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구광렬 김병수 김재홍 김종원 김태수 성환희 이규원 이상열  이숙희 이한열  임윤

     장상관 정성희 조 숙   조숙향  최장락 허영미

동시: 우덕상 유정탁

동화 김병수

소설: 박종관 

 

間 14


구광렬



파슈파티나트(Pashupatinath) 사원을 끼고 도는 바그마티 강, 그 다리 옆 화장터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산 자의 행렬, 앞의 주검을 태우던 장작이 강 위를 부유하면 뒤의 산 자는 자신의 몸을 태우기 위해 타다만 젖은 장작을 건져내니, 산자와 죽은 자의 차이는 마른 장작과 젖은 장작 반 개 피 차이일 뿐.

내 뒤에 죽을 자가 타다만 장작 쪼가리 하나 건지지 못할 때 타다만 내 주검이 그의 주검을 태울 젖은 장작이 되어도 좋을 아침, 손만 씻으려 수도꼭지를 틀건만 머리 위로 불보다 더 뜨거운 찬물이 쏟아진다


해파리


김병수



너는 가끔, 히바리 하나 없이

해파리 같은 너의

삶이 신물난다고 말했지만

해파리로 한 번 살아 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뱃속 다 드러내고


수면에 엎드려 물결 따라

바람 따라 한세상

떠다니는 것도 좋지 않을까


벅찬 파도에도 가라앉지 말고

햇살 따뜻해도 잠들지 말고

제 몫의 물결 한 줄기 만들지 못해도

작은 다리

쉼 없이 저어 가다가


가끔씩, 물살 헝크는 거센 소용돌이엔

암팡지게 독침도 한 방 쏘아가면서


편지3 

  -할머니를 생각하며.2



김종원



잊어야 한다고

다짐하고 다짐할수록

자꾸만 깊어지는

게 있지요.

이른 새벽

어두운 방 윗목에

앉아

연신 담배를

피우고

휴우, 휴우 그리움

쏟아 내도

차마

잊을 수 없어

울컥

서러워 지지기도 하고

마른

잎사귀

위를

스치는 

작은 바람 소리에도

큭~ 숨 멈추시던

할머니

날마다

캄캄한 어둠 속으로

가슴속에 담아둔 그리움

쏟아 놓으신다.

아무도

몰래


신탄리역, 열차는 멈추고



김태수


여기서 철길이 끝나는구나

전곡역, 연천역, 대광리역 철원역 지나

평강역, 세포역, 고산역, 통지역, 낯선 이름들

지난다 기차는 뿌우, 기적소리

의기양양했을 원산역도 지척이다


이산의 통증에 삭신이 저린 백발의 노인네들

작은 역 광장 긴 나무 의자에 앉아

침묵 중, 한 때 남남북녀였을 거야 시동을 멈춘

낡은 버스 옆구리는 안보관광 표시 선명하다 역사(驛舍)는

한낮의 고요 속, 긴 하품이다

철길 위는 수직으로 내리는 칠월 땡볕이

지글지글 아지랑이를 길어 올리지만

그래도 철마는 달리고 싶다


드디어 철길이 끝나버린 이 신탄리역에서.




* 신탄리역 : 경원선 최북단역




푸른 주검


                  성 환 희




사람살이 어느 곳인들

농간이 없다 할까

무심코 찾아 든 십리대밭에서

쓸쓸히 시퍼런 주검들을 본다

죽순, 자글자글 말라간다

누가 불렀는가

훌러덩 훌러덩 옷 벗어 둔 채

마디마디 하얀 속도 터엉 비워놓고

너는 지금 어디를 떠도는가

끝없는 이 길이 이리도 어두운 미궁속인 것은

대밭 가득 드러누운 너의 울음 때문이겠으나

살아 꽃 피우지 못한

찢겨진 살결엔

아직도 멈추지 않은 숨이 있어

시리도록, 내가 아프다.


좋은 사람



우덕상



끝이 아름다운 사람

끝이 깨끗한 사람

끝이 깔끔한 사람


끝까지 좋은 사람

끝까지 책임을 다하는 사람

시작과 끝이 같은 사람


좋은 세상을 만드는

좋은 사람입니다.



똥 싸는 감들



유정탁



감나무에 매달린 감들 보면

똥마려운 것 참고 있는 것 같아.

아니, 엉덩이 드러내 놓고

똥 누고 있는 모습이 맞을 거야.

그렇다고 쉽게 싸버리면 재미없고

참을 때까지 참아 보기로 하는데

참을 성 없는 몇몇은 뛰어내리기도 하지.

그러고 주저앉아 똥 싸는 자세로 앉아 있다

제 몸이 똥이 되기도 해.

대개 감들은 참을성이 좋아.

떨어지는 감보다 매달린 감들이 더 많거든.

저렇게 똥구멍 아프도록 참다 보면

똥이 몸속에 그득 차는 거야.

울그락불그락 시뻘겋게 익어가는 감들

우리는 그것들을 홍시라고 부르지.

감이 홍시가 되기까지 참을성 대단하지 않니?

홍시가 맛있는 거 다 이유가 있는 거야.


온건노조지부장


이규원




10시

현대자동차 의장라인 컨베어가 섰다

10분간 휴식!

커피 내기 오목을 두거나

신문과 책을 읽으며 잡담을 하던 사람

풋샵과 줄넘기 하나 둘

아령 들고 체력단련 하던 사람

오늘은 모두들 분임조 탁자에 쪼롬이 모여

고개를 뒤로 젖혀 있거나

이마에 쉿! 하고 앉아있다

혹시 할 말이 더 있는데 다 못한 표정?

3대 금속노조지부장결선선거 개표결과가 나오기 직전이다

전통의 강성후보를 제치고

온건실리노선후보가 유력하다는 보도가 있었던 터

막 돌아가는 컨베어의 진동에

불빛이 흔들렸나

사람들의 얼굴 위로

후회의 물결이 언뜻 일고 간 것 같기도 하고

회심의 물결이었나

조용하던 사람들 하나 둘

작업장 불빛 속으로 사라지고 없는 탁자 위에

뽕짝만 신나게 흔들어 재끼고 있다

할 말 한 마디만 해도

공장 문 닫아야 하는 협력업체도 있지만

그래 다 잘 먹고 잘 살자고 하는 일이지

마! 올해는 CR만 하지 마라


CR(cost reduction): 협력업체에 단행하는 일방적 부품단가 인하책


비원悲願



이상열


구름천지 안개천지에서 티베트를 만났네.

모호한 실체처럼

만져지지 않는 자욱한 연무 속에는

구릿빛 피부와 살가운 미소의 착한 사람들이 있었네.

펄럭이는 바람마다 기원이 담겨있었네.

쉴 새 없이 돌아가는 황금빛 마니차는

토번으로 시집가는 문성공주의 염원이 서렸는데,

잃어버린 땅에서 포효하는

설산사자기* 속 신령한 흰 사자 두 마리

삼보**의 진언을 담아 저 멀리 두고 온 어머니의 땅

그곳까지 오체투지를 하네.

뒹구는 돌에도,

흔들리는 풀잎에도,

귓가를 스치는 바람에도,

옴 마 니 반 메 훔

옴 마 니 반 메 훔

아픈 소원이 담겨있네.

슬픈 비원이 담겨있네. 


  

*설산사자기(雪山獅子旗)-1912년에 만들어진 티베트 망명정부의 국기.

*삼보(三寶)-불보(佛寶),법보(法寶),승보(僧寶)의 세 가지를 일러 삼보라 함.




추측


이숙희


선사시대 돌칠판에는 고래가 살고 있다.

우주 공간은 물 천지, 비행기처럼

헤엄쳐 다니는 무리 속에 거미줄에

걸려 말라가고 있는 백일홍 꽃잎을

발견한 가을 고래 한 마리.

저기.

뿔 달린 짐승의 털은 단청같이 곱고

주둥이를 앞세우고 돌진하는 맷돼지

순간을 놓치지 않는 살벌한 침묵의

호랑이.

숨을 가다듬고 유영을 시작할 그때

꽃잎을 쥐고 놓아주지 않는 거미줄.

햇빛처럼 쫘악 퍼져 덮쳐 오는

거미줄

지금, 가을 고래는 숨죽이고 있다




다락리 사랑



이한열




다락리에서는 아무도 사랑을 탓하지 않았네 열여섯 고을에서 모여든 들뜬 호기심들이 뜰을 다 태워도 탓하지 않았네 절벽의 허리쯤에 핀 꽃 한 송이 품으려고 안달이었네 가냘프고 어여쁜  자태에 모두 빠졌네 사진 잘 찍는 이는 정성스레 인화를 하여 그 마음을 잡으려고 했네 시를 좋아하는 이는 그 꽃을 바라보며 사시사철 노래했네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이들도 마음으로는 늘 품고 있었네 다락리에서는 간혹 연인들이 사라졌다가 정념의 뼈를 다 태우고 한참 후에 돌아올 때도 있었네 그럴 때마다 전설이 생겨나고 아름다운 죄라는 연가가 불리어 졌네 세월이 흘러 다시 만나도 이미 망각의 강을 건너 온 이들은  예전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사랑을 하네 다락리에 있었던 이들은 결코 사랑을 탓하지 않고 사네.




까레이스키 연어

-회귀 그 후


임 윤




  사할린동포 모국방문단이 울산에 도착했다


  태극기 들고 앞장 선 김갈리나 할머니는 징용으로 끌려간 남편 찾아 젖먹이 들춰 업고 열여덟에 까레이스키 바다를 떠났단다 고려인 강제이주에도 차디찬 오호츠크 바다에 살아남았단다 코르샤코프항 휘돌아 동해로 떠나간 연어를 꿈에서나마 따라나섰단다 거친 물살, 숫한 파랑 넘으며 가쁜 숨 몰아쉬었단다 함께 오지 못한 남편을 사할린스크 외곽 공동묘지에 손수 묻었다고도 한다


  태화강에 육십여 년만에야 회유한 연어가 왔다 마을 어귀 개울물에 쭈그러든 거죽 지느러미를 담갔다


  동네잔치 열린 그날 밤, 할머니는 사할린에 있는 어린 손자 생각에 밤새 뒤척였단다

 


무위기Ⅱ



장상관



바람은 노동가 부르며 쟁기를 끌고

구름이 제 속살 파종하는 아득한 수평면

부푼 근육으로 방파제 차고 올라

파도는 내항에 정박한 목선을 점명한다

굳었던 관절 푸는 빈 개울들도 이제

청강에 업혀 바다로 나아갈 것이나

내면은 언제쯤 쟁깃밥 출렁이고

한 무리 가마우지 울음 들을 수 있을까

수만 씨앗들 숨소리에 부푸는 바다

불끈불끈 힘줄 솟은 파도가

폭우 헤치고 달려와 웅크린 가슴 파헤친다

울울한 홑이불 두르고 떨다

생각의 채널 돌리며 언뜻언뜻 스치는

흐린 얼굴들 그리려 애쓰다 보면

먹먹한 귓속 후려치는 푸른 빛줄기에

일순간 명멸하는 먼 풍경들이

동공 속 오래 잔상 지는 민박집 창가

빗속 오들오들 떨며 눈 반짝이는 불빛들

누군가를 애타게 기다리는 기억은 아닐까

또박또박 써 놓은 이름들이 저마다

항로를 짚어보며 닻줄 감아올리는 유리창

등대불빛이 꾹꾹 눌러 다리는 주름 보며

나는 고작 옥죄는 불면 한 겹씩 벗겨

미어터진 꿈의 옆구리를 꿰맨다



갈치 


정성희


                  


유독 갈치를 좋아하는 둘째 언니


"마늘 떼다 팔아 저녁 생일상엔 갈치구이 해 주마"

의성장에 가신 어머니 오시지 않고

하루해 꼴딱 마을을 통째 삼키고 자정 무렵,

전화선 타고 흘러온 비린내

언니 오빠 얼굴에 휘청휘청 경련이 인다

희붐한 새벽길을 헤엄치고

밀양까지 달려온 앰뷸런스

어머니 하얗게 굳어 계셨고

꽃상여 둥실둥실

갈치 찾아 바다로 떠났다


평소 갈치 거들떠보지 않는 둘째 언니

생일날 저녁이면

어머니 제사상에서 꺽꺽

갈치를 찾는다



남산과 막걸리



조숙




우리는 막걸리를 사서 남산으로 갔다. 저녁 무렵이라 중년 지난 남자 몇 운동복차림으로 올라왔다 내려갔다. 우리는 야외 토론장 옆 나무탁자에 앉았다. 순대와 술빵과 쑥절편 안주였다. 일찍 떠오르는 보름달 보며 잠시 김소월 <예전에 미처 몰랐어요>를 떠올렸다. <초혼>이 따라 나오고 <진달래꽃>이 피려는 걸 눈치 챘다. 나는 마음속 뚜껑을 급히 닫아두었다. 부연 안개가 소나무 사이로 피어오르고 옷깃은 축축해졌다. 저녁 무렵 달려들던 모기들도 잠잠해졌다. 줄어든 잔업이야기, 하청업체 이야기를 하면서 막걸리 통은 비어가고, 하얀 스티로폼 도시락에 당면 조각 붙은 나무젓가락이 놓여졌다. 나무뿌리가 드러난 흙길을 내려오며 아주 오래 전부터 살아왔던 이 집, 다시 내 것이 아니게 될 집을 갖고 싶었다.  



버덩집* 

 


조숙향


또 딸이냐, 이러다 집안 망한다, 할머니가 거친 숨 몰아쉬며 뒤란으로 달려가고 장독대 위에 놓여있던 신주단지가 마당에 떨어졌다. 단지 깨지는 소리가 초여름 햇살처럼 따갑게 흩어졌다. 사철나무 울타리 밑에서 모이 쪼던 닭들이 푸드덕거렸다. 갓난아기 울음소리에 묻힌 흐느낌이 안방 창호지 넘어 간간히 새어나왔다. 윗집 명자는 분홍색 원피스를 입고 단오구경 하러 떠나며 자꾸 힐끗힐끗 돌아다보았다. 나는 괜히 누워있는 엄마의 소매부리를 잡아당겼다. 가늘게 떨리는 엄마의 눈빛이 싸리비에 걸렸다. 어디선가 날아온 참새 떼들이 널브러진 낟알을 쪼아 먹던, 여섯 살의 버덩집 마당에서는,


 


*버덩집-어릴 때 마을 사람들이 부르던 고향집



꼬리뼈



최장락




짐승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꼬리뼈가 자라면서부터다. 진화된 꼬리뼈. 슬쩍 스쳐도 민감하게 작용하는 촉수다. 떨어져 나간 자리에 몰려 있는 말초신경들이 아무렇지도 않는 듯 낮게 숨어 있지만 손대면 이빨을 드러내며 으르렁거린다. 앞으로 향할 수 없는 꼬리가 말초신경으로 남은 은둔의 부위. 왕성한 나이가 되자 조금씩 융기하면서 성감대로 자라 바지 속에서 꿈틀거린다.




■최장락: 1999년 문학세계로 등단. 2009년 시집 <와이키키 브라더스>. 울산매일 경제부 기자



은갈치 열 마리



허영미




손가락 끝에서

은 갈치 열 마리가 파닥거린다


빛깔 고운 반짝이 옷을 입고 은빛 지느러미를 흔든다. 쳐다보니 수줍은 듯 눈길을 피해가는 놈도 있고, 말똥말똥 까만 눈을 뜨고 똑바로 뚫어져라 바라보는 놈도 있다. 억새밭에 바람이 불고 은 억새들이 노래를 부른다. 은 갈치 열 마리가 음률에 따라 춤을 춘다. 허공으로 몸을 솟구치더니 어떤 놈은 몸을 수평으로 뉘어 구불구불, 또 어떤 놈은 사선으로, 다른 놈은 수직상승하며 꼬리만 살랑살랑, 또 다른 놈은……


청명한 시월 오후, 현란한

은빛 축제의 장이 눈부시다




울산신항 남방파제


김재홍



1


아랫도리에서 불쑥 솟구치는 숫놈의 우악스런 힘의 폭력성과 꿈틀대는 근육의 잔인성과 어떤 지구적 파괴와 우주적 재앙에도 분연히 떨쳐 일어나 단 한 순간에 진압할 수 있을 것 같은, 델타 포스와 그린 베레 혹은 람보나 터미네이터 같은, 저 깊은 대양에서 밀려오는 숫놈과 숫놈의 본능이 근육과 혈관과 뼛속과 뇌수를 에돌아 야금야금 촘촘하게, 그러나 전광석화처럼 빠르게 솟아났다



2


육지로부터 3km 떨어진 평균 수심 25m의 바다에 길이 2,100m, 폭 18m의 울산신항 남방파제가 섬이 되어 떠있다. 5천 톤짜리 케이슨(caisson) 85개를 투하시켜 해저 점토층과 접합해 기반을 다졌다. FD(Floating Dock)선과 DCM(Deep Cement Mixing) 전용선을 비롯한 막대한 양의 토목 에너지가 수중에 투입됐다. ‘매미’와 같은 특급 태풍이 100년 동안 쉬지 않고 몰아쳐도 버틸 수 있는 강력한 방파 기술을 집약시켰다. 풍속과 조류, 수온, 염도 등을 복합 변수로 계산해 콘크리트의 내구성과 케이슨들의 접합도를 정교하게 설계했다.


그러니까 ‘토목은 절대 폼 잡지 않는다’ ‘화장발은 토목엔 먹히지 않는다’는 말은 명백한 사실이며, 보이지 않는 물속에 총공사비의 75%와 최신 기술력을 집중적으로 쏟아 부었다.



3


홍등과 백등 사이에 뱃길이 있다. 범월갑방파제와 남방파제 위에 비스듬히 기울여 세운 홍등과 백등. 빨라도 3개월은 순항해야 도달할 수 있는 수십만 톤 뱃길을 삐딱하게 환호하는 두 개의 등대.


길은 언제나 사이에 있고, 한번 터지면 100년이 지나도 닦아낼 수 없는 유조선과 해양 생태의 안녕과 국가경제의 동맥을 지켜야 하는 방제선과 순시선과 경비정은 날마다 삐딱하게 드나들지만, 홍동과 홍등 사이 백등과 백등 사이에도 길이 있음을 뱃놈이라면 누구나 안다.



4


동북아 액체 물류 중심항의 위용을 똑바로 보라고 등대 위에 전망대를 설치했다. 남방파제에는 여덟 개의 파라솔을 꽂을 수 있는 19개의 벤치와 남녀 화장실 2조와 소변 전용기 2대를 설치했다. 구명환, 구명조끼, 구명사다리를 갖춘 구명도구함도 8군데에 비치했다. 내항 약 1,500m 구간에는 테라스 형 설계로 강력한 파도가 월경한다 해도 물 한 방울 묻지 않도록 피난처를 만들었다.


민간인 출입을 엄격히 통제하지 않았다면, 국토해양부 울산지방해양항만청이 개방에 필요한 감시원 인건비만 조달할 수 있다면 휴머니즘의 극치가 아닐 수 없겠다.



5


5만 톤 액체 화물선 2척이 동시에 접안할 수 있는 선석은 내항에 시설했고, 외항에는 테트라포드로 성난 파도의 사지를 찢을 수 있게 했다.


나체의 바다 앞에서 밤마다 시동을 끄고 간첩선처럼 음습하게 침투한 낚시꾼들이 내버린 소주병과 초장 껍질과 낚시 바늘과 구겨진 신발을 네 개의 벌거벗은 다리는 매일같이 찢고 있다.



6


모든 진리는 선하고 쭈글쭈글하게 접힌 바다도 선하다. 테트라포드를 향하다 찢어지는 쭈글쭈글한 운동의 불규칙성도 선하고, 찢어진 맨살의 접힌 속살 또한 선하다. 사지에 닿아 찢어진 네 갈래의 접힌 속살이 모여 바다가 된다. 속살을 펼치는 힘으로 바다는 다시 파도를 만들고 거대한 쇳덩이를 띄운다. 그러므로 모든 진리는 선하고 쭈글쭈글하게 접힌 바다도 선하다.



7


바다 한가운데 일직선으로 뻗은 남방파제는 꿈틀대는 맨살을 찢고 붙이면서 최소한 100년은 버틸 것이다. 그동안 방파제 외항에서 난바다로 3km 이상 떨어져 있는 SK에너지 부이와 S-Oil 부이에는 덜렁거리는 파이프를 들고 수십만 톤 유조선이 들어왔다 나갈 것이다.


숫놈의 바다에 암놈의 바다가 있다. 밀려오는 숫놈과 밀려가는 암놈 사이에, 접힌 숫놈과 펼쳐진 암놈 사이에 방파제가 있다. 자웅동체의 방파제 위에 지금 막 깨어나는 숫놈과 숫놈의 비린 맨살이 서 있다. 수십만 톤 꿈틀대는 맨살의 힘으로 최소한 100년은 버틸 것이다.



8


비린 것들이 마구 날아다녔다. 바람과 파도와 함께 꿈틀대는 시커먼 물기둥 같은 것들이 폭죽처럼 솟구쳐 올랐다. 100만 톤의 바지선을 띄워 5만 명 관객을 올려놓고 남방파제 방파 기술의 절정을, 식도를 타고 내려가는 마지막 한 모금 침을 뱉어내고 싶었다.


그리하여 어떤 파괴와 재앙에도 의연히 떨쳐 일어나 단 한 순간 제압할 수 있는 거대한 숫놈과 암놈의 비린 나체를 보고 싶었다.

차 타라고 방송하는 놈, 아닌가?



무지개폰(동화)

김병수


청소를 끝내고 민훈이는 서둘러 가방을 둘러 맸습니다. 오늘은 토요일이라 학원도 안 가는 날입니다. 그런데 다른 아이들은 집에 갈 생각도 하지 않고 교실 구석에 몰려 서서 웅성거리고 있었습니다. 아마 원우가 새로 샀다는 무지개폰을 구경하느라고 집에 가는 것도 잊은 모양입니다.

무지개폰은 최고 인기 그룹이 광고하는 최신 핸드폰입니다. 회사에서 지은 이름은 따로 있지만, 폰을 켜면 무지개빛 불이 들어와서 아이들 사이에선 ‘무지개폰’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새로 나온 데다 노트북을 따로 사지 않아도 될 만큼 기능이 많아서, 아이들이 제일 갖고 싶어하는 핸드폰입니다.

민훈이도 아이들 틈에 끼어서 구경할까 하다가 그만 두기로 했습니다. 폰은 보고 싶지만 원우 자식의 잘난 체하는 표정을 또 보기는 정말 싫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민훈이는 눈 딱 감고 교실 문을 열고 복도로 나왔습니다. 교실 안에서 웅성거리는 소리는 복도까지 또렷이 들렸습니다. 민훈이는 몇 번이나 교실을 돌아보다가 걸어 나옵니다.

“야, 김민훈!”

교문 앞까지 걸어왔을 때 뒤에서 누군가가 민훈이를 불렀습니다. 돌아보니 같은 반 기영이입니다. 아마 기영이도 무지개폰을 구경하다 나온 모양이었습니다.

“왜 무지개폰 구경도 안 하고 먼저 나왔어? 그 폰 정말 좋던데, 신기하기도 하고.”

기영이는 민훈이 옆으로 와서 함께 걷습니다.

“넌 봤어? 만져도 보고? 정말 텔레비전에서처럼 무지개색 불이 들어와?”

민훈이는 기영이를 보며 물었습니다.

“야야, 만지긴 뭘 만지냐? 그 자식이 애들한테 막 만지게 하겠어? 눈으로 보기만 하라고, 애들은 가까이 오지도 못하게 했어. 수민이가 그거 살짝 건드렸는데 지문 묻었다고 얼마나 성질을 부리던지…….”

기영이는 손사래를 치며 얼굴을 찡그렸습니다.

“그래서 구경도 제대로 못했어? 무지개불도 못 봤겠구나.”

“아냐, 지가 손에 들고 다 보여 주던데! 광고에 나오는 것처럼 그런 기능 다 있더라야. 얼마나 부럽던지, 무지개불도 진짜 예쁘고…….”

기영이는 이번에는 눈을 가늘게 뜨고 말을 합니다. 아직까지도 무지개폰이 눈앞에 있는 것처럼.

민훈이는 그런 기영이를 보자 그 폰이 더 갖고 싶어졌습니다. 한 번 보기만 해도 저런데 정말 갖게 되면 얼마나 좋을까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두근거렸습니다.

“야, 박기영! 우리 무지개폰 구경하러 갈까? 요앞 핸드폰 가게 있잖아?”

민훈이는 기영이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습니다.

민훈이와 기영이는 집이 같은 방향에 있는데, 가는 길에 핸드폰 가게가 많이 있습니다. 둘은 그 중 가장 큰 가게 앞에 섰습니다. 여러 가지 핸드폰이 전시된 유리창에는 무지개폰을 들고 있는 가수의 사진이 붙어 있었습니다. 유명한 연예인이 들고 있으니까 핸드폰이 더 멋있게 느껴졌습니다. 둘은 유리 안에 전시된 무지개폰을 보고 섰습니다. 한참이나 구경을 한 것 같은데 아무리 보아도 너무 예쁘기만 합니다.

“참, 있잖아. 원우 그 자식 무지개폰 어떻게 샀는지 알아?”

기영이는 갑자기 생각이 난 듯 민훈이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몰라. 어떻게 샀는데?‘

민훈이는 눈을 반짝이며 물었습니다.

“아까 애들이 그러는데, 그 자식 원래 폰이 있었잖아? 그걸 일부러 고장냈대. 아무도 몰래 물에다 빠뜨려서 고장을 내고는 새 폰 사 달라고 우겼대. 그래서 이번에 무지개폰을 산 거래.”

“에이, 그런다고 부모님이 바꿔 주시겠어? 울 엄마 같으면 폰을 아예 없애라고 할 걸?”

민훈이는 집에 계신 엄마를 떠올리며 말했습니다.

민훈이에게도 핸드폰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작년에 아빠가 핸드폰을 바꾸시면서 쓰시던 것을 민훈이에게 주셨습니다. 그래서 민훈이의 핸드폰은 다른 아이들 것보다 많이 크고 낡았습니다. 그래서 민훈이는 친구들 앞에서는 핸드폰을 잘 꺼내놓지 않았습니다. 아이들이 민훈이 폰을 보고 놀리기 때문이었습니다.

민훈이도 부모님께 핸드폰을 바꿔 달라고 졸라 보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말씀을 드려봐야 부모님의 핀잔을 듣기만 했습니다. 핸드폰이 전화하고 문자만 잘 되면 되지 뭐가 더 필요하냐는 것이었습니다.

민훈이는 집에 돌아와서도 아까 본 무지개폰이 잊혀 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가방과 점퍼를 아무렇게나 벗어놓고 소파에 털썩 앉았습니다.

“옷이랑 가방을 그렇게 던져 놓으면 누가 치우라고 그래? 제 자리에 갖다 놔야지.”

주방에서 설거지하는 소리를 분명히 들었는데, 하여튼 엄마는 못 속입니다. 어떻게 알았는지 엄마가 야단을 치십니다.

어쩔 수 없이 민훈이는 소파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가방과 점퍼를 제자리에 치웁니다. 하지만 표정만은 여전히 심통이 났습니다.

“우리 반에 원우 있잖아…….”

설거지를 끝내고 나오신 엄마를 향해 민훈이는 말을 꺼냈습니다.

“너랑 사이 나쁘다는 그 원우 말이야? 원우가 왜, 또 싸웠어?”

엄마는 걱정이 되시는 듯 놀라서 물으셨습니다.

“아니, 걔네 엄마가 어제 새 폰 사 줬대, 최신 폰으로. 오늘 가지고 와서 얼마나 자랑을 하는지, 만지지도 못 하게 하고. 재수 없어!”

“그것 때문에 그래? 이젠 6학년 되니까 휴대폰 새로 사 주신 모양이지. 너도 폰 있잖아.”

엄마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말씀하셨습니다.

민훈이는 입을 달싹거리다가 말았습니다. 어떻게 말해도 부모님이 무지개폰을 사 주실 리 없다는 것을 민훈이가 제일 잘 알기 때문입니다. 대신 마른 침을 삼키며 탁자 위에 놓인 낡은 휴대폰을 내려다보았습니다.

“오늘 숙제는 없니? 알림장 한 번 가지고 와 봐.”

“숙제 없어. 일기만 하나 쓰면 돼.”

민훈이는 알림장을 내밀며 말했습니다.

“아, 배 아파! 갑자기 왜 배가 아프지? 엄마, 나 화장실!”

엄마가 알림장을 보고 계시는 동안 민훈이는 자기 핸드폰을 집어 호주머니에 넣었습니다. 그리고는 엄마 쪽을 살피며 말했습니다.

엄마 눈을 피해 화장실에 들어와 세면대에 물까지 받았지만 민훈이는 자꾸만 망설여집니다. 이제 핸드폰을 물에 빠뜨리기만 하면 엄마, 아빠도 별 수 없이 새 핸드폰을 사 주실 겁니다. 운이 좋으면 민훈이도 무지개폰을 갖게 될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고장도 안 난 핸드폰을 일부러 고장내는 건 아무래도 마음에 걸렸습니다.

민훈이는 우선 핸드폰을 껐습니다. 그리고 오른손에 들고 천천히 세면대 위로 팔을 옮깁니다. 그리고 민훈이는 눈을 질끈 감았습니다. 핸드폰 빠지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습니다. 물 소리에 놀라 민훈이는 핸드폰을 물 속에서 얼른 꺼냈습니다.

“훈아, 뭐해? 배 많이 아파?”

그 때 갑자기 엄마가 화장실 문을 두드리며 말씀하셨습니다.

“아, 아, 아니! 이제 괜찮아.”

아직 작동이 되는지 궁금했지만 한 번 켜보지도 못하고 민훈이는 화장실을 나왔습니다.

“그런데…, 엄마, 폰이… 이렇게 됐어…. 세면대에 얹어놓고 볼일 봤는데…, 갑자기 빠졌어. …아무도 안 건드렸는데…….”

민훈이는 물이 뚝뚝 떨어지는 핸드폰을 들고 나오며 말했습니다. 그리고는 엄마의 표정을 살폈습니다.

“어쩌다 그랬어? 조심 좀 하지. 그리고 핸드폰은 화장실에 뭐하러 들고 들어갔어?”

야단을 치시긴 했지만, 생각보다 엄마 목소리가 그렇게 많이 화가 나신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엄마는 핸드폰을 비닐팩에 싸서 손가방에 넣었습니다.

“안 그래도 지금 장 좀 보고 오려고 했는데, 시장 근처에 AS하는 곳이 있으니까 엄마가 맡기고 올게. 너무 걱정하지 말고 있어. 고쳐질 거야.”

엄마가 나가시고 민훈이는 텔레비전을 켰습니다. 하지만 소파에 누워 텔레비전을 보면서도 무지개폰 생각뿐이었습니다. 엄마는 고친다고 하시지만, 친구들 중에 물에 빠진 폰을 고쳐서 쓰는 애는 하나도 없습니다. 물에 빠뜨린 애들은 모두 핸드폰을 바꿨으니까요.

“애가 왜 저렇게 오래 자지? 아까 배가 아프다더니 많이 아픈 거 아냐?”

엄마가 손으로 민훈이의 이마를 짚어 보십니다.

“놔 둬. 핸드폰 고장 나서 속상할 텐데, 잠이나 자게.”

아마 아까 텔레비전을 보면서 누워 있다가 깜빡 잠이 든 모양입니다. 그 동안에 엄마는 시장에 다녀오시고, 아빠도 저녁을 드시러 오신 것 같았습니다. 근처에서 과일 가게를 하시는 아빠는 저녁을 집에 와서 드시고 다시 가게로 가시는 일이 많습니다. 민훈이는 잠에서 깼지만 그냥 좀 더 누워있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말야…, 이래서 큰일이야. 오늘도 얼마 못 팔았어. 이러다가 가겟세 내는 것도 힘들겠는데.”

아빠는 한숨을 푹 내쉬었습니다.

“그러게 말예요. 전 같으면 과일들도 많이 사 먹을 계절인데…….”

“요즘은 먹을거리가 많아서 전처럼 과일을 많이 사 먹지는 않는 것 같애. 며칠 전에 들여놓은 귤이 자꾸 썩어서 아까도 몇 개 버렸는데, 얼마나 아깝던지.”

아빠는 또 한숨을 푹 쉬고 나서 말씀을 하셨습니다.

민훈이는 며칠 전에도 썩은 귤을 버렸다고 하시면서 아까워하시던 아빠의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그런데 그 폰은 영영 고칠 수가 없대?”

“아니에요. 물에 빠지자마자 바로 꺼냈고, 물에 빠지고 나서 작동을 안 시켜서 간단하게 고칠 수 있다던데요. 수리비도 얼마 안 든다고 하고요. 내일 찾으러 오래요.”

“그래도 다행이네. 고칠 수 있어서.”

“나는요, 이번에 우리 훈이 핸드폰 하나 바꿔주고 싶은데, 자기 생각은 어때요?”

갑작스런 엄마의 말에 민훈이는 깜짝 놀랐습니다. 시장에 가면 몇백 원도 아끼고, 택시비가 아까워 꽤 먼 거리도 걸어서 다니는 엄마입니다. 그런 엄마가 고칠 수 있는 걸 두고 새 폰을 사자고 하는 것이 민훈이 생각에는 참 의외였습니다.

“하긴 요즘 좋은 것들이 많던데, 훈이 건 너무 낡았지. 이참에 하나 바꿔줄까?”

이번에는 아빠 목소리였습니다.

“그건 그렇고 당신, 허리 아픈 건 병원에 가 봤어? 많이 아픈 것 같던데?”

“아니, 오늘은 견딜 만해서 내일 가 보려구요.”

“매일 그렇게 미루다가 못 가. 돈 아깝다고 병원 안 가다가 큰 병이라도 되면 어쩌려고?”

며칠 전에 엄마는 짐을 들다가 허리를 다치셨습니다. 아빠는 병원에 가 보라고 재촉하시지만 엄마는 괜찮다고 하십니다. 하지만 민훈이가 보기에도 엄마 허리가 괜찮지는 않아 보였습니다. 아까 시장에 가실 때도 허리를 한 손으로 받치고 집을 나가시는 것을 민훈이도 보았기 때문입니다.

“내일은 꼭 가 볼게요. 그런데 이번에 가면 검사도 여러 가지 해야 할 거고, 그렇게 되면 병원비가 만만치 않을텐데 걱정이에요.”

엄마도 아빠처럼 한숨을 내쉬셨습니다.

민훈이는 조금 더 누워 있다가 저녁상을 다 차린 후에야 일어났습니다. 학교 갔다 와서 아무 것도 먹은 게 없어서 그런지 매일 먹는 된장찌개도 김치도 참 맛있었습니다. 하지만 상을 차리시면서 한 손을 내내 허리에 대고 계시는 엄마를 보면서 속이 상했습니다.

“참, 훈아! 아까 핸드폰 맡겼는데…….”

엄마가 민훈이를 보면서 말씀을 하셨습니다.

“와! 이 된장찌개 진-짜 맛있다! 엄마, 오늘 여기다 뭐 넣었어?”

민훈이는 말씀하시는 엄마를 보면서 큰소리로 말했습니다.

“하여튼 우리 엄마 솜씨는 알아줘야 한다니까!”

민훈이는 숟가락을 휘저어가며 또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 새 핸드폰 필요 없어. 고칠 수 있으면 고쳐서 쓸 거야. 아빠 가게도 어렵다면서? 난 내 폰 쓸테니까, 엄마 병원이나 가봐. 엄마 허리가 아프니까 자꾸 나한테 심부름을 시키잖아. 귀찮아 죽겠어, 아주!”

그렇게 말하는 동안에도 민훈이 머릿속에는 무지개폰이 켜졌다 꺼졌다 하며 무지개 불빛이 반짝거리긴 했습니다. 하지만 민훈이는 정말 그렇게 생각했어요. 엄마가 병원도 안 가시고 그 돈으로 새 핸드폰을 사면 너무 기분이 찜찜할 것 같았거든요.

“훈아, 여보! 이리 나와 봐!”

민훈이가 일기를 쓰고 있는데 아까 나가셨던 아빠가 가게를 마치고 돌아오셨습니다.

민훈이는 거실로 나갔습니다. 그리고는 깜짝 놀랐습니다. 거실 탁자 위에 새 핸드폰 상자가 놓여 있었습니다.

“좋은 거 아니야. 돈 하나도 안 내고 가지고 왔어. 공짜폰인데 예쁘지?”

아빠는 뒷머리를 긁적거리면서 말씀하셨습니다.

비록 무지개폰은 아니지만 민훈이는 상관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핸드폰 상자를 열어 보았습니다. 친구들도 많이 가지고 있는 것이었지만, 민훈이는 이 폰이 무지개폰보다 열 배는 더 예쁘게 느껴졌습니다.



노란 손수건

 


박종관 




한국의 가을 하늘은 중앙아시아의 드넓은 초원을 옮겨 놓은 듯 깊고 푸르다. 바쁘게 살아가는 이곳 사람들을 보면 초원의 하늘을 유유히 나는 독수리가 더욱 그리워진다. 주말부터 수백만 명이 이동하는 피서 철이다. 갈 곳 없이 외로운 처지에 초원의 축제가 자꾸 생각난다. 자유롭고 열정적이면서 타인을 배려하는 여유가 흘러넘치는 아름다운 영혼의 잔치였다. 칠흑같이 어두워서 더욱 더 찬란한 보석으로 아롱아롱 빛나는 별들이 연인들의 눈썹 끝마다 걸리고 어제와도 다르고 내일의 잔치에서도 결코 들을 수 없는 아코디언의 선율이 한밤의 유성우처럼 지평선 저 너머로 끝없이 흘러간다. 매일의 축제가 곧장 새로운 신화로 쌓여가는 초원의 나라다.

식당 바깥은 불가마 속이다. 갈증이 심해 두 번이나 냉커피를 타 마셨다. 손님이 눈에 띄게 줄었다. 주인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가 없다. 몸이 고되어야 정신도 긴장이 되는데 멍하니 앉아 있는 시간이 늘수록 잡념만 커진다. 흙먼지가 구름처럼 일어서는 지평선으로 한 개 점이 되어 내달리던 종마가 너무나 그립다. 흰 구름을 등에 지고 푸른 융단처럼 푹신하게 깔린 초원을 유유자적하는 양 떼들도 보고 싶다. 

계산대에 앉아 있는 주인여자와 시선이 마주친다. 환갑을 지낸 여자로서는 너무 젊어 보인다. 벌써 두 시간째 커다란 의자에 꼿꼿이 앉아 있다. 자세가 바로잡힌 몸도 젊음과 건강의 상징이다. 경아는 여자가 눕는 걸 한 번도 보지 못했다. 물리적인 나이만으로는 할머니뻘이다. 불곰 가죽으로 치장한 의자에 안기듯 앉아 하늘을 선회하는 독수리를 좇던 할머니의 모습과는 너무나 대조적이다. 일상사에서도 늘 아름다움을 챙기는 주인여자는 스트레스 받는 걸 극도로 싫어한다. 종업원이 게으름을 피우는 것도 건강과 미용에 치명적인 스트레스의 요인이 된다고 믿기에 조금이라도 눈에 거슬리면 가차 없이 해고해 버린다. 

경아가 테이블을 닦아 나아간다. 벌써 세 번째다. 손님이 다녀가지 않아 닦고 말고 할 것도 없지만 가끔씩 가볍게 찌푸려지는 주인의 눈썹 주위를 보고 앉아 있는 것보다는 훨씬 마음이 편하다. 한낮의 찌는 더위에 누가 숯불 불고기를 먹으러 올 것인가. 유월 초까지만 해도 백화점에서 만난 주부들이 떼로 몰려와 진을 치고 앉아 놀던 곳이 텅 비었다. 저녁 시간대의 예약도 한 건 없는 모양이다. 식당의 매상을 좌우하는 것은 뭐니 해도 회사단위의 큰 회식자리다. 수십 명씩 몰려와 일이백을 예사로 쓰고 가니 종업원도 신이 난다. 주인여자는 지금 예약전화를 고대하고 있을 거였다. 한 시간도 안 되어 테이블 닦는 일이 끝난다. 또 할 일이 없다. 홀 구석에 앉아 텔레비전을 볼까 하다가 이참에 점수나 두둑이 따두자는 생각으로 주방으로 들어간다. 주방장과 보조 요리사 셋은 대형냉장고 뒤쪽에 마련된 휴게실에서 소리 안 나게 포커게임을 즐긴다. 서빙을 하고 주방일도 돕는 여자 둘은 재방송되는 연속극에 빠져 있다. 말이 휴게실이지 중고 텔레비전 한 대가 낡은 받침대 위에 동그마니 놓인 온돌공간이다. 창고가 넘치면 식자재들이 박스째로 쌓이는 곳이지만 컨디션이 안 좋을 때는 잠시라도 몸을 눕힐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어서 그렇게 부른다. 음식을 내는 홀 쪽의 벽에 걸린 시계가 정적을 깨뜨린다. 일 분도 안 되어 초침 소리가 다시 정적에 묻힌다. 분명 움직이면서 소리를 토해내는 데도 들리지 않는다. 소리마저 뙤약볕에 녹아버린 듯하다. 경아가 진열대 칸에 크기 별로 박혀 있는 수백 개의 접시들을 바라보다가 결심한 듯 손을 놀리기 시작한다. 대형 다라에 접시들을 한가득 담아와 씻기 시작한다. 연속극을 보는 아줌마들이 깨끗이 씻어 놓은 것들이어서 헹굼 질만 하게 되니 안 해도 되는 일을 일부러 하는 체 한다는 오해를 받을 짓이다. 그러나 일을 탐하는 경아를 이태 째 보아온 식당 식구들이어서 그런 오해는 하지 않는다. 아줌마들은 백인여성에 대해 상당히 부정적인 편견을 가지고 있다. 가사노동에서는 빵점이고 자나 깨나 더 나은 섹스만을 욕심내는 바람둥이쯤으로 알고 있다. 아메리카가 아니고 러시아에서 왔다고 해도 믿지 못하겠다는 눈치다. 오히려 러시아에도 백인이 사느냐고 엉뚱한 질문을 한다. 러시아는 소련이고 소련은 공산주의의 두목 국가이니 사람들도 모두 붉은 색일 것이 아니냐고 지레 경계한다. 참으로 어이가 없다. 하긴 자신도 십여 년 전에는 초원과 하늘만이 이 세상의 전부라고 알고 있지 않았던가. 그러나 지금은 너무나 큰 변화를 겪어서 그 때 불렸던 이름마저 생소하게 느껴진다. 뽀드득뽀드득 경쾌한 소리로 씻겨 지는 접시들의 촉감이 너무 좋다. 경아가 청바지 주머니에서 종이 한 장을 내어 알루미늄 새시 틈에 끼워 넣는다. 깨알같이 작은 글자들로 서툴게 쓴 춘향가 속의 그네 뛰는 장면이다. 입에 선 가락이 흥얼흥얼 흘러나온다.  

“이때는 춘삼월이라 일렀으되, 오월단오일이었다. 일 년 가운데 제일 좋은 시절이라. 이때에 월매 딸 춘향이도 또한 시서음률에 능통하니 천중절을 모를소냐. 그네를 뛰려고 향단이를 앞세우고 내려올 적에 난초 같이 고운 머리 두 귀를 눌러 곱게 땋아 금봉비녀를 바로 꽂고 비단치마 두른 허리 다 피지 아니한 버들들이 힘없이 드리운 듯 아름답고 고운 태도로 아장거려 흐늘거리며 가만가만 다닐 적에 장림 속으로 들어가니 녹음방초 우거져 금잔디 좌르르 깔린 곳에 황금 같은 꾀꼬리는 쌍쌍이 오고 갈 제 백 자 길이로 높이 매고 그네를 뛰려고 할 제 수화유문 초문장옷 남방사 홍단치마 훨훨 벗어 걸어 두고 자주영초 수당혜를 썩썩 벗어 던져두고 백장사 진솔 속곳 턱밑에 훨씬 추고 연숙마 그넷줄을 섬섬옥수 넌짓 들어 양수에 갈라 잡고 백릉버선 두 발길로 살짝 올라 발구를 제 세류 같은 고운 몸이 단정히 노니는데 뒤 단장 옥비녀 은죽절과 앞 치례 볼 것 같으면 밀화장도 옥장도며 광원사 겹저고리 제색 고름의 모양이 난다. 향단아, 밀어라. 한 번 힘을 주며 두 번 굴러 힘을 주니 발밑의 가는 티끌 바람 따라 펄펄, 앞뒤 점점 멀어가니 머리 위의 나뭇잎은 몸을 따라 흔들흔들 오고갈 제 살펴보니 녹음속의 붉은 치맛자락이 바람결에 내비치니 구만장천 흰 구름 속에 번갯불이 비치는 듯 문득 보면 앞에 있더니 문득 다시 뒤에 있네. 앞에 얼른 하는 양은 가벼운 저 제비가 도화일점 떨어질 제 차려하고 쫒아가듯 뒤로 번듯 하는 양은 광풍에 놀란 나비 짝을 잃고 날아가다 돌치는 듯 무산선녀 구름 타고 양대에 내리는 듯 나뭇잎도 물어 보고 꽃도 질끈 꺾어 머리 위에다 실근실근 하며 이 애 향단아! 그네 바람이 독해서 정신이 어질어질하다. 그네를 붙들어라. 붙들려고 무수히 진퇴하며 한창 이렇게 노닐 적에 시냇가 반석 위에 옥비녀 떨어져 쟁그랑 소리 나니.”

부지런히 손을 놀리고 있으나 활짝 열린 눈에서는 금방이라도 새파란 눈물이 뚝뚝 떨어질 기세다. 기구한 운명으로 태어나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내는 춘향이의 순수하고 아름다운 시절을 되새겨 보니 자신의 그 시절도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여고 2학년은 뭔가가 늘 그리운 나이다. 쉬는 시간에도 가만히 앉아 있지를 못한다. 그 해의 가을에는 유독 더 그러했다. 창밖을 보면 운동장 가장자리에서 노랗게 물들어 가는 은행잎들이 눈에 쏙쏙 들어왔다. 그 때마다 눈물이 쏟아지려 했다. 초원을 떠나 도시로 온 지 이태 째였다. 연방을 이루는 수백 개의 소수민족 중 하나였던 부족은 돈을 좇아 뿔뿔이 흩어졌다. 공산주의 이념도 어쩌지 못했던 수백 년 전통이 돈 앞에서는 삼십 년도 견뎌내지 못하고 무너져 버렸다. 모두 도시로 짐을 싣고 떠났다. 소녀도 가족을 따라 도시로 들어왔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눈이 가던 은행나무였으나 그날은 유독 더 아름답게 보였다. 모든 것이 다 새로워지는 것 같았다. 도시에도 이런 아름다움이 숨겨져 있었구나. 낯익은 교정마저 새로운 세계로 설레게 했다. 친구들은 평소와 다름없이 장난을 치고 수다를 떤다. 그들의 웃음 가득한 얼굴을 보고 있자니 살아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 감사하다. 은행잎들이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일제히 흔들린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잎이었으나 이상하게도 하나의 이파리로 느껴진다. 다음 시간은 문학수업이다. 소녀는 친구들의 웃음소리를 뒤로 한 채 교실을 달려 나왔다. 등굣길의 문방구점에서 얼핏 본 노란 손수건이 생각났다. 그걸 사서 문학교사에게 드려야 한다는 생각이 참아내기 어려운 목마름으로 솟아났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평생 후회할지도 모르는 엄청난 일이 일어날 것만 같았다. 문방구는 교문 바로 앞에 있다. 빨리 갔다 오면 수업시간에 늦지 않을 것이다.

소녀가 계단을 뛰어내린다. 은행나무 아래를 지나쳐 교문 밖으로 달려 나아간다. 한길과 한참 떨어진 좁은 도로는 한적하다. 상쾌한 바람에 머리가 흩날린다. 세일러복 옷깃 사이로 바람이 스며들어 답답한 가슴을 시원하게 어루만진다. 몇 개의 은행잎이 실내화 코를 살짝 넘어 굴러 간다. 문방구점을 십여 미터쯤 지나쳐 검은 색의 승용차 한 대가 서 있다. 서둘러 문방구점으로 들어가 손수건을 집어 들고 돈을 치렀다. 손수건을 건네는 순간의 자기 모습과 그이의 얼굴이 떠올라 가슴이 방망이질을 한다. 이제 곧장 뛰어 가면 그이와 동시에 교실로 들어설 것이다. 그러면 눈이 마주칠 것이고 그이는 크고 맑은 눈으로 왜? 하는 물음을 던져올 것이다. 그러면 그냥 미소만 지으며 들어설 것이다. 자리에 앉으면 다시 한 번 궁금해 하는 시선이 올 것이지만 일부러 모른 체해서 애를 태울 것이다. 소녀는 짧은 시간 동안 많은 생각을 한다. 그이를 놓고 벌이는 공상은 언제든 솜사탕처럼 달콤하다. 문학교사는 교실에 들어서면 꼭 소녀를 눈으로 찾는다. 조심스러움이 잔뜩 묻어나는 눈길이다. 무심함으로 살짝 가려진 시선을 역시 그런 표정으로 받아들이는 순간의 짜릿한 환희는 하늘의 축복이다. 저쪽 끝부터 이쪽까지 천천히 이동하다가 조금씩 가까워지는 시선의 소리도 들을 수 있다. 가까워질수록 따듯해지는 몸의 감각도 남 몰래 즐길 수 있는 달콤한 비밀이다.

문방구점을 나오니 아까의 차가 앞을 막아선다. 무슨 급한 용무라도 있는 모양이라고 생각하면서 소녀는 차 뒤로 걸음을 옮긴다. 직각으로 굽어진 도로의 끝이 보인다. 아무도 없다. 고목이 다 되어 가는 자작나무들이 길을 따라 늙은 참전용사들의 열병식처럼 근엄하면서도 맥 빠진 모습을 도열해 있다. 참 오랜만에 보는 시원스런 전망이다. 복닥판으로 변하는 등하교 시간대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차 때문에 적어도 일 분은 허비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짜증이 인다. 잘못하면 그이의 미소와 눈빛을 마주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마음이 급해진다. 내려올 때보다 더 빨리 달려야 한다. 소녀가 손수건을 꼭 쥐고 발을 성큼 내디딘다. 이상하다. 몸이 뭔가에 꼭 붙잡혀 있다. 뭘까? 지금 내가 꿈을 꾸나? 혹시 그이가 아닐까? 내가 내려오는 것을 지켜보고는 골려주려고 숨어 있다가 뒤에서 잡고 있는 것이 아닐까. 소녀는 궁금증을 억제하면서 약간은 설레는 마음으로 뒤를 돌아다본다. 고개가 돌아가지 않는다. 대신 방금 전보다 훨씬 완강해진 힘이 목덜미를 내리누른다. 이건 또 뭔가. 그이가 지금 나를 품에 안고 있나? 얼굴과 목덜미로 열기가 솟는다. 모른 체하고 확 돌아서서 안아 버릴까. 아니면 키스라도 할까. 키스를 생각하니 온몸에 전기가 흐르는 것 같다. 소녀가 좀 더 세찬 몸짓으로 몸을 돌리며 팔을 벌린다. 그러나 마음뿐이다. 그녀의 몸은 더욱 더 완강한 힘에 짓눌린다. 그제야 소녀는 달콤한 환상에서 깨어나 소리를 지른다. 그러나 마음뿐이다. 오히려 입과 코로 축축한 액체가 느껴진다. 독한 약품냄새가 기도를 가득 채운다. 숨이 콱 막힌다. 죽을힘을 다해 용을 쓴다. 허사다. 설상가상으로 몸이 붕 떠오른다. 누군가가 자신을 번쩍 안아 옮긴다. 어지럽다. 현기증이 일면서 까마득한 어둠 속으로 빠져 든다. 소녀가 한기를 느끼며 눈을 뜬다. 커다란 침대거울이 눈에 들어온다. 알몸으로 누운 자신의 몸이 보인다. 가랑이를 벌린 볼썽사나운 모습이다. 옷이 없다. 손발도 묶여 있어 몸을 뒤척일 수도 없다. 발가벗은 몸으로 누어 지내다가 잠이 든다. 잠이 깰 때마다 몸이 낯설어진다. 누군가가 함부로 다루었다는 걸 느낄 수 있다. 시간을 가늠할 수조차 없다. 몸의 느낌으로 많은 시간이 흘렀을 것이라고 짐작해 볼 뿐이다. 은행잎과 노란 손수건이 어른거린다. 말을 걸어오는 이도 없다. 적막 속에서 심장 뛰는 소리만 들린다. 악을 쓰고 욕을 하고 미친 척 노래를 불러도 적막은 요지부동이다. 잠들지 않으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깨어보면 곯아떨어지고 난 후다. 몸의 감각으로 누군가가 또 다녀갔다는 걸 알 수 있다. 먹은 것이 없는데도 배도 고프지 않다. 주사바늘의 흔적만 팔목 안쪽에 늘어난다. 아랫도리에서도 더 이상 아무런 감각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러던 어느 날 눈을 떠 보니 모든 게 다 변했다. 쇠창살이 가득 박힌 창이 눈에 든다. 침대와 소파도 있다. 텔레비전도 보이고 옷도 입혀진 상태다. 동거인도 있다. 화장실 출입도 자유롭다. 그러나 밖으로 나갈 수는 없다. 동거인은 멧돼지처럼 생긴 저능아다. 밤낮 없이 달려들어 그 짓만 한다. 거부하면 마구 매질을 한다. 무섭다. 짐승이 따로 없다. 여름 한 철이 지루하게 지나간다. 낙엽이 진다. 은행잎도 노랗게 물들어 유혹한다. 동거인은 잠시도 눈을 팔지 않는다. 두 번이나 자살을 기도했다가 발각되어 사흘씩 묶여 지내며 모진 매를 맞았다. 여자는 자신이 섹스도구로 팔렸음을 깨닫는다. 겨울옷이 지급되더니 멧돼지가 나타나지 않는다. 싫증이 난 모양이다. 다행이다. 푸짐한 저녁만찬이 나온다. 불안해서 아무 것도 먹을 수가 없다. 낯선 남녀가 나타난다. 먼 길을 가야 하니 살고 싶으면 먹으라고 윽박지른다. 고기를 조금 썰어 입에 넣었다. 너무 맛있다. 마음과 달리 손이 부지런히 고기를 입으로 나른다. 포도주도 한 잔 따라 준다. 소녀는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훌쩍 마셔버린다. 그리고 또 곯아 떨어졌다. 깨어 보니 캄캄한 창고 같은 곳에 누워 있다. 자신 말고도 여러 명의 여자들이 희미한 윤곽으로 눈에 들어온다. 모두 다 눈을 감은 채 죽은 듯 누워 있다. 시간의 흐름을 알 수 없다. 끼니로 주어지는 빵과 우유를 받고서야 한나절이 지났음을 알게 된다. 사흘 쯤 지나 배가 멈추어 서는 것 같다. 일렁이는 파도와 간간이 들리는 갈매기들의 울음소리로 이국의 항구에 정박 중임을 짐작한다. 한 여자가 미친 듯 날뛴다. 눈이 허옇게 뒤집혀 악을 쓴다. 저주의 욕설을 퍼부으면서 제 몸을 마구 자해한다. 낯선 사내들이 들이닥쳐 번쩍 들고 나아간다. 그리고는 돌아오지 않는다. 늦은 저녁식사가 들어온다. 잠이 쏟아진다. 몽롱해지는 의식 속에서 다시는 깨어나지 않기를 바라면서 정신을 잃었다. 깨어보니 차를 타고 있다. 무서운 속도로 질주하는 차 속에서 전혀 새로운 인종을 만났다. 한국 땅의 새 주인이다. 어떻게 해서 자신의 삶이 이토록 무자비하게 으깨지는지 그저 꿈을 꾸고 있는 것만 같다. 악몽이 깨면 곧장 여고 2학년의 그날로 돌아갈 것만 같다. 그러나 악몽은 엄연한 현실이었다. 지옥 같은 생활 속에서 한 해의 세월이 흘러갔다. 눈물도 나오지 않는다. 주인은 네가 우리 집에서는 제일 비싼 백마라고 추켜세운다. 백마를 타고 싶어 환장하는 것들이 줄을 섰다고 희희낙락한다. 본전을 뽑으려면 하루도 쉴 틈이 없다고 몰아친다. 필요하지도 않은 화장품과 옷이 마구 들어왔다. 모두 다 빚이다. 애정도, 윽박지름도, 회유도, 협박도 모두 다 빚을 늘이자는 수작이다. 잡혀온 여자들이 해먹는 밥도 다 빚으로 계산된다. 아무리 사내를 많이 받아내도 빚은 줄지 않고 늘어만 간다. 고통을 잊기 위해 술을 마신다. 무슨 약인지 수시로 주사도 놔 준다. 아주 비싼 약이라고 했다. 몸의 주요부분에 문신을 새긴다. 도망치려는 기색만 보이면 무자비한 매가 떨어진다. 사나흘 도리로 얻어맞아 갈비뼈가 부러지고 코가 주저앉고 입술이 터진다. 구원의 손길은 없다. 고통을 함께 하는 여자들이 더 잔인하고 무섭다. 들어온 날짜를 따져 철저한 위계질서가 형성되어 있다. 신참은 고참의 모든 뒤치다꺼리를 해야 한다. 빨래를 하고 밥을 짓고 온갖 자질구레한 심부름까지 해야 한다. 거절하면 집요한 보복이 기다린다. 저 잘난 맛에 사는 년이라고, 눈물이 헤픈 년이라고, 음탕한 년이라고, 이기적인 년이라고, 괜히 주는 거 없이 미운 년이라고 머리를 잡아채고 발길질을 하고 뺨을 때리고 얼굴과 몸에 손톱자국을 내고 담뱃불로 지지고 술병을 깨어 휘두른다. 지옥의 나날이다. 도무지 수긍할 수 없는 일들이 다반사로 일어난다. 살아도 산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죽을 수도 없다. 자포자기다. 웃음이 나온다. 가을이 금방 지나가고 겨울이 오고 다시 봄이 왔다. 포주부부가 따로 불러낸다. 매우 심각한 표정이다.

“내 네년을 위해 모처럼 좋은 일을 해줄 것이니 도망갈 생각 말고 고분고분 따라와. 잠시라도 딴 생각을 하면 쥐도 새도 모르게 죽여 버릴 것이니.”

모든 걸 체념한 상태다. 어디 가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아무런 두려움도 일지 않는다. 무려 열 달만의 외출이다. 차에서 내리니 외진 달동네의 허름한 창고 건물이 보인다. 십자가가 높이 솟았다. 휴거! 공중 재림!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시뻘건 활자에서 금방이라도 피가 흘러내릴 것 같다. 너무나 뜻밖의 장소다. 온갖 문구들이 고딕체의 활자로 도배된 입구에서 앳된 소녀가 날자 판을 바꾸는 중이다.

휴거! 앞으로 87일.

소녀를 바라보니 눈물이 핑 돈다. 자신의 몸 어느 곳에서도 앳된 모습은 찾을 수 없을 것이었다. 자신은 이제 죄의 구렁이에 빠져 지내면서도 목숨을 끊지 못한 타락한 악녀요, 음부였다. 건물 안에서 아버지 하나님과 주님을 부르짖는 절규가 끊임없이 터져 나온다. 교회가 아니라 무슨 합숙소 같다. 매트리스가 연이어 깔린 바닥에 옷가지며 이부자리와 방석들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다. 금방이라도 세상이 어떻게 될 것처럼 들뜨고 어수선한 분위기다. 문과 가까워 좀 밝아 보이는 곳에서 초췌한 안색의 남녀노소가 얼굴을 드러낸다. 십여 명이 때 묻은 담요를 덮고 방석을 둘둘 말아 벤 채 지친 모습으로 눈을 감고 있다. 출구에서 오른 쪽 구석은 주방으로 사용되는 듯 갖가지 기기와 연료통이 보인다. 잇대어 쌓인 쌀 포대와 라면박스도 언덕을 이루었다. 

“여러분! 힘을 냅시다! 우리 다시 찬양, 찬양합시다아!”

새벽의 설동 안처럼 희미한 안쪽에서 외치는 소리가 들린다. 곳곳에서 사람들이 힘겹게 일어나 앉는다. 아버지와 주 예수를 찬양하는 절규가 터져 나온다.

눈앞이 점점 밝아진다.

여자는 포주부부를 따라 무리 속에 끼어들었다. 뜨거운 열기가 솟는다. 두 팔을 높이 들어 몸을 좌우로 흔든다. 일제히 괴성을 질러댄다. 성경을 앞에 놓고 무릎을 꿇은 채 손을 모아 쥐고 통곡하던 젊은 남녀가 벌떡 일어서서 온몸을 비틀며 회개의 음성을 토해낸다. 중년 사내들과 노인들이 바닥에다가 무수히 이마를 찧으며 소리 없는 눈물을 줄줄 흘린다. 순식간에 일어난 광란의 현장이다. 너무나 놀라운 광경에 꼼짝도 할 수가 없다. 여자도 차츰 자신의 몸속에서 뭔가가 마구 요동치는 걸 절감한다. 알 수 없는 현상이다. 여자가 무릎을 꿇는다. 가슴을 마구 두드리면서 엉엉 운다. 이마로 바닥을 마구 찧는다. 너무나 애절한 통곡이다. 벌떡 일어서면서 미친 듯 팔을 휘젓고 고래고래 악을 쓴다. 광란의 절규와 몸부림이 끝나자, 사람들이 다시 이곳저곳으로 떨어져 나아가 쓰러진다. 여자는 교주 앞으로 안내된다. 근엄한 얼굴이다. 새하얀 도포와 황금 관이 눈부시다. 엄숙한 몸짓으로 인도자 노릇을 하는 포주부부가 무릎을 꿇고 발에 입을 맞춘다. 교주는 그네들보다 여자에게 더 많은 관심을 보인다. 자애로움이 넘쳐 나는 얼굴이다. 교주를 향해 남녀가 비굴한 웃음을 지어 보인다. 교주가 손을 높이 들어 부부의 정수리에 손을 얹는다. 사람을 사고파는 자들치고는 너무나 나약한 모습이다. 여자도 얼른 무릎을 꿇고 이마를 조아린다. 먼 하늘나라에서인 듯 교주의 음성이 들린다.

“성령께서 그의 제자 아브라함에게 너의 외아들을 제물로 바쳐 올리라 하셨을 때에 아브라함은 조금도 의심치 않고 저의 아들을 기꺼이 번제로 바치려 하니 문득 하늘에서 천사의 음성이 들리기를 아브라함아, 우리 주께서 너의 믿음을 이미 알았으니 너는 네 아들을 데리고 산을 내려가 조만 간에 닥칠 심판의 날을 기해 천국의 문에 들 순간을 준비하라 하셨더라. 내 오늘 너희 부부의 믿음을 이 아이를 통하여 다시 한 번 확신하면서 이 말씀을 떠올렸으니 너희 부부도 아브라함의 부자가 그리했던 것처럼 더욱 더 강한 믿음으로 심판의 날을 기해 반드시 열리게 돼 있는 천국의 문안으로 들 순간을 준비하라.”

너무나 엄청난 말이었다. 여자는 귀를 의심하면서 포주부부를 곁눈질로 살핀다. 무엇하는 이들인가. 정말 하느님의 대리인인가. 여자의 초점 잃은 시야에서 놀라운 광경이 펼쳐진다. 저승사자처럼 냉혹했던 포주부부가 눈물을 펑펑 쏟으며 소리 없는 울음을 토해낸다. 조금도 가식의 기미가 느껴지지 않는 울음이었다. 그들이 쏟아내는 눈물을 대하니 모든 게 다 거짓말 같다. 자신이 겪은 일도 다 남의 일 같이 느껴진다. 부모의 얼굴도 생각나지 않는다. 학교 친구들도 떠오르지 않는다. 손수건과 은행잎도 너무나 하찮은 것으로 다가온다. 사람의 형상마저 거짓의 상징으로 느껴진다. 그들 모두의 얼굴 가죽을 면도날로 죽죽 긋고 싶다. 그 날부터 여자의 거처는 교회 안으로 바뀐다. 이 또한 너무나 황당한 현실이지만 아무런 고통도 느껴지지 않는다. 정신마저 혼미해진다. 어떻게 이런 엄청난 일들이 이토록 아무렇지도 않게 다반사로 일어날 수 있단 말인가. 여자는 포주부부의 가장 귀한 재산으로 교주에게 바쳐졌다. 교주는 제법 큰 교회를 이끌던 개신교 목사였다고 한다. 자신이 말세의 심판을 주관할 성령의 화신임을 깨닫고는 교단을 탈퇴하여 새 교회를 열었다. 신도 수는 2백여 명에 지나지 않았으나 하나같이 다 열성교도였다. 여자도 마찬가지로 열렬한 믿음을 내보이는 신도로 변한다. 특별한 가르침이나 설교를 들은 바가 전혀 없는 데도 여자는 누구보다도 강하게 세상의 종말을 확신하고 사람의 탈을 쓴 적그리스도의 존재를 믿는 신도로 변해 갔다. 교주에게는 기적처럼 나타난 보배였다. 여자는 자연스럽게 교주의 총애를 받으며 그의 곁에서 온갖 시중을 들게 된다. 그런 과정을 겪으면서 여자는 비로소 자신이 아직 젊고 아름답다는 걸 알게 된다. 섹스의 기쁨도 비로소 찾게 되었다. 그러나 여자의 행복은 오래 가지 못한다. 많은 이들이 교주의 기도 발을 믿고 찾아왔다. 신문에서 자주 얼굴을 대하는 저명인사도 끼여 있었다. 그네들의 바람은 남이 알까 봐 쉬쉬해온 가정불화의 해결이나 불치병을 치료하는 것이었다. 교주가 경찰에 잡혀들어 간 것은 이들의 부탁으로 행한 치유행위가 잘못되어 환자가 죽었기 때문이었다. 환자를 데리고 오는 이들은 대부분 최악의 경우를 예상하고 온다. 그래서 이들의 부탁은 안수하는 이의 손을 교묘하게 빌리는 간접 살인행위였다. 그런데도 모든 죄는 환자의 치료를 맡은 자가 뒤집어쓰게 된다. 교주의 석방을 위해서 신도들은 별별 짓을 다했으나 법은 냉혹하게 외면했다. 교주는 기약 없는 수형의 길로 들어섰다. 설상가상으로 사이비 종교집단에 자식을 빼앗겼다고 이를 갈던 사람들이 경찰을 앞세워 들이닥쳤다. 몇몇이 더 잡혀 갔다. 신도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여자도 비로소 자유의 몸이 되었다. 그러나 갈 곳이 없었다. 교주의 말이 아니라도 그녀는 오래 전부터 말세의 징후를 느껴온 것이었다. 세상으로 나아가고 싶지 않았다. 사람들 속에 들어가는 것이 더 무서웠다. 말세의 징후는 곳곳에서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신도들 중에는 서울대학에 다니던 청년도 있다. 전국 음악 콩쿠르에서 일등을 한 여고생도 열성 신도였다. 하나같이 다 똑똑하고 우수한 애들이었다. 그런 아이들일수록 믿음이 강하다. 모두 다 순교를 각오하고 있다. 남한 순교자를 자처하는 신도들은 지하철이나 버스 정류장엘 가면 언제든지 만날 수 있다. 세상의 종말을 믿고 가출한 학생들은 많았다. 그중 일부는 부모의 설득으로 귀가했으나 나머지 아이들은 더 깊이 숨어든다. 자식을 빼앗겼다고 생각한 이들이 조를 짜 추적하고 연명으로 수사를 의뢰해도 허사다. 불법감금, 폭행, 사기, 약취유인 등 다방면으로 수사를 해도 아무런 혐의도 잡을 수 없다. 참고인으로 불려온 아이들은 하나같이 다 자유로운 신앙행위였다고 주장한다. 개인의 의사에 반하는 어떠한 짓도 강요당한 바 없다고 진술한다. 어디서나 몸싸움이 벌어진다. 선교차량이 불타기도 한다. 그런데도 돌아가고 싶지 않다. 세상 속에서 그녀를 기다리는 건 사람이 아니었다. 사람의 탈을 쓴 또 다른 짐승이었다.

여자는 자신이 세상으로부터 너무나 먼 곳까지 떠밀려 왔음을 깨달았다. 모든 인간을 짐승으로 보는 적그리스도의 논리 위에서만 자유를 느낄 수 있었다. 세상이 종말에서 멀어질수록 갈 곳은 줄어든다. 너무나 무서웠지만 엄연한 현실이었다. 그러나 종말을 확신하고 그걸 대비하는 모임과 교회도 많았다. 무척 든든했다. 세상이 망하지 않는 한 종말을 확신하는 이들도 사라지지 않을 것이었다. 여자는 너무나 큰 은혜를 받은 것 같아 홀로 눈물 어린 감사의 기도를 올렸다. 여고 교실을 떠난 이후 처음 해보는 기도였다. 닭장으로 불리는 버스를 수십 대씩 세워놓고 방패와 진압봉으로 무장한 경찰도 어디서나 눈에 들었다. 길을 가다보면 하루에도 몇 번씩 이들의 무리를 만난다. 실종자도 자꾸 늘어난다. 실종자 가족 협의회와 전국 가출인 찾기 운동본부라는 단체까지 생겨났다. 축복이었다. 어떤 날은 동일한 시각에 같은 자리에서 대열을 이룬 경찰관들과 실종자 가족협의회 사람들을 한꺼번에 만나게 된다. 실종 여성의 90%가 사창가 행이라는 기사가 실린 신문과 주간지도 넘쳐난다. 끼리끼리 몰려 나와 점심을 먹고 난 형사들이 이쑤시개를 질겅거리면서 그런 걸 펼쳐보고 낄낄거린다. 박금자(17세) 학생(중3). 서울 성북구 길음동. 학교에서 점심시간에 실내화만 신은 채 실종. 오정희(22세) 대학생. 일요일 오후에 어학 강좌를 들으러 나간 후 실종. 학생만이 아니었다. 주부, 회사원, 여공은 물론 남자들도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진다. 범죄와의 전쟁이 선포돼도 퇴폐, 변태영업소는 나날이 늘어난다. 여자에게는 너무나 다행스러운 현실이었다. 거리로 나서면 마음이 놓인다. 여자는 밤낮 없이 거리를 떠돌았다. 거리가 가장 안전한 집이었다.

여자는 자주 공상에 빠져 들었다. 아름다운 신부가 되어 하늘나라로 떠올려지는 자신을 만나곤 한다. 순백의 웨딩드레스가 눈부시다. 커다란 다이아몬드가 박힌 왕관도 멋지다. 신랑은 모든 이들이 선망하는 배우가 되기도 하고 가수로 나타나기도 하고 탤런트로 찾아온다. 모두 말쑥한 턱시도를 입고 황금 지팡이를 의젓하게 든 모습이다. 생을 찬미하는 감미로운 음악이 들린다. 백 가지 천국의 비밀이 숨겨진 책도 보인다. 하늘나라로 타고 올라갈 방주도 신랑 신부를 기다린다. 다가올 미래를 대비하라. 하늘의 문이 열린다고 소리치는 함성에 이어 축복의 나팔소리가 울려 퍼진다. 666 적그리스도의 유혹에 빠지지 말라는 외침도 들린다. 언제든 암송할 수 있는 성경 말씀도 끊임없이 흘러나온다.

“저가 모든 자, 곧 작은 자나 큰 자나 빈궁한 자나 자유한 자나 종들로 그 오른 손에나 이마에 표를 받게 하고 누구든지 이 표를 가진 자 외에는 매매를 못하게 하니 이 표는 곧 짐승을 이르는 수라. 지혜가 여기 있으니 총명이 있는 자는 그 수를 세어 보라. 그 수는 사람의 수니 육백육십육이니라. 아멘.”

여자는 자기도 모르게 아멘을 큰 소리로 외치다가 문득 현실로 돌아온다. 다시 초침소리가 들린다. 연속극의 대사도 흘러나온다. 휴대폰이 울린다. 경아가 몽롱하게 흐려진 눈을 물 묻은 손으로 닦아내고는 휴대폰을 귀에 댄다.

“언니. 뭐 해요?”

“일하지, 뭐. 어디야?”

“학교에요.”

“학교에선 공불해야지. 약속했잖아.”

“언니가 우리 버리고 어디로 갈까봐, 공부가 안 돼요.”

“난 안가, 절대로.”

“고마워요, 언니. 공부 열심히 할게요.”

올봄에 고3에 올라간 보람이다. 교주가 잡혀 가는 바람에 뿔뿔이 흩어진 아이들을 거리에서 만났다. 자유의 몸이 되었으나 갖가지 이유로 돌아갈 집을 잃어버린 아이들이다. 나쁜 짓만 일삼는 원장의 보복을 피해 고아원을 뛰쳐나온 아이들도 있다. 모두 다 저마다의 감옥 속에다 자신을 가두어 놓고 거리를 떠돌고 있다. 내버려 두면 자신이 밟아온 길을 똑같이 걸어갈 게 분명하다. 아이들은 경아를 수호천사로 여긴다. 무거운 책임감에 마음이 무겁지만 아이들이 오히려 든든한 추로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아 준다. 노란 손수건을 생각하면 아이들에게 하늘나라가 아닌 지상에서의 천국을 만들어 주어야 한다. 이단으로 몰려 죽음을 당한다고 해도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교주는 경아에게 나비라는 법명과 함께 영좌(靈座)를 부여해 주었다. 영계의 주인은 당연히 교주였다. 그는 오랫동안 관찰하고 시험하여 믿음이 가면 착좌식을 열어 세속의 이름을 대신할 법명과 함께 영계에서의 자리와 역할을 부여한다. 나비는 영계의 꽃밭에 거주하면서 각종 꽃의 수정을 돕는 자리다. 그래서 착좌식도 교주의 침실에서 단둘이 치렀다. 교주의 늙고 비만한 몸에 짓눌린 가슴은 답답했다. 교주는 잔인한 웃음을 지으면서 가쁜 숨을 연이어 토해냈다. 그 순간에 경아는 모든 인간들의 빡빡 깎은 알머리를 보았다. 정수리에 찍힌 바코드가 너무나 선명하다. 시작코드, 진행코드, 완료코드가 모두 6이다. 분명 적그리스도다. 세상은 지옥이다. 천국의 문에 들기 위해서는 쇠가죽처럼 질긴 가면을 벗어야 한다. 이 세상과도 좀 있으면 이별이다. 그러나 너무나 아쉽다. 영계에 들기 전에 누군가로부터 진정으로 사랑한다는 말을 꼭 한 번 듣고 싶다. 진심에서 우러나는 그 말 한 마디면 모든 것이 다 용서될 듯하다. 그 말을 듣기 전까지는 가면을 벗을 수 없다. 경아는 눈물 속에서 문학교사의 얼굴을 기억해 내려고 무진 애를 썼다. 거리로 나와서는 표정 없이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전단지를 나눠주며 외쳤다.        

“여러분. 휴거를 준비하세요. 심판의 날이 곧 다가옵니다. 다가올 미래를 대비하세요.”

특별 선교기간이면 한 주일 저녁을 거리에서 살기도 했다. 고등학생으로 집을 나와 북한지역의 선교를 위한 순교자로 지명된 소년들과 팀을 이루어 버스정류장을 찾아다니기도 했다. 그들은 해외선교 팀의 막내였다. 이미 오래 전에 순교를 서약한 몸이었다. 그러나 그 아이들도 지금은 갈 곳이 없다. 불안한 마음으로 오지 않는 휴거만을 고대하는 처지다. 목안이 불에 덴 듯 쓰리고 아파도 사람들은 하나같이 무표정했다. 적그리스도들이 우글거리는 광야에 홀로 내던져진 듯했다. 손가락질을 하고 침을 뱉는 이도 많았다. 두꺼운 성경을 옆구리에 끼고 다가온 중년 여인은 분노에 찬 시선으로 달걀을 던지기도 했다. 정통 기독교인임을 자부하는 광신도임이 분명했다. 교양 있게 늙은 신사는 혀를 차며 지나간다. 말세 따위는 단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한 채 온실 속의 화초 같은 신도들을 갖가지 감언이설로 현혹하는 장로쯤 되는 이일 거였다. 그들은 이웃의 아픔을 모른다. 모든 것을 당사자의 무능과 부도덕함으로 매도하길 좋아한다. 마이크를 놓을 수가 없다. 멸시와 천대로부터 자신을 지켜줄 사람의 손길만이 그리웠다.    

“적그리스도는 교활한 짐승들이어서 위장술이 뛰어납니다. 이 점을 항시 명심해야 합니다. 놈들의 두꺼운 가면과 갑옷을 단번에 꿰뚫어 버릴 수 있는 우리들의 창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천 년 왕국에 들기 위한 갖가지 시련 속에서도 여러분은 목숨을 내건 선교의 공덕을 쌓아야만 합니다. 이게 우리들의 유일한 무기입니다. 지금 이 순간도 천년왕국으로의 휴거를 선교하기 위해 학업마저 포기한 채 거리거리에서 고군분투하고 있는 어린 형제자매들을 생각해 보세요. 오로지 성령의 은총에 온몸으로 부응하고자 부모와 처자식까지 버리고 영광된 순교자의 길에 들어선 이도 많습니다. 수많은 사탄의 억압과 질시 속에서도 강철 같은 믿음 하나로 교주님의 기적을 증거 하기 위한 고행을 죽음의 부활의식으로써 수행하려는 형제자매도 줄을 잇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 모두 분발 또 분발해야 합니다. 그러자면 선교활동에서 반드시 직면하게 돼 있는 적그리스도의 정체를 한 시라도 빨리 파악해야 합니다. 자, 다시 한 번 해봅시다. 알파벳 첫 글자 A는 얼마입니까?”

“6입니다.”

“B는?”

“12입니다.”

“이렇게 셈해 나아가면 마지막 Z는?”

“156입니다.”

“그래서 나온 수를 모두 더하면?”

“666입니다.”

“좋습니다. 컴퓨터(COMPUTER), 뉴욕(NEWYORK), 키신저(KISSINGER)도 이렇게 추적해 보면 모두 666 적그리스도입니다.”

적그리스도는 어디에나 있다. 그러나 그럴수록 참으로 그리운 것 역시 사람의 손길이었다. 사랑이라는 단어를 일기장에 처음 써 보게 한 문학선생의 묵직한 음성이 찾아온다. 눈물이 왈칵 쏟아지려 한다. 그이가 칠판 가득 써 놓고 따라 읽게 한 시구절도 생각난다. 수백 번도 더 암송해온 시였으나 지금은 그것마저도 잊혀졌다. 하나의 슬픔이 태어나기 위해선 적어도 일억 년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첫 행만 생각난다. 한 인간을 절망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은 슬픔은 단 오 분의 시간도 필요로 하지 않았다. 그러나 경아는 이제 안다. 그 슬픔에서 벗어나 사람을 다시 사랑하는 순간도 일 분이면 충분하다는 것을. 경아의 입에서 다시 서툰 가락이 흘러나온다. 요번에는 심청가의 한 대목이다.

“사람이 슬픔이 극진하면 도리어 가슴이 막히는 법이라. 심 봉사 하 기가 막혀 놓으니 울음도 아니 나오고 실성을 하는데, 애고 이게 웬 말이냐. 응, 참말이냐. 말 같지 아니하다. 나 보고 묻지도 않고 마음대로 한단 말인가. 네가 살고 내 눈 뜨면 그는 응당 좋으려니와 네가 죽고 내 눈 뜨면 그게 무슨 말이 되랴. 너의 모친 너를 난지 칠일 만에 죽은 후에 눈조차 어둔 놈이 품안에 너를 안고 이집 저집 다니면서 동냥 젖 얻어 먹여 그만치나 자랐기로 한시름 잊었더니 너 이게 무슨 말이냐. 눈을 팔아 너를 사지 너를 팔아 눈을 산들 그 눈 해서 무엇 하랴. 어떤 놈의 팔자로서 아내 죽고 자식 잃고 사궁지수가 된단 말인가. 네 이 선인 놈들아. 장사도 좋거니와 사람 사다가 제수 넣는 데 어디서 보았느냐. 하나님의 어지심과 귀신의 밝은 마음 앙화가 없을쏘냐. 눈 먼 놈의 무남독녀 철모르는 어린 것을 나 모르게 유인하여서 사단 말이 웬 말이냐. 쌀도 싫고 돈도 싫고 눈 뜨기 내 다 싫다. 네 이 독한 상놈들아.”

경아의 두 눈으로 다시 푸른 물기가 넘늘거린다. 노란 은행잎이 하늘하늘 초원 위를 날아간다. 심청이가 되어 아득히 높은 뱃전에 서 있는 것만 같다. 인당수 푸른 물이 입을 딱 벌리면서 어서 뛰어 내리라고 닦달을 한다. 경아가 눈물을 훔쳐내면서 다짐한다. 그래, 어둠이 크면 밝음도 그만큼 큰 법. 그이를 만나 이걸 전해주는 순간이야말로 내게는 진정한 천국일 것이라. 이를 위해 나는 나를 죽여야 한다. 어둠에 길들여진 슬픈 내 분신들을 매일매일 저 푸른 바닷물에 던져 넣어야 하리라. 길 잃은 천사 같은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하늘나라의 유혹을 뿌리쳐야 하리라. 다짐하고 다짐하면서 한 백인여성이 손을 놀릴 때마다 깨끗이 닦인 접시들이 정갈한 물속에서 탐스럽게 핀 박꽃처럼 송이송이 피어난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