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엌에서의 어떤 講義

 

신순말

 

동서도 살아보게나, 언젠가는 이 말이 생각나게 될게야. 지금은 그 아들, 딸이 조선에 다시없을 아들, 딸이지? 부모와 자식 간의 촌수가 일촌이라지만 그것도 품안의 자식일 때 이야기라네. 그 아이들 자라나서 결혼을 하면 일촌이 아니라 이촌 만큼은 멀어져 있는 법이네. 아들 며느리, 딸과 사위처럼 부모와 자식사이에만 일촌인 것이 아니라 며늘애도 사위도 일촌을 알처럼 품고 있는 존재라서 그런지, 짝을 채워주면 그만 이촌의 거리만큼 멀어지게 된다네. 그 사이에 자식들이 생겨서 손주가 나면 또 일촌이 덤으로 붙어 아들, 딸이란 존재는 나에게 그저 삼촌정도가 될 뿐이라네. 父子간은 일촌이고 祖孫간은 이촌이 맞다구? 아, 이것은 촌수 계산법과는 다른 이야기라네. 자네도 한 번 살아보시게나. 형제사이가 이촌이라지만 형제에게 짝이 생기면 그만 삼촌의 거리만큼 멀어지고, 그 사이에 자녀를 두면 또 사촌만큼의 거리가 생기는 것도 같은 이치니…. 그리 생각하면 세상이 너무 삭막하다고? 핏줄사이 삭막한 것은 강남제비가 박씨 물어오던 흥부놀부시대나 달밤에 서로 볏가리에 볏단 나르던 의좋은 형제시절에도 있었던 일 아닐 텐가, 핏줄기끼리 의좋게 지내라고 그런 이야기 자꾸 들려주는 것일 테지 않겠나…. 사람사이 촌수를 따지려면 이렇게 제대로 따져야 가족이건 친척이건 서로 평안하지 않겠는가? 아, 유행가도 있잖은가. 사랑에도 유통기한이 있다고, 허허헛. 자네도 일찌감치 이 계산법을 염두에 두면 서운한 맘 같은 건 생기지 않을 것이네….

 

 

 

신묘년의 꿈

 

신대원

 

우리나라가 호랑이 닮았다 하고

우리나라가 토끼 닮았다 하지만,

난 말이지,

못생겨도 좋으니,

밥상 닮았으면 좋겠네.

오순도순 둘러앉아

밥도 먹고 말도 하고

방귀 뀌면

엄지검지 코 맞잡고

소리 내어 웃어젖히기도 하는

고런 밥상 닮았으면 좋겠네.

차라리 허망해도 좋으니,

고런 꿈 한자리 꾸었으면 쓰겠네.

 

신대원 : 경북 의성출생. 상주 <들문학회> 회원. 천주교 신부

 

 

빈집

 

권석창

 

낯선 마을 지나다가

옛날 초가집을 보았다

발길이 절로 집을 향한다

쥔장 계시는지요?

뉘신지요?

지나가는 나그넨데

길은 멀고 날은 저물어서

……하룻밤 신세질 수 있는지요?

집이 누추하고 대접할 것은 없지만

괜찮으시다면 들어오시지요

주인의 은근한 말소리 들리지 않고,

빈방은 있지만 여자 혼자 사는 집이라

곤란하다는 절색의 여인도 보이지 않고

그리운 것 하나 들리지 않고

그리운 것 하나 보이지 않고

주인 없는 빈집 목련이 혼자 지네

헛간 바람만 거미줄 흔드네

 

 

낡은 거울 

 

하재영

 

고향 낡은 집 대문 들어서자 거울이 나를 반긴다. 반갑다고 손 내밀려다 그 거울 오래 전 할아버지께서 나들이 할 때 들여다보며 단정한 모습 확인했던 것임을 상기한다. 농사꾼 할아버지와 나 사이 머문 거울의 깊이에 묵은 먼지 쌓인 세월이 있고, 그 먼지 밟으며 걷는 아버지의 뒷모습도 머문다. 의료과학단지 지정으로 집 헐리게 될, 마을 사람들도 뒤숭숭한 자신의 모습 머물던 집 한 채 거울로 바라보며 집을 떠나야 함을 소처럼 되새김질한다. 옮기려던 발길 다시 멈추곤 거울 앞에 머무른다. 집 한 채 이승에 짓고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손때 묻은, 힘 좋은 불도저가 담장과 집안을 허물어 마음으로 들여다보아야 할 집, 깨어질 듯 달랑 걸린 낡은 집 한 채 거울 속에서 단정함을 떠나 스스로 단정한다.

 

 

감주 외 2편

 

조현명

 

 

할머니가 밤새 달여 온 달착지근한 손주에 대한 사랑 여러 병, 페트병에 담아 얼려놓아 녹여서 먹으면 일품이라는 그 사랑을 쿨쿨 콸콸 큰 그릇에 솥아 부어선 손주들에게 한 그릇씩 나누어 준다 나는 그 옆에서 꼽사리로 한 그릇 받아와선 왜 술주자가 말미에 붙었을까 생각하다가 밥알이 둥둥 뜬 동동주 같은 그걸 꿀꺽 목구멍으로 넘길 때 시원하다가 달착지근한 게 우적우적 씹기도 해야 하는 그걸 한 그릇 더 했으면 혀를 감는다 할머니가 오면 으레 그것 가지고 온 줄 알고 조르는 손주들을 웃으며 대하는 손이 즐겁다 한꺼번에 들이키는 즐거운 비명에 고개를 저으시며 감추어놓은 꼬깃꼬깃 쌈짓돈 빼듯 한 병 꺼내들면 모두 반기는 이것은 할머니의 사랑, 그 이상인 그 무엇

 

 

 

문수스님, 낙동강 등신불 되셨네.

 

권미강

 

땅에 기어 다니는 작은 벌레라도 밟을까 조심조심,

물결 속 작은 생명 하나라도 다치지 않을까

물수제비조차 뜨지 않으시던 문수스님

제 몸 불살라 버리셨네.

 

벌레에게는 삽도 아닌 포클레인

얼마나 거대한 공포라는 거 아신 것이지.

 

내장이 다 보이는 투명한 몸으로

강 생명들에게 영양이 되어주는 플랑크톤,

꺽지, 꾸구리, 묵납자루..., 수천 년 헤엄치던 물고기들에게

숨 막히는 시멘트벽

얼마나 높은 장벽이라는 거 아신 것이지

 

세상 온갖 고통의 사슬 끊이려

묵언수행, 정진수행

이십 칠년 오욕칠정 다 끊어내고

염화세상 해탈세계 들려하셨던 문수스님.

 

숨 못 쉬는 생명들 아우성 들으신 듯.

죽어가는 생명들 흐느낌 들으신 듯.

 

한마디 항변도 못하고

억울하게 죽어간 그것들, 외로울까

그렇게 가는 저승길 어둡고 무서울까

 

빈자의 등불처럼 추운 마음 따뜻하게,

아픈 마음 환하게 비추려고

스님 몸에 불 밝히셨네.

땅 파고 물 막아 욕심 채우는 미물들에게

어리석음 버리라고 소신공양 하셨네.

 

자연을 자연스럽지 못하게 하는 어리석은 중생들에게

몸 태운 환한 불로 각성의 죽비 내리셨네.

 

문수스님, 낙동강 등신불(等身佛) 되셨네.

 

 

 

정전

 

김재환

 

죽도 시장 어판장 초입에서

몇 마리 물 좋은 대가리를 고르고 섰는데

갑자기 불이 가버렸다

일시에 쳐들어온 난봉꾼에

이 뭐꼬? 어이 씨발, 와 이카노?

도마에 칼 부딪는 소리,

넙치꼬리 철퍼덕 물 치는 비린내,

어둠은 순식간에 이리 많은 소리를 내 뱉는구나


하필 이런 봄날에 온몸에 문신처럼 덮치다니

뽀얀 나비처럼 날개 펴고 건너 와얄 땐데

생선 다라이 줄을 선 시장통

양초 꽁다리가 어둠 속 길을 겨우 뚫자

콸콸 내쏟는 몸통 잘린 우럭의 넋두리

(이 집은 오늘 아침 중딩 알라가 집을 나가버렸대)

문디 가시나, 우짜마 좋노?

그 옆 한치 다라이가 퍼담는 말

(그쪽 집은 석 달째 신랑이 에스병원에 누워 있다나)

아이구, 지가 무신 넙치라고 일나지를 않는 거고?


손님들 설설 빠져나가는 사이

어둠은 다라이 한편에 앉아

오늘 집에 두고 온 식구들을

불러오고 있다


흥정을 하다말고 서 있던 나는

다라이 앞에 쪼그려 앉아

겨우 이야기 머리를 밝혀놓은 촛불에 기대

눈 휘번덕거리며 노려보는

넙치 대가리를 누르면서

배추흰나비들이 떼 지어 날아오는 것을

본다

 

 

 

 

강들의 등본 

 

 

 

 

 

 

강태규

 

 

 

 

 

 

좋, 았다

 

 

 

 

신경림, 문인수, 정희성, 허만하가

 

 

낙동강을 등재했다

 

 

 

 

조정래, 황금찬, 김하돈, 조현자, 박상건, 박우현이

 

 

한강을 등재했다

 

 

 

 

 

김헌, 문병란, 홍관희, 오선장, 김영환, 전숙, 김택용, 문순태, 김용택이

 

 

영산강을 등재했다

 

 

 

 

 

신동엽, 김진광, 황동규, 안도현, 이교택이

 

 

금강을 등재했다

 

 

 

 

마크 트웨인의 미시시피강, 조셉 콘레드의 콩고강,

 

 

미하일 숄로호프의 돈 강은 무사하신지,

 

 

응웬옥뜨의 메콩강, 이백의 황허강, 두보의 양쯔강은

 

 

안녕하신지

 

 

 

 

좋, 됐다

 

 

점유권 소실 중이다

 

 

서기 이천십 년의 일이다

 

 

 

 

 

현동역

 

 

이석현

 

그대

현동역에 가 보셨나요.

 

초여름 비 가랑 가랑 내리던 날

사람이 그리워 사람을 찾아

바다로 나가는 길목에

일순 마음 끌려 들렸던 곳

 

시간의 무게와 고요가 공존하는

승객도 역무원도 없이

상하행 열차시간표 만이

텅빈 역사를 지키는 공간 너머

철길이 나란히 평행을 유지하며

그리움의 길을 드나드는 곳

 

그냥 떠나기엔 남겨 둔 아쉬움에

다시 뒤돌아 보게 하는

산기슭 작은 산사山寺 같은 간이역

 

그 역에 들린 적이 있었다오.

 

*현동역: 경북 봉화군 소천면에 있는 작은 간이역

 

 

 

오늘

 

 

박희용

  


꽃씨가 몇 개 났다

봉숭아 맨드라미 접시 꽃 보려고

영주 장날 안 팔리고 남은 씨앗 세 봉지

블록 담 아래 뿌렸다

명주실보다 가느다란 연두 빛 생리

겨우 틔우고 배시시 웃는다

여름에서 가을까지 동네 사람들 보라고

어미 가신 빈집을 숨 쉬게 할 거다


호박 모종을 솎았다

묵은 변소를 퍼 만든 구덩이에 뿌린 호박씨들

날 놈 나고 안 날 놈 안 났다

몸짱 몇 놈만 남기고 기타는 던져버릴까 하다가

아무 흙을 그어 대충 심었다

살 놈은 살고 죽을 놈을 죽을 거다

졸지에 자리를 뺏긴 잡초들이 

아야야아야야 안 들리는 비명이다


석류나무 가지가 휘었다

작년 봄 어린 나무 열한 개를 산밭에 심었는데

모진 겨울 보내고 여섯 개 남았다

다섯 개는 조금 휘니 뚝 부러졌다

자두 하나 대추 둘 복숭아 하나는 푸른 이파리 상큼한데

석류 둘은 오월이 다 가도록

온갖 풀씨들이 둘러서서 꽃을 피워도

이파리 하나 없이 침묵이다

죽었니살았니 줄기를 살살 긁어도 기척이 없다 

무심한 것아 꾸중하며

가지를 깊이 휘어도 부러지지 않았다


앵두가 오지게 달렸다

지난 늦가을 온몸을 덮은 가시넝쿨을 걷어내고

썩은 호박 하나 던져주었다고 

오랜만에 온 사내를 위해

가지마다 연분홍 풋정이 총총하다

지난 해 첫물은 이웃이 털어갔다

며칠 있다가 금줄을 둘러주어야겠다 

  

아카시아를 잘랐다 

헌 집 헌 마당 헌 담 경계 안에

혼자 도도한 게 눈꼴 시려 톱으로 잘랐다

금방 이파리가 축 늘어졌다

힘도 없는 게 빳빳하게 고개 치켜들다니

톱 소리를 들은 담 밖에 아카시아가 으스스 떨었다

담 밖에 있는 키 큰 도토리나무에게

올해도 묵 많이 먹게 해 줘 응

다정한 목소리로 부탁했다


툇마당을 빗자루로 싹싹 쓸자

깊이 썩어가던 낙엽과 이끼들이 부스스  뜯겨 나왔다

이불을 잃은 벌레들이 놀라서 허둥댔다

시멘트 깨진 틈새에서 싹을 틔운 풀꽃들이

졸지에 뽑혀 담 밖에 버려졌다

해바라기를 하며 꾸벅꾸벅 졸던 빈 단지들이

바삐 속에 공기를 채워 넣는다

블록 담에 기대 두 송이 꽃 겨우 피운 장미가

또 무면허 가지치기를 당할까봐 벌벌 떤다

 

차 하나 운전수 하나 식구 한 솥

강을 삽질해 일당을 벌기 위해

백사장에 덤프트럭이 길게 줄을 섰다

화강암을 떠나 수십 리 물길 흘러온 모래들이

끝내 바다에 가지 못하고 붙들렸다

속살이 뿌연 평은강이 얕은 숨을 쉬며 누워있다

그 위로 하늘 눈물이 그렁그렁 흘러간다

백로 한 마리가 저 위에서 저녁먹이를 구한다


작년엔 지천인데 올해는 없다

웰빙 식품인데 중얼대며 그냥 오다니

아카시아 숲 아래 맑은 이파리 소복하다

아내는 밑동 째 꺾어오라 하지만

그러기가 미안하여 이파리 두세 개씩 땄다

그만 들켰잖아 보초 누가 섰어 물어내 

수리대들이 잘라진 팔을 흔들며 종알댔다

   

나무들이 나를 보더니 왼고개를 쳤다

까톨복상나무 가지마다 어린 열매들이 주렁주렁이다

뽕나무 가지마다 어린 오디들이 소복소복이다

저 사람이 작년에 우리 어린 것들을 한 톨도 안 남기고

다 털어갔어 천식에 좋다는 소문 듣고

아무리 그래도 지도 생물인데 씨가 영글기는 해 줘야지 말이야

영글기만 하면 딱따구리라도 못 깨는데 말이야

씨알이 앉기도 전에 털어가 버렸어 

저 사람이 작년에 우리 잎과 오디를 도둑 손으로 다 훑어갔어

몸을 밟고 올라가는 바람에 팔이 몇 개 부러졌어

다행히 허연 거품 내뿜으며 병든 척 하는 동무는 손 안 대더군

큰 나무들은 온몸을 흔들며 흉을 보고

작은 나무들은 이파리와 열매를 감추느라 바빴다

올해 맺힌 어린 것들이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이른 봄에 아내는 까톨복상은 열매보다 꽃이

천식에 좋다고 서너 번 말했다


개미 떼가 풀쐐기를 물어뜯고 있었다

흑갈색 털이 무성한 풀쐐기는 이미 축 늘어졌고

개미들은 승리를 만끽하고 있었다

아카시아 꽃 잎자루로 싸움을 말렸다 

남의 먹이를 가로채려 하지 말아요

이놈은 덩치만 컸지 우리 떼에겐 못 당해요

당신 사는 세상은 우리 사는 세상과 전혀 무관하니

세상 넘어 끼어들지 마세요

개미 한 마리가 고개를 치켜들고 더듬이를 흔들며 항의 하였다 

죽었니살았니 풀쐐기를 살살 긁어 보았다

아무 기척이 없었다 그래도 계속 긁으니

축 늘어졌던 몸이 약간 웅크려들었다 

풀잎 가마에 태워서 키 큰 풀 가지 위에 올려놓았다  

다행히 살아나 고운 나비가 되면

여름 어느 날 문득 내 귓가에 살포시 앉으려나


높다란 평은 다리 밑 공터에는

어느 안노인이 지난 겨울동안 잘 덮은 색동 솜이불이 

비와 강바람에 삭고 있다

불륜을 맛있게 먹고 버린 화장지들이

허연 DNA를 묻힌 채 쓰러져 있다 

다음에 오면 이불을 불 태워야겠다 

저승 추위에 떨고 있을 안노인에게 보내야겠다

아직 꼬리를 치고 있을 화장지를 태워서

저승에서 번식하도록 해야겠다

코끼리의 생식기처럼 굵게 서 있는 다리발에

안어른이 올 겨울에 추울 거예요 

당신이 버린 씨앗이 울고 있어요

매직으로 굵게 한 장 써 붙여야겠다


육 할이 물 삼 할이 뼈와 살 일 할이 세균

백열 근 나가는 고기 덩이 하나

산소를 마시고 이산화탄소를 뿜으며 달린다

가도 가도 인생길은 끝이 없다지만

평은강 둑길은 이십 리

한 인생 가는 길에 희로애락 교대라지만

삭아가는 고기 덩이가 달리는 강둑길엔

울긋불긋 크고 작은 풀꽃이 한창이다

물과 세균 뼈와 살로 빽빽한 이 몸

아무리 계산해도 정신이 들어갈 자리가 없다 

어제 읽은 이언 플리머의 《지구의 기억》이 들어 갈 틈이 없다

정신의 무게는 얼마일까 궁금하다


세상을 한 바퀴 돌아보고 와도

앞 베란다에 또 한 세상이 있었다 

반쯤 쓴 연필만한 지렁이 한 마리가 

하수구멍 쪽으로 죽기살기로 기고 있었다 

몇 년 전 화분흙에 섞여 아파트로 이사 와

늘어난 식구들을 몇 번 내보냈는데

어린 것들이라 베란다 바닥에서 말라죽고 말았다 

탈출하여 새 세상을 만들어라

어미는 자식의 등을 떠밀었다

집 주인이 없는 틈에 젊은 것이 용감하게 길을 나섰다

하수구멍이 눈앞인데 그만 인간에게 들켰다 

뭉클뭉클 퇴비냄새를 진하게 풍겼지만

어찌 할 도리가 없다


오늘 하루

영주 가흥동에서 안동 운안동까지

나노 구멍으로 들여다 본 여러 세상

선물로 손에 든 것은 지렁이 한 마리

용감하였으므로 잘 살아라  

뒤 베란다 창문을 열고 휘익 던졌다

다행히 풀밭에 떨어졌다

작년 이맘 때 쯤

11층 여자의 우울증이 추락한 자리 가까이   

 

 

 

노니* 외 2편 

 

 

 

 

 

변비가 도졌다

안색까지 누렇다

니가 직방이라고 천거한 약

텁텁, 조석으로 한 숟갈씩 퍼 넣으니

살만큼은 틔었다

 

 

꼭꼭 틀어 막힌 똥구멍 툭 틔우듯

내 속내에 엉겨 응어리져 있는 것들

말랑말랑하게 어르고 반죽하여

밖으로 내던져줄

묘약

어디 없니?

 

 

노니……

 

 

노느니

염불이나 하라고?

 

 

 

 

*NONI, 동의보감에서는 해파극, 또는 파극천이라 함.

 

 

 

바다 이발소 외 2편

- 느구엔 누곡디엔의 노래 1

 

 

최 부 식

 

 

드르륵 덜컥 문 밀고 들어서는

양포 바람도 바다 이발소 손님이다

바리깡 들고 바둑판에도

훈수 톡 탁 던지는 쉰 문턱의 이 씨

소문난 술주정뱅이 이발사다

어미젖꼭지 주렁주렁 문 새끼 돼지들

이발소 가화만사성 그림은

사각사각 가위질하는 동안만 평화롭고

뭔 말인지 몰랐던 사랑 고백

동생 학비 보내자던 약속은

외상 긋고 가버리는 동네 바람일 뿐

 

열여섯 새댁 느구엔

나지막이 노래 부른다

파도에 밀려 바람에 실려

송꼬이 강 건너 숲 우거진 마을로

눈물 편지 가닿을 쯤

첫 아기

엄마 등 잡은 꼬막손 놓고

고개 까닥 젖히며 잠드는

양포 바다 이발소

 

 

 

 

삼강주막

 

윤석홍

 

지난 여름, 경상북도 예천군 풍양면 삼강리에 있는 삼강주막에 들렀습니다. 이 땅의 마지막 주막이라던 삼강주막 할머니가 세상을 뜬 지 몇 년 되었습니다. 뒤꼍의 회화나무도 슬금슬금 기운을 잃어버리고 강물도 늬엄늬엄 느리게 흘러갑니다. 힘없이 회화나무를 돌아가던 바람이 할머니가 흙벽에 그어놓은 외상줄을 보듬어 줍니다. 한 잔 술에 세로금 하나, 한 주전자면 길게 가로금을, 이제 더는 외상 그을 이도 지울 외상도 없지만 바람은 자꾸만 허튼 금들을 해작거립니다. 이 금들이 채 지워지기도 전에, 할머니 담배냄새가 채 사라지기도 전에 바람이 먼저 흙으로 돌아갑니다. 더는 외상 그을 곳 없어진 사람들이 새로 난 다리 밑에 돗자리 깔고 앉아 말없이 흘러가는 강물을 벗삼아 소줏잔 기울이며 할머니를 추억하고 있습니다.

 

 

 

 

 

개망초

      임술랑

 

 

 

뜨거운 대낮에 자전거 타고

둑길을 내려간다

맞은 편에서 자전거 타고 오는

흰옷 입은 여인

이마에 땀방울 맺혔다

둑방에 핀 개망초꽃

흔들린다

그와 나도 한 그루

망초꽃인가

고개를 빼들고

햇살에 흔들리다가 시드는

누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그저 스쳐가는 것이다

길 옆에서

 

 

 

끽연 3
   - 임어당의 말
김종인

 



도덕적 약점이라는 것은 인정하지만
약점이 없는 인간은 신용이 안 간다.
인류 최대의 쾌락을 잃고 있다는 것
재떨이가 없는 집을 생각해 보라
지나칠 정도로 깨끗하게 정돈된 방이며
일정한 장소에 놓여 있는 쿠션
주인은 새색시 모양으로 단정하고
인정미라곤 찾을 길이 없을 것이니
시적 정서를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끽연의 정신적 이익을 어찌 논하리

철학자의 입술로부터 예지를 끌어내며
우매한 입을 닫게 한다고 새커리는 말했다
명상적이며, 생각이 깊고 인자하며
허식 없는 청담을 조성하나니
보통 때보다 명랑하고, 사교적이며
명랑한 재치가 넘쳐흐르는 담화
그러한 즐거움을 맛보기 위해서라면
어떠한 희생이라도 사양치 않으리

끽연가 치고 자살한 사람이 없다거나
마누라와 싸우지 않는다는 매긴의 말은
더욱 더 진실에 가까운 명언이지 뭔가
파이프를 입에 물고 있을 때에는
자연히 낮은 목소리로 말하게 된다
파이프에서 피어오르는 고요한 연기에
은근히 기분이 좋고 진정시켜 주기 때문에
울적하고 성난 감정도 뱉어 버리며
거듭 태어나는 경건한 신자여
갑자기 금연을 하리라 하고 도대체,
성스럽지 못한 결심을 하게 된 이유가 뭔가

세상에 도덕적 행복감을 부정하는 것보다
더 큰 부도덕이 어디 있으랴 ?


 

 

 

겨울 불영사  

 

김 만 수

 

겨울마당귀를 돌고 있었다 그녀들

근처럼 박힌 불꽃 혹은

잔존 부력을 털어내고 있었다

잔설 그림자 잔설 자박이며

밀지 못한 가슴의 털을

거기 묻은 지분 냄새를 지워내고 있었다

 

파고들던 홍매 향도

담을 타고 기어들던

능소화 짓무른 눈빛도 뜯어내며

청송 그늘진 깊은 언덕을 기어오르고 있었다

 

춘양으로 가는 버스

붉은 소나무 위로 지나고

청설모 눈알들 목어 눈 속으로 굴러가는

겨울 불영사

몰랑몰랑한 석탑들이

늦은 마당을 돌고 또 돌고 있었다

 

상좌스님 손 안으로 내리는

싸락눈

가만히 꿇어앉는 불영사

 

 

 

 

 

 

 

담쟁이를 바라보며 외 2편

 

 권 화 빈

 

 

오늘 하루만 살려고

그토록 발버둥치며 담쟁이는

담을 기어오르지 않는다

누군가 목덜미를 잡아 끌어내리려 해도

그 자리에서 끄떡없다

담쟁이는 제 가는 길이 천직임을 안다

담장이 울퉁불퉁 해도 함부로 탓하지 않는다

제 온몸이 비틀려도

제 갈 길을 멈추지 않는다

푸르게 푸르게 제 삶을 꾸리며

오늘도 쉬지않고 앞으로 앞으로만 나아가고 있다

 

 

 

 

 

 

 

 

수를 놓다 

 

-이종암

 

 

 

그러니까 까닭 없이 답답하고 우울하면

아니, 세상에 나를 내보낸 인연 그리워

태어나고 자란 곳

금천 지나 매전 고향 마을 찾아간다

 

동곡재 마루에 올라서면 멀리 황사 구름 속

겹겹의 산 능선들 눈앞에 마주 선다

병풍같다

무릎 꿇고 절하고 싶다

 

병풍에 새겨진 그림은 내 아버지의

아버지들 누대의 삶이 수(繡) 놓은 것

저 속으로 걸어가고 싶다

 

병풍, 손으로 만져볼 수 없는 저기

아버지 마중 나오는 소리가 있다

언젠가 나도 내 아들도 가서

병풍 속 수 하나 또 놓을 것이다

 

 

 

 

 

 

청주집 

김소인

 

 

시장통 고추상회 뒷골목 먼지 먹은 판잣집도 조는 한낮 소리 소문 없이 들어서 주모, 주모 술 좀 주게 고단한 일상에 여윈 얼굴들 목 마르요 뼈대 없는 집안의 닭발 맵싸하게 불러내고 고갈비 등 푸른 가시 빗살 좋게 발라내면 연탄불 데인 오돌뼈 돼지고기 불콰하게 술 청한다 오고 가고 농(弄) 치고받는 거나한 술판 울면불면 좆같은 인생살이 오늘만 같아라 서러운 그대 화들짝 자지러지는 웃음 바람에 어디선가 봄 햇살 문지방 너머 기웃거리고 우당탕 꽃비 날리는 듯도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