 거미줄처럼 어지럽게 흩어진 고압선들이 일제히 한국타이어공장쪽을 향하고 있었다.  저 많은 고압선 아래쪽에 있는 땅과 집들을 팔려고 하면 과연 살 사람이 있을까 궁금했다.

 두 번째는 마을이 너무 조용하다는 것이었다. 50여호 정도(애초에는 100여호 정도 있었으나 공장이 들어선 이후 18년동안 50여호로 줄었다 한다) 돼 보이는 마을의 지붕들은 하나같이 70년대나 80년대에 지은 것처럼 보이는 낡은 집들이었으며, 왕래하는 사람은 거의 찾아 볼 수가 없었다.

 다음에는 소음과 냄새였다. 마을회관 앞에 차를 세우고 잠시 주위를 둘러 보는데 귓가에는 계속 웅웅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분명히 공장에서 나는 소리였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금방 매케하고 역겨운 냄새가 코를 찔러왔다. 일행중 냄새에 민감한 한 분은 아예 수건으로 코를 막고 있었다.

  잠시후 박씨 성을 가진 60대쯤 돼 보이는 남자 한분과 대화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누군가가 “공장 들어오면 살기좋다고 해서 견학 왔는데 정말 살기 좋습니까?” 라고 질문했다. 그러자 대뜸 “뭐가 좋습니까? 공기도 나쁜데” 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박씨와 대화가 끝나고 잠시후 한국환경교육네트워크 최모 사무처장이 도착했다. 간단하게 인사를 나눈 후 마을회관앞 정자에 둘러앉아 얘기를 나누었다. 최씨의 말은 더 심각했다. 간단하게 정리해 보겠다.

 “금산은 이 마을 주변만 들판이고 나머지는 다 산이다. 그래서 비단금(錦)자를 써서 금산(錦山)이라고 한다. 금산에는 제대로 된 공장은 한국타이어 한 곳 뿐이다. 한국타이어가 들어 온 이후로 다른 공장은 전혀 들어 올려고 하지 않는다. 한국타이어 고용규모는 약 1,700명정도 된다. 1개면에 해당하는 규모다. 어마어마하다. 하지만 공장규모에 비해 주민에게 도움 되는건 너무 적다 아니 차라리 아무것도 없다고 보면 된다. 단지 금산군에 납부하는 세금 30억원 정도가 전부다. 지방세외에 수익금은 전액 서울에 있는 본사로 올라간다. 주민에게 돌아오는 이익은 1원도 없다. 설립 초창기엔 지역주민을 몇 명 고용하더니 지금은 그나마 거의 없다. 젊은 친구 1명이라도 고용시킬라 치면 군의원, 면장은 물론 군수 추천장까지 받아 가도 취직이 잘 되지 않는다. 이렇게 큰 공장은 힘이 세기 때문에 지방자치단체의 말을 잘 안 듣는다. 큰 공장은 지역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차라리 작은 공장이 훨씬 낫다. 작은 공장은 지역밀착도가 높은 편이다. 큰 공장 중에서도 사회공헌을 하지 않는 대표적 기업이 한국타이어다, 아주 나쁜 기업이다. 타이어공장에서 나는 냄새와 분진은 멀리 가지 않고 약 10km 이내에서 다 내려 앉는다. 주변지역이 집중적으로 피해를 입기 마련이다. 비가 올때는 초창기 약 15시간 까지는 공장으로부터 시커먼 폐수가 흘러 나온다. 성분검사를 의뢰해 보니 타이어 성분이라고 나왔다. 공장 관계자의 안내를 받아 공장내부로 들어가서 확인해 볼 기회가 있었다. 주행시험장에는 차가 빠른 속도로 하루종일 돌고 있었다. 타이어 닳는 양이 엄청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공장 지붕을 보니 타이어 분진이 새까맣게 쌓여 있었다. 그 분진들이 비가올때 빗물에 섞여 폐수로 흘러 나오는 것이었다. 타이어공장에서 사용하는 화학물질의 수는 엄청나다 우리가 다 알지도 못한다. 이 화학물질들이 모두 타이어에 묻어 있다가 분진이 되어 공기중으로 날아갔다가 다시 인근에 있는 주민들 몸속으로 들어간다. 타이어 분진은 멀리 날아가지 않는다. 회사가 커지고 발전할수록 주민은 괴롭고 지역발전은 전혀 없다. 큰 공장은 지역주민의 얘기를 전혀 듣지 않는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지역주민들은 고향을 잃어버린 꼴이다. ‘타이어공장도 아니고 주행시험장이 뭐 큰 피해가 있겠나?’ 이렇게 생각 할 수도 있겠지만 아니다, 그건 아무도 장담 못한다. 오히려 주행시험장이 더 위험할 수 도 있다. 우리가 후손들을 생각해야 한다. 후손들에게 아름다운 고향을 물려 주는 것이 어른들의 도리 아니겠는가?”

 최씨의 말은 큰 울림으로 다가왔다. 지역 원로분들은 한동안 말을 잃고 멍하니 한숨만 지을 뿐이었다.

 

 올해는 동학농민혁명 120주년을 맞는 날이다.

 120년전 우리 선조들은 무엇을 지키기 위해 30여만명씩이나 목숨을 잃어 가면서 그토록 저항했던가? 그 이유를 곰곰히 생각해본다.

 

 

김영태/ 공갈못문화재단 상임이사.


 

왕산 옛터전

권홍열

 

왕산을 오르기 위해 왕산역사공원의 잘 단장된 경내 길을 따라 걷는다. 왕산은 해발71.3m 정도의 작은 산인데 기록에는 이 산을 중심으로 신라시대부터 읍성을 쌓았다. 왕산 바로 아래 남쪽에 상주목 관아가 있었고 조선시대는 1592년 임진왜란 시에 대구로 이전될 때 까지 경상감영이있었던 곳으로 신라시대부터 행정의 중심이었던 역사가 있는 터전이다.

상주에서 과거시험 문과에 인재가 많이 배출된다하여 이 산을 장원봉이라고 불렀다고도하나, 일제시대 때는 민족혼을 지우고 일제의 잔재를 남기려고 앙산으로 불리어진 슬픈 역사도 있었다.

신록이 우거진 산길이라면 바람에 흔들리는 이파리의 서걱거리는 소리와 하늘로 향한 작은 구멍사이로 숲을 드나드는 바람이 가져다주는 풀내음이 물씬 풍겼을 테지만, 산이 주는 그러한 특유의 싱그런 맛은 없고 새에게 자리를 내준 키 큰 나무들이 여름을 즐긴다.

왕산을 찾은 이유는 갑오년 9월 120여년 전 그날 사건의 문을 열어보고픈 충동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상주지역에서 치적을 남긴 사람들의 공덕이 새겨진 비문이 세월속에 글자의 형체가 흐릿하다. 어렴풋한 비석 군락을 지나 돌 계단을 천천히 밟으며 발길을 내지른다. 상주에 오래 살았는데도 자주 찾지 못한 탓인지 왠지 낯선 방문객인 듯하다.

'낯선 방문객을 어디서 본 적이 있는가. 발걸음을 기억하는가'하고 왕산에게 물었다. 대답이 없다. 그날의 사건을 왕산은 보았고 다 알고 일을터인데 역시 대답이 없다. 안으로 들어가는 문은 열렸는데 나오는 문은 닫힌 모양이다.

'걸어 들어가는 사람은 누구이며 발걸음은 누구의 것인가. 안으로 들어가는 문은 닫혔고 나오는 문도 닫힌 것인가.

나에게 질문을 던졌다.

안으로 닫아 놓은 문을 열려고 노력은 했으나, 열리기만을 기다린 건 편히 쉬고픈 욕심 때문이었나? 아마 그럴 것이다. 역사를 알고부터 역사와 멀리 떨어져 있고 싶은 마음이 나를 지배한 것이다. 알고 있었던 것들이 잠시 자리를 비운 것이었다.

지금 까지 마음 속 한편에서는 일직선으로 가야만한다는 것과 그 반대편에서 많이 망설이기는 했다. 동학이 태동했던 그 시절 1963년 임술년 농민항쟁을 소설로 약간 다루었으나 지방에서 역사를 다룬다는건 어려운 일임을 느꼈기 때문이다.

얼굴에 와 부딪치는 더위가 열을 내뿜게 한다. 열기를 식히려고 몸을 돌았던 물기의 뭉치가 송골이 맺힌다 이윽고 분리되어 땀방울로 떨어진다.

몸을 이롭게 하고 폐기물로 사라지는 물방울, 사람들은 이 물기뭉치의 가치를 알기나 할까.

돌아올 수 없는 길, 동학이 뭔지도 모른체 사라져간 사람들, 그들도 같은 조선인이었을 진제, 그들을 이곳으로 모여들도록 한 것은 무엇인가. 살지도 죽지도 못할 환경 때문이었나. 밖에서 안쪽 문을 열려고 했던 그들, 문 안의 세계는 바다였었다. 누군가가 억지로 밀어 넣은 게 아니라 그들은 오직 몸으로만 안쪽문을 열려고 했다. 문을 열었기 때문에 그들은 그대로 바다에 빠질 수 밖에 없었다. 바다는 용서란 존재에 너그럽지 못하므로......

작은 구멍에 들어가는 바람이 왕산을 감아흐른다. 이파리 사이를 흔들어 쓰다듬는다. 나뭇가지를 흔들지 못하는 건. 내가 보지 못하는 눈을 가졌기 때문이다. 바람에게 물어보면 바람은 분명 나뭇가지도 흔든다고 할 것일터. 내가 안쪽으로 들어가는 문을 열지못함이다.

그 소리를 들어려고 더욱 천천히 계단을 오른다.

창문이 열린듯 길이 보인다. 가지를 흔들고 막 떠나는 바람에 이파리들이 부대끼는 소리가 들린다. 기침 소리 신음소리 한숨소리가 끼여든다. 갈데 까지 가야했던 그때의 생기없는 소리인듯 하다. 어쩌면 어두운 곳에서 항변하는 고단한 음파다. 그때의 명암이 나무그늘에 묻혀있다.

그때 9월 이곳은 분명 비릿한 피냄새가 진동했을 터였다.

인적이 느껴졌다. 한 낮인지라 사람이 찾지않아 아무도 없이 나 혼인줄 알았는데 사람이 옆을 지나간다. 언덧보니 나이든 노인이었다. 백수를 넘긴 노인이라면 그 날의 사건를 알건 같것만 왕산 길을 오르는 사람들은 그 냄새를 모를 것이다.

연이은 연속성 상상을 품으며 좀 더 높은 곳으로 오르기 위해 발걸음을 위로 밀어올린다. 그 자리에 비로자나불(복룡동석불좌상 보물제119호)이 조용하다.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돌부리에 걸린 이끼인 것을, 어디로 간 것인가. 자연이 바낄 때마다 몸을 변화시켜 적응해야하는 나무는 몇백년을 살아가건만. 욕심을 버리지 못하는 것들은 누구인가. 바람도 길도 여리게 열리고 여린 빛도 가늘어진다. 기다려주는 삶은 재미가 없는 것인가. 쓸어갈 것도 없는 세상에 삶을 내려놓고 붉은 영혼과 이야기 나누며 죽음의 그림자와 함께 거꾸로 서고 싶었던 것이었나......'

쓸어갈 흔적없는 자리 하늘에 낀 구름이 시꺼먼 빛으로 변해 방문객의 얼굴 위로 한꺼번에 뭔가를 내릴 것 같다.

잘못된 정치의 개혁을 외치며 시대가 수용할 수 없는 혁명적인 기치를 내걸고, 보국안민과 외세배격을 주장하며 안쪽으로 들어간 사람들 그들은 시대가 빼았아간 붉은꽃이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 상주 1894년 갑오농민 항쟁 일자별 요약 》

○ 1894년 4월 27일 : 상주농민 술렁임

○ 1894년 6월부터 농민군이 무장

○ 1894년 9월18일 : 동학농민군 결성, 봉기 준비

○ 1894년 9월 22일 : 농민군 읍성 점령

○ 1894년 9월 28일 : 일본군의 공격으로 패퇴(100명 희생)

- 관. 향리 : 民堡軍 조직(500여명), 尙州執綱所 설치, 농민군 기찰 및 체 포 타살

- 동학농민군 : 대접주 김현영을 비롯한 농민군지도자 읍성 재검거를 포기 하고 북접동학군에 참가

○ 1894년 9월 29일 : 영남소모사 임명 (召募使 鄭宣黙)

○ 1894년 10월18일 : 소모사 소모절목 9개조 작성 10월21자로 각 면리에 공포, 감사에 요청하여 집강소가 소모영에 통제되도록 조치

○ 1894년 10월19일 : 민보군을 흡수하여 소모영(양반 향리 합세한 농민군 색축 처단) 설치

○ 1894년 10월 22일 : 태평루에서 농민군 9명 처형

○ 1894년 11월 7일 : 태평루에서 농민군 처형

○ 1894년 11월 14일 : 모동장터 포살 5명

○ 1894년 11월 15일 : 모동 반계 포살 (조왈경 등)

○ 1894년 11월 17일 : 화동 포살 3명

○ 1894년 11월 19일 : 화령 장터포살 3명

○ 1894년 11월 20일 : 화남 광주원 포살 2명, 평원 포살 3명

○ 1894년 11월 24일 : 태평에서 포살 6명

○ 1894년 11월 27일 : 청산 월남전 포살 2명

○ 1894년 12월 2일 : 청산 소사동 포살 2명

○ 1894년 12월 11일 : 상주유격병대 용산에서 농민군과 격전

○ 1894년 12월 12일 : 남사정에서 처형 6명

○ 1894년 12월 14일 : 태평루에서 처형 4명

○ 1894년 12월 18일 : 상주유격병대. 일본군과 농민군이 보은 북실에서 접 전 2,600여명 살육

○ 1894년 12월 22일 : 남사정에서 처형 10명

○ 1894년 12월 23일 : 태평루에서 처형 3명

○ 1895년 1월 24일 : 상주소모령 해체

※ 출저 : 상주문화 12호 (상주문화원)

 

권홍열/ 경북 영양 출생, 2002년 계간《공무원문학》소설 등단, 2005년 월간《문학세계》소설 등단, 상주숲문학회 회원, 상주시청 근무.







일금 오천 원의 위엄

김인기 

 

  가을이 한창인데도 백화점에서는 옷가지들을 이월상품이라며 내놓았다. 이게 얼마 전이다. 아내가 외출했다가 전화로 나를 불렀다. 윗옷 하나의 가격이 59,000원이다. 닷새 전에는 이게 159,000원이었다. 이런 상품의 관련자들도 많을 터이다. 그렇더라도 적정가격이 9,000원 정도면 알맞지 않을까? 이게 내 감각이다. 이러니 내게 옷은 늘 비싸다. 이런 건 5,000원이면 충분하지. 재래시장에서는 이와 별반 다르지 않는 것들도 이 가격으로 팔리던데, 뭐.

  어느 재벌가의 딸은 1,000,000원이나 하는 블라우스를 두고도 ‘창피스럽게 그런 싸구려를 어떻게 입고 다니느냐?’ 반문했다지만, 그건 그네들 사정이고, 나는 고가품이 거북하다. 내게는 우선순위가 이보다 앞서는 용처도 수두룩하다. 나는 옷치레로 당장 뭘 어떻게 할 의사도 없다. 이런 생활이 내게는 익숙하다. 하지만 이러는 나도 때로는 거울 앞에 선다. 혹여 내 차림새가 남들의 오해를 부를까 염려한다. 이래서 더러는 본의 아니게 일탈도 한다.

  치장도 누구에게는 취미활동이겠지만, 나는 이런 게 번거롭다. ‘이렇게나 시답잖은 일에 끼어드느라 돈과 시간을 썼구나. 그러느니 차라리 그걸로 책이나 사다 읽을 걸.’ 그런들 어쩌겠는가! 일은 이미 저지른 뒤이거니와 남들한테 내 방식을 강요할 수도 없으니. 이것도 다 심약한 인간이 육신을 이끌고 남들과 어울려 살자면 으레 감내해야 하는 고역이다. 그러고 보니 도깨비들이 옷가게에만 있는 것도 아니다.

  어느 날 오후였다. 나는 헌책방에서 수필집 한 권을 보고는 자신이 저자라 밝히지도 않고 점주더러 이게 얼마냐고 물었다. 어쩔 것인가? 다른 수필집은 2,000원 또는 3,000원인데 이건 왜 이렇게 비싸냐며 흥정이라도 할까? 나는 일언반구도 없이 5,000원을 내밀었다. 지금 다시 읽어봐도 결함투성이인 졸저 근처에는 불후의 명작들이 어깨를 나란히 하며 2,000원 또는 3,000원에도 팔리지 않아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반야(般若)의 바다를 구족하건만

열반(涅槃)의 성(城)에 머물지 않나니

마치 저 아름다운 연꽃이

높은 언덕에 나지 않음과 같도다.

 

모든 부처님이 한량없는 세상에

온갖 번뇌를 아주 버리지 않으시고

세간(世間)을 제도한 후에야 비로소 끊으니

마치 진흙에서 꽃이 핌과 같도다.

 

저 육행(六行)의 경지들은

보살의 닦는 바이요,

저 삼공(三空)의 취(聚)는

보리(菩堤)의 직도(直道)로다.

  

  이런 게송이 실린 『금강삼매경론(金剛三昧經論)』도 헌책방에선 5,000원보다 더 싼 값으로 팔린다. 그렇기로 나 어찌 졸저가 이보다 더 낫다고 우기랴. 무엇의 가격을 매기는 것도 사람들이다. 이렇게 밀리고 저렇게 밀리다가 마침내 내게로 온 책들아! 너희들의 모습에도 누군가의 애호와 박대의 흔적이 남았구나. 이러면서 나는 이것들과 사귄다. 하기야 경전이란 게 꼭 묵자(墨字)나 점자(點字)로만 이루어지지도 않는다. 때로는 고등어 눈깔이나 콩나물 대가리도 설법을 한다.

  작년이었다. 아내가 백화점 식품매장에서 누군가를 봤다. 그래서 반가운 마음에 이것저것 살피지도 않고 ‘아무개 엄마!’라고 불렀는데, 워낙 혼잡한 터여서, 그 여자가 이 소리를 듣지 못했다. 아내가 다시 목소리를 높이려다가 그만 그러지 못했노라 했다. 당시에 아내가 입었던 옷들이 한때는 다 그의 것이었으니까. 심지어는 부츠마저도 문제의 그 여자가 잠시나마 신었던 거였다. “그러면 누구라도 아는 척을 못하지!” 나중에 사연을 들은 여자들이 폭소를 터뜨렸다.

  저마다 그 행태에 차이가 있다. ‘내 옷이 없는 것도 아닌데, 내가 왜 남의 옷을 입어?’ 이건 내 생각이다. 아내는 이렇지 않다. 여자들이 ‘언니’니 ‘동생’이니 하며 희희낙락한다. 이로부터 이들 사이에 갖가지 물자들이 오간다. 이러다가 사고가 난 것이다. “이미 그렇게 ‘언니’가 되고 ‘동생’이 되기로 했으면, 그럴 것도 없잖아요?” 이것도 허튼소리이다. “그간의 교류로 누가 더 큰 이득을 얻었지?” 이런 결산도 없다.

  이게 괴이하다. ‘서로 모르는 사람으로 만났으나 우리는 이제부터 의자매(義姉妹)로 살기로 하자.’ 만약에 이런 거였다면, 아내도 그 자리에서 달리 행동했어야지. ‘봐라, 아무개야! 나는 널 이렇게 생각하고 있단다.’ 이게 이런 물증이니까. 이들 사이에 신분의 차별이 있는가? 그렇다면 더욱 괴상하다. ‘왜 그런 게 필요해?’ 이런 질문이 나오니까. “에이, 우리 사이에 그런 건 없어요.” 누가 이런다고 해도, 나는 의심할 것이다.

  여자들이 신통하다. 이들이 즉각 공감하니까. 인간관계도 수상하다. 이들도 정체 모를 도깨비들한테 시달리나 보다. 그러니까 옷장이 옷가지들로 미어터져도 마땅히 입을 옷이 없지. 이들은 늘 동일한 배역으로 동일한 무대에 서는 배우들이 아니다. 이들이 행여 연출자라면 모를까. 그나마 상황을 오롯이 파악하면 동료들과 심심찮게 목젖이 보이도록 웃기라도 하지. 이러지도 못하면 모두 알게 모르게 골병이 들지나 않을지 걱정스럽다.

  농사꾼은 자그마한 텃밭만 하나 있어도 할 일이 없지는 않다. 이 사람은 뭘 해도 한다. 누가 드넓은 논밭을 코앞에 두고도 무료해 한다면, 이 사람은 필시 농사꾼이 아닐 터이다. 요리사도 마찬가지이다. ‘어휴, 저녁에는 또 뭘 하나…….’ 설마 달인이 이럴까. ‘나는 쓸 게 없어요!’ 누가 펜을 들고 이런다면, 이 사람도 작가라 하기는 어렵다. 그렇다고 쥐대기가 꾼들보다 고생을 덜 하는 것도 아니다.

  셔츠 하나에 5,000원이 비싸냐? 그렇지 않다. 이걸로는 신간 잡지 한 권도 사기 어렵다. 하지만 현재 통닭집이나 분식점에서 임시직원한테 지급하는 시급이 5,000원이라 생각하면, 이게 허투루 여겨도 좋을 금액도 아니다. 이런 일들이 고되기도 하거니와 종사자들의 자존감을 높여주지도 않는다. 정치경제학이니 인간성이니 하지도 말자. 기껏 시급 5,000원으로 사람들을 마구 부려도 그만인 사회라면, 그런 것 없이도 능히 따질 수 있어야지. 이게 내 상식이다.

  그러나 이런 주장이 언제 또 어디에서 얼마나 너절한 구설에 시달릴까? 내 수중으로 들어오는 50,000,000원은 너무나 모자라고 남의 수중으로 들어가는 5,000원은 도리어 넘친다고 여기는 이들의 속내를 보라. ‘저것들한테 돈을 많이 주면, 결국은 내 말을 듣지 않을 거야. 그 돈으로 자립할 테니까. 저것들이 그래서 까부는 꼴을 어떻게 봐? 그러니까 입에 겨우 풀칠이나 하게 돈을 줘야지. 이리저리 거듭거듭 얽어매야 저것들이 우리들한테 고분고분할 게 아니냐?’ 혹자들에게는 이게 진리이다.

  권력자들의 횡포야 새삼스러울 게 없다. 그래서 우리들도 만사를 오로지 인정이나 도덕에만 맡기지 말고 법률과 제도로 규제하자는 게 아니냐. 그런데도 약자들 다수가 어정쩡하다. ‘지금 내가 허드렛일을 한다고 해서, 이 인간마저 싸구려인 줄 아느냐?’ 이게 그나마 존중할 만한 자존심이기는 하다. 그러나 이걸로는 부족하다. ‘너희들이 지금 활개를 치는 그 근거가 얼마나 합당한지부터 따져보자.’ 나는 이들이 이랬으면 좋겠다. 이런 태도가 자신들을 구하지 않을까. 남들이야 뭐라고 하거나 말거나.

  균형 감각이 없으니, 몇몇이 모인 자리에서도 유머가 아니라 망발이 나온다. 심지어는 자기들의 옹호자마저 내친다. ‘저들을 보면 자꾸만 내 몰골이 떠올라!’ 이 심리가 이렇게도 이어진다. ‘나는 저들과 달라.’ 모순도 이런 모순이 없다. 이에 우리들이 이렇게 물을 수 있다. “어쩌다 소견머리가 그렇게 되었느냐?” 그 답변이 뜨악하다. “본인이 성실하지 않았다.” 진짜? 누군가 의혹을 제기한다. “사실은 그게 아니라…….” 이런 반론은 불온하다. 왜? 이게 혹시나 힘깨나 쓰는 이들의 심기를 거스를지도 모르니까. “그게 어때서?” 이런 질문도 금기이다.

  자기 인생은 자기가 사는 거니까, 각자가 무슨 생각을 하든, 이거야 당사자의 소관이다. 그래도 이들 역시 남들과 교섭할 수밖에 없고, 이런 사람들이 나라를 이루어야 한다면, 피차 갈등을 조절하기 위해서라도 어떤 원칙은 정했어야 했다. 이게 헌법이다. 그런데도 여기에 근거해서 권한을 행사한다는 자들이 이걸 아주 개떡으로 알다니. 그 변명이라고 하는 게 툭하면 특수성이고 예외성이다. ‘남북분단의 엄중한 현실이…….’ ‘우리는 경제위기라는 국난에 처했으므로…….’ 그 환란이 바로 자신들의 탈법에서 왔어도 이네들은 늘 뻔뻔스럽다.

  사람들이 반쯤은 원망으로 반쯤은 우스개로 이렇게 한탄한다. “아이고, 저승차사는 어디에서 뭘 하느라고 저런 인간들을 안 잡아가나!” 나도 때로는 이런 소리를 내지르고 싶다. “으이그, 제 딴에는 잘났다고 나대는 위인들이 넘쳐나는데도 어째 세상 돌아가는 꼴은 이러냐!” 내가 바라보기에도 그 작태가 너무나 지긋지긋하다. 과연 이 사회에도 정치인이니 법조인이니 문학인이니 또 뭐니 하는 사람들도 많다. 이들이 부조리를 몰라서 혹세무민하는 걸까? 나는 도저히 그렇게 믿을 수 없다.

  간밤에 비가 내리더니 가로수 잎사귀들이 우수수 떨어졌다. 바야흐로 가을이 한창이다. 길모퉁이에 노점상들이 홍시를 벌여놓고 팔기도 한다. 한 무더기에 5,000원이다. 능금도 한 무더기에 5,000원이다. 물론 품질에 따라 개수가 조금 다르기는 해도, 행인이 비닐봉투에 담아서 한 손에 들고 가기에는 적당한 분량이다. 홍시나 능금이야 잠깐 먹으면 사라지지만, 의복은 그렇지도 않으니까, 5,000원짜리 옷은 너무 싼가 싶기도 하다. 생산자들이나 상인들도 이윤이 조금은 있어야 하니까.

 [2012.10.]

 

 

 

 

 

 

김인기/ 경북 영천 출생(1962),《월간에세이》로 등단(1991), 수필집『함께 가는 우리들』(1999),『참 좋은 날』(2006). 대구경북작가회의, 대구수필가협회 회원. gagozigo@hanmail.net




갑오년 일기

박래녀 

 

  

  갑오년의 의미가 새삼스럽게 가슴에 닿은 것은 농민동학혁명이 일어난 지 딱 120주년이 된다는 것을 알면서다. 나도 농부이기에 농자만 들어가도 가슴이 시큼하다. 부농으로 사는 사람도 가난한 소작농으로 사는 사람도 농사일은 고되고 힘들다. 육체노동이라 그렇겠지만 정신적 갈등 또한 심하지 않을 수 없다. 뼈 빠지게 일 년 농사지어 곳간에 쟁여놔도 농산물 값이 폭락을 하면 본전치기도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물가는 한 해가 다르게 뛰고, 공과금 역시 오르기만 하고 내리지 않는데 농산물 값은 20년 전이나 비슷하다. 쌀이 주식인 우리나란데도 쌀값은 늘 제자리를 맴돈다. 쌀값만 그런가. 마늘, 양파, 고추, 콩 같은 곡물도 그렇고, 푸성귀도 그렇다. 자급자족으로 살 수 있는 세상이라면 농사꾼이 가장 마음 편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이겠지만 농부도 돈 없으면 농사짓기 힘들어진 시대다. 농사에 드는 모든 것이 돈으로 사야 하는 시대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부지런하면 거름 걱정 없었지만 요즘은 거름도 돈 주고 산다. 거름 만들어 파는 업자는 장사꾼이다. 어떤 작물이든 농약 안치면 실농이다. 농사꾼의 수입이란 농산물을 팔아 들어오는 것이 전부다.

 

  올해는 어떤 농사로 한 해를 살까. 마음 챙김부터 하자고 정초에 멀리 문경 한산사로 명상수업을 다녀왔다. 강행군을 했는데도 마음이 참 편하고 좋았다. 내 몸을 무겁게 하는 것은 눈에 보이는 일상의 불편함이 원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남편은 빚을 내서라도 고사리 밭을 늘리려고 하는데 그 뒷감당을 어찌 하나. 임대했던 단감 산을 주인에게 돌려주고 허탈한데 고사리 농사만 지어서 한 해를 살 수 있을까. 상노인이신 시부모님과 부지런하지만 바를 정자 남편, 대학 다니는 두 아이, 내가 지고 갈 짐은 자꾸 무겁기만 한데 내 몸이 지탱해 줄까. 이런 저런 불편함이 내 몸을 아프게 한다는 사실을 명상수업을 통해 깨달았다. 내 가슴 밑에 깊이 가라앉아 꽁꽁 다져진 앙금을 풀어내기 전에는 일상의 무게가 어깨를 짓눌러 온다는 것을 알지만 막상 풀어보려니 풀 게 없다. 아니 풀기가 싫은 교만 때문일까. 사람은 저마다 살아 온 습이 있다. 굴곡 없는 인생은 없다. 굴곡이 있어 종교를 찾고 마음 수행의 필요성을 느끼는 것이리라.

 

  어쨌든 새로운 해가 열렸다. 농민동학운동을 이끈 전봉준 열사의 결기를 떠올리며 열심히 살아 볼 일이다. 농부의 아내로, 작가로, 어미로, 며느리로. 자만하지 않고 겸손하며 지혜로운 삶, 열린 삶을 살아볼 일이다. 명상수업의 목적을 다시 한 번 새겨본다.

 

깨어 있는 사람이 된다.

자유로운 사람이 된다.

행복한 사람이 된다.

 

  의식이 깨어있는 사람은 생로병사에서 자유로울 수 있고, 자유로움은 행복에 이른다는 평범한 진리가 새삼스럽게 가슴에 닿는 정초다. 갑오년, 또 살아 볼 일이다. 안달하는 마음을 알아차리고, 성냄을 알아차리고, 억울함을 알아차리고, 분노하는 마음을 알아차리면 나는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마음 챙김에서 나오는 자비심은 나와 이웃을 행복하게 할 것이다. 행복 바이러스가 만연하는 한 해가 되길 기도하며 갑오년 새해 동학농민운동의 선봉장이지만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전봉준 선생의 절명시를 읊어본다.

 

때를 만나서는 천하도 내 뜻과 같더니

운이 다하니 영웅도 스스로 어쩔 수 없네

백성을 사랑하고 정의를 위한 것이 무슨 허물이리오

나라를 사랑한 단심 누가 알리 있으리.

 

 

 

박래녀/ MBC 전원생활체험수기 공모 대상 수상, <농민신문>신춘문예 중편소설 당선, 제8회 여수해양문학상 소설부문 대상 수상,《현대시문학》시 등단, 수필집 『푸름살이』.





피베리(Peaberry)커피

박종희

 

분쇄기에 커피콩을 갈던 남편의 낯빛이 좋지 않다. 늘 하던 일인데 오늘따라 커피콩을 넣었다 꺼냈다 분쇄기 날을 뺐다 끼웠다 하는 등 몹시 분주해 보인다. 그냥 두었다가는 오늘 안에 커피 마시기 어려울 것 같아 가보니 커피콩이 문제였다.

이제껏 한쪽 면이 평평하여 플랫빈이라 불리는 원두커피를 마셨는데, 며칠 전에 지인이 선물로 준 피베리 커피는 완두콩처럼 동글동글한 커피였다. 분쇄기의 칼날을 평평한 생두가 갈리도록 조정해 두었는데 둥근 커피콩을 갈려니 갈아질 리가 만무했다. 칼날을 몇 번 조정하고 커피콩을 방바닥에 흐트러트리면서 어렵사리 갈아 드리퍼에 내리니 그윽하고 구수한 커피 향이 집 안 구석구석까지 헤집고 다닌다.

커피 열매 안에는 커피 생두 두 개가 서로 마주 보고 들어 있는데, 가끔 불량품처럼 둥근 생두가 하나만 들어있는 것이 있다. 이 생두가 완두콩처럼 생겼다고 해서 ‘피베리’라 불린다고 한다. 핸드드립 커피를 좋아해 마실 때마다 생두를 갈아 마시는 나도 ‘피베리커피’는 처음 들어보는 낯선 이름이었다.

처음 커피가 알려지던 때에는 ‘피베리’가 커피의 잡맛을 내는 ‘결점두’라고 생각해 다 골라냈었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커피광들 사이에서 특별한 대접을 받으며 비싼 값에 팔리고 있다. 커피 애호가들은 피베리커피가 보통의 생두보다 뛰어난 향과 깊은 맛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그 이유는 두 개의 생두에 가야 할 모든 영양소가 한 개의 알맹이에 모여 있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이를 뒷받침하는 과학적인 연구 자료는 아직 없다고 한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피베리가 더 좋은 맛을 낸다고 하는 것은, 피베리의 둥글둥글한 모양이 평평한 것보다 균일한 로스팅을 할 수 있어, 좀 더 좋은 향과 깊은 맛을 끌어낼 수 있다고 보는 것 같다. 또, 커피 전체 생산량의 2∼10% 정도밖에 되지 않는 적은 생산량 탓에 귀한 대접을 받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불량두’라고 버려지던 피베리가 맛과 향을 인정받아 고급커피로 불리는 것을 보면서 우리 주변에도 진가를 알지 못해 묻혀 사는 것들이 얼마나 많은가 생각하게 되었다.

 

지난달에 조카가 사회적 기업을 승인받아 ‘맑은 기업’이라는 회사를 만들었다. 조카는 대학 재학 중에 사고를 당해 휠체어를 타야만 하는 1급 장애인이다. 그런 조카가 열심히 노력하고 공부하더니 기업의 대표가 되었다. 조카네 회사는 제지회사에서 용지를 공급받아 규격에 맞게 자르고 포장하여 납품하는 업체다.

회사를 개업한다고 해서 가보니 조카가 휠체어에 앉아 우리를 반겼다. 컴퓨터 프로그래머로 일하면서 워낙 침착하고 명석해 성공할 줄은 알았지만, 막상 15명이나 되는 직원을 거느리는 대표이사가 되어있는 것을 보니 콧등이 시큰했다.

사회적 기업은 취약계층에 사회서비스 제공과 일자리 창출을 목적으로 하는 기업이라 조카도 지적장애인 7명을 의무적으로 채용했다고 했다. 얼핏 보기에 그들은 일반인들과 다를 바 없었는데, 언어가 조금 어눌하고 하는 짓이 어린아이 같았다. 그들 중에 유난히 마음이 가는 여자직원이 있었다. 청순하고 얌전해 보이는 예쁜 아가씨였다.

조카는 그들이 단순작업은 성과가 좋은데, 숫자를 센다거나 기억을 해야 하는 일은 무리라고 했다. 그날, 개업식 행사 중에 복사용지를 재단하여 포장하는 작업을 직접 시연해 보이는 시간이 있었다. 구의회 의장을 비롯하여 내빈들이 50여 명 모여 있고, 각 언론사의 기자들까지 와있는 자리라 혹시라도 실수하면 어쩌나 싶은 생각에 마음을 졸였는데, 그들은 완벽하게 작업과정을 보여줬다.

“지금부터 복사용지가 만들어지는 작업과정을 보여 드리겠습니다.”라는 사회자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정해진 자리에 가서더니 자기들이 맡은 업무를 척척 해내,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눈시울을 뜨겁게 했다. 마흔이 다 돼가는 자식이 결혼도 못하고 집에 뒹구는 것을 보며 애를 태우던 부모님도, 아들이 근무복을 입고 일하는 모습을 대견한 듯 바라보았다. “세상에는 내 자식이 할 수 있는 일도 있구나!”라고 하며 행복해했다.

사람이든 사물이든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저마다 존재해야 할 필연적인 이유를 가지고 태어난다. 아들의 지능이 떨어진다고 근심만 하며 세월을 보냈던 부모는 그날 어떤 기분이었을까? 지적장애인이라고 해서 직장생활을 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들의 지능에 맞는 일을 찾아주지 못해 그들이 사회 속으로 들어올 기회가 없었을 뿐이다.

한때, ‘결점두’라고 불량품 취급받았던 피베리커피가 고급커피로 자리매김한 것처럼 이제 사회에 첫발을 내디딘 그들도 그들만의 아름다운 인생을 구축하게 될 것이다. 남편이 정성껏 내려준 피베리 커피를 한 모금 입에 물고 궁굴려본다. 개업식 날 맥주 한 잔에 얼굴이 발그레해지던 아가씨의 수줍은 미소가 커피잔에 어른거린다.

 

 

박종희/ 2000년《문학세계》수필 등단, 제10회 전국시흥문학상 우수상 수상, 제5회 올해의 여성문학상 수상, 제17회 매월당 문학상 수상, 저서『나와 너의 울림』,『가리개』.




낙엽의 향기   

윤정숙

 

 

듬성듬성 숱 없는 노모의 윤기 잃은 머리카락처럼, 보도위에 뒹구는 마른 낙엽들이 스산한 바람결에 흩어져 어지럽게 날아 다닌다.

하늘은 더 이상 부신빛살을 토하지 않겠다는 듯 우울한 침묵만을 고집하고 있음이, 눈이라도 한바탕 몰고 와 쏟아 부을 기세가 사뭇 암팡지게 느껴진다.

“마른 잎은 굴러도 대지는 살아있다”고 중국의 대문장 임어당은 노래하였지만, 죽어가는 것에 더 이상 의미를 부여 할 수 없는 것이 나의 지론이라면, 혹자들은 아마도 따가운 시선으로 나를 바라볼 수도 있으리라.  

하지만 나는 가끔씩 치매로 기억을 놓치시는 어머니를 대할 때면, 어머니는 더 이상 살아 있는 것이 아님과 동시에, 통제되지 않는 뇌 세포의 분열로 인해 자식을 알아보지 못하시고 박제된 사람마냥 뼈만 앙상하게 남아, 오직 식욕만 탐애 하시는 모습이 슬프다 못해 그저 곤혹스럽기만 하다. 젊은 날의 단아하던 모습은 간데없고, 시선조차 마주치지 않으시며 먼 곳을 응시하다 혼자서 아지 못 할 소리로 중얼거리는 것을 보노라니, 내 어머니는 이제 살아도 살아있는 것이 아님을 느끼면서 목구멍까지 차올라오는 비애감에 눈시울이 뜨거워지곤 하였다  

사람은 누구나 늙으면 그렇게 변해 가는 것인데, 나 자신도 언젠가는 지금 어머니의 모습이 되어 내 아들 딸에게 혹은 손자손녀에게 저렇게 낯선 모습으로 각인 되지 않을까 생각하니 두렵기도 하거니와, 변해버린 어머니의 모습에서 차라리 이제까지의 겉 모습을 벗어 던진 위선과 가식이 없는 인간 본연의 자세로 돌아온 것이라 생각 하며 애써 위안을 삼아도 보지만, 나약한 인간의 한계를 깨닫는 순간임에랴

이제 곧 엄동에 삭풍이 불면 쩡쩡 얼음 우는 소리가 한밤을 채울 것이다

그 긴 날을 어려움 속에서 여럿남매 입히고 먹이며 살아오신 어머니는, 동시대를 함께한 우리들 어머니의 슬픈 자화상 이였다

헐벗은 가난을 이겨 내고자 고행으로 여며온 세월은, 희고 고왔던 어머니의 손과 발을 거북이 등껍질처럼 딱딱하고 거칠게 만들었고, 웅크려 굽은 등이 포개진 다리와 함께 가슴에 얹혀 져, 펼 레야 펼 수조차 없을 지경으로 어머니를 변모 시켰다

산송장에 가까운 모습이 되어서야, 한 많은 인고의 맥을 놓으시려는 듯 순한 눈망울을 이리저리 굴리며 이따금씩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기도 하였다

정이 많아 천성이 모질지 못한 탓에, 가부장적인 아버지와 아망이 센 자식들까지 썩은 속을 어찌하지 못하실 땐 샘가에서 방망이로 걸레에다 한 풀이를 하셨는데 그런 어머니가 큰딸 작은딸 시집보낼 때엔 구석방에 놓여 진 재봉틀 앞에 홀로앉아 숨죽여 우시던 기억이 어제일 같이 새롭게 여겨진다.

유일하게 연애 결혼한 막내딸을 끝으로 자식들을 불러서 당부하기를, 지아비 부(夫)가 하늘 천(天)을 뚫고 나온 것은 남편이 하늘보다 더 높은 것을 의미하므로, 남편에게 순종하고 하늘처럼 떠받들고 살아야 한다며 순종지덕을 강조 하시고는, 한결같이 사위들에게 천금 같은 딸자식 호강하며 키우진 못했지만 내 품을 떠나 자네 손에 넘기는 순간부터 내겐 아무 권한도 없으니 죽고 사는 것은 오직 자네 할 탓이라, 이젠 나도 할 일을 다 했으니 한시름 덜고 살겠노라며, 주름 가득한 얼굴로 잔잔히 웃으시던 어머니였다

그런 어머니에게 나는 무던히도 속 끓이던 자식 이었다

편식이 심해 잘 먹지 않아 몸이 약한 나머지, 잔병치레로 애 태우면서 못된 성깔에 고집 만 남아 곧잘 속을 썩였는데, 애면글면 평생을 희생으로 키워온 딸이 늙고 병들어 초라하게 누워있는 당신을 두고 낯설어하며, 땅위에 모든 생명 있는 것들은 잊혀지는 그날로 아무런 의미도 가치도 없다는 생각을 서슴없이 하고 있다면, 어머니의 심정은 어떠실까

당장에라도 벌떡 일어나 통한의 울음을 뿌리실까

낮은 회색빛으로 물감을 풀어 놓은 듯 사방이 온통 가라앉은 습기로 도배를 하고 있다

한 꺼풀 미세한 떨림이 전율하며 연주하는 타악기처럼, 바람을 몰고 와 괴기한 소리로 울부짖기도 한다

서서히 다가올 늦은 하오의 땅거미가 제 그림자에 끌려서 질질 낙엽과 함께 미로를 헤매이는 계절이다

떨어진 낙엽더미 속에는 아직 마르지 않은 낙엽의 향기가, 어릴 적 어머니의 품에서 살갑게 묻어나던 땀 냄새처럼 베여 있건만, 힘든 탓일까 무심한 얼굴로 찾아온 삶은, 이 겨울 우리에게 남아있는 한 가닥 따 습은 연민마저 지우려한다

머지않아 샤갈의 숲에 눈 내리는 밤이 오면, 뾰족하게 솟은 교회 지붕 위 종탑에서 혹은 구세군의 냄비에서, 은은하게 울리는 종소리를 들을 것이다

아련한 유년의 시간들이여, 기쁨으로 술렁이던 젊은 날 그 거리의 활기참이여

나는 세상의 모든 고통과 번민을 향해 작별을 고하리라

그리운 것은 다만 그리움의 몫으로 남겨 두고, 시들어 가는 어머니 기억속의 세포와 함께 저무는 풍경 속으로 기쁘게 성큼성큼 걸어 갈 것이다

그리하여 한 많은 어머니의 역사는, 이제 가뭇없는 저녁연기처럼 성성한 백발이 되어 형체도 없이 사라질 것이다.

 

윤정숙/ 한국문협 회원,《문학세계》등단, 상주숲문학회 부회장.




권정생 선생님께

이병순

 

 

선생님, 안녕하십니까?

벌써 선생님이 타계하신 지 1년가량이나 흘렀습니다. 선생님이 계신 그 곳도 봄빛이 무르익어 선생님을 간질이겠지요. 선생님은 그 누구보다 우리나라 산하 마디마디에 피고 지는 정서를 천연덕스럽고도 살갑게 그려 내신 분이라 등꽃이 치렁치렁한 이 늦봄을 선생님은 또 어떤 표현으로 우리를 감질나게 하실지 궁금합니다.

저는 지금 제가 가진 옷 중에서 가장 싸구려 옷을 입고 앉아서 선생님의 어느 글에서의 표현대로 ‘싸구려 옷처럼 편안하고 격식 없는’ 마음으로 이렇게 선생님을 불러 봅니다.

선생님을 제 머리 속에 떠 올리면 몇 가지 스쳐 지나가는 영상이 있습니다. 눈에 물기가 함빡 젖은 채 난남이를 업고 다리를 절며 들판을 걷는 몽실 언니가 생각납니다. 장거리를 돌고 돌아 고등어 한 손을 사서 들고 오는 종갑이 할머니가 생각납니다. 깊은 가을 익어 떨어진 감을 주워서 터진 언저리를 어루만지며 소쿠리에 담는 선생님의 모습이 생각납니다.

선생님의 글은 어린 시절 딱지를 다 잃고 억울하고 분한 마음에 안달을 부렸던 그 골목으로 저를 데려다 놓습니다. 막내 오빠를 따라 뒷산에 올라서서 멀리멀리 하늘을 헤집으며 두둥실 날아오른 연을 바라보며 먼 곳을 동경했던 그 시절로 데려다 놓습니다.

누군가가 미국에는 데이비드 소로우와 스콧 니어링이 있다면 우리나라에는 전우익 선생님과 선생님이 버티고 있다며 의기양양하게 말을 하더군요. 금욕과 검소한 삶으로 요약되는 무소유를 지향했다는 점에서 동일선상에 올렸는지 몰라도 저는 달리 생각하고 싶습니다. 물론 저도 하버드 대학 출신의 데이비드 소로우가 출세 가도를 버리고 월든이라는 오지의 호수에 파묻혀 자연으로 돌아 간 삶을 쓴 ‘월든’을 읽고서는 매우 신선한 자극을 받았습니다만 단지 ‘이런 삶도 있구나’ 하는 생각만으로 그쳤습니다. 스콧 니어링 또한 많은 강의와 저술로서 나누어 가며 살아야 함을 강조하는 철저한 사회주의자였습니다. 그런데 니어링이 백 살까지 딱 살고 스스로 곡기를 끊고 굶어 죽었다는 이야기에선 절대 인간의 편이 되어 주지 않는 운명마저 자기 손아귀에 거머쥐고 있었다는 면에서 무소유가 아니라 다 가진 삶처럼 보였습니다.

그들에 비하면 선생님의 참된 무소유 정신이나 글에서는 우리들의 방치된 삶을 되돌아보게 합니다. 쉽게 흘러가고 있는 우리들의 인생을 냉엄하게 바라보게 합니다. 인세 수입으로 모은 12억이라는 유산을 오로지 불쌍하고 가난한 어린이를 위해 써 달라고 유언을 하셨으면서 선생님은 안동 조탑리의 외진 마을에서 한 평도 안 되는 방에서 지병을 앓으며 사셨습니다.

선생님이 아동 문학가로서의 명성은 이미 만 천하에 알려졌지만 저는 선생님의 문학 작품보다 ‘녹색 평론’이라는 잡지의 서문에서 칼럼으로 먼저 선생님의 글을 대했습니다. 그 잡지의 서문에서 선생님은 너무도 간곡하고 절실하게 생태파괴를 걱정하시고 계셨습니다. 한 줄 한 줄 목 안이 바짝바짝 타 들어간다는 느낌이 들도록 선생님의 글에는 힘이 넘쳤습니다. 행간을 가로지르는 대목마다 당신 가슴을 치고 또 치는 모습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그 때서야 비로소 저는 선생님을 뒤지기 시작했습니다. 아! 그 때 설렜던 제 마음을 어떻게 글로서 나타낼 수 있겠습니까. 책상에 너저분히 있던 다른 책들을 착착 포개 밀쳐놓고 선생님의 책을 바짝 끌어당겨 앉았더랬습니다.

초등학교 졸업이 최종학력인 선생님은 홀로 책 읽고 습작하고 신문 쪼가리 옆퉁이에 대고 끊임없이 글을 쓰셔서 신춘문예 등단으로 본격적으로 작품 활동을 하셨다더군요. 나중에 이오덕 선생님이 선생님더러 ‘인간 국보’라고 칭하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그 때 신춘문예 심사를 하신 이오덕 선생님은 권정생이라는 사람의 주소가 시골의 작은 교회 문간방으로 되어 있음을 아시고 예사롭지 않은 관심이 생기더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선생님은 오랜 거지 생활을 전전하시다가 그 교회 문간방에 살면서 새벽마다 교회 종을 쳐 주는 종치기 생활을 하셨습니다. 종을 한 번 칠 때는 외딴집 할머니가 깨시고 두 번 치시면 방앗간 할아버지가 일어나시고..., 세상의 새벽을 깨우듯 그렇게 시골 마을을 깨우면서 틈틈이 책을 읽고 밭을 일구고 글을 쓰시며 치열하고 아름답게 사셨습니다. 이른 새벽, 여명이 어른거리는 창 앞에 홀로 앉아 책 읽고 글 쓰시는 선생님의 모습이야말로 성스럽고 고귀한 실체의 전형이 아닐는지요.

선생님의 문학은 결코 어린이용만이 아니었습니다. 어떤 책 어느 쪽을 들춰봐도 이 땅의 어르신들의 삶이 고스란히 녹아있는 민초들의 대 서사시였습니다. 6.25를 지나면서 굶주리고 헐벗었던 선생님 주변의 인물들을 등장시켜 쓰라린 우리 현대사를 신음 소리 하나 내지 않고 담담하게 읊조렸습니다. 활극으로 사람을 놀래키는 무리한 극적 구성도 없는데 이야기가 재미있었습니다. 또 선생님은 어쩌면 그렇게 맑고 바스락거리는 문장을 일궈낼 수 있는지요. 골짜기에 돌돌돌 굴러 흐르는 냇물처럼 꾸밈없고 소박한 문장을 여며가는 재주는 어떻게 해야 다다를 수 있을까요 선생님.

선생님 지인들과 주고받은 편지 내용에서 서로서로 책을 추천하고 책을 주고받고 하는 모습들이 꼭 학생운동하는 청년처럼 보여 댓바람을 쐬는 듯 상큼한 기분이었습니다. 동화, 소설을 쓴다고 영희가 바둑이를 데리고 논다든가 혹은 나그네 이야기를 다룬 책만 읽는 것이 아니라는 것 사실쯤은 알고 있었지만 힘 센 사람이 약한 사람을 휘두르는 꼴을 못 봐 넘기시는 선생님의 매섭고 부리부리한 눈초리는 늘 부조리한 그늘을 파헤친 책을 탐하셨습니다. 세기를 가로질렀던 육중한 사회과학 도서들을 주로 읽으셨더군요.

그러나 선생님.

선생님의 글 속에는 앵두나무도 조약돌도 고추밭도 지게꾼도 있어야 할 곳에 적절히 잘 있으면서 알맞은 몸짓을 갖추고 제 역할을 다하고 있는데 저는 어디에 서 있어야 마침맞게 제 자리를 섰다고 할 수 있는지요. 방구리를 파야 너구리라도 뛰어든다는 심정으로 일단 집 밖을 나섰습니다. 신발 끈도 조였습니다. 어디로 갈까요? 사마천이 말한 삼망(三忘)을 되새겨 봅니다. 싸움터에서 명령을 받으면 집을 잊고, 부모를 잊고, 공격의 북소리가 들리면 자신을 잊으라고 했습니다. 공격의 북소리. 언제 쯤 공격의 북소리가 들릴까요. 

여태 그랬던 것처럼 앞으로도 계속 바람에 출렁이는 깃발이 되어 나부끼며 살아야 할까요? 세상의 끝을 다 봐버린 선생님의 저린 삶에서는 분명히 인두질로 달궈진 뜨거운 해답을 주실 것 같습니다. 연필심 뾰족하게 깎았습니다. 뭘 찔러볼까요? 제 이름자부터 반듯하게 쓰는 연습을 하라고요? 자기를 깊이 들여다보면 자아를 잊게 돼 있다고요? 흐리멍덩한 생각일랑 떨쳐내고 이름부터 또박또박 쓰겠습니다. 이름부터 바로 쓰고 나서 허리를 펴서 잠시 하늘을 올려보겠습니다.

 

줄탁동기

이양섭

 

닭이 새벽을 알리고 있다. 예전의 농부들은 저 소리에 눈을 뜨고 일과를 준비했다지만 나는 아직 잠자리에 들지도 않고 무슨 대단한 짓거리를 한다고 컴퓨터의 자판을 두드리고 있다. 써놓은 지 반년이 넘어버린 소설을 처음부터 훑어 다시 고치고 이어 쓴 지금 원고지 600매를 넘어서고 있다. 쓴 것은 별 것 아닌 것 같고 이어 쓸 일 또한 까마득하기만 하다. 그래 잠시 머리를 식힐 겸 잡문이나 하나 남겨 나 살아있음을 알리려 한다. 내가 임영태, 이서인 소설가 부부가 앞에 앉은 그들의 차 뒷좌석에 앉아 제천의 천둥산 박달재 근처의 시랑산방에 도착한 날은 5월 6일이다. 와보니 앞뜰의 작은 개가 새끼를 낳아 아직 눈도 뜨지 않은 3마리가 있다. 암수가 있는 닭장에는 암탉이 둥지에서 알을 품고 있다. 시랑산방 생활 3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라고 한다. 매일 그 유정란을 하나씩 쏠쏠히 빼먹다보니 닭이 알을 품을 기회를 주지 못했던 것이다. 주인이 며칠 집을 비운 새 몇 개 모인 것을 기회 포착하여 알을 품은 것이란다. 주인 부부는 내게 집을 맡기고 글을 마저 쓰라며 신신당부를 하고 떠났다. 이제 앞뜰의 어미개와 뒷뜰의 숫개에게 끼니를 주고 닭장에 모이를 주는 것이 내 일이 되었다. 개구리 울음소리와 이름모를 새소리, 바람소리로 나는 혼자이지 않다. 적막이 제대로 찾아오는 밤이면 나의 깊이에 조금 더 다가서고 싶어 말갛게 밤을 샌다. 많은 이들의 염려 속에서 많은 것을 놓고 온 여기서 혼자 무얼 얼마나 찾을 지 알 수 없다. 글을 쓴다는 이 지난한 고행이 과연 내게 얼마나 의미가 될 지 알 수 없지만 지금은 그저 �� 가슴 속에 묻혔던 그것들 풀어내는데 정신과 육신을 몰입하고 싶기도 하다. 그리고 또 시간이 얼마나 지나면 지금의 결과야 어떠하든 다시 내 길을 갈 것이다. 한결 나아질 것인지, 미진하여 더 다가서고 싶을 지 지금은 모르겠다. 매일 닭장에 다가가서 알을 품고 있는 암탉의 모습을 가만히 들여다 본다. 눈만 깜빡거리며 꼼짝도 하지 않고 같은 자리에서 자세만 약간씩 바뀌어 있을 뿐이다. 모이를 먹는지 물을 먹는지 도무지 알 수 없다. 수탉은 근처를 배회하거나 횃대에 올라 앉아 가끔 목청을 울리며 사뭇 경계병 같기도 하다. 개와 닭에게 물을 주면서 초보 농부가 심어놓은 고추와 상추 파 등에도 물을 뿌린다. 오늘은 아까 오후에 산 중턱까지 올라갔다 내려오는 길에 닭장 앞에 한참을 앉아 있었다. 끈기와 의무감에서 나는 저 암탉의 일편단심에 새발의 피다. 한 20여 일 지나면 나 혼자 신생한 병아리들을 볼 것이다. 전에 농사짓는 친구 학촌에게서 들은 줄탁(口卒,啄)이란 말을 다시 되새겨 본다. 어미닭이 일정기간 알을 품고 있으면 알 속에서 움직임을 갖는 병아리가 그 여린 부리로 밖으로 나가겠다는 신호로 알 껍질을 쫀다. 이것이 줄(口卒)이다. 아주 미세한 그 소리와 움직임을 알아채고 어미닭이 강한 부리로 밖에서 그 곳을 쪼아준다. 이것이 탁(啄)이다. 이 두 가지의 움직임이 동시에 맞아뜨려져야 한 생명이 알에서 나온다. 그래서 벽암록에는 이것을 줄탁동시(同時) 또는 줄탁동기(同機)라고 한다. 불교에서는 수행하여 깨침의 순간에 스승과 제자가 갖게되는 역할의 중요성을 이 말로 비유하기도 한다. 부모와 자식 간이나, 스승��� 제자 간이나, 사랑하는 사람 간이나, 일과 자신 간이나, 무릇 많은 현상에서 우리는 줄탁을 생각할 수 있다. 각자의 선입견을 비롯한 욕심과 아집으로 너무 많은 것에 자기 위주로 길들여진 우리는 병아리와 어미닭의 교감 만큼 동시에 딱 맞아 떨어지기는 쉽지 않다. 여기 내려오기 전 나는 개인적으로 직장 문제로 꽤 심난한 고민을 하였고 내 건강 문제로 스스로 갈등이 있었고 어머님을 속상하게 해드려 말은 못해도 마음으로 무척 죄스러웠고 딸아이의 예상치 못한 일로 무척 속상하여 며칠 잠을 못잘 지경이었다. 그런 한 편으로 내가 하고 싶은 것에 대한 열망 또한 버리기 힘들었다. 무엇과 무엇이 만나야 하는데, 그것은 공간과 시간의 문제이기도 하다. 나는 알게 모르게 '줄'을 표현하여 누군가로부터 '탁'을 많이 받은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나는 과연 누군가를 위해서 얼마나 '탁'을 해 주고 있는가? 그것도 꼭 필요한 그 순간에, 그에게 가장 필요한 무엇을 해주려 긴장하고 기다린 적이 있는가? '줄탁'은 생명이 탄생하는 고도의 신비와 경이에 필요한 감각적 Communication이다. 우리는 얼마나 누군가를 위해 온 몸의 감각을 동원해 대화할 준비를 하고 있는가? 그 대화의 시간을 놓쳐버려 얼마나 많은 것들을 흘려 보내거나 잃어버렸을까? 여기서 내가 혼자인 듯 하여도 산이 있고 들이 있고 나무가 있고 풀이 있고 새싹이 돋고 꽃이 피고 바람이 불고 새소리가 들린다. 나는 무엇과도 교감할 수 있는 것이다. 내가 얼마나 몸과 마음, 내가 가진 모든 감각을 열고 교감하며 살아야 하겠는가! 그것은 비단 나를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또 다른 생명이나 빛나는 순간을 위한 것이기도 하겠다. 내게 주어진 생이 가볍거나 무겁거나 하여도 그것은 지금의 인식일 뿐, 언제 어디서 어떤 교감으로 새로운 생명력으로 다시 시작할 수 있을지 모른다. 나는 지금 알의 안에 있는가, 밖에 있는가.........

 

이양섭/ (사)강남웨딩업연합회 이사장, 한국웨딩산업학회 고문, 애니버셔리 청담 회장, marie5707@naver.com 








아는 척                

정경해

 

 “오늘은 일찍 나오셨네요. 여기서 만나는걸 보니.”

 뒷냇가 벚꽃 길을 걷다가 지인을 만나 반갑게 인사를 나눈다. 어제 보고 오늘 또 보는 사람이지만 손이 저절로 나아간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마주잡은 손을 흔든다. 오가는 미소가 발걸음을 더욱 가볍게 한다.

 얼굴만 봐도 반가운 사람과의 만남은 언제나 기분을 좋게 한다. 이른 새벽에 느끼는 그런 마음은 하루 종일 나를 즐겁게 한다. 하지만 전에는 그렇지 않았다. 신선한 새벽공기를 마주하며 거니는 것이 좋긴 했지만 뭔가 찜찜하게 며칠을 보낼 때가 있었다. 나의 오래된 습성 때문이다.

 나에게는 몇 가지 걱정거리가 있다. 그 중 하나가 사람을 잘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한번 만난 사람은 물론 두세 번 만난 사람이라도 그 이후 길거리에서 만나거나 어떤 모임에서 만나면 기억을 하지 못할 적이 많았다. 그럴 때마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 하듯 무심히 대해서 민망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내가 알아보지 못할 때 그들은 자신의 성격대로 반응을 한다. 어떤 이는 우리가 전에 어디 어디에서 만났었다며 먼저 반색을 하고, 어떤 사람은 자신도 가물가물하는지 낯은 익은데 어디서 봤더라? 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더러는 말없이 앉아 있다가 헤어질 무렵이 되어서야 언제 어디서 보았던 기억이 있다고 넌지시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었다.

 때로 난감할 적이 있다. 함께 한 자리에서는 아무 말 없다가 만남이 있은 후 한참 지나 다른 사람을 통해 나에 대한 서운함이 전해질 때다. 그런 말은 끊임없는 수다 끝에 우연히 듣게 되는데 그럴 때는 비록 옳은 말일지라도 곱게 들리지 않는다.

 “뭐, 나에게 아는 척 안하기에 나도 그냥 가만히 있었어.”

 지인을 통해 들려오는 이런 말은 미안한 마음 한편에 얄미운 생각이 들게 한다. 마음이 씁쓰레하고 그냥 직접 말해주면 안되나 하는 고까운 생각까지 든다.

 여러 차례 그런 일을 겪고 나서 생각해 낸 것이 한 가지 있다.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숙제를 내듯 혹시라도 다음에 내가 알아보지 못하거든 먼저 아는 척 좀 해달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나마 위안인 것은 처음 만나면 으레 하는 나의 말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도 그런 실수를 많이 해서 이해한다며 맞장구를 치곤 한다. 그럼에도 나는 번번이 실수 아닌 실수를 해왔다. 얼굴을 기억하지 못하는 나의 습성에다 생각에 잠기는 버릇까지 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깨어있는 동안 늘 생각을 하고 살아간다. 나 또한 끊임없이 생각에 빠져 살아간다. 버스를 타거나 길을 걸을 때에는 생각에 잠기는 것이 습관화 되어있다. 그렇기에 길을 걸어가면서도 앞에서 누가 오고 있는지, 누가 내 곁을 스쳐가고 있는지 신경을 쓰지 못한다. 상대방이 먼저 아는 체하지 않는 한 그냥 스쳐지나간다. 사람들은 그런 나를 종종 얼굴 붉어지게 한다. 생각에 잠겨 걷기에 열중하는데 누군가 멈칫하며 나를 보는 것 같아 슬쩍 고개 돌려보면 꼭 한마디씩 했다.

 “또 그냥 지나가.”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해요.”

 “아는 척 좀 해봐요.”

 “사람 좀 보고 다녀요.”

  어떤 사람은 말로 안 통한다는 듯 아예 타고 가던 자전거를 휙 돌려 앞을 막아서서 나를 깜짝 놀라게 하기도 했다. 생각에 잠겨 걷는 것에 집중해 있을 뿐인데 그런 나를 바라보는 사람들은 이상하게 생각하였다. 그리고는 영 서운하고 못마땅하다는 표정이다. 그럴 때면 내 습관인데 이해 좀 해 주지, 하다가도 막상 내가 그 입장에 서 보면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일들은 참 씁쓸했다. 그래서 나의 태도를 바꿔보기로 했다. 길가에 오밀조밀 피어나는 식물과 냇가 주변을 노니는 하늘, 냇물, 개개비, 백로, 청둥오리에게만 주던 눈길을 사람에게 돌린 것이다. 주변에 눈길을 주며 걷다가도 앞에서 사람이 걸어오면 의식적으로 그 사람을 바라보았다. 낯선 사람을 너무 뚫어지게 쳐다보는 것은 아닐까 민망할 때도 있었지만 지인인지 아닌지 확인이 될 때까지 유심히 쳐다보았다.

 그런 날들이 반복되다보니 변화가 왔다. 어느 날부터인가 나를 알아보고 인사하는 사람보다 내가 먼저 인사를 건넬 적이 많아졌다. 내가 먼저 알아보니 인사를 받는 사람들의 얼굴이 더 환해졌다. 오가는 눈빛이 자연스레 생글거렸다. 거니는 길로 들어서서 만나고 집으로 되돌아가다 다시 만나도 반가워서 손을 흔들고 또 흔들었다. 더러는 몇 년 동안 만나지 못했던 사람을 우연히 만나 한동안 이야기꽃을 피우기도 했다. 집을 나설 때면 오늘은 또 누굴 만날까 기대되며 은근히 설레기까지 했다.

 누군가와 서로 아는 척 한다는 것은 큰 즐거움이다. 삶의 윤활유가 되어 뻑뻑한 일상을 부드럽게 해 준다. 잠시 스쳐가는 만남에서도 큰 기쁨이 일고 흥얼흥얼 콧노래가 나온다. 누군가가 나를 알아봐줄 때 느끼는 기쁨도 크지만 내가 먼저 손 내밀 때 반가워하는 상대의 모습을 바라보는 마음 속 일렁임은 더할 나위 없이 크다. 손을 잡으며 반가이 인사 나눴던 사람과 헤어져 걸으면서도 여전히 그 눈빛과 함께 하는 듯하다.

 서로를 알아보고 반가워할 수 있는 사람이 주변에 있다는 것에 마음이 뿌듯하다. 내일은 또 어떤 생글거림과 마주하게 될까 기대가 크기 때문이다.

 

정경해/ 경기 안성 출생, 월간《순수문학》등단, 수필집『같은 빛깔로 물들어 간다는 것은』(2008년),『까치발 딛고』(2011년).







<소설>

편견과 진실

고창근

 

 

아침에 상장 수여식이 있었다. 아이들은 각 교실에서 모니터에 눈길을 박았다. ‘토끼와 거북이’이라는 글감으로 운문과 산문을 쓰는 교내 백일장이었다. 글감은 교장이 낸 것인데 애씀상부터 최고으뜸상까지 상장 수여를 끝낸 교장은 마이크 앞에 섰다. 아이들은 보이지 않고 교장의 모습이 모니터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여러분은 거북이 같은 성실한 인간이 되어야 합니다.

교장은 모니터 정면을 향해 있었다. 마치 모니터를 통해 아이들을 쭉 둘러보는 형국이었다. 아이들은 앞자리에 앉은 아이의 등을 연필로 찌르거나 옆 자리의 옆구리를 찌르고 킥킥거렸다. 나는 둘째손가락을 입에 갖다 대었다.

여러분도 잘 알다시피 거북이가 어떻게 토끼를 이겼습니까? 오직 노력하고 열심히 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도 열심히 하면 성공할 수 있습니다. 돈도 많이 벌고 높은 자리에도 오를 수 있습니다. 열심히 노력하지 않으면 가난하고 실패한 인생이 됩니다……

나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순간 어, 하며 나도 모르게 소리를 내고 말았다. 운동장엔 검정 고무신을 신고 까까머리를 한 수많은 아이들이 뜨거운 햇빛을 받으며 교장의 훈시를 듣고 있었다. 덥고 지겨워 몸을 움직인 아이에게 선생이 다가가 뒤통수를 후려쳤다. 순식간에 아이들은 자세를 바로 했다. 이마와 등에서 땀이 흘러 내렸다. 아이들의 맨 앞줄에 서 있는 키가 작은 아이가 눈에 띄었다. 아이는 큰 죄라도 진 듯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나는 한동안 그 아이를 바라보았다. 가슴이 저려왔다. 그 아이는 30여 년 전의 나였다. 그때도 나는 토끼와 거북이에 대한 교장의 훈시를 듣고 있었다. 아침 조회가 끝나면 육성회비를 못 낸 나는 집으로 쫓겨날 판이었다. 어제도 그랬고 그저께도 그랬기 때문이었다. 니들은 공부도 외상으로 배우냐. 육성회비를 못 낸 아이들을 향해 담임은 지휘봉으로 머리를 때리며 말했다.  

가난한 사람은 다 게으른 사람들입니까?

아마도 그날 아침인지, 아니면 수업시간 중이었는지 누군가 담임한테 물었다.

게으르고 나태하면 다 가난하다.

담임이 말했다.

열심히 하면 누구나 다 부자가 될 수가 있습니까?

그렇다.

정말로 거북이가 토끼와 달리기하면 이길 수 있습니까?

책에 나와 있지 않나.

그때, 누군가 뒤에서 궁시렁거렸다.

씨발, 거북이와 토끼를 어떻게 달리기 시합을 시켜. 말도 안 돼. 공평하지가 않잖아, 씨발. 거북이를 앞에 가도록 하든지 토끼의 다리를 뭉개 놓든지 해야지 공평하지.

그 날 그 아이는 수업시간 내내 복도에서 두 손을 들고 무릎 꿇고 않아 있었다.

 “선생님 공부 안 해요?”

아이들의 소리를 들었을 때에야 나는 정신이 들었고, 운동장의 아이들은 사라지고 없었다. 모니터에는 이미 상장수여식이 끝나 있었다. 나는 아이들이 사라진 운동을 한 번 더 바라보았다. 뜨거운 햇살이 하얗게 부유하고 있었다. 그때가 4학년 쯤 되었는데 지금 내가 맡고 있는 아이들과 같은 학년이었다.

 

                                    *

 

사단이 일어난 것은 점심시간이 끝나고 오후 수업이 시작 될 때였다. 나는 점심 후의 나른한 몸을 이끌고 교실로 가는데 이상하게 교실이 조용했다. 마치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이 녀석들 수업 시작벨소리를 못 듣고 아직도 운동장에서 뛰어 노는 거야? 나는 운동장을 둘러보았지만 아이들은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이상한 느낌에 발걸음을 빨리 했다. 지금쯤 아이들은 점심시간 내내 운동장에서 뛰어 노느라 얼굴은 빨갛게 익었고 땀을 비 오듯 흘리며 왁자지껄 떠들고 있어야 했다. 그래서 5교 시 수업은 제대로 되지 않았다. 나는 마침 도덕 시간이라 ‘토끼와 거북이’에 대해 아이들끼리 토론을 시킬 요량이었다. 교실 가까이 다가섰을 때였다.

“이 새끼들아 그렇게 살지 말란 말이야. 사이좋게 살아야지. 응?”

이건 분명 어른 목소리였다. 어디선가 들어본 목소리였지만 동료 교사의 목소리는 아니었다. 요즘 시대에 아이들한테 이 새끼라고 부르는 교사는 없었다.

“알았어? 한번만 더 우리 덕수한테 그러면 다 죽을 줄 알아!”

목소리와 함께 무언가를 내리치는 소리가 났다. 아마도 주먹으로 교탁을 치는 것 같았다. 나는 뛰다시피 걸어가 교실의 뒷문을 열었다. 아. 나는 머리에서 수만 볼트의 고압전기가 지나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내가 있어야 할 자리에 동팔 씨, 그러니까 덕수의 아버지가 수염이 텁수룩한 얼굴로 아이들에게 훈계를 하고 있었다. 아이들은 겁에 질린 듯한 표정들이었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나는 앞으로 재빨리 다가가 동팔 씨의 어깨를 잡았다. 마음 같아서는 동팔 씨를 집어들어 교실 밖으로 던지고 싶었다. 나는 숨을 깊게 들이쉬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이노마들이 우리 덕수를 따돌리지 않소. 이놈들은 혼 좀 나봐야된다카이.”

동팔 씨는 부리부리한 눈으로 아이들을 둘러보았다. 아이들은 움찔거렸다. 여자애 몇몇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울고 있었다.

“아이들한테 손댔어요?”

나도 모르게 고함을 질렀다.

“이노마들은 혼 좀 나봐야된다카께요. 내가 머라 켔어요? 선생님이 안 혼내면 내가 직접 혼내……”

나는 더 들을 수가 없었다. 동팔 씨의 팔을 잡고 교실 밖으로 끌어냈다. 몸에서 술과 두엄더미 냄새가 확 풍겼다.

“왜 이러세요. 아이들 교육은 학교에서 한다지 않습니까?”

“근데 왜 우리 덕수를 따돌리고 때린 애들을 그냥 두는 거요? 선생이 안 그러니까 내가 직접 손봐준 거요.”

“정말 이럴 거요?”

나는 한 대 칠 것처럼 노려보았다. 순간 동팔 씨는 몸을 돌렸다. 그리곤 중얼거렸다.

“한번만 더 우리 아 괴롭히면 그냥 안 둔다니께.”

나는 걸어가는 동팔 씨의 등을 후려치고 싶은 감정을 애써 누르며 교실로 들어왔다. 그동안 몇 번이나 학교에 항의하러 찾아왔지만 직접 교실에 들어가 아이들을 때리거나 혼낸 적은 없었다. 그런데… 속에서 분노가 일었다. 동팔 씨는 반 아이들이 자기 자식인 덕수를 왕따 시키고 때린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이들 말을 들어보면 그렇지가 않았다. 절대 그런 일이 없다고 했다. 나는 처음엔 동팔 씨의 말을 듣고 아이들을 닦달했다. 다른 학교에서 빈번이 일어나고 또한 자살했다는 소식도 들은 터였다. 그러나 그건 도시의 일이지 이런 시골에서 일어나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아이들은 완강히 부정했다. 한마디로 왕따 시킨 게 아니라 자기가 스스로 놀지 않았으며 때린 적은 없었고 어쩌다 뛰어가다 부딪힌 적은 있다고 했다. 아이들을 믿을 수도 안 믿을 수도 없었다. 동팔 씨가 몇 번이나 학교에 찾아와 왕따 시킨 애들을 처벌해 달라거나 직접 애들을 혼내겠다고 했지만 잘 타일러 되돌려 보낸 적이 많았기에 아이들의 말을 전적으로 믿을 수 없었다. 덕수는 올해 초에 전학 왔기에 아이들과 잘 어울리지 못 하는 면이 있기도 했다. 수업이 끝나고 덕수를 따로 불러 물어 보았는데 덕수의 말은 아이들과 좀 달랐다. 쉬는 시간이나 점심시간에 자기들과 친한 아이들끼리만 축구를 하고 자기한테는 같이 하자는 말도 꺼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같이 하자고 끼어들지 그러니.”

내가 몇 번이나 말했지만 덕수는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없었다. 아이들이 때린 적이 없다는 것은 덕수도 인정했다. 하지만 장난이 심한 아이들이 지나가다 부딪혀서 넘어진 적은 몇 번 있다고 했다. 다시 아이들에게 물었다.

“너희들 친구랑 사이좋게 놀아야지 전학 온 지 몇 개월 안 된 아이를 안 끼워줬다며?”

“에이 선생님도. 끼워줬는데 지가 못 한다고 스스로 안 했어요. 또 좆나게 축구도 못 하고요.”

한 아이의 말에 아이들은 책상을 두들기며 웃었다. 조용히 하라고 하면서도 나는 한 편으로 아이들의 말을 인정하고 있었다. 면에 있는 네 곳의 학교 중 세 곳이 폐교되면서 폐교된 학구에 있는 아이들이 면소재지에 있는 이 학교로 통학버스를 타고 왔다. 그러니 자연히 아이들은 함께 통학버스를 타고 오는 아이들끼리 친하게 지냈다. 학교와 조금 떨어진 곳에 사는 덕수는 걸어오거나 아버지의 트럭을 타고 왔다. 또한 서울에서 전학 온 덕수는 축구를 잘 하지도 못 할 뿐만 아니라 땡볕에 아이들과 뛰어다니는 걸 싫어했다. 그러니 자연히 다른 아이들과 친하게 지낼 수 없었다.

동팔 씨가 찾아와 항의할 때마다 자초지종을 얘기했지만 믿지 않았다. 분명히 자기 아들은 왕따를 당했고 아이들에게 맞았다는 것이었다. 덕수가 그러느냐고 내가 묻자 동팔 씨는 그렇다고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덕수를 교무실로 불렀다. 부자간에 대질한다는 게 좀 께름칙했지만 매일이다시피 술만 마시면 학교에 찾아와 행패를 부리기에 어쩔 수 없었다.

“덕수야, 솔직히 얘기해봐, 진짜로 아이들이 네가 함께 놀려고 하면 너와 안 놀아주더냐?”

덕수는 말은 않은 채 동팔 씨의 눈치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아이들이 때리더냐?”

또다시 덕수는 제 아버지의 눈치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이노마야, 분명 집에서는 아이들이 너를 왕따 시키고 때렸다며?”

동팔 씨가 눈을 부라렸다. 나는 급히 아이를 교실로 돌아가라고 했다.

“거 보세요. 아무 일도 없다지 않습니까? 덕수가 축구나 운동을 싫어해 아이들과 못 어울리는 면이 있지만.”

“그게 아니요. 학교라서, 선생 앞이라서 겁을 먹어서 거짓말을 하는 거요.”

동팔 씨는 어떠한 말을 해도 믿으려 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선생이 가해 아이들을 혼내지 않으면 자기가 직접 혼내겠다고 말했다. 그러다 결국은 이 사단이 벌어진 것이었다.

나는 교실로 들어와서도 아이들에게 아무 말도 못 하고 자괴감에 몸을 떨었다. 덕수는 고개를 숙인 채 있었다. 이러다 정말로 아이들이 덕수를 왕따 시킬까봐 걱정이 되었다. 결국은 그날 애초에 수업하기로 했던 ‘토끼와 거북이’ 토론 수업은 하지 못 했다. 하지만 학교에서도 문제를 키운 측면 또한 있었다. 처음 동팔 씨가 학교에 문제 제기했을 때 그가 술 먹고 왔다는 이유만으로 교장은 그를 무시했다. 그리곤 무조건 학교엔 왕따 같은 문제는 없다고 큰소리쳤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자기 말을 듣지 않는 학교에 대해 밸이 단단히 꼴릴 수도 있었다. 교장은 혹 그런 일이 있다고 해도 외부로 소문이 나면 안 된다는 입장이었다. 다른 지역 아이들이 왕따 문제로 많이 자살을 했고 언론에서는 왕따 문제를 크게 다루고 있던 참이었다. 차라리 처음부터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고 동팔 씨를 설득시켰다면 이렇게까지는 안 됐을 텐데 하는 후회가 몰려왔다. 어쨌든 내가 아이들 앞에 얼굴을 못 들 정도였다. 하지만 몇몇 교사들은 ‘무식한 것’이라고 드러내놓고 동팔 씨를 욕했다.  

나는 3년 파견근무로 시골에 내려왔다. 아내가 우울증을 앓아 시골에서 요양도 할 겸 파견근무를 신청한 것이었다. 올해가 2년차였고 나름대로 시골생활에 만족하고 있었다. 첫해에 마을 사람들의 도움으로 어렵지 않게 집을 구했다. 비록 몇 해 묵은 집이라지만 대충 수리하니까 쓸 만했다. 아내를 위해 마루를 덧 잇고 처마를 더 냈다. 아내는 마루로 나와 해바라기를 하며 차를 마시길 좋아했다. 학교 아이들 또한 영악하지 않았다. 비록 결손가정이라고 하는, 조부모 밑에서 자라거나 홀부모 아래서 생활하는 경우가 다반사였지만 순박한 데가 있었다. 그러나 집이 가난하다보니 어처구니없는 일이 일어나고는 했다. 학교가 작다보니 급식소가 학교에 없고 인근 학교에 있었다. 그러니까 두 개의 면에 한 급식소가 있었다. 급식차가 와서 한 개씩 있는 초등학교와 중학교에 점심을 배급했는데 집이 가난한 아이들은 4교시가 되면 아예 수업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배가 고픈 아이들은 앞을 보지 않고 수시로 창밖을 바라보았다. 급식차가 오지 않나 해서였다. 나는 어떻게든 아이들의 주의를 끌려고 했지만 5분을 넘기지 못 하고 진땀을 빼야했다. 하지만 그마저도 오래가지 못했다.

“급식차다!”

창밖을 바라보던 누군가 소릴 치면 이미 그 수업은 끝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어떤 녀석은 주섬주섬 책상을 정리하였다. 재빨리 급식장소로 뛰어갈 준비를 하는 것이었다. 학교 앞에 문방구겸 과자를 파는 곳이 있기는 해도 아이들은 과자를 사 먹지 못 했다. 돈이 없기 때문이었다. 대부분 결손 가정이라 따로 용돈을 받는 아이들이 없었다. 그러다 보니 어떤 아이는 친척이 왔다가며 2만원을 주고 갔는데 문방구점 그 자리에서 2만원어치를 다 사먹었다는 아이도 있었다. 그 아이는 부모가 없는데 집에 가면 매일 숙제는 안 하고 게임만 한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어 집으로 찾아간 적도 있었다. 게임을 많이 하면 안 좋다는 나의 말에 할머니는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 갸가 무슨 재미로 살겠소. 부모도 없는 아이가 집에 오면 게임하는 재미가 없으면 무슨 재미로 살아간다오. 그냥 두시오. 불쌍한 내 새끼. 할머니는 내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급식을 할 때면 밥을 두 그릇이나 먹는 아이인데 비만이었다. 요즘은 가난한 애가 비만이라더니 시골에 오니 실감이 갔다.

동팔 씨의 사건만 없다면 그야말로 무탈한 생활이었다. 교직생활 20여 년 동안 처음으로 시골생활을 했지만 나름 아이들에게 최선을 다 했다. 아내 또한 시골생활 2년차로 접어들자 눈에 띄게 좋아졌다. 아내는 아이가 있는 아는 사람한테 부탁해 입지 않는 옷을 부쳐 달래서 나에게 반 아이들 갖다 주라고 했다. 어떤 아이는 겨울인데도 춘추복이나 겨울 점퍼 하나만 입고 다닐 정도로 가난했다. 그러면 나는 아내에게 전해 받은 옷을 다른 아이 아무도 모르게 살짝 아이에게 전해주곤 했다. 그런 아이들이 전교에서 많았으나 다른 반 아이는 그 반 담임의 눈치가 보여 도와줄 수는 없었다.  

아내는 마을 사람들하고도 자주 어울렸다. 그러다 보니 동네의 소문을 많이 듣고 나에게 전해주었다. 이상한 점은 마을 사람들이 동팔 씨를 아무도 나쁘게 보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학교에서야 골치 아픈 학부형이지만 마을에서는 전혀 그렇지가 않다는 것이었다. 또한 학교에서 동팔 씨가 한 행동에 모두들 잘 한 일이라고 한다는 점이었다.

“왜 그런데?”

나는 어이가 없어 아내에게 물었다. 이 마을 출신인데 중학교를 마치고 서울에서 살다가 회사에서 명퇴 당하고 귀향한 인물이라서 그런가, 했다. 이 마을 출신이니 모두들 선후배 사이라 했다.

“꼭 그렇지는 않아.”

아내는 콕 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마을에 이상한 기운이 했다고 했다. 비록 동팔 씨가 술을 자주 먹고 술주정을 한다고는 하나 부지런하다고 했다. 서울에 살다 왔으니 땅도 집도 없었을 텐데 마을 사람들은 그에게 집도 구해주고 땅도 농사지으라고 주었다고 했다. 그 대가로 동팔 씨는 마을의 일을 도맡아 한다고 했다. 모심기는 물론 추수까지 도와주고 바쁠 땐 언제든지 달려가 준다는 것이었다. 술주정만 빼면 더없이 좋은 사람이라고 다들 칭찬이 자자하다고 했다. 어이가 없었다. 내가 알기론 무례하고 술주정뱅이일 뿐이었다. 다른 교사들도 그에게 적대감은 갖고 있는 건 당연했다.

“특히 조심해할 것이 있어요.”

아내는 정색을 하고 말했다.

“조심해야할 거?”

나는 콧방귀를 뀌었다.

“그 양반 아주 자존심이 세다는 거야. 누가 자기를 무시하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데.”

그건 누구나 다 그래. 나는 그렇게 아내에게 말했지만 속으로 뜨끔한 것은 사실이었다. 왕따 문제도 비록 교장이 시키긴 했지만 처음엔 밖으로 소문이 날까봐 상황자체를 쉬쉬한 것은 사실이었다. 그렇다고 아이들을 직접 교육시킨다고 학교까지 찾아와서 행패를 부린 것은 어쨌든 용서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이 모두 동팔 씨의 말을 믿고 있다니 조심할 수밖에 없었다. 마을 기류가 학교에 불리하다는 아내의 말이었다. 나중에 동팔 씨에 대해 안 사실은 또 다른 점이 있었다. 자존심이 센 것이 아니라 열등의식이나 자격지심이 강하다는 것이었다. 그건 나도 인정하는 바였다. 학교에서 행패를 부릴 때는 상식이 통하지 않았다.

“직장에서 명퇴를 당했는데 자기는 상사에게 뇌물을 안 주어서 그렇다는 거야. 순진하게 있다가 뒤통수를 맞았다는 거지.”

며칠 뒤 마을에 다녀온 아내가 저녁을 먹으며 말했다.

“그 말 사실이야? 뻥 치는 거 아냐?”

“글쎄, 연기가 그냥 나는 것도 아니고. 어쨌든 명퇴를 당한 것은 사실인 거 같으니까. 그러다 장사한다고 퇴직금으로 무슨 체인점 가게 열었다가 말아 먹고. 그 통에 아내는 도망가고.”

음. 나는 아내의 말을 듣다보니 점점 동팔 씨의 과거가 머리에 그려졌다.

“집에서는 왕이었데. 아내나 아이들 꼼짝 못 했데. 자기 말에 토를 달거니 하면 폭력을 쓰고.”

“그런 사람이 원래 그래.”

나는 무심하게 말했다.

“명퇴 전에는 그렇게 착하고 얌전했다던데.”

아내는 다분히 동정적인 얘기를 했다. 나는 이쯤에서 그만하라고 했다. 동팔 씨를 편드는 것 같아 기분이 언짢았다. 과거에 아무리 성실하고 착했다 해도 과거가 아니라 현재가 문제였다. 동팔 씨는 아무리 상황을 설명해도 도무지 벽창호였다.

“하여튼 알아둬. 마을 사람들 학교에 대해 별로 좋지 않게 생각한다는 거.”

밥을 먹는데 목에 생선가시가 박히는 느낌이었다. 나는 말없이 밥을 다 먹고 나서 화제를 돌렸다.

“애들한테는 전화 자주 오고?”

서울에서 파견근무로 내려오며 집은 대학에 다니는 두 아들이 쓰고 있었다. 아이들은 시골이 불편하다며 방학 때도 며칠 있지 못 하고 서울로 올라갔다.

“자주 오면 돈만 들지 뭐. 그나저나 졸업하자마자 취직이 되어야 할 텐데.”

아내는 한숨을 쉬었다. 비록 서울에서 대학을 다닌다 해도 밑에서 끄트머리 대학이라 취직률이 낮았다. 아내는 그걸 두고두고 후회했다. 어릴 때부터 과외를 시켰더라면 좋은 대학가고 취직도 잘 할 텐데, 했다. 그러면서 주위에 좋은 대학 간 아이들이 어떤 과외를 받았고 어떤 학원에 다녔는지 줄줄 얘기했다. 하지만 그건 내 박봉에 엄두도 못 낼 형편이었다. 집 대출금 갚고 나면 두 아이에게 저렴한 학원 하나씩 보내기도 벅찼다. 아이들의 미래는 어떤 부모를 만나느냐에 달려있는 듯했다. 가난하게 태어나면 유치원 때부터 이미 부잣집 아이에게 밀렸다. 유치원 때부터 미술학원에다 음악학원은 기본이고 원어민 영어 강사가 있는 유치원에 다녔다. 그러니 인생이란 장거리 마라톤에 출발부터가 달랐다. 개천에서 용 나는 세상은 지났다.  30여 년 전 토끼와 거북이를 배우는 시간에 한 아이가 어떻게 거북이와 토끼가 달리기 경주를 할 수 있느냐고 투덜거렸던 게 생각났다. 맞는 말이었다. 부잣집 아이들이 토끼라면 가난한 집 아이는 거북이였다. 책에서야 열심히 하면 거북이가 토끼를 이기지만 현실에서는 말이 되는가. 어떻게 거북이와 토끼가 달리기 경주를 한단 말인가. 어떻게 거북이가 토끼를 이길 수 있는가. 시골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든 생각들이었다. 어차피 아이들은 대학은 못 갈 것이었다. 조부모 밑에서 혹은 홀 부모 밑에서 커는 아이들이 무슨 돈으로 대학을 간단 말인가. 학교를 마치면 학원은커녕 숙제조차도 안 하는 아이들이었다. 알림장도 필요 없었다. 학부모들조차 아이들의 학교생활에 관심이 없었다. 아니 관심을 둘 만큼 물질적이나 정신적 여유가 없었다. 4학년인데도 한글을 완전히 못 깨친 아이들이 몇 명이나 되었고 수학은 말할 것도 없었다. 수업 후에 따로 아이들을 모아 기초부터 가르치기도 했지만 쓸데없는 일이라고 동료교사들이 말했다. 나도 아이들을 가르치면 한숨부터 나오는 게 사실이었다. 도대체 4학년이나 된 아이들이 도시에서의 1학년만도 못 한 것이었다. 그런 나를 보고 다른 선생들은 혀를 쯧쯧 찼다. 그래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뭔가 모르는 악의가 솟아올랐다. 그래 비록 거북이 같은 인생이지만, 비록 토끼를 이길 수 없지만, 그래도 한번 해보아야 되지 않겠느냐는 오기도 생긴 건 사실이었다. 왜 사람들이 시골로 가지 않으려 하는 지를 절실히 깨닫는 순간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동팔 씨가 다시 찾아온 것이었다. 그것도 교장과 싸우러 찾아온 것이었다. 의외였다. 전혀 상상하지 않은 일이었다. 10여 일 전 아이들을 직접 혼내고 또한 나와도 싫은 소리를 하고 난 뒤 이제는 안 찾아오겠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때마침 내 주술이 맞기라도 한 것처럼 한동안 동팔 씨는 학교에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나 또한 그동안 동팔 씨의 한이 풀렸으니 이제는 학교에 찾아올 일이 없겠구나, 했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동팔 씨는 학교에 찾아와 교장과 싸우고 있다고 했다. 교무 보조인 아가씨가 직접 교실로 찾아온 것이었다. 이제 1교시가 시작 될 무렵이었다. 나는 아이들에게 잠깐 자습하라고 이르곤 곧장 교실을 나왔다. 흘끗, 아이들을 둘러보는데 덕수가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게 보였다. 덕수는 이미 알고 있을 터였다. 아버지가 학교로 찾아와 교장과 싸우고 있는 것을. 나는 교장실로 가며 덕수에게 아무 일도 아니라고 얘기를 해야 하는 게 아닌가 생각했지만 이미 발걸음은 교장실에 다가와 있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어요? 응?"

교장실 밖에까지 동팔 씨의 고함소리가 들렸다. 나는 교무 보조를 돌아보며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교무보조는 머뭇거렸다. 말을 해야 하는지 가늠하는 중인 것 같았다.

"어제 무슨 일 있었어요?"

어제 오전에는 교육과정 건으로 나는 교육청에 교육을 다녀왔다. 교육의 대부분은 교내 폭력문제였다. 폭력학생을 어떻게 상담하고 학교 내 폭력을 근절하느냐였다. 상담교사를 대상으로 한 교육이었지만 우리 학교에는 전문상담교사가 없어 생활지도 담당인 내가 가게 된 것이었다. 대부분의 학교에서는 폭력학생을 격리시키는데 우선 주안점을 두고 있었다. 폭력 학생이 학교에 안 나오길 바라고 학교에 나왔더라도 제발 아무 일을 일으키지 않기를 바랄 뿐이라는 푸념 섞인 교사들의 얘기도 들었다. 한 반에 20-30여 명을 데리고 수업을 하는데 교사의 손길이 미치는 데는 한계가 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어제 내가 빠진 우리 반 수업에 교장이 들어갔다는 것이었다. 평소 같으면 교감이 들어가는데 웬일일까 하고는 깊이 생각지 못했는데 동팔 씨가 나를 안 찾아오고 교장실로 곧장 가서 교장과 싸우고 있다고 하니 어제 수업 시간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게 아닌가 싶었다.

"글쎄, 그게."

나의 독촉에 교무보조는 머뭇거리다 이런 말해도 되나 몰라 혼잣말로 중얼거리더니 말했다. 어제 1-2 교시는 교감이 들어가고 3-4교시에 교장이 들어갔는데 덕수를 수업시간에 혼자 있게 했다는 것이었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어이가 없었다.

"그러니까 교장 선생님은 예절 교육시킨다고 아이들에게 악수하는 법이며 인사하는 것을 가르치셨는데 덕수한테는 혹 수업하다 무슨 일 있으면 네 아버지가 또 난리를 칠 것이니 혼자 가만히 있어라 하고. 아이 난 몰라요."

교무 보조는 말을 다 잇지 못 하고 교무실로 들어갔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만으로도 어떤 상황인지 알 것 같았다. 평소에 교사들뿐만 아니라 교장도 동팔 씨에게 감정이 많이 상해 있었다. 그걸 아는지 덕수 또한 학교에 와서도 기를 펴지 못 했다. 자꾸만 선생들을 피하고 내 눈길도 피했다. 때마침 수업에 들어간 교장은 덕수를 보고는 수업을 배제시킨데 분명했다. 너 또 괜히 무슨 일 생기면 네 아버지가 학교에 찾아와 난리를 칠 것이니 아무 것도 하지 말고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어라. 교장의 말이 귀에서 윙윙거렸다. 다른 아이들은 수업에 참가하고 있는데 혼자 의자에 앉아 가만히 있던 덕수의 심정은 어땠을까. 나는 교장실문을 열려다 멈칫했다. 누구 편을 들 수 없는 난감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싸움은 말려야 했다. 내가 문을 열고 들어가니 교장은 의자에 앉아 있다가 잘 왔다는 듯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동팔 씨는 교장 책상 앞에서 서 있다 불콰한 얼굴로 나를 돌아보았다. 벌써 술을 한잔 걸친 모양이었다. 술을 먹지 않고는 학교에 찾아와 따질 용기도 없는 사람. 나는 동팔 씨의 팔을 잡았다.

"얘기 들었습니다. 밖에 나가서 저와 얘기하지요."

하지만 동팔 씨는 팔을 뿌리쳤다.

"왜 우리 아를 공부도 안 가르치고 따돌린단 말이요? 응?"

"따돌리다니. 평소에 아이들한테 왕따를 당한다고 하니 아이들과 떨어지게 한 것뿐이요."

교장은 내가 있어서 그런지 큰소리를 쳤다.

"그게 왕따가 아니고 뭐요, 씨발. 내 청와대에 진정할 거요."

동팔 씨는 거친 숨을 내쉬며 씩씩거렸다. 분이 안 풀리는 모양이었다.

"예 마음 충분히 알겠습니다. 나가서 저와 얘기하지요."

나는 동팔 씨의 팔을 잡고 강제로 밖으로 끌어냈다.

"좆도 씨발."

동팔 씨는 교장실 밖으로 끌려나와서도 분이 안 풀리는지 거친 숨을 내쉬더니 담배를 꺼내 물었다. 저, 그게. 나는 학교는 금연구역이라는 말을 하려다 동팔 씨를 데리고 예전에 숙직실로 쓰던 곳으로 갔다. 나는 동팔 씨의 담배에 불을 붙여주었다. 동팔 씨는 나의 호의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더니 연기를 들이마셨다가 길게 내뿜었다.

"대체 이런 경우가 어디 있어. 씨발."

"참으세요."

나는 어쨌든 동팔 씨의 화를 삭이고 돌려보내는 것이 급선무였다.

"개지랄. 내가 못 나고 가난하니께 그러는 거 아니요? 만약 내가 부자고 많이 배웠다면 그럴 수 있을 거요?"

동팔 씨는 흥! 콧방귀를 껐다. 나는 잠자코 있었다. 맞장구를 칠 수도, 아니라고 적극 변명하는 것도 짜증스러웠다.  

"내 그냥 안 둘 거여. 모가지 날릴 거여. 저런 새끼가 교장이라고. 예전부터 그랬다고 저 새끼는. 가난하고 못 배운 사람은 인간취급도 안 했다고."

동팔 씨의 입에서 막말이 나오고 있었다. 나는 제지했다. 아무리 교장이 잘못했다고는 하나 학교 내에서 교장에게 그런 말을 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화 풀고 그만 돌아가시지요. 저도 수업 들어가야 합니다. 그리고 아이들 있는데 교장 선생님에 대해 심한 말은 삼가주시고."

"삼가? 지랄하고는. 내가 지금 진정하게 생겼소? 아이들도 모자라 교장까지 왕따 시키는데. 청와대에 진정해서 저 새끼 모가지 날릴 거야."

동팔 씨는 담배를 재떨이에 거칠게 끄고는 새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이번엔 나는 불을 붙여주지 않았다. 그러면서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동팔 씨가 교장을 심하게 불신하고 있다는 것을. 또한 심하게 욕을 하고 있다는 것을. 전에 보지 못 한 동팔 씨의 모습이었다. 상처 입은 짐승의 모습이랄까. 동팔 씨의 모습에서는 자괴감과 열등의식, 피해의식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러면서도 알 수 없는 적의가 있었다. 적의는 무엇 때문일까. 옛날부터 그랬다고, 저 새끼가. 문득 동팔 씨가 조금 전에 한 말이 떠올랐다. 그럼 예전부터 알고 있는 사이인가. 나는 동팔 씨가 비틀거리며 문을 열고 나가는 뒷모습을 한참동안 바라보았다.  

저녁에 집에 퇴근하니 동팔 씨가 학교에 와서 교장과 싸웠다는 것을 아내는 이미 알고 있었다.

“어떻게 됐어요?”

아내는 호기심으로 물었을 테지만 나는 마음이 개운하지 않았다. 교장이 잘못한 것은 분명 맞지만 동팔 씨 또한 학교에 와서 행패를 부린 것도 잘못한 일이었다. 피해는 고스란히 아들인 덕수한테 가는 것을 왜 모르는가. 나는 아내의 물음에 다 아는 것을 왜 묻느냐고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어쨌든 교장이 잘못한 거 아녜요?”

아내는 식탁 앞에서 말을 꺼냈다. 시골로 온 후 아내는 차츰 이웃들을 사귀기 시작하더니 내가 없는 낮엔 바쁜 농사일도 도와주고 아예 점심을 얻어먹기도 했다. 도시에 비해 아내는 주위 사람들과 잘 어울렸다. 그런데 아내에게 서운하였다. 아내는 학교나 교사에 대해 언론에 나오면 무조건 학교나 교사 편을 들었던 게 사실이었다. 물론 남편이 교사이니 당연히 그러는 게 맞는다고 나는 생각했다. 그런데 은근히 동팔 씨를 두둔하고 나서는 아내가 얄밉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팔 씨도 그러는 게 아니야. 조용히 따지든지 해야지. 술 먹고 오면 어떡해.”

나의 말에 아내는 동네 분위기가 그렇지 않다고 했다. 다들 교장을 욕한다고 했다. 동팔 씨의 행동이 정당하다는 거였다.

저녁을 먹은 후 아내와 나는 산책을 위해 집을 나섰다. 마을을 조금만 벗어나면 큰 내가 흐르고 있었기에 방천둑을 따라 걸으면 시원하고 가슴이 탁 트였다. 아내와 나는 자주 저녁이면 산책을 하였다. 마치 시골 생활을 마음껏 즐기려는 욕구 같은 것도 있었다. 이제 1년 조금 지나면 서울로 올라가야 했다.

“이거 우선생님 아니십니까?”

마을을 벗어나려는데 누군가 구멍가게에서 아는 체 했다. 구멍가게라고 해 봐야 과자부스러기 몇 개와 소주 막걸리를 파는 곳이었다. 마당에는 하얀 칠이 벗겨진 탁자 두 개와 의자 너댓 개가 전부였다. 돌아보니 동팔 씨였다. 김치를 안주 삼아 소주를 마시고 있었다. 아침에 본 것 마냥 얼굴이 역시 불콰한 게 술기운이 있었다. 그냥 지나갈 수도 없어 인사를 하였다.

“이제 일이 끝났나 보죠?”

“해지면 땡이지요. 이리 와서 한잔하시지요.”

아침에 학교에 와서 행패를 부릴 때와는 달리 공손하였다. 학교 밖에서 만나기는 처음이었다.

“아닙니다. 방금 저녁 먹어서.”

나는 여차하면 재빨리 벗어날 궁리로 말하였다.

“술 배 밥 배 따로 있는 거 아닙니까? 그러지 말고 이리 와요. 사모님도 오시고요.”

동팔 씨는 한 번 더 권했지만 나는 돌아갈 참이었다. 그러나 아내가 옆구리를 찔렀다. 가서 한잔하라는 것이었다. 순간 아내가 언젠가 한 말이 떠올랐다. 여기 사람들 있죠. 호의를 무시하면 굉장히 화내요. 자신들을 무시한다나 어쩐다나. 그러니 당신도 조심해요. 까칠한 성질에 이곳 사람들과 부딪히지 말고요. 아내가 옆구리를 찌르는 데야 어쩔 수 없었다. 나는 다가가 앉지 않고 서 있었다. 동팔 씨는 주인에게서 잔과 사이다를 가져오더니 나에게 맥주잔에 소주를 가득 따라 내밀었다. 나는 엉거주춤 두 손으로 받았다. 아내에게 사이다를 따라주었다.

“한잔 하슈.”

동팔 씨는 맥주잔에 든 술을 한 입에 털어 넣었다. 그러곤 손으로 김치를 집어 입안에 넣었다. 나는 잔을 들어 조금 마시곤 잔을 내려놓았다. 안주는 먹지 않았다.

“우리 촌놈 인생은 말이요.”

동팔 씨는 자신의 잔에 술을 가득 채우며 말했다.

“오이 같은 인생이요. 비닐하우스에 커는 오이 봤소? 못 봤지요? 그게 우리 인생과 같다는 말이요.”

동팔 씨는 술 취한 목소리로 지껄였고 나는 빠져나갈 궁리만 했다.

“오이를 모종해서 키우면요, 딱 한 줄기만 키웁니다. 저도 고향에 내려와서 알았지 뭡니까? 예전에는 노지에 키울 때 그냥 줄기가 나가는 대로 뒀지 않습니까?”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동팔 씨의 말을 들으니 어릴 때 고향 생각이 났다. 고향 집에서도 수박이랑 오이 농사를 많이 지었다.

“근데 곁줄기는 생기자마자 다 자르고 한 줄기만 키우는데 그 줄기가 커서 사람 키만 하면 큰 오이를 따고 줄기 끝을 한 뼘쯤 아래로 내립니다. 요렇게요.”

동팔 씨는 손으로 줄이 내려져 있는 상황을 설명하고 줄기가 줄을 타고 위로 올라갈수록 매일 줄기를 내린다고 했다. 꽃과 작은 오이가 달린 줄기는 다음 날 한 뼘씩 크고, 그러면 제일 위에 있는 오이는 따고 줄기를 다시 한 뼘씩 내리고 집개로 줄에 집어준다고 했다. 그러니 매일 컸다가 다시 아래로 내려진 오이 줄기들이 마치 뱀이 똬리를 튼 것처럼 줄기 아래에 둥글게 몇 층으로 쌓인다고 했다.

“오이는 분명 위로 열심히 살아간다고 생각할 거 아니요? 근데 매일 그 자리이지요. 꽃이 핀 것도 그렇고 오이 열린 것도 매일 똑같지요. 열심히 살아봤자 맨 그 자리라는 겁니다. 좆도 우리처럼 말이지요. 우리 못난 인생살이와 비슷하지 않소?”

동팔 씨는 맥주잔을 들어 단숨에 술을 털어 넣었다. 그러곤 손으로 김치를 집어 입에 넣었다. 손은 흙이 덕지덕지 묻은 바지에 쓱 닦았다.

“전 이만 가 봐야겠습니다. 할 일도 있고.”

하지만 동팔 씨는 내 말에 개의치 않고 자신의 잔에 술을 가득 따르며 중얼거렸다.

“그 교장 새끼 내 그냥 안 둘 거요. 청와대에 내 꼭 진정해서 모가지 날릴 거요.”

나는 돌아서서 가려다 동팔 씨를 똑바로 보았다.

“그 문제는 이제 그만하시지요. 우리 반 일이기도 하고 제가 사과드리겠습니다. 앞으로는 그런 일 없도록 하지요.”

나는 진심으로 사과했다.

“우선생님이야 무슨 죄가 있습니까? 교장 그 새끼가 문제지요. 아침에 교장 찾아갔을 때 딱 한 마디 사과만 했어도 나 안 그랬어요. 근데 사과는 커녕 자꾸 변명만 늘어놓는 통에. 나요, 이제 우선생님한테 감정 없습니다. 다 풀렸습니다. 내가 쬐끔 오해해서 생긴 거지요. 옛날 그 교장 새끼 때문에.”

“예? 오해라뇨?”

교장에 대한 태도가 귀에 거슬렸지만 참기로 했다. 어차피 일을 확대시킬 수는 없었다.

“우선생님은 몰랐지요? 그 교장이 사실 내 국민학교 때 담임이었다오. 미친 개. 흐흐, 그게 그때 교장 별명이었지요. 이 동네 사람들 교장을 다 그렇게 불러요. 미친 개라꼬.”

“아니, 그런데 왜?”

일이 이상하게 돌아간다 싶으면서 나는 나도 모르게 자리에 앉았다. 아내도 곁에 앉았다. 제자인데도 옛 스승한테 험한 말을 하는 것 보면 뭔가 깊은 내막이 있는 듯싶었다.

“자, 한잔 하슈.”

동팔 씨는 내 잔에 자신의 잔을 부딪치곤 또다시 입에 모두 털어 넣었다. 저렇게 막 마셔도 되는가 싶었다.

“그 미친 개가 우리한테 얼마니 악독하게 했는지 아슈? 그땐 육성회비 안 낸 집이 수두룩했는데 악착같이 받는단 말이요. 공부도 외상으로 배우냐 이러면서요. 육성회비 안 낸 아이들은 집으로 쫓아내거나 운동장에 풀 뽑는 걸 시켰지요.”

“음.”

나는 나도 모르게 술잔을 입으로 가져가 조금 마셨다.

“하여간 그 미친 개는 가난하거나 공부 못 하는 애들은 사람 취급 안 해줬어요. 화장실 청소에다 온갖 궂은일은 다 시켰지요. 부자? 부자 앞에선 설설 깁니다. 치맛바람 한번 불면 돈 봉투가 여럿 들어오니까요. 근데 말이요.”

동팔 씨는 말을 멈추고 담배를 꺼내 물었다. 나는 아찔 현기증을 느꼈다. 그건 내 이야기였다. 내가 어릴 때도 육성회비를 못 내 연신 쫓겨났고 얻어맞았다. 공부 잘하고 부자 애들한테는 그렇게 살갑게 대해주던 선생이 나처럼 가난한 아이들은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미술시간에 준비물을 돈이 없어 못 사갔는데 준비물을 안 가져왔다고 몽둥이로 때렸다. 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럼 교장 때문에 학교에서 그렇게 하신 겁니까?”

나는 이제야 동팔 씨의 실체를 아는 것 같아 물었다.

“그렇지요. 아가 처음에 왕따를 당했다 캐서 학교에 갔는데 글쎄, 교장이 운동장에 있지 뭡니까? 나는 놀라기도 해서 그냥 집으로 왔어요. 잠도 하나도 못 자고. 그런 미친 개가 학교에 있다면 애 말이 맞구나, 했지요. 가난한 애들 왕따 시키고 때리고 멸시하고. 돈 봉투만 가져다주면 잘 대해주고. 그 미친 개를 보며 아직도 이런 세상인가. 한탄했지요. 옛날과 똑 같구나. 그래서 다음 날 술 마시고 찾아갔지요. 맨 정신으로 또 그 미친 개 만날까봐.”

“그래서 그렇게 상황을 설명하며 아니라고 해도 못 믿었습니까?”

“못 믿을 밖에요. 요즘 세상도 돈 없고 못 배우면 멸시받지 않습니까. 인간취급도 안 하지요.”

“요즘은 촌지가 없을 뿐만 아니라 옛날하고 많이 다릅니다. 부모가 부자나 가난하다고 해서 애들 차별하는 일도 없고요.”

“좆도, 말도 안 되는 소리 마슈. 돈이면 안 되는 게 없는 세상인데. 그 봐요, 그 미친 개가 또 우리 아를.”

“죄송합니다. 그건 제가 사과할게요.”

나는 진정으로 용서를 빌고 싶었다.

“교장실에 찾아갔을 때 바로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만 했어도. 씨발.”

“진정하시고. 다시는 그럴 일이 없을 겁니다. 내 약속합니다.”

“약속은 씨발. 하여튼 그 미친 개는 그냥 안 둔다니께. 하여튼 바쁜 사람 붙잡아서 미안하슈.”

동팔 씨는 손을 내밀었다. 나는 그 두툼한 손을 두 손으로 잡았다. 나는 한동안 잡고 있다가 일어섰다.

“아닙니다.”

나는 고개를 깊숙이 숙이고 물러났다. 산책할 마음도 사라져 집으로 방향을 털었다. 아내가 말했다.

“예전에 서울에서 명퇴당하기 전에는 가족이 오붓하게 살 때는 그렇게 상냥하고 착했다는데. 성실하고.”

나는 아내의 말에 아무 말도 못 하고 하늘에 뜬 별만 바라보았다. 수많은 별들이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

 

 

고창근/ 경북 상주 출생, 한국작가회의 회원, <웹진 문학마실> 편집인, 소설집『소도(蘇塗)』,『아버지의 알리바이』, 장편소설『누드모델』,『존재의 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