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목포작가지 수록 작품(시)



꽃샘


김성호



모든 출산에서 순산이란 없다

비교적

혹은, 결과적으로 순산일 뿐

우리가

결과만을 이야기하고 있을 때

이 계절은

우리에게 과정을 가르치고 있다


제왕절개로 끄집어내는 봄,

난산이다






나 고향으로 가다


  곽의진



순수의 유년을 놓아둔 채

집시되어 떠돌았다

늘 배가 고팠고 밤이면 헛것이 보였다


-키 작은 감나무 .주렁주렁 열린 똬리 감

-손가락 잎세 틈으로 불꽃놀이 하는 무화과

-불 들녁에 피어나는 ,흰살 혀끝에 녹는 삐비

-개펄에서 꼼지락 거리는 짱뚱어 사랑게


허기를 채워야했다 빛 또는 어두움을 찿아 헤맸다

무엇도 없었다 ,정망


천지 쩌렁쩌렁 울던 밤

상처투성이 육신 끌고 폭우속을 달렸다

태(胎)심은 땅으로 숨었다


갯바람은 어디서 부는가.

콩새는 어느 숲에서 노래하는가

내 침침한 영원을 흔들며

소리 나게 흔들며 나를 깨웠다


남겨두었다가 고향이 준 것

또 다른 생명

그러므로 나는 아직 젊어있다






가거도행


박관서


밀려난 꿈은 가장자리가 가장 깊다

사는 일에 목을 걸고 맴을 돌다

국토의 맨 끝 가거도에 이르러

이웃나라 닭울음에 귀 귀울이고 있는

녹섬앞 둥구회집 평상에 앉아

검정 보리술로 목을 헹구다보면

박혀있던 낚시미늘마저 따뜻해진다

밤깊은 동개해변 찰랑거리는

둥근 달빛에 흠뻑 젖어

사는 일 흔적도 없이 지워져

남의 나라 남의 일이 된 즈음에야

새로워진 나를 만난다 스스로 깊어진

가장자리를 만난다 생무릎 꺾여

밀려나보지 않은 이들은 평생을 살아도

가거도에는 이르지 못하리








조금리 장터


박남인



오늘은 연만들기 기인 김판용씨를 만났다

동갑내기 여자친구와 흘러간 사연을

순번없이 호출하던 치기를 간신히 씻어낸 뒤

장터에 오면 무슨 약속들도 둥둥 떠 다닌다

섬 구석에 내몰린 묵은 설움도 함께 풀리는 우수날

해진정육점 탁자에 앉아 소맥 한 잔을 들이킨다

참연 오살연 가오리연 쌍연 썩을년

막걸리잔 위 닷새만에 정겨운 욕이 떠다닌다

농민장사 철웅이형도 납부닥에 버짐이 늘었다

해마다 되풀이되는 호파폐기처분에 매달려

남쪽 섬마을 2월이 그렇게 흐른다

이 산 저 산 분명코 봄이련다? 실업고 선생이

단가 한 곡을 부를 때 어디서 장기판 알치는 소리

서촌 뻘밭 간재미는 맛도 좆도 두배나 된다

이렇게 간간이 재미를 보는 조금난리 장터에 오면

딴 주머니가 없어도 파릇한 봄동 한 잎에

붉은 구기자 떠다니는 동동주가 넘쳐난다

여기서 산다는 것이 모두 약속이다

다시래기 허튼 춤사위로 장판을 휘젓는 홍장군

홍림이형은 딸들이 장하다 그게 진도다

또 어디서 펑 깡냉이 튀밥이 튄다 너도 나도

부풀린 가슴 연처럼 떠오르는 조금리 장터.






낙타 


박성민


모래바람에 날아간 꿈들을

낙타는 눈빛으로 끌어 모아

두 개의 혹 속에 밀어 넣는다

낙타의 혹은 꿈들이 묻힌 무덤이다

등에 진 짐들은 오히려 가벼운 것일까

낙타는 살아온 나날을 헤아리듯

발굽 아래 흩어지는 모래알을 센다


낙타가 걷는 사막에는 길이 없다

모든 길을 모래바람이 지운다

하여, 낙타는

자신이 걸어온 길들을 돌아보지 않는다

발자국의 경전(經典)을 들여다보는 자는

이 사막에서 눈이 멀게 된다


오아시스 아래 낙타는

주름살 이랑을 씻어내며 얼굴 비추지만

물 한 모금 마시고 낙타가 떠난 자리

그 물 다시는 낙타의 얼굴을 기억해 주지 않는다

모래바람은 시리고 차게 사막을 횡단한다



산길


이봉환


길은 흔들리지 않고 저 혼자 묵직하다

산길이 거센 바람에도 저리 단단한 것은

그동안 수많은 발길들이 다녀갔기 때문

자살하려고 산에 들어섰던 어느 실연자는

일등바위까지 올랐다가 이내 웃으며 내려갔다

그건 길이 울음을 대신 삼켜주었기 때문

언젠가는 실직자가 낮술에 취해 꺼윽꺼윽

슬픈 얼굴을 길 다 젖도록 비벼대기도 하였다

신발 끈 질끈 동여 맨 산길의

궁리와 생각들은 저토록 깊고 우직하다

태풍이 온다는 예보에 바위가 잔뜩 움츠리고

은사시나무 잎이 사방팔방으로 몸서리친다

굽은 산길은 덤덤하고, 천천하고, 묵묵하다

수많은 영혼들이 그동안 깃들었기 때문

단단히 다져진 길의 근육이 정신처럼 빛난다






어떤 엽서



안오일

  


셔터 내린 전파사 앞

의자에 앉아 아코디언을 치는

소녀


딱히 응시점 없는 미소가

땋아 내린 갈래 머리로

작은 가슴

가지런한 두 다리로

잔잔히 퍼진다


질주하는 시간의 소리도

앞다투어가는 경적도

그대로인데


천상의 소리는 들리는 것이 아니라

보이는 것이어서

세상 참 고요하다




새벽기차


유종


새벽 발기發機에 엉겨 붙은

피비린내

가벼웠던 생의 내력들이

기관차 단면에 빽빽하다

진로 빼앗긴

망각의 통로를

또 어떤 꿈들이 채우고 있는가

  

날벌레 날벌레

날품팔이 날품팔이


기차를 움직이는 것들의

정체가 날벌레였던가

가끔 날갯죽지 꺾여 실려 오는

날품팔이였던가

용산행 새벽 기차에

올라앉은

사내의 검은 눈이

오랜 침묵처럼 깊다.




늙은 엄마의 밤은 길다



정영숙


아버지 생신날

객지에 흩어진 자식들

아까시꽃 처럼 방울방울 모여

왁자한 생신잔치

자식이 다 같으랴

특별히 아린 자식 있어

풀벌레 소리도 잠잠한 여름밤

늙은 어미는 잠못 이루고


번듯한 직장 버리고

한곳에 맘 붙이지 못해

변방을 떠도는 둘째

굳은살 박힌 굵은 손마디 놓칠리 없는

늙은 어미는 한몸 지키기도 힘든

삭신 삭아드는 한숨 소리

어둠속을 뒤채고 있다


깊어가는 여름밤

늙은 어미와  자식의

꿈구는 속내는 달라

지 속살 찢고 나온

또 아린 자식 있어




'WORK'의 비밀


 최기종

 

'WORK'란 단어에는 지루한 사막이 있었다.

어둡고 춥고 살을 에는 듯 눈보라와 삭풍이 있었다.

황사처럼 강물처럼 전쟁과 질병과 공포와 기아가 깔려 있었다.

그냥 쿨하게 ‘워크’라고 발음이 된다면 노동의 신성성은 존중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악마의 소리처럼 길게 발음되는 ‘워:크’란 단어에는

출구 없는 터널처럼 허리 부러지게 아무리 걸어도 벗어날 수 없는 사슬이 있었다.

 

'WORK'란 단어에는 주술이 걸려 있었다.

맷돌을 돌리는 황소처럼 채찍을 맞아야 했고

가슴 없는 기계처럼 속도에 매여서 착취당해야 했다.

돌팔매질 받으면서 쫓기는 저주받은 선구자처럼

관성적으로 물을 건너는 백수광부처럼

주술이 걸려 있는 ‘워:크’란 단어에는

피 냄새가 나고 야적장 해골들의 노랫소리가 났다.

 

그런데 아무리 외롭고 힘들 때에도

'WORK'란 단어는 우리와 함께 있었다.

그것은 아무리 죽여도 되살아나는 것이었다.

전기와 수도가 끊긴 극한 상황에서도

손목이 묶이고 밥줄이 잘리는 절망 속에서도

입술에 힘을 주다보면 검은 환영들이 물러났다.

황야의 매머드처럼 눈빛이 살아났다.

 

전염병 창궐하는 난민촌 모퉁이

밤마다 몰래 버려지는 병자들도

여럿이 ‘우어:ㄹ크’ 입술을 모으면

거적 재끼고 부시시 일어났다.



바람의 집, 나무


한보리



6월의 나무에 드는 바람을 보고

나는 한 때

'바람에 몸 부푸는 나무'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습니다

6월의 바람부는 어느 한 때

언덕 위에서 하얗게 몸을 뒤집는 은사시나무를 보며

'바람에 몸을 씻는 나무'라고 소리내어 말한 적이 있었습니다

다시 6월의 하루

바람에 따라 나무의 문이 여닫히고 나무의 창으론 구름이 닿고

밤 별들이 내려앉는 저녁 고요해진 나무를 바라보다가

'바람도 잠에 들었는가? 나뭇가지에 몸을 부린 바람은 무슨 꿈을 꿀까?'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나는 비로소 나무가 바람의 집이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나를 끊임없이 흔들어대는 그대여!

그대를 위해 나 여기 오래 서있을지니





할머니 누룽지(동시)



김화숙


     


싸르륵

싸르륵

가마솥에서

들려오는

파도소리


어느새

할머니 손에는

오색빛 감도는

전복껍질에

구수한 누릉지가

들려있었네


한평생

물질을 한

할머니 손을 닮은

전복 껍질 누릉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