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두언>

 

역사를 되돌릴 수 없다

일본으로부터 잊을 만하면 들려오는 망언이라는 것이 있다. 기회 있을 때마다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하며 일본의 침략전쟁을 부인하는 발언을 하며 우리의 속을 뒤집어놓곤 한다. 일제의 식민지 침탈에 대해서도 한국의 경제성장의 초석이 되었다고 하고, 정신대 문제에 대해서도 한국의 여성들이 돈을 벌기 위해 스스로 지원했다고 한다. 지난 8.15 무렵에는 일본의 몇몇 정치인들이 독도를 방문하겠다고 인천공항에 왔다가 돌아간 사건이 있었다. 광복이 된지 60년이 넘어서도 그들의 이른바 망언은 그칠 줄 모른다. 명백한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있는 그들의 태도를 우리는 이해할 수가 없다.

그들은 왜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망언을 계속하고 있을까?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찾기는 그렇게 어렵지 않다. 일본이 태평양 전쟁에서 연합군에 항복하여 우리가 해방이 되었다고 알고 있다. 그러나 1945년 8월 15일 일왕 히로히토가 라디오 방송을 통해 했다는 항복은 항복이 아니었다. 항복이라는 단어는 어디에도 없고 오직 연합국의 회담 내용을 수용하겠다는 말뿐이다. 그리고 일본 왕실은 아직도 그대로 세습되어 오고 있다. 그 후로 그들의 망언이 있을 때마다 우리 정부가 항의하면 마지 못에 유감의 뜻을 표한다는 애매모호한 태도로 일관하고 있다. 일본의 지식인들 가운데는 한일 과거사에 대한 진정한 반성을 하는 이들이 있지만 일본 정치인 가운데 진정한 반성을 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특히 망언을 일삼고 있는 정치인이나 학자들 대부분은 ‘일본회의’라는 일본 내의 거대한 조직에 속해 있으며 일본회의는 우리가 말하는 태평양전쟁 전범들의 후손을 주축으로 조직된 극우 단체다. 일본의 문화는 음식점을 대를 이어 하듯이 권력도 세습되고 있기에 그들은 아직도 우리를 식민지로 여기고 있거나 과거 일본제국주의 시대로 되돌아가고 싶어 한다. 따라서 그들에게 대한민국은 아직도 식민지 대한민국일 뿐이다.

일본은 러일전쟁에 승리하면서 러시아 함대를 감시하기 위해 자기들 마음대로 1905년 독도에 망루를 설치했으며 시마네현에서는 독도를 시마네현 수협에 편입하였다. 어느 문헌을 보나 독도가 일본 땅이라는 근거는 없다.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는 유일한 근거는 시마네현 고시가 유일하다. 일본의 한반도 침략의 시작인 을사늑약 무렵 임의로 차지한 땅인 독도를 아직 자기네 땅이라고 하는 것은 그들이 우리의 독립을 인정하고 있지 않는다는 증거가 된다.

이렇듯 일본의 극우파는 아직도 우리의 독립을 인정하지 않는다. 한편 대한민국의 이름바 우파는 어떠한가?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방출된 이승만은 미국을 근거지로 활동하며 한인 사회에서 영향력을 확대하여 해방과 더불어 미국을 등에 업고 귀국한다. 수많은 독립지사들을 제거하고 남한만의 단독정부를 수립하여 대통령이 된다. 겉으로는 민족주의를 표방했지만 사실은 친일세력을 바탕으로 한 권력을 형성한다. 인재가 없어서 친일세력을 중용했다고 하지만 사실과 다르다. 진정한 독립지사들과 그 후손들은 철저하게 배제되거나 암살당했다. 친일파를 척결하기 위한 반민족행위자특별조시위원회도 이승만 스스로 해체하여 친일파에 면죄부를 주었다. 그 결과 우리사회는 친일파의 후손이 주류가 되었다. 우리의 극우파는 친일세력을 근거로 하고 있다. 필자는 이것을 이승만 코드라고 부른다.

우리사회에 아직 친일파가 있느냐는 물음이 있을 수 있다. 엄밀히 말하면 일본제국주의에 동조해서 다시 식민지가 되기를 원하는 대한민국 국민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일단 일본식민지 통치 사실을 어쩔 수 없는 일로 규정하고 친일을 불가피한 사실로 인식하는 국민은 다수라고 할 수 있다. 친일파의 후손이라는 것을 부끄러워하기보다는 일제식민지 통치 기간의 화려했던 조상들의 삶을 자랑스러워하는 성향을 보이기까지 한다. 그들은 우리 민족의 공동체적인 삶보다는 개인의 기득권을 중요시한다. 우리사회의 주류를 형성하는 이른바 기득권 세력은 일제시대, 자유당시대, 군사독재시대로 이어지는 지배계층의 영화를 유지하고 싶은 것이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도덕성의 해이로 무장된 부도덕한 세력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 우리 사회는 이승만 코드에서 이어지고 있는 부도덕한 세력들이 주류를 형성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우리사회에는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우리의 힘으로 뽑은 우리의 대통령인 노무현을 국가권력의 힘으로 죽음에 이르게 한 일이 가장 대표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역대 대통령 가운데 가장 정의로웠던 인물이 권력의 벽에 부딪혀 좌초한 일이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가령 용산참사, 4대강 공사, 한진중공업 사태, 기륭전자 사태, 유성기업 사태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다. 우리사회에서 주류에 저항하는 모든 세력은 좌파로 분류되고 좌파 딱지가 붙으면 아무렇게나 대해도 된다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고 시대의 아픔이다.

이러한 역사 되돌리기 현상은 문학에서도 예외가 될 수 없다. 한국작가회의 경북지회는 문학이 민족문제, 사회문제 해결에 기여해야 한다는 데 뜻을 같이하는 문학인들에 의해 출범하였다. 그간 나름대로 올곧은 작가정신을 지키기 위해, 혹은 지역문학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해 왔다고 자부한다. 저간에 관에서 주도하는 보여주기 행사에 참여하지 않았고, 문학 본질에 충실하기 위해 노력했으며, 작가 개인의 역량을 확대하고 지역문학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경북작가회의는 관으로부터의 제대로 된 지원을 받을 수 없는 어려움을 겪지 않으면 안 되었다.

공자의 제자가 공자에게 가장 좋은 정치에 대해 물었다. 공자는 음악으로 다스리는 것이 가장 좋은 정치라 했다. 공자의 장인이 음악가였고 공자 또한 음악가였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예술과 정치에 대한 공자의 인식이 잘 드러나는 것이기도 하다. 정치는 통치자가 백성들에게 명령해서 통치자의 뜻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인식이다. 공자는 백성들의 심성과 정서가 음악을 통해서 순화되고 고양되었을 때 나라가 평화로워진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통치자는 문화 정책 하나 만으로도 나라를 다스릴 수 있다고 생각했음을 유추해 볼 수 있다.

선진국이라 불리는 나라들이 문화적 기반이 튼튼한 나라라는 사실이 이를 잘 증명해 준다. 자연이 준 혜택으로 석유를 많이 보유한 지역에 자리 잡은 나라들은 경제적으로는 엄청난 부를 누리고 있지만 우리는 그들 나라들을 선진국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문화적 기반이 없으면 질 높은 삶을 살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평화와 안정을 누릴 수 없기 때문이다.

‘한국작가회의’라는 문인 단체가 있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문인들은 대부분 한국작가회의에 소속되어 있다. 이 단체에 해마다 지급되던 문예 진흥기금을 작년에는 받지 않았다. 불법시위에 참가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써야 돈을 주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문제로 총회를 열어 만장일치로 지원금을 거부하기로 결의했다. 작가라는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존재다. 작가들이 그런 구차한 돈을 받는다면 더 이상 창작활동을 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한국작가회의 기관지인 <내일을 여는 작가>는 지금 발행 중단 상태다.

문화 정책 당국자들도 문화와 정치에 대한 관련성을 알고 있기는 하다. 다만 문화는 정치를 선전하는 도구라고 잘못 알고 있을 따름이다. 정부의 정책을 찬양하거나 홍보하는 것이 문화라고 알고 있는 듯하다. 그래서 정부의 행사에 들러리를 서서 구색을 맞추는데 기여하는 재주 있는 사람들이 문화 예술인이라고 알고 있는 듯하다. 일제강점기에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문인들로 하여금 학병에 지원할 것을 종용하는 글을 쓰게 하거나 일본 식민지 통치를 찬양하는 글을 쓰게 했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렇게 해서 나온 작품이 그 유명한 ‘오장 마쓰이 송가’가 아니었던가? 문화가 그런 것이라면 사회를 병들게 하는 것일 게다.

참여정부에서 문광부 장관을 지낸 이창동 감독이 각본을 쓰고 윤정희가 주연한 ‘시’라는 영화가 있다. 지난 해 칸 영화제에서 각본상을 받은 걸작으로 평가된 영화다. 지금 미국에서 <뉴욕타임즈>의 절찬을 받으며 상영되고 있다. 이 작품은 처음 문화예술진흥위원회에 제작에 필요한 보조금 신청을 했지만 탈락된 작품이었다. 각본이 부실하다는 이유였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 작품은 세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영화제에서 각본상을 받았다. 지금의 문화 정책의 현주소를 말해준다. ‘시’라는 영화는 좋은 시는 시인이 자기를 내세우기 위해 쓸 때 오는 것이 아니라, 진정성을 가지고 시 쓰기에 임했을 때 제대로 된 시가 찾아온다는 메시지도 담고 있다.

2007년 경상북도 문화상을 준다고 경주 엑스포 행사장에 부부동반으로 정장 차림으로 오라는 연락을 받았다. 없는 옷을 마련해 입고 15년 탄 낡은 차를 몰아 경주에 갔다. 식장은 화려하고 티브이 카메라도 돌아가고 있었다. 도백으로부터 상패와 꽃다발을 받았다. 상금도 없고 커피 한 잔도 없었다. 돌아오는 길에 휴게소에서 가락국수 한 그릇 먹고 올 수밖에 없었다. 상금을 주면 선거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상금을 주지 않기로 했다는 것이다. 시인은 이슬과 노을만 먹고 시를 써서 관청 행사를 빛내는 존재로 알고 있는 모양이다.

필자는 6년째 한국작가회의 경북지회장의 책임을 맡고 있다. 해마다 경북도로부터 문예 진흥기금, 또는 문화단체 보조금이라는 명목으로 지원을 받아왔다. <작가정신>이라는 문집과 <경북작가 시선집>을 발간하고 세미나와 문학 강연회 등의 행사를 해오고 있다. 경북을 대표하는 문학단체로서의 책임감을 가지고 일해 왔다. 해마다 850만 원 가량 주던 보조금을 올해는 350만 원 준다고 한다. <작가정신> 발간경비 500만원이 삭감되었다. 같은 사업을 하는 한국문인협회 경북지회에는 1,800만 원이 배정되었다. 한국작가회의는 지금 가장 활발한 작품 활동을 하는 작가들의 모임이다. 350만 원으로 한국작가회의 경북지회를 꾸리라는 것은 문화 예술에 대한 지원이 아니라 작가에 대한 모욕이다. 지역의 어려운 여건 속에서 창작 활동을 하는 문인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350만 원 정중하게 사양했다. 우리의 이러한 처지를 아는 어느 고마운 분의 도움으로 이 책을 발간한다.

글 / 한국작가희의 경북지회장

 

 

 

 

 

낙동강 특집

 

 

 

당신의 시(詩)는 안녕하신지요?

 

하재영

 

 시와 신, 시와 시인, 신과 시인.

 장독대에 놓인 크고 작은 항아리처럼 시와 관련된 글자를 서두에 써 놓고 창 밖 강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이내 당신의 모습을 떠올려 봅니다. 당신은 지금 사무실에서 오늘의 일거리를 바쁘게 진두지휘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 어쩌면 당신은 남편과 자식을 일터와 학교에 보내고 차 한 잔 마시며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을지도 모르지요.   

 혹시 당신 주변에 시인이 있는지요. 아니면 당신이 좋아하는 시인이 세상에 있어 위로받고 행복한지요. 그것도 아니면 당신은 좋은 시 몇 편을 기억하며 지갑 속에 꽂아놓은 그리운 사람 사진을 꺼내듯 종종 떠올려보는지요. 

 당신도 잘 아시다시피 시는 감정의 표출로 누구나 쓸 수 있는 예술의 한 갈래입니다. 그런데 보다 전문적인 시를 쓰기 위해서는 예리한 감성과 끝임 없는 노력이 뒤따라야 할 것입니다. 그렇기에 시인은 일반인과 다른 품격을 갖춘 사람으로 많은 사람들이 생각합니다. 우리의 머리에 각인된 유명 시인 중에는 고독했고, 괴짜로 소문났고, 서른도 못 넘기고 요절한 시인이 많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당신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시인하면 알코올 중독자이면서 지독한 애연가이고, 때론 새 한 마리의 죽음을 애도하는 대책 없는 사람으로 인식하고 있음을 부인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세계의 훌륭한 시인들의 모습을 살펴보면 우리에게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습니다. 초인의 힘으로 예언자적 능력을 발휘하기 위해서 시인은 한밤을 하얗게 지새우기도 했습니다. 그러한 가운데 인간의 맑은 영혼을 되살리기 위해서 끊임없이 번민했습니다.

 영국의 윌리암 워즈워스의 시 ‘무지개’를 당신은 지금도 기억할지 모르겠습니다, 구태어 전문을 인용하는 이유는 다시 한번 시의 아름다움에 마음을 적셔 보았으면 해서입니다.


 저 하늘 무지개를 보면/ 내 가슴은 뛰노라/ 내 어릴 때도 그러했고/지금도 그러하고/늙어서도 그러하리/그렇지 않다면 차라리 죽는게 나으리/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내 하루가 /자연의 숭고함 속에 있기를


 시는 인간의 삶을 응축해서 드러낸 글입니다. 시는 모든 예술의 가장 밑바탕에서 타 예술에 많은 영감을 제공하고 있는 뿌리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한 편의 시에는 이웃의 목소리, 산과 강의 싱싱한 생명, 수평선 아래 펼쳐진 바다가 찰찰 넘치도록 담겨 있습니다.

 좋은 시에는 무엇보다 대상을 향한 연민을 갖게 합니다. 고만고만한 현실을 한 폭의 풍경화처럼 보여주지만 그 이면에 숨겨진 부조리를 살며시 드러내기도 합니다. 그것은 자연을 창조한 신의 목소리에 부응하는 일이고 뭍사람들의 아픔을 공유하는 길이며 모든 예술가들이 지향하는 공통분모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우리의 기억에 밑줄 긋게 하는 시인들의 시에는 신의 목소리가 담겨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경제발전과 개발이라는 속도 앞에 많은 강이 본래의 모습에서 해체되고, 숱한 생명들이 목숨을 잃고 있습니다. 윌리엄 워즈워스의 시 무지개에는 ‘내 하루가/자연의 숭고함 속에 있기를’ 간구하고 있습니다.

 시인의 발걸음은 세상의 급격한 변화를 쫒아가기에는 그 보폭이 너무 좁은 사림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자연이 그야말로 자연스럽게 변하는 것을 희망하는 사람이기도 합니다. 소중한 뭍 생명의 죽음은 미래의 지구를, 아니 이 땅의 미래를 걱정하게 합니다. 

 가슴 가득 시심에 젖었던 당신도 어느 과거의 동심이 경제 논리의 빠른 시멘트 속도에  굳어져 버리지는 않았는지요.

 창 밖 강을 바라보며 당신의 마음속에 머문 시는 안녕하지 안부를 묻게 되는 초여름입니다. 시와 신, 시와 시인, 신과 시인이란 글자를 불경(不敬)스럽게 짜 맞추어 보면서 말입니다. 

 

<완>

 

 

 

 

 

강의 신음소리를 들으며 걷다

조영옥(시인)

 

 

 

지난 겨울 해외여행을 다녀와서는 한동안 해외여행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별 생각 없이 다녔는데 문득 '여행 중 연세 많으신 시아버지나 친정엄마가 돌아가시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올 여름, 여행을 가지 않으니 그래도 시간이 꽤나 여유가 있을 것이라는 예측과는 달리 무슨 일들이 그렇게 많은지.....하는 일 없이 세월은 달려 갔다.

주어지는 일에 매달리다 보면 아무 것도 할 수 없이 방학은 거의 다 가 버리고...이러다 뭔가 의미 있는 일이라고는 하나도 없겠구나 ..하는 생각에 도모하게 된 것이 우리 집을 중심으로 동서남북 길을 걷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남쪽으로 집까지 돌아오는 길,. 그리고 두번째는 사벌 쪽으로 걸어 낙동강의 발원지인 퇴강까지 그리고 세번째는 우리 학교(내서면 내서중학교)까지, 그리고 마지막으로 점촌까지 걷겠다는 계획이었다.

거리는 평균 20Km 정도였고 소요시간은 5-7시간정도였다.

어떤 날은 아침을 먹고 출발하기도 하고 어떤 때는 새벽 6시 쯤에 출발하기도 했다.

햇빛 쨍쨍한 날도 있었고 가끔씩 비가 뿌려 우의를 입고 걸어야 하는 날도 있었다.

차를 타고 걷는 길보다 혼자서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마을을 둘러보며 걷는 길은 또 다른 길이었다.

사람이 있고 자연이 있고 또 그 모든 것이 하나로 어우러져 바람처럼 내게 다가와 몸속에 스며드는 그런 시간이었다.


두 번 째 나선 길이 동쪽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상주IC가 있는 외답을 지나 병성천을 끼고 걷다보면 병성마을이 나온다,.

병성마을을 지나 사벌쪽으로 가다보면 병성천과 낙동강이 만나는 지점이 보이고 멀리 상주보(댐)도 보인다.

병성교에 서서 병성천을 바라보면 강의 위쪽은 아직 본래의 모습이 있으나 상주보가 있는 쪽을 보면 병성천에 역행침식이 수시로 일어나  제방에 보강을 한 모습을 볼 수 있다.

특히 이번 장마에 상주보 아래 제방이 150미터나 유실되어 중동마을이 홍수가 날 뻔 했다. 


이렇듯 4대강 공사는 우리민족의 동맥을 파헤치는 공사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핏줄이라고 할 수 있는 강의 지천(샛강)에도 엄청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올해 봄부터 우리는 중고등학생들을 데리고 샛강탐사를 했다. 상주지역에서 낙동강으로 흘러드는 샛강인 북천과 병성천, 그리고 동천을 끼고 걸어보았다.

이제는 본 모습을 잃어버린 낙동강-파헤져진 강과 그 주변의 모래 언덕을 보면 숨이 막히고 저절로 고개가 돌려지지만 아직 본래의 모습을 지니고 있는 샛강 옆길을 따라 걷노라면 그 아름다움에 경탄이 나오고 마음도 저절로  편안해졌다.

영원한 아름다움이 있다 없다.......그런 논쟁과는 별개의 아름다움이 자연의 아름다움일 터. 그러나 아름다움의 원줄기처럼 생각되는 강이 그토록 처참하게 훼손당하는 것을 참 무기력하게 대응하고 마음만 안타까웠기에 샛강의 아름다움을 그저 아름답다고 즐길 수 있는 마음이 되지 않는 것이다. 혹시 이곳도 낙동강처럼.....하는 의심.

이렇듯 몇 년 간 낙동강을 따라 걸으며 아름다운 모습이 점점 파괴되어가는 모습을 보아온 터라 아름답다'는 말이 '불안'과 동의어처럼 느껴졌다.

불안한 아름다움-언제부터인가 아름다움을 아름다움 그 자체로 온전하게 느끼지 못하고 살아가는 우리의 삶이 과연 무엇을 통해 행복을 찾을 수 있을까?

아예 모르고 살아가거나 관심이 없다면 차라리 행복할 것이다. '불편한 진실'이란 말이 새삼 다가온다.


사벌 쪽으로 들어가면 화달리와 경천대 가는 길로 나뉘는데 차마 경천대쪽으로 갈 수가 없었다.

상주의 절경중 하나로 꼽히는 경천대- 굽이굽이 낙동강을 굽어볼 수 있고 특히 넓고 부드러운 모래가 일품인 백사장을 자랑하던 곳, 그러나 지금은 완전히 파헤쳐져 백사장은 없어지고 푸른 들판을 뒤덮은 누런 모래밭에서 먼지만 날릴 뿐인 그 강을 내려다보고 싶은 마음은 없기 때문이었다.

화달리 사벌왕릉이라고 전해지는 유적을 돌아보고 사벌면 소재지로 들어가 매호리를 거쳐 퇴강으로 향했다.

퇴강에 이를 때쯤 예천과 시 경계가 있고 풍양으로 가는 다리가 있다. 부드럽게 펼쳐지던 강의 흐름은 없어지고 높다랗게 쌓아 올린 제방과 그 위로 끝없이 펼쳐지는 모래산,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작업 중인 강 가의 포크레인 등이 보였다. 얼른 고개를 돌리고 퇴강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퇴강’이란 이름보다는 '물미'라는 이름이 더 아름답다. 물미마을-낙동강 가에 있어 물미 혹은 물뫼라고 했는데 한자어로 적으니 퇴강(退江)이 되었다.

퇴강은 마을도 아름답지만 100년이 된 고풍스런 성당이 있고 낙동강 7백리 표지석이 있다.

예전에는 마을을 돌아보고 성당에 들어가 앉아 고귀한 분위기와 그에 맞춰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감흥을 즐기곤 하였는데 이제는 마음의 여유조차 없어져 버렸다.

우리는 낙동강의 발원지를 태백 황지라고 한다. 그러나 이곳 상주사람들은 낙동강의 발원을 상주라고 한다. 강의 흐름에서 가장 시원이 되는 샘으로 본다면 1300리 길이 되는 낙동강이고 여기저기 강들이 모여 하나로 도도히 흘러가는 700리 강을 생각한다면 상주, 거기에서도 물미가 바로 그곳이다. 점촌 쪽에서 내려오는 영강과 금천강 그리고 낙동강이 하나로 모여 흐르는 곳이다.

‘낙동강’이라는 ‘낙동’의 어원도 상주의 옛 이름인 낙양의 ‘낙’과 낙양의 동쪽을 흐르는 '동‘을 따서 낙동강이라고 했다한다.

그러니 낙동강 700리 표지석을 세우고 긍지를 갖는 상주사람이다.

강에 대한 긍지가 무슨 소유처럼 생각되어 지는 감도 있는데 이렇게 강과의 연결고리가 깊고 질기다면 그만한 관심과 애정이 있어야 할 것 아닌가?

강을 강답게 두지 못하고 인간의 편리대로 혹은 욕심대로 변형시키고 그래서 파괴한다면 그것이 과연 사랑이고 긍지일 수 있는가?

언젠가 서울에서 낙동강 순례를 온 한 순례자는 낙동강을 바라보면서 눈물을 흘렸다.

서울에서 나고 자란 수 십년간 자신이 생각한 강은 한강이었다는 것이다.

강이란 그렇게 직선의 흐름과 시멘트로 덮힌 둔치와 잔디밭과 끊임없이 준설작업을 하는 그것이 강이라고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강을 보면서 눈물을 흘리는 그의 모습과 하루하루 변하고 있는 낙동강과 굳건하게 강을 버티고 올라가고 있는 상주보를 보면서 저 밑바닥에서부터 치올라오는 분노에 몸을 떨어야 했다.


우리나라 4대강 사업 관계자는 독일의 뮌헨을 찾는다. 소위 ‘이자르 플랜’이라고 부르는 이자르강 복원공사를 벤치마킹 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이자르 플랜은 4대강 사업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이자르 플랜은 이자르강 복원공사이다. 직선화된 강이 홍수를 유발하여 이것을 다시 재자연화하는 공사이다.직선화된 물줄기를 개선하고 그동안의 준설로 강바닥이 파인 곳을 자갈과 흙으로 메우고 강기슭의 콘크리트와 돌벽을 허물고 평평한 돌과 자갈, 그리고 모래를 깔아서 강변침식을 방지하는 공사인 것이다.그런데 우리 4대강 사업은 이 이자르 플랜을 가져온 그 이전의 상태로 가겠다는 것 아닌가?

이자르강이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기 위해 얼마나 많은 인력과 돈을 퍼부어면서 노력하는데 우리는 홍수를 예방한다는 구실을 내세우며 본래의 강을 파헤치고 보를 쌓고 강둑에 시멘트를 퍼붓고 있는 것이다. 이자르강 뮌헨구간 8킬로미터를 복원하는데 11년이란 세월과 총 3500만 유로(525억)이 소요되었다. 그런데 우리는 634킬로미터에 이르는 4대강을 2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공사를 마무리하겠다며 밤에도 불을 밝히고 총력전을 펼치고 있는 것이다. 그 결과와 또 다시 돌아와야하는 그 엄청난 시간들을 생각하면 우리는 우리의 후손들에게 너무도 미안하다.


낙동강 칠백리 표지석을 보다가 둑에 올라서 오늘도 열심히 일을 하는 포크레인을 보면서 참 난감하고 한심했다. 이런 작태를 비난하고 욕하고 싶은데 무슨 말로 욕을 해야 할지 그 단어가 떠오르지 않는 것이다. 너무 어이가 없으니 말을 할 수가 없다.

이렇듯 힘이 들고 뾰족한 수가 없으니 많은 사람들의 희망이 ‘정권이 바뀌면...’이다.

그러나 정권이 저절로 바뀌는 것도 아니고 바뀐다고 저절로 포기되는 것도 아닌 것인 줄 뻔히 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4대강 사업에 대한 반대는 100% 완공될 때까지도 해야 하고 그 이후에도 해야 한다. 우리는 죽을 때까지 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의 자식들도 해야 한다. 100년이고 200년이고 우리는 강을 강답게 되살리기 위해 4대강 사업을 반대하고 복원을 외치고 다시 이자르 플랜을 배워야한다.


마음에 작정이 서니 마음의 그늘도 지워지는 것 같았다.

나의 두 번째 순례는 퇴강에서 끝이 났다. 6시간을 걸었다. 아무 생각 없이 걸으려했는데 강을 보면서 참 생각이 많았고 그리고 생각을 정리할 수 있었다.

걷는 것이 좋은 것은 생각을 하게 하고 생각이 정리되고 그리고 항상 좋은 방향으로 정리된다는 것이다. 항상 그랬다. 그래서 자꾸 걸으려하는지 모른다.

마음이 우울하거나 복잡하거나 슬픔이 가득할 때에 무작정이라도 길로 나가 걸어보면 참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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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발하여 처음 다다른 남천교- 상주에는 낙동강으로 흘러드는 지천이 몇 개 있는데 그중 하나이며 병성천이라고도 한다.

아직까지 강의 모습을 잘 지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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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성교에서 바라본 상류쪽- 그래도 보아줄 만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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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상주보 쪽의 모습은 참혹하다. 지천에도 이런 역행침식이 일어나 흙이 깎여내려가고 제방이 유실되어 얼마나

많은 예산을 허비하며 또 쌓아 올리고 있다. 멀리 강 끝쪽에 상주보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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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개를 넘으니 멀리 강을 막고 있는 높은 제방이 보인다. 강은 보이지 않는다. 누런 모래 장막이 온 마음을 내리 누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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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강성당- 퇴강보다 아름다운 우리말 '물미'가 더 와 닿는 곳- 상주지역 최초의 천주교 교당이며 1956년 건립되었다.

고딕양식의 건축물로서 그 가치가 매우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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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동강 칠백리 표지석- 영강과 금천강, 낙동강이 모여 이곳에서 부터 하나가 되어  도도히 아래로 아래로 흘러간다는 것이다.

그러나 강의 시작이라는 긍지와는 무관하게 뒤편에서 강은 파괴되고 있다. 이렇듯 아래에서부터 강의 시발점으로 거슬러 올라와

본 여정이었다. 강의 아픔을 인간이 얼마나 알 수 있을까?  부끄러울 뿐이다.>

 




세상사람들이 가장 공평하게 나눠 가진 것은 良識이 아니라 어리석음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 속에 있는 어리석음을 보지 못한다. 쉽게 만족하지 않는 까다로운 사람들조차도 자기 안에 있는 어리석음을 없애는 일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움베르토 에코-

 

 

비공식적인 시간 

남태식

 

 

언제부터 공식적인 시간이 되지 못한

지금은 비공식적인 시간.

 

어떤 없는 꽃등의

눈동자, 입술, 목덜미를,

비공식적으로 훔치는 시간.

 

아, 주름살, 주름주름진

꽃등을 드는 시간.

 

언제까지 공식적인 시간이 될 수 없는

지금은 비공식적인 시간.

 

또 어떤 없는 꽃등과

DVD방, 소주방, 카페에서,

비공식적으로 부딪는 시간.

 

가끔은 ‘또는’으로, 가끔은 ‘그리고’로

꽃등을 내거는 시간.

 

어떤 꽃등도, 또 어떤 꽃등도 없고,

비공식적이기에 공식적으로는

없는 시간.

 

 

 

씀바귀꽃길 따라

남효선

 

 

영규할배 노환으로 자리에 눕자

어미소도 마굿간에 갇혔다.

갓 코뚜레를 뚫은 송아지도

함께 갇혔다.

 

동이 트자

영규할배 발길을 따라

진개골 밭둑 이슬 털며

함께 나들던

칠십년 세월

 

자운영꽃이 벙글고

엉컹퀴꽃이 보랏빛 향내를 풀풀 날리는

영규할배 평생 노동 길에

누렁이 퍼질러 놓은

쇠똥더미에 노오란

씀바귀꽃이 피었다.

세 해 째 자운영만 엉컹퀴만

홀로 무성하다.

 

마흔 해 전, 세경살이로 쥔 집에서 받은

배내기 암소 한 마리로

영구할배 세 남매 키우고

손주들 길렀다.

 

가을볕 따가운 동마루에

영규할배 풀어진 눈망울이

누렁소 눈망울에

초생달처럼 고여있다.

 

 

 

 

장미와의 전쟁 

  정선호

 

 

 

장미꽃이 아파트 담장을 에워 싸

성을 쌓고 감옥을 만들었다

향기가 밖에 새어나가지 않도록

철조망까지 두른 장미의 제국,

제국에서는 오월에 축제를 열어

매일 술판을 벌였다

감옥엔 제국의 독재에 항거하다

붙잡힌 잡초들이 늘어만 갔다

 

진실은 감옥에 가둬둘 수 없는 일,

아파트 안에 머물던 봄바람이

장미의 독재를 담장 밖에 알려

이름 없는 풀꽃들 담장에 돌 던졌다

감옥에 갇혀 있던 잡초들 탈옥하여

장미와 전쟁을 시작했다

 

전쟁은 한달내내 계속되었으며

싸움에 단련된 뜨거워진 바람과

무성해진 풀들이 휘두르는 칼날에

제국은 끝내 허물어졌다

 

 

 

 

 

 

 

 

 

하게한다 

  송은영

누적된 피로에 죽은 것처럼 
누워 있는 초췌한 가장이  
여자의 얼굴을 검게 한다

항해 중에 만난 배들이 추월 할 때마다
사력을 다해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  

달은 그저 해를 복제 할 뿐 아니라 
거꾸로 해가 달을 복제하게끔 한다  

막장의 농밀한 어둠이 쉰 넘은 사내에게
감당 할 수 없는 빚을 각혈로 대신 갚게 한다 

힘깨나 쓰는 지난 정권의 실세들이 
검찰의 칼날에 힘없이 절단 되기도 한다

사채업자의 새빨간 거짓말이 이웃 사촌을 
벼랑 끝으로 내몰게 한다

머리가 길을 찾지 못하고 빙빙 돌고 있을 때
마음은 거대한 지도가 되기도 한다

한 순간 져버린 꽃들이   
연둣빛 행상을 차리고 이 계절을 살아나게 한다

요 며칠 빌어먹은 시간이 
세톨박이로 거듭나게 한다

 

 

 

 

 

 

제목: 서울, 1964년 겨울

원작: 김승옥

각색: 김우출

 

등장인물: 김가-스물 다섯 살, 시골출신, 구청 병사계직원.

          안가-스물 다섯 살, 대학원생, 부잣집 장남.

          사내-서른 대여섯, 유난히 눈시울이 붉고 턱이 빈약함, 서적 외판원.

          운전수-마흔 살 정도. 신경질적임.

          그 외 포장마차 선술집 주인. 순경. 남영동 집주인 아줌마. 가정부. 굴장수

          중국 요리집 사환-여관의 사환도 겸함

 

무대는 1964년 서울의 겨울 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던 것이라고 우길 수 있을 만한 포장마차 선술집이다.

배경은 영사기로 도시의 밤거리를 연상할 수 있는 네온싸인의 현란함을 보여주면 되        겠고, 선술집은 포장마차로 꾸민 리어카를 직접 올려서 실감나게 사용하는 것이 좋겠  다.

 

제 1장

막이 오르면 녹음기나 라디오에서 찢어지듯 악을 쓰는 유행가 가락이 들리고 염색한 군용 잠바를 입은 중년 사내가 안주를 굽고 있다.

ㄱ 자로 놓여진 두 개의 긴 의자에는 손님인 듯 한 쪽에는 청년 두 사람이 앉아있고, 한 쪽 귀퉁이에는 한 사나이가 연탄불에 손을 녹이고 있다. 그는 제법 깨끗한 코트를 입었고 머릿기름을 얌전하게 발랐다.

김가: (안가에게 악수를 청하며) 이런 데서 처음 만난 사이지만 우리 성씨나 알고 같이 마  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사이) 저는 시골 출신이고 구청 병사계 말단 직원인 김입니   다.

안가: (악수하면서) 아, 예! 저는 재산 있는 부모 덕에 대학원에 다니고 있는 학생 안입니다.

김가: 아니라니요?

안가: 내가 안가 성을 가졌다구요.

김가: 난 술을 마시기도 전에 취했는가 했지요.

 

잠시 술만 마시는 침묵이 계속되다가 김가가 안주를 집으면서 불쑥 던지듯이 얘기를 시작한다.

김가: 안형, 파리를 사랑하십니까?

안가: 아니요, 아직까진……

김형은 파리를 사랑하세요?

김가: 예. (사이) 날을 수 있으니까요. 아닙니다. 날을 수 있는 것으로 동시에 내 손에 붙잡  힐 수 있는 것이니까요. 날을 수 있는 것으로서 손안에 잡아본 것이 있으세요?

안가: 가만 계셔 보세요. (안경 속으로 김가를 멀거니 바라본다.)

(잠시동안 표정을 꼼지락거리더니) 없어요, 나도. 파리밖에는 ……

(날씨가 몹시 추워서 김가가 발이 시리다고 느낄 때, 안가의 다음과 같은 기특한 질문      때문에 참는다.)

김가: (의기양양하게) 사랑하구 말구요. (사이)

사관학교 시험에서 미역국을 먹고 나서도 얼마동안, 나는 나처럼 대학입학 시험에 실패한 친구 하나와 미아리에서 하숙하고 있었습니다. 서울엔 그 때가 처음이었죠. 장교가 된다는 꿈이 깨어져서 나는 퍽 실의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 때 영영 실의해버린 느낌입니다. 아시겠지만 꿈이 크면 클수록 실패가 주는 절망감도 대단한 힘을 발휘하더군요. 그 무렵 재미를 붙인 게 아침의 만원 버스 칸이었습니다. (사이) 함께 있는 친구와 나는 하숙집의 아침 밥상을 밀어놓기가 바쁘게 미아리 고개 위에 있는 버스 정류장으로 달려갑니다. 개처럼 숨을 헐떡거리면서 말입니다. 시골에서 처음으로 서울에 올라온 청년들의 눈에 가장 부럽고 신기하게 비추이는 게 무언지 아십니까? 부러운 건 뭐니뭐니 해도, 밤이 되면 빌딩들의 창에 켜지는 불빛 아니 그 불빛 속에서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는 사람들이고 신기한 건 버스 칸 속에서 일 센티미터도 안 되는 간격을 두고 자기 곁에 이쁜 아가씨가 서 있다는 사실입니다. 때로는 아가씨들과 팔목의 살을 대고 있기도 하고 허벅다리를 비비고 서 있을 수도 있어서 그것 때문에 나는 하루종일 시내버스를 이것저것 갈아타면서 보낸 적도 있습니다. 물론 그날 밤엔 너무 피로해서 토했습니다만……

안가: 잠깐. 무슨 얘기를 하시자는 겁니까?

김가: 꿈틀거리는 것을 사랑한다는 얘기를 하려던 참이었습니다. 들어보세요, 그 친구와 나는 출근시간의 만원버스 속을 쓰리꾼들처럼 안으로 비집고 들어갑니다. 그리고 자리를 잡고 앉아있는 젊은 여자 앞에 섭니다. 나는 한 손으로 손잡이를 잡고 나서, 달려오느라고 좀 멍해진 머리를 올리고 있는 손에 기댑니다. 그리고 내 앞에 앉아있는 여자의 아랫배 쪽으로 천천히 시선을 보냅니다. 그러던 처음엔 얼른 눈에 뜨이지 않지만 시간이 조금 가고 내 시선이 투명해지면서부터는 나는 그 여자의 아랫배가 조용히 오르내리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안가: 오르내린다는 건…… 호흡 때문에 그러는 것이겠죠?

김가: 물론입니다. 시체의 아랫배는 꿈쩍도 하지 않으니까요. 하여튼……나는 그 아침의 만원 버스 칸 속에서 젊은 여자 아랫배의 조용한 움직임을 보고 있으면 왜 그렇게 마음이 편안해지고 맑아지는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그 움직임을 지독하게 사랑합니다.

안가: (기묘한 음성으로) 퍽 음탕한 얘기군요.

김가: (화가 난 표정으로 관객 쪽을 보며) 아니 여러분, 나는 내가 만일 라디오 박사 게임 같은 데에 나가게 돼서 ‘세상에서 가장 신선한 것은?’ 이라는 질문을 받게 되었을 때, 남들은 상추니 오월의 새벽이니 천사의 이마니 할 때 정말 신선한 대답을 하려고 일부러 기억해 두었던 것인데 음탕하다니요? (다시 안가를 보며 강경한 태도로) 아니, 절대로 음탕한 얘기가 아닙니다. (더욱 단호한 어조로) 그 얘기는 정말입니다.

안가: 음탕하지 않다는 것과 정말이라는 것 사이엔 어떤 관계가 있죠?

김가: 모르겠습니다. 관계 같은 것은 난 잘 모릅니다. 요컨데……

안가: 그렇지만 그 동작은 ‘오르내린다’는 것이지 꿈틀거린다는 것은 아니군요.

김가: (다시 침묵…. 술잔만 만지작거리던 김가가 관객쪽을 바라보며) 개새끼, 그게 꿈틀거리는 게 아니라고 해도 좋다. (사이)

안가: 난 방금 생각해 봤는데 김형의 그 오르내림도 역시 꿈틀거림의 일종이라는 결론을 얻었습니다.

김가: 그렇죠? (즐거운 듯이) 그것은 틀림없이 꿈틀거림입니다. 난 여자의 아랫배를 가장 사랑합니다. 안형은 어떤 꿈틀거림을 사랑합니까?

안가: 어떤 꿈틀거림이 아닙니다. 그냥 꿈틀거리는 거죠. 그냥 말입니다. 예를 들면……데모도……

김가: 데모가? 데모를? 그러니까 데모……

안가: 서울은 모든 욕망의 집결지입니다. 아시겠습니까?

김가: (깨끗한 음성으로) 모르겠습니다.

 

대화가 끊어지고 침묵이 오래 계속된다. 김가가 술잔을 입으로 가져간다. 술잔을 비웠을 때 안가가 잔을 입에 대고 눈을 감고 마신다. 김가가 다소 서글픈 기분으로 자리를 떠날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술잔을 비운 안가가 갑자기 한 손으로 김가의 한 쪽 손을 살그머니 잡는다.

 

안가: 우리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김가: (좀 귀찮은 듯이) 아니요. 안형은 거짓말을 했는지 모르지만 내가 한 얘기는 정말이었습니다.

안가: 난 우리가 거짓말을 하고 있었던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붉어진 눈두덩을 안경 속에서 두어 번 꿈벅거린다.)난 우리 또래의 친구를 새로 알게 되면 꼭 꿈틀거림에 대한 얘기를 하고 싶어집니다. 그래서 얘기를 합니다. 그렇지만 얘기는 5분도 안돼서 끝나 버립니다. (사이)우리 다른 얘기합시다.

김가: (심각한 어조로)평화시장 앞에 줄지어 선 가로등들 중에서 동쪽으로부터 여덟 번째 등은 불이 켜 있지 않습니다……(안가가 어리둥절한 표정인 것을 보고 더욱 신이 나서)……그리고 화신 백화점 육층의 창들 중에서는 그 중 세 개에서만 불빛이 나오고 있었습니다……

안가: (놀라운 기쁨이 빛나는 얼굴을 하고 빠른 말씨로) 서대문 버스 정거장에는 사람이 서  른 두 명 있는데 그 중 여자가 열 일곱 명이었고, 어린애는 다섯 명 젊은이는 스물 한  명 노인이 여섯 명입니다.

김가: 그건 언제 일이지요?

안가: 오늘 저녁 일곱 시 십 오 분 현재입니다.

김가: (절망적인 기분으로) 아, (그 반작용인 듯 굉장히 기분이 좋아져서)단성사 옆 골목의  첫 번째 쓰레기통에는 초콜릿 포장지가 두 장 있습니다.

안가: 그건 언제?

김가: 지난 십 사 일 저녁 아홉 시 현재입니다.

안가: 적십자 병원 정문 앞에 있는 효도나무의 가지 하나는 부러져 있습니다.

김가: 을지로 상가에 있는 간판 있는 한 술집에는 미자라는 이름을 가진 색시가 다섯 명 있는데 그 집에 들어온 순서대로 큰 미자, 둘째 미자, 셋째 미자, 넷째 미자, 막내 미자라고들 합니다.

안가: 그렇지만 그건 다른 사람들도 알고 있겠군요. 그 술집에 들어가 본 사람은 꼭 김형 하나뿐이 아닐테니까요.

김가: 아 참 그렇군요. 난 미처 그걸 생각하지 못했는데 난 그 중에서 큰 미자와 하루 저녁 같이 잤습니다. 그 여자는 다음 날 아침, 일수(日收)로 물건을 파는 여자가 왔을 때 내게 팬티 하나를 사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여자가 저금통으로 상용하고 있는 한 되 들이 빈 술병에는 돈이 백 십 원 들어 있었습니다.

안가: 그건 얘기가 됩니다. 그 사실은 완전히 김형의 소유입니다.

김․안: (동시에) 나는……

안가: (존중하는 말투로) 먼저 말씀하십시오.

김가: 아닙니다. 먼저 말씀하시지요.

안가: 서대문 근처에서 서울역 쪽으로 가는 전차의 도루래가 내 시야 속에서 꼭 다섯 번 파란 불꽃을 튀기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건 오늘 밤 일곱 시 이십 오 분에 거길 지나가는 전차였습니다.

김가: 안형은 오늘 저녁엔 서대문 근처에서 살고 있었군요.

안가: 예. 서대문 근처에서만……

김가: 난 종로 2가쪽입니다. 영보빌딩 안에 있는 변소문의 손잡이 조금 밑에는 약 2센티미터 가량의 손톱자국이 있습니다.

안가: 하하하하. (소리내어 웃고) 그건 김형이 만들어 놓은 자국이겠지요?

김가: (무안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떡이며) 어떻게 아세요?

안가: 나도 그런 경험이 있으니까요. (사이) 그렇지만 별로 기분 좋은 기억이 못되더군요. 역시 우리는 그냥 바라보고 발견하고 비밀히 간직해 두는 편이 좋겠어요. 그런 짓을 하고 나서는 뒷맛이 좋지 않더군요.

김가: 난 그런 짓을 많이 했습니다만 오히려 기분이 좋았……(자신의 그 행위에 대한 혐오감이 치밀어서 말을 중도에 그치고 안가의 의견에 동의하는 고갯짓을 하고 만다. (사이) 의혹에 찬 얼굴로) 안형이 부잣집 아들이라는 것은 사실이겠지요? 그리구 대학원생이라는 것도……

안가: 부동산만 해도 대략 삼천만 원쯤 되면 부자가 아닐까요? 물론 내 아버지의 재산이지만 말입니다. 그리고 대학원생이란 건 여기 학생증이 있으니까……(호주머니를 뒤적거려 지갑을 꺼냈다.)

김가: 학생증 까진 필요 없습니다. 실은 좀 의심스러운 게 있어서요. 안형 같은 사람이 추운 밤에 싸구려 선술집에 앉아서 나 같은 친구나 간직할만한 일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다는 것이 이상스럽다는 생각이 방금 들었습니다.

안가: 그건……, 그건……(열띤 음성으로) 그건……그렇지만 먼저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요.

김형이 추운 밤에 밤거리를 쏘다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김가: 습관은 아닙니다. 나 같은 가난뱅이는 호주머니에 돈이 좀 생겨야 밤거리를 나올 수 있으니까요.

안가: 글쎄, 밤거리에 나오는 이유는 뭡니까?

김가: 하숙방에 들어앉아 벽이나 쳐다보고 있는 것보다는 나으니까요.

안가: 밤거리에 나오면 뭔가 좀 풍부해지는 느낌이 들지 않습니까?

김가: 뭐가요?

안가: 그 뭔가가. 그러니까 인생이라고 해도 좋겠지요. 난 김형이 왜 그런 질문을 하는지 그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 내 대답은 이렇습니다. 밤이 됩니다. 난 집에서 거리로 나옵니다. 난 모든 것에서 해방된 것을 느낍니다. 아니 실제로는 그렇지 않을는지 모르지만 그렇게 느낀다는 말입니다. 김형은 그렇게 안 느낍니까?

김가: 글쎄요.

안가: 나는 사물의 틈에 끼여서가 아니라 사물을 멀리 두고 바라보게 됩니다. 안 그렇습니까?

김가: 글쎄요, 좀……

안가: 아니, 어렵다고 말하지 마세요. 이를테면 낮에 그저 스쳐 지나가던 모든 것이 밤이 되면 내 시신 앞에서 자기들의 벌거벗은 몸을 송두리째 드러내 놓고 쩔쩔맨단 말입니다. 그런데 그게 의미가 없는 일일까요? 그런 사물을 바라보며 즐거워한다는 말이 말입니다.

김가: 의미요? 그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난 무슨 의미가 있기 때문에 종로 2가에 있는 빌딩들의 벽돌 수를 헤아리는 일을 하는 게 아닙니다. 그냥 ……

안가: 그렇죠? 무의미한 겁니다. 아니 사실은 의미가 있는지도 모르지만 난 아직 그걸 모릅니다. 김형도 아직 무르는 모양인데 우리 한 번 함께 그거나 찾아볼까요? 일부러 만들어 붙이지는 말고요.

김가: 좀 어리둥절한데요. 그게 안형의 대답입니까? 난 좀 어리둥절하군요.

안가: 아, 참 미안합니다. 내 대답은 아마 이렇게 될 것 같군요. 그냥 뭔가 뿌듯해지는 느낌이 들기 때문에 밤거리로 나온다고(목소리를 낮추어서) 김형과 나는 서로 다른 길을 걸어서 같은 지점에 온 것 같습니다. 만일 이 지점이 잘못된 지점이라고 해도 우리 탓은 아닐 거예요.(다시 쾌활한 음성으로) 자,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어디 따뜻한 데 가서 정식으로 한 잔씩 하고 헤어지시다. 난 한 바퀴 돌고 여관으로 갑니다. 가끔 이렇게 밤거리를 쏘다니는 밤엔 난 꼭 여관에서 자고 갑니다. 여관엘 찾아든다는 프로가 내겐 최고죠.

 

두 사람이 서로 계산하기 위하여 각기 호주머니에 손을 넣는다. 결국 안가가 계산하는 사이 술잔을 앞에 놓은 채 마시지도 않고 불만 쬐며 구석에 앉아 있던 사내가 두 사람에게 말을 걸어온다.

사내: (힘없는 음성으로) 미안하지만 제가 함께 가도 괜찮을까요? 제게 돈은 얼마간 있습니다만……

김가: (안가와 서로 마주 보고 나서) 아저씨 술값만 있다면……

안가: (김가의 말을 이어서) 함께 가시죠.

사내: (역시 힘없는 음성으로) 고맙습니다.                       -암전-

 

제 2장

무대에는 포장마차 선술집 리어카가 내려지고 대신 집 한 채가 꾸며져 있으며, 그 옆에는 중국 집과 양품점이 늘어 서 있다.

 

두 사람은 일이 좀 이상하게 되었다는 얼굴로 사내와 함께 갑자기 목적지를 잊은 사람들처럼 사방을 두리번거리면서 느릿느릿 걸어간다. 바람소리가 스산하게 들리고 사람들은 힘껏 웅크리고 빠르게 지나가고 있다. 김가가 바람에 날려 발 밑에 떨어진 종이 한 장을 집어들고 읽는다.

 

김가: 미희 특별 서비스. 특별 염가.

사내: 지금 몇 시쯤 되었습니까?

안가: 아홉 시 십 분 전입니다.

사내: (김과 안을 번갈아 보며) 저녁들은 하셨습니까? 난 아직 저녁을 안 했는데…제가 살테니까 같이 가시겠어요?

김․안: 먹었습니다.

김가: 혼자서 하시지요.

사내: 그만 두겠습니다.

안가: 하세요. 따라가 드릴 테니까요.

사내: 감사합니다. 그럼․․

 

세 사람은 중국 요리 집으로 들어간다. 방에 들어가 앉는다.

 

사내: 뭐라도 좀 드시죠?

김․안: 괜찮습니다.

사내: 그래도 뭘 주문하시는 게……

김가: (권유 철회를 위해) 아주 비싼 걸 시켜도 괜찮습니까?

사내: (힘있는 목소리로) 네, 사양 마시고. (사이)  돈을 써 버리기로 결심했으니까요.

김가가 통닭과 술을 주문하자 안가가 어처구니없는 얼굴로 쳐다본다. 옆방에서는 불그레한 신음소리가 들린다.

사내: 형씨도 뭘 좀 드시죠?

안가: (술이 다 깬다는 듯이) 아니 전……

 

세 사람은 모두 조용히 옆방의 다급해져 가는 신음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전차의 끽끽거리는 소리와 홍수 난 강물소리 같은 자동차의 달리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리고 이따금 초인종 울리는 소리도 들린다. 방안은 어색한 침묵에 싸여 있다.

 

사내: 말씀드리고 싶은 게 있는데요. (사이) 들어주셨으면 고맙겠습니다……(이젠 슬프지도 않다는 얼굴로 두 사람을 빤히 쳐다보며) 오늘 낮에 제 아내가 죽었습니다.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하고 있었는데……

김가: (놀란 듯이) 네 에 에……

안가: 그거 안되셨군요.

사내: 아내와 나는 참 재미있게 살았습니다. 아내가 어린애를 낳지 못하기 때문에 시간은 몽땅 우리 두 사람의 것이었습니다. 돈은 넉넉하지 못했습니다만 그래도 돈이 생기면 우리는 어디든지 같이 다니면서 재미있게 지냈습니다. 딸기 철엔 수원에도 가고, 포도 철엔 안양에도 가고, 여름이면 대천에도 가고, 가을엔 경주에도 가보고, 밤엔 함께 영화구경, 쇼 구경 하러 열심히 극장에 쫓아다니기도 했습니다……

안가: (조심스럽게) 무슨 병환이셨던가요?

사내: 급성 뇌막염이라고 의사가 그랬습니다. 아내는 옛날에 급성 맹장염 수술을 받은 적도 있고, 급성 폐렴을 앓은 적도 있다고 했습니다만 모두 괜찮았는데 이번 급성엔 결국 죽고 말았습니다…… 죽고 말았습니다.

 

고개를 떨구고 무언지 입을 우물거리고 있다. 안가가 김가의 무릎을 손가락으로 찌르며 꺼지는 게 어떻겠느냐는 눈짓을 보냈지만 사내가 다시 고개를 들고 말을 계속하는 바람에 두 사람은 눌러 앉는다.

사내: 아내와는 재작년에 결혼했습니다. 우연히 알게 됐습니다. 친정이 대구근처에 있다는 얘기만 했지 한번도 친정과는 내왕이 없었습니다. 난 처가집이 어딘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할 수 없었어요. (다시 고개를 떨구고 입을 우물거린다)

김가: 뭘 할 수 없었다는 말입니까?

사내: (김가의 말을 못 들은 듯, 다시 고개를 애원하는 듯한 눈빛으로)

      아내의 시체를 병원에 팔았습니다. 할 수 없었습니다. 난 서적 월부 판매 외교원에 지나지 않습니다. 할 수 없었습니다. 돈 사천 원을 주더군요. 난 두 분을 만나기 얼마 전까지도 세브란스 병원 울타리 곁에 서 있었습니다. 아내가 누워 있을 시체실이 있는 건물을 알아보려고 했습니다만 어딘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냥 울타리 곁에 앉아서 병원의 큰 굴뚝에서 나오는 희끄무레한 연기만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아내는 어떻게 될까요? 학생들이 해부실습 하느라고 톱으로 머리를 가르고 칼로 배를 찢고 한다는데 정말 그러겠지요? (사환이 단무지와 양파가 담긴 접시를 갖다 놓고 나간다.)

기분 나쁜 얘길 해서 미안합니다. 다만 누구에게라도 얘기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었습니다. 한 가지만 의논해 보고 싶은데 이 돈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저는 오늘 저녁에 다 써버리고 싶은데요.

안가: (재빨리) 쓰십시오.

사내: 이 돈이 다 없어질 때까지 함께 있어 주시겠어요?

김․안: 좋습니다.

사내: (힘없는 음성으로) 멋있게 한 번 써봅시다.

 

거리로 나온다. 세 사람 모두 취해 있다. 사내는  한 쪽 눈으로는 울고 다른 쪽 눈으로는 웃고 있다.

안가: (김가를 보며) 이젠 도망갈 궁리를 하기에도 지쳐버렸습니다.

김가: (중얼거리듯) 엑센트 찍는 문제를 모두 틀려 버렸단 말이야 엑센트 말야.

 

거리는 영화에서 본 식민지의 거리처럼 춥고 한산하다. 소주 광고와 약 광고 네온싸인이 반짝인다. 귤 장수 양품점 앞에 자리잡는다.

 

사내: 이제 어디로 갈까?

안가: 어디로 갈까?

김가: 어디로 갈까?

 

사내가 중국 집 곁에 양품점의 쇼 윈도우를 가리키며 두 사람을 끌어당긴다.

세 사람 모두 양품점 안으로 들어간다.

 

사내: (호통치듯) 넥타이를 골라가져. 내 아내가 사 주는 거야.

 

모두 알록달록한 넥타이를 하나씩 들고 양품점에서 나온다.

 

사내: 어디로 갈까……

(잠시 후 양품점 앞의 귤 장수 쪽으로 바쁜 걸음을 옮기며 외치듯) 아내는 귤을 좋아했다.

 

사내가 산 귤을 받아든 두 사람은 이빨로 귤껍질을 벗기면서 서성거린다.

사내: 택시! (택시가 앞에 서고 차에 오르자마자) 세브란스로!

안가: (재빠르게, 외치듯) 안됩니다. 소용없습니다.

사내: (중얼거리며) 안될까? (사이) 그럼 어디로?

운전수: (짜증난 음성으로) 어디로 가시는 겁니까? 갈 데가 없으면 빨리 내리쇼.

 

세 사람이 차에서 내린다. 거리의 저쪽 끝에서 요란한 싸이렌 소리가 나타나서 점점 가깝게 달려든다. 소방차 두 대가 우리 앞을 바르고 시끄럽게 지나쳐간다.

 

사내: (고함치며) 택시!

(택시가 앞에 서고 세 사람이 차에 오르자 마자) 저 소방차 뒤를 따라 갑시다.

 

차안에서도 김가는 계속 귤껍질을 벗기고 있다.

 

안가: 지금 불 구경하러 가는 겁니까? (사이) 안됩니다. 시간이 없습니다. 벌써 열 시 반인데요. 좀 더 재미있게 지내야죠. 돈은 이제 얼마 남았습니까?

 

사내가 호주머니를 뒤지고 돈을 모두 털어 내어 안가에게 준다. 천 구백 원 하고 동전이 몇 개 십 원 짜리 몇 장이 있다.

 

안가: (사내에게 돈을 돌려주며) 세상엔 다행히 여자의 특징만 중점적으로 내보이는 여자들이 있습니다.

사내: (슬픈 음성으로) 내 아내 얘깁니까? 내 아내의 특징은 너무 잘 웃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안가: 아닙니다. 종삼으로 가자는 얘기였습니다.

 

사내는 안가를 경멸하는 듯한 웃음을 띄우며 고개를 돌려 버렸다. 세 사람은 화재 현장에서 가까운 곳에 도착한다. 화재현장은 영사기를 이용하여 화면으로 처리해도 좋다. 아래층은 페인트 상점이고 미용학원인 2층에서 불길이 장으로부터 뿜어 나오고 있다. 경찰들의 호각소리, 소방차의 싸이렌 소리, 불길 속에서 나는 탁탁 소리, 물줄기가 건물 벽에 부딪쳐서 나는 소리가 어지러우나 사람들의 소리는 나지 않는다. 사람들은 불빛에 비쳐 무안 당한 사람처럼 붉은 얼굴로 정물처럼 서있다. 세 사람은 발 밑에 굴러있는 페인트 통을 하나씩 궁둥이 밑에 깔고 웅크리고 앉아 불 구경을 한다. 미용학원이라는 간판 원자에 불이 붙기 시작한다.

 

안가: 김형, 우린 우리 얘기나 합시다. 화재 같은 건 아무 것도 아닙니다. 내일 아침 신문에서 볼 것을 오늘밤에 미리 봤다는 차이 밖에 없습니다. 저 화재는 김형의 것도 아니고 내 것도 아니고 이 아저씨 것도 아닙니다. 우리 모두의 것이 돼 버립니다. 그러나 화재는 항상 계속 해서 나고 있는 건 아닙니다. 그러기 때문에 난 화재엔 흥미가 없습니다. 김형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김가: (아무렇게나) 동감입니다.

 

미용학원 간판 ‘학’자에 불이 붙고 있다.

 

안가: 아니, 난 방금 말을 잘못 했습니다. 화재는 우리 모두의 것이 아니라 화재는 오로지 화재 자신의 것입니다. 화재에 대해서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난 화재에 흥미가 없습니다. 김형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김가: 동감입니다.

 

물줄기 하나가 불타고 있는 ‘학’으로 달려들고 있다. 물이 닿은 곳에서 회색연기가 씌어 올랐다. 힘없는 사내가 갑자기 힘차게 깡통으로부터 일어섰다.

 

사내: (환한 불길 속을 손가락질하며 눈을 크게 뜨고 소리지른다.) 내 아냅니다. 내 아내가 머리를 막 흔들고 있습니다. 골치가 깨질 듯이 아프다고 머리를 막 흔들고 있습니다. 여보……

안가: (아저씨를 끌어 앉히며) 골치가 깨질 듯이 아픈 게 뇌막염의 증세입니다. 그렇지만 저건 바람에 휘날리는 불길입니다. 앉으세요. 불 속에 아주머님이 계실 리가 있습니까? (다시 김가를 향해 나지막하게) 이 양반 우릴 웃기는데요.

 

꺼졌다고 생각하고 있던 ‘학’에 다시 불이 붙는다. 물줄기가 다시 그 곳으로 뻗어 가고 있다. 물줄기는 겨냥을 잘 잡지 못하고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다. 불은 날쌔게 ‘용’자를 핥고 있다.

무언가 하얀 것이 세 사람이 안장 있는 곳에서 불타고 있는 건물 쪽으로 날아가는 것이 보인다. 그 비둘기는 불 속으로 떨어진다.

 

김가: (안가를 돌아보며) 무엇이 불 속으로 날아들어 갔지요?

안가: 예, 뭐가 날아갔습니다.. (이번엔 사내를 돌아다보며) 보셨어요?

 

사내는 잠자코 앉아 있다. 그때 순경 한 사람이 세 사람 쪽으로 달려온다.

순경: (사내를 한 손에 붙잡으면서) 당신이지? 방금 무얼 불 속에 던졌소?

사내: 아무 것도 안 던졌습니다.

순경: 뭐라구요? (때릴 듯한 시늉을 하며 소리친다.) 내가 던지는 걸 봤단 말요. 뭘 불 속에 던졌소?

사내: 돈입니다.

순경: 돈?

사내: 돈과 돌을 손수건에 싸서 던졌습니다.

순경: (김가와 안가를 보며) 정말이요?

안가: 예, 돈이었습니다. 이 아저씨는 불난 곳에 돈을 던지면 장사가 잘 된다는 이상한 믿음을 가졌답니다. 말하자면 좀 돌았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이지만 나쁜 짓은 결코 하지 않는 장사꾼입니다.

순경: 돈은 얼마였소?

안가: 일 원 짜리 동전 한 개였습니다.

(순경이 가고 나자 사내에게) 정말 돈을 던졌습니까?

사내: 예.

안가: 모두?

사내: 예.

 

세 사람은 꽤 오랫동안 불꽃이 튀는 탁탁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한참 후,

 

안가: (사내에게) 결국 그 돈은 다 쓴 셈이군요……

자, 이젠 그럼 약속이 끝났으니 우린 가겠습니다.

김가: 안녕히 계십시오.

 

김과 안이 돌아서서 걷기 시작한다. 사내가 두 사람을 쫓아와서 김과 안의 팔을 한 쪽씩 붙잡는다.

 

사내: (벌벌 떨며) 나 혼자 있기가 무섭습니다.

안가: 곧 통행금지 시간이 됩니다. 난 여관으로 가서 잘  작정입니다.

김가: 난 집으로 갈 겁니다.

사내: 함께 갈 수 없겠습니까? 오늘밤만 같이 지내 주십시오. 부탁합니다. 잠깐만 저를 따라와 주십시오.

 

사내는 말을 마치고 안과 김의 팔을 붙잡고 있는 자기의 팔을 부채질하듯이 흔든다.

 

김가: 어디로 가자는 겁니까?

사내: 여관비를 구하러 잠깐 이 근처에 들렀다가 모두 함께 여관으로 갔으면 하는데요.

김가: (호주머니 속에 든 돈을 손가락으로 계산해보며) 여관에요?

안가: 여관비라면 내가 모두 내겠으니 그럼 함께 가시지요.

사내: 아닙니다. 폐를 끼쳐 드리고 싶지 않습니다. 잠깐만 절 따라와 주십시오.

안가: 돈을 빌리러 가는 겁니까?

사내: 아닙니다. 받아야 할 돈이 있습니다.

안가: 이 근처에요?

사내: 예, 여기가 남영동이라면.

김가: 아마 틀림없는 남영동인 것 같군요.

 

사내가 앞장서고 안과 김이 그 뒤를 쫓아서 화재 현장으로부터 멀어져 간다.

 

안가: 빚 받으러 가기에는 시간이 너무 늦었습니다.

사내: 그렇지만 저는 받아야 합니다.

 

세 사람은 어두운 골목길로 들어선다. 골목의 모퉁이를 몇 개인가 돌고 난 뒤에 사내는 대문 앞에 전등이 켜져 있는 집 앞에서 멈춘다. 사내가 벨을 눌린다. 잠시 후 대문이 열리고 사내가 대문 안에 선 사람과 말하는 소리가 들린다.

 

사내: 주인 아저씨를 뵙고 싶은데요.

가정부: 주무시는데요.

사내: 그럼 주인 아주머니는……

가정부: 주무시는데요.

사내: 꼭 뵈어야겠는데요.

가정부: 기다려 보세요.

 

대문이 다시 닫힌다. 안가가 달려가서 사내의 팔을 잡아끈다.

 

안가: 그냥 가시죠.

사내: 괜찮습니다. 받아야 할 돈이니까요.

 

안가는 다시 먼저 서 있던 곳으로 걸어온다. 대문이 열린다.

 

사내: (대문을 향해 고개를 숙이며) 밤늦게 죄송합니다.

주인여자: (잠에 취한 음성으로) 누구시죠?

사내: 죄송합니다. 이렇게 너무 늦게 찾아와서. 실은……

주인여자: 누구시죠? 술 취하신 것 같은데……

사내: 월부 책 값 받으러 온 사람입니다.

(갑자기 비명 같은 높은 소리로 다시 한 번) 월부 책값 받으러 온 사람입니다.

(문기둥에 두 손을 짚고 앞으로 뻗은 자기 팔 위에 얼굴을 파묻으며 울음을 터뜨린다.)월부 책값 받으러 온 사람입니다. 월부 책값……

(계속해서 흐느낀다.)

주인여자: 내일 낮에 오세요. (대문을 탕 닫는다.)

 

사내는 계속 울고 있다. 가끔 ‘여보’라고 중얼거리며 오랫동안 울고 있다. 두 사람은 열 발짝쯤 떨어진 곳에서 그가 울음을 그치기를 기다리고 있다. 한참 후 사내가 두 사람 쪽으로 비틀거리며 걸어온다. 모두 고개를 숙이고 어두운 골목길을 걸어서 거리로 나온다. 적막한 거리에 찬바람이 세차게 불고 있다.

 

사내: (두 사람을 염려하는 듯) 몹시 춥군요.

안가: 추운데요. 빨리 여관으로 갑시다.

 

세 사람은 여관 앞에 선다. 여관은 간판만 바꿔 달면 되겠다.

 

안가: 방을 한 사람씩 따로 잡을까요? 그게 좋겠지요?

김가: 모두 한 방에 드는 게 좋겠지요.

 

사내는 두 사람의 처분만 바란다는 태도로, 지금 자기가 서 있는 곳이 어딘지도 모른다는 태도로 멍하니 서 있다. 여관에 들어서자 두 사람마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서 있다.

 

김가: 모두 같은 방에 들기로 하는 것이 어떻겠어요?

안가: 난 지금 아주 피곤합니다. 방은 각각 하나씩 차지하고 자기로 하지요.

사내: (중얼거리듯) 혼자 있기가 싫습니다.

안가: 혼자 주무시는 게 편하실 거예요.

 

세 사람은 나란히 붙은 방 세 개에 각각 한 사람씩 들어갔다.

 

김가: 화투라도 사다가 놉시다.

안가: 난 아주 피곤합니다. 하시고 싶으면 두 분이나 하세요. (자기 방으로 들어간다.)

김가: 나도 피곤해 죽겠습니다. 안녕히 주무세요. (방으로 들어간다. 이불을 뒤집어쓴다.)

                                                              -암전-

 

제 3장

날이 밝아온다 안가가 김가의 방에 와서 김가를 깨운다.

안가: (김가의 귀에 입을 대고 속삭이듯) 그 양반 역시 죽어버렸습니다.

김가: (잠이 달아난다는 듯이 놀라며) 예?

안가: 방금 그 방에 들어가 보았는데 역시 죽어버렸습니다.

김가: 역시……(사이) 사람들이 알고 있습니까?

안가: 아직까진 아무도 모르는 것 같습니다. 우린 빨리 도망해 버리는 게 시끄럽지 않을 것 같습니다.

김가: 자살이지요?

안가: 물론 그것이겠죠.

 

김가가 급히 옷을 입는다. 개미 한 마리가 발 쪽으로 기어온다. 발을 급히 옮긴다. 밖에는 싸락눈이 내리고 있다. 두 사람은 빠른 걸음으로 여관에서 멀어져 간다.

 

안가: 난 그 사람이 죽으리라는 걸 알고 있었습니다.

김가: 난 짐작도 못했습니다.

안가: (코트의 깃을 세우며) 난 짐작하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어떻게 합니까?

김가: 그렇지요. 할 수 없지요. 난 짐작도 못했는데……

안가: 짐작했다고 하면 어떻게 하겠어요?

김가: 씨팔 것, 어떻게 합니까? 그 양반 우리더러 어떡하라는 건지……

안가: 그러게 말입니다. 혼자 놓아두면 죽지 않을 줄 알았습니다. 그게 내가 생각해 본 최선의, 그리고 유일한 방법이었습니다.

김가: 난 그 양반이 죽으리라고는 짐작도 못했다니까요, 씨팔 것, 약을 호주머니에 넣고 다녔던 모양이군요.

 

안가는 눈을 맞고 있는 어느 앙상한 가로수 밑에서 멈춘다. 김가도 멈춘다.

 

안가: (이상하다는 얼굴로) 김형, 우리는 분명히 스물 다섯 살 짜리죠?

김가: 난 분명히 그렇습니다.

안가: 나도 그건 분명합니다. (고개를 기웃하며) 두려워 집니다.

김가: 뭐가요?

안가: 그 뭔가가, 그러니까…… (한숨 같은 음성으로) 우리가 너무 늙어버린 것 같지 않습니까?

김가: 우린 이제 겨우 스물 다섯 살입니다.

안가: (손을 내밀며) 하여튼 ……

김가: (손을 잡으며) 자, 여기서 헤어집시다. 재미 많이 보세요.

 

두 사람은 헤어진다. 김가는 버스가 막 도착한 길 건너편 버스 정류장으로 달려간다. 버스에 올라서 창으로 내려다본다. 안가는 앙상한 나뭇가지 사이로 내리는 눈을 맞으며 무언지 곰곰이 생각하고 서 있다.  (천천히 막이 내린다.)

 

 

 

지역 초대시/대전작가회의

 

가을날 외 2편

육근상

 

   

개밥그릇에 담긴 햇살이 맘껏 찌그러지는 가을날이다

 

볏가리 걷힌 논바닥 굵은 주름이 매운 연기 빼어 무는 가을날이다

 

지팡이 짚고도 코가 땅에 닿을 듯 산허리 꺾여 뜰팡에 서성대는 가을날이다

 

노을 한 자락 베어 물고 날아가는 기러기 떼

 

 

 

 

 

 

 

 

 

 

 

 

 

 

 

 

 

 

 

방우리

 

 

 

 

적벽강 깊은 낭떠러지 끼고 사는 마을이다

 

어쩌다 컹! 짖으면 수 만 조각 갈라진 벽 울음이 뼛속까지 스미어

노인들 시름시름 앓다 은어로 돌아가는 마을이다

 

수면 위로 튀어 오르던 은어 떼가 국수 빛 보름달을 밀어 올리는 저녁

 

사나운 짐승소리 내던 자작나무도 슬그머니 꼬리 감아 내리고

희디 흰 찔레꽃이 내 누이처럼 몸 던지는 서러운 마을이다

 

 

 

 

 

*방우리 ; 충청남도 금산군 제원면 방우리

 

 

 

 

 

 

 

   

 

 

 

 

짧은치마 아가씨 흰 종아리 어쩌나

진눈깨비 날리는데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빈가지 어쩌나

 

담장 아래 서성이며 몸 부르르 떠는

노랑머리 아가씨

 

엄마 구두는 몰래 신고

바닥까지 끌리는 가방은 메고

 

  

 

 

육근상 ; 1960년 대전 출생. 1990년 『삶의문학』을 통해 작품 활동 시작. 한국작가회의 회원. 『작가마당』편집위원. 시집 『그대에게 가고 싶습니다.』

 

*주소 ; 302-981 대전광역시 서구 내동 맑은아침 아파트 104동 403호

 

*전화번호 ; 010 - 5452 - 3811/ 042 - 533 - 3811

 

 

 

 

사랑 이야기 외 2편

김병호

 

 

 

 그는 하늘만 바라볼 수 있도록 고정된 눈을 가지고 태어났다 하늘의 작은 움직임이라도 보려면 하루 이상은 눈 맞추고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다른 아이들은 흔들리는 땅을 바라보기도 버거운 두 살에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나 하늘과 땅을 모두 볼 수 있는 사람들 중 누구도 이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그는 나뭇가지에 숨은 작은 새의 울음을 눈에 담았고 거기에서 하늘의 내밀한 속삭임을 품은 나뭇잎만 골라 작은 가방에 담았다

 

 그의 머리가 처음으로 땅과 닿은 날은 하늘이 아닌 한 사람을 바라보기 시작한 스물세 살의 가을이었다 처음 맛보는 편안함과 함께 그의 귀를 간질이던 수많은 소리들의 주인이 땅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일어날 수 없었다 소리들에게서 시선을 돌릴 수 없었다 하늘의 썰미가 날카로워지는 봄이면 거기에 베어 대지의 핏발이 툭 터지는 걸 보았다 초록으로 핏물 배어 오르는 들길과 하얗게 상처 난 하늘길이 정확하게 같은 얼굴로 마주보았다 눈 녹는 자리 드러나는 작은 돌처럼 초록 속으로 던져진 것이 사람이었다 사람을 보았다

 

 삼백일 내내 먹구름 두터운 땅에 대고 하늘을 부르기 시작한 것은 이름을 부르는 일이 사람을 조금씩 덜어내는 일이란 사실을 사람에게서 아프게 배운 후였다 그가 지난 자리마다 얇은 각질처럼 떨어진 이름들이 아기의 쌔근거리는 호흡만 있어도 사각거리며 돌아누웠다 비 마른 아침 달팽이들이 그린 끈적이는 경로처럼 그가 사라진 공간마다 하얗게 쌓인 눈만이 그가 머물던 곳임을 말했다 그가 부를 수 있는 모든 이름을 불렀을 때 하늘은 햇볕에 마른 젖었던 책처럼 낱장으로 벌어졌다 그날 그의 눈에 남은 것은 처음 보는 이름 하나였다

 

 

 

 

 

 연애 이야기

 

 

 여자의 입에서 비눗방울이 나왔다 여자의 말은 들을 수도 볼 수도 있었다 작은 방은 위에서부터 말로 가득 찼다 봄이었다 여자는 움직여야 생각할 수 있었다 생명은 원래 그렇다고 했다 여자의 눈에서는 수은이 흘렀다 그 무정형의 중금속이 발목까지 차오른 날 여자의 슬픔이 더 무겁다고 내가 실토했다 비 그친 날이었다 여자가 만드는 모든 세상을 나는 걸어 다녔지만 그렇게 믿었지만 사건은 끝이 없었다 세상이 끝이 없었다 가장 단순한 건 죽음이었다 콧속으로 수은이 흘러들어도 숨 가쁘지 않았다  

 마지막 밤 여자는 비눗방울 안을 수은으로 가득 채우고 작은 방에 떠있었다 딱 심장 높이였다 무겁지도 혼란스럽지도 않았다 생명은 원래 무정형이었지만 여자는 모양을 가졌다

 모든 거리가 그랬다 수은으로 인화한 사진이었다

 

 

 

 

 대칭이 깨진 자리

 

 

 소스라친다

 피안彼岸에서 건너오는 울음 중에서 네 것에

 

 모음은 깊게 멍든 가을하늘, 그 끝에서 끝을 한 주기로 채운 저음의 파랑과

 사금파리 같은 지평선에 찢기는 하늘의 선혈, 그 마찰음을 자음으로 네 울음은

 온전한 화성和聲이다

 철 놓친 모기 한 마리 서쪽으로 피냄새를 따라 서쪽으로

 

 그래서 울음은 통째로, 한꺼번에

 가을이다

 

 

김병호

 

98년 《작가세계》등단. 시집 『과속방지턱을 베고 눕다』외

 

 

019-9175-3020

 

충남 계룡시 엄사면 유동리 대동@ 108-502